♬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작품들은 한결같이 매끄럽다. 그러나 막상 당선작으로 흔쾌히
밀만한 힘 있고 혼 깊은 작품을 고르기는 힘들었다."
특정 신문.장르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 모든 신문 신춘문예 전 장르에 해
당되는 지적이다. 요즘 문학도들의 습작 태도에 대한 기성문단의 의문으로도
볼 수 있다.
"문장과 작품을 짓는 기술은 평준화됐다. 그러나 문학의 힘과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삶의 진실을 다루려는 욕구가 없으니 큰 울림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문학도들은 문학을 여기 (餘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때만 해도 정말 목 메달고 문학을 했었는데…."
작가 박범신씨. 그는 문학이라는 나무에 목 메달은 심정으로 습작에 임했다.
문학이 아니면 죽음 밖에 없다고.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소설창작
을 지도하고 있는 박씨는 요즘 문학도들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자기 고백용.과시용으로 문학을 여겨 문학 자체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약하다는 것이다.
"메시지 즉 주제 보다는 상황의 매끄러운 전개에 애썼다.
소설은 철학자들의 에세이와는 분명 다르지 않은가. 평이한 문장으로 내
자신을 드러내 그대로 보여 주려했을 뿐 이러쿵 저러쿵 주제적 진실을
독자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은게 당선의 영예를 안긴 것 같다. "
올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자 조윤정씨는 작품의 주제 보
다는 문장이나 작품 구성에 애썼다고 밝힌다. 그리고 다른 신춘문예
당선 소설들도 두루 읽어보니 재미 있게 잘 읽히기는 하나 도대체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느냐에 의심이 든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교재 삼아 공부한 90년대 작가들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주제 의식보다 표현을 앞세운 당선작들이 문학의 힘과 감동을 앗아간
것이다. 혼 없는 몸만 매끈하게 치장하고 있으니 허깨비나 다름 없다.
문장력과 상상력만 믿고 써내려간 작품이 독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릴 리 없다. 잘됐다고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작품도 읽는 순간
감성과 감각만을 자극할 뿐 오래도록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반성의 공간은
줄 수 없다.
한편 주제나 기법 측면에서 정통 문예미학에 충실한 작품들은 항상 그
상투성에서 문제가 된다. 기존 문학의 틀에서 한치도 벋어나지 못해
신선함을 도무지 줄 수 없는 작품들도 올 신춘문예에는 많았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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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경철 기자
구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드는가?
좋은 책은 서점에 많다. 고전은 다 좋은 책이다. 베스트셀러를
읽느니 고전을 마저 다 읽는게 나으리라.
[류시화는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그의 눈밖에 나면 책장사는 끝이다.
출판업계의 7할을 먹여 살린다.] 뭐 이런 말을 달고 다닌다.
류시화가 출판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하면
[내 마음의 닭괴기 수프]인지 먼지 하는 걸 번역하여
[마음을 열어주는 백한가지 이야기]로 제목 바꾸어 100만부 팔았다.
그러자 모든 책이 제목을 류시화식으로 바꾸었다.
지금 서점에 베스트 셀러는 다 [20대에 해야할 20가지 일]
뭐 이런 식으로 숫자와 가지가 들어가야 한다.
숫자와 가지가 없으면 책이 안나간다.
슬프다.
출판계가 그런 상술에 지배되는 작금의 세태가 마냥 슬프다.
아으 다른건 몰라도
출판이야 말로 지성의 영역이 통하는 데 아닌가?
그런데 한낱 가배야운 상술이라니.
박범신이 발마따나
[목매달지 않았거든 책을 쓰려들지 말거라.]
[목매단 흔적이 없거든 그놈의 책을 읽어주지도 말거라.]
나는 글이 매끈매끈한 류시화식 글을 혐오한다.
메시지는 없고 상황의 매끄러운 전개만 있는
단팥죽처럼 목구멍에 솔솔 잘 넘어가는
어떤 책이 팔리는 지는 나도 알고 있다.
요즘 처럼 IMF시대에는 80년대 초의 단(丹)처럼 크게 뻥을 치는 책 이 잘나가게 되어 있다. 작심하고 사기치는 예언서가 좋다.
[원효결서....한국이여 일어날 때가 되었니라. ]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피를 열번 토하지 않았거든 미처 붓을 잡아서 안되는 법이거늘.
옛날 석용산이 [여보게 저승갈땐 뭘 가지고 가지?]
이거 제목 하나는 기가 차게 뽑았는데 이 정도로 머리 잘돌아가는 자가 과연 중일까? 혹시 가짜 중? 하였다.
근데 과연 중이었다. 나는 그 책을 몇페이지만 읽어서
[전혀 생각이란 거 해보지 않고 썼군] 하고 내던지는데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몇줄을 더 읽어보았는데
[이 양반이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샘터 깨나 읽었군]
무엇인가? 석용산은 아무 생각없는 자다. 그러나 남들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눈치를 열심히 보는 자이다.
그는 사기꾼인 것이다. 차지혁이 같은 늠이다.
그리하여 PD수첩에도 나왔다.
[석용산은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
류시화나 석용산 이런 사람들은 생각을 안하고 사는 자이지만 대신
남들이 뭘 생각하는지는 열심히 살피는 자이다.
돈은 이런 자가 번다. 그들은 독서인들이 책읽기를 싫어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책읽은 척 지적 허영을 남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문장이 매끄러워 술술 잘 넘어가면서도 마치 깊이가 있는 듯이
사기치는 책..그런 책을 원한다. 그것이 작금의 세태.
십년전만 해도 나는 신춘문예 당선작 서너편은 읽어주었다.
그러나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을 한줄도 읽어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글의 매끄러움만 있고 피 토하는 울음은 없어져
버렸다.
신춘문예 당선자가 [주체적 진실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당선 영예를 준 것 같다] 이런 소리를 하는 나라.
싫다. 정말이지 싫다. 이런 나라에서 노벨상은 절대로 안나온다.
생각을 안하고 사는데 무슨 노벨상..더우기 나와서도 안된다.
이런 나라에서 영화를 만들던 연극을 만들던 헐리우드를 이길 수는 없다. 평론가들은 노상 헐리우드의 가벼움을 비판하지만 나는 아직
헐리우드만큼의 깊이를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류시화는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얍삽한 존재인지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슬프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여보게 저승갈 땐 뭘 가지고 가지.]
지적 허영과 가배야움을 동시에 충족시킨 두마리 토끼의 사냥
베스트 셀러. 인도를 안가보고도 인도를 팔아먹을 수 있는 자.
중질을 안해보고도 중을 팔아먹을수 있는 자가 있다.
나는 한동안 석용산이 진짜 스님이 아닐거라고 의심했다.
그 정도라면 스님노릇을 안해보고도 쓸 수 있고
스님이라면 그리 가벼운 하품소리가 안나오기 때문이다.
류시화는 인도를 가보고 왔는가?
갔다면 글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홍보용일 것이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은 여러번 본듯하지만 (제목만)
구름이 추천하니까 몇페이지는 더 읽어조야겠다.
언론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
세상 그 어떤 것이나 경쟁과 감시, 비판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국회는 선거가, 회사는 노조가, 상품은 소비자가, 학교는 학부모가 감시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감시받는 자가 감시하는 자의 관계가 대등하지 못할 때 감시는 불가능하다. 특히 학교와 학부모의 관계, 선진국에서는 학부모가 감시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져다 바치기 바쁘다. 그래서 전교조가 필요하다. 뭣이든 견제와 감시비판이 없으면 반드시 공산당이 된다.
공산당이라도 소련이나 중국처럼 시장규모가 있는 나라는 어떻게든 자정능력이 있다. 북한 알바니아 쿠바처럼 작은 나라는 답이 없다. 그것은 나라가 작기 때문이다.
우리 몇이 협잡하여 아프리카 미개한 마을에 가서 마음먹고 장악하려면 할수 있다. 인구가 적다면 말이다. 한국은 인구가 적은 편이다. 유럽은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어 인구가 많고 미국도 일본도 시장이 크다. 한국같이 무식하고 쪼매한 나라에 조선일보와 안기부 몇몇이 이나라를 말아먹자 하고 작당하면 충분히 말아먹을수 있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흔히 영화에 잘나오는 식으로 CIA의 몇몇이 음모를 꾸며 전체 미국국민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영화, [체인리 액션] 처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당장 북한이 군주와 언론이 짜고 나라를 통째로 자기 호주머니 구슬로 만든거 아닌가?
이나라 언론은 비판과 감시 견제가 안된다. [독자가 그 신문을 안보면 될 것 아닌가?] 이 말은 소비자가 악덕기업 물건 안사면 될 것 아닌가 하는 말과 같은데 당장 북한은 그럼 투표에 김정일이 안찍으면 될거 아닌가? 북한도 투표한다.
중요한 점은 조선일보가 장사를 잘하기 때문에 악덕신문사가 된 것이 아니라 안기부가 장사를 잘하는 신문을 골라서 부패시킨다는 점이다. 즉 원래 삐닥한 신문이 장사가 잘된 것이 아니라 젤로 장사가 잘되는 신문을 안기부가 말아먹었다는 것이다.
어떤 신문이든 우리나라에서 젤로 잘팔리는 신문이면 안기부가 침투하여 공작하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 내부에 그쪽의 끄나풀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조선 안보기 해서 조선이 안팔리면 대신으로 안기부는 동아나 한국에 침투할 것이다. 고로 도로아미 타불이다. 요는 그러한 음모가 통하지 않는 나라가 될 정도로 국민이 깨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말살운동은 한 신문사를 없애자는 운동이 아니라 국민이 깨어나자는 운동이다. 극소수 몇몇이 밀실에서 음모하여 한 나라의 대통령을 제조하는 그런 나라라면 슬프지 아니한가? 안기부와 조선은 그런 음모로 지난 대선에 개입하였고 그 증거가 한겨레에 보도되고 있다.
이나라 언론이 서려면 오로지 우리가 비판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은 원래 극우가 아니었다. 이승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제 조선은 또 변해야 한다. 엠비시는 PD수첩에서 스스로 자기고백을 했다.
왜 조선은 여전히 고백하지 않는가?
조선이 스스로 범죄행위를 고백할 때까지 우리의 조선말살캠페인은 지속되어야 한다.
류시화 이야기 속편
구름이 언급했대서가 아니라 진작 생각해 둔 적이 있기 때문에 썰을 푸는 것이다. 글고 내 글이 좋아졌다면 필력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글이란 작심하고 다듬으면 얼마든지 좋게 만들수가 있는 것이다.
군대 있을 때 이야기가 통신에 올려진 줄은 나중에 알았다. 그것은 남 읽으라고 쓴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것이다. 내 글의 대부분은 나 자신이 가장 큰 독자다. 에세이스트가 되려면 더 나이를 먹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생각을 저축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류시화는 과연 본명일까? 서태지나 이주노가 예명이듯 (양현석은 본명이다) 이름이 차지혁이면 가명일 공산이 크다. 차지혁이 소문을 첨 듣고 사기성을 느꼈다. 그것은 석용산이나 류시화의 그것과 같다. 이름 때문이다. 과연 본명일까?
류시화와 차지혁을 발음해보면 앞은 여성적이요 뒤는 남성적이라는 차이 뿐 느낌이 비슷하다. 아주 영리한 사람이면 이런 이름을 짓는다. 자기 이름까지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다.
소설가가 흔히 작명하는 이름은 다혜나 병태 나영이 지은이 이런 이름들은 성을 붙이지 않고는 좋은데 앞에 성을 붙이면 김다혜나 박다혜나 좋지 않다. 다가 타로 발음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시화는 어색하다. 류가 붙어야 그럴듯하다. 이건 첨부터 남편이나 친구에게 정답게 불리기 보다 공인이 되어 다중에게 무난하게 불리길 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차지혁도 망하지 않았다면 사기꾼은 아니다. 요는 이름까지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상술이다. 물론 나의 느낌이다. 정말 가명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이름 가진 사람을 경계한다.
만약 당신이 낯선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김아무개나 이아무개라고 말하면 상대는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류아무개나 차아무개라면 잘 기억한다. 김이박은 너무 흔하다. 우리나라에 김씨가 24프로 이씨가 16프로 박씨가 9프로 합쳐서 49프로다.
그렇다고 희성이 되어 [천방지축 지랄방가]도 곤란하다. 이건 상놈 성씨다. 골상학적 경험으로 말하면 천씨나 방씨 지씨 축씨 남씨 가씨 하씨 안씨 좀 그렇다. 무난한 것이 정씨, 송씨, 장씨, 조씨, 유씨, 오씨, 최씨 고씨 서씨 신씨 정도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상하게 학구적인 것이 류씨다. 문화 류씨, 본관부터 문화적인 느낌이 든다.
미애, 순자, 영희는 좀 촌스럽다. (차)지혁은 만화주인공이다. (류)시화는 작심하고 지은 그럴듯한 이름이다. 그럴듯하면 가짜다. 베스트셀러 제조기는 자기 이름부터 탄탄하게 연출해야 하는 것이다.
스님이 [여보게 저승갈땐 뭘 가지고 가지] 라고 해서 100만부 해치웠다면 또 수녀가 [하나님 수녀는 빨간팬티 입으면 안되나요?] 이런 제목으로 백만부 일도 아니다. 이런건 척하면 삼천리 아닌가? 그리하여 제목은 자꾸만 길어진다.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제목을 늘여라. 받쳐주는 힘이 있다면 [아버지]나 [서편제]처럼 짧아도 좋다. 그러나 시덥잖은 잡소리로 벌려면 [하나님 수녀는 빨간팬티 입으면 안되나요?] 이렇게 길게 늘여야 한다.
베스트셀러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출판가의 징크스다. 그 법칙에 맞추어 나오면 나는 일단 안본다. 그 법칙을 깨면 일단 본다.
♧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말하면 나는 그 책을 스무번도 더 읽었다. 류시화 책이라면 서점에 늘려 있어서 저절로 보게 된다. 한 구절을 인용할까?
[인연]
한 인도거지가 류시화에게 말했다. [난 자네를 이생(生)에서 만나기 위해 일생을 기다렸네 그러니 내 생활비는 자네가 책임져야 하네. 류시화는 별수없이 한달치 생활비를 거지에게 주었다.
물론 기억이 희미하니 정확하지는 않다.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사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즈니쉬 [배꼽] 아류에 해당하는 그런 책을 나는 읽지 않는다.
구름이 그 책을 말하길래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아 내 기억 속의 그책인가 긴가민가 하였다. 그따위 하찮은 책을 내가 제목식이나 기억할리 없기 때문이다.
그 책을 유독 기억하는 것은 (제목은 잊었지만) 표지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이도 최고급이며 칼라사진 삽화를 쓴다. 제목이 멋있을뿐더러 표지가 또한 걸작이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네명의 여자 사진이 시계안에 작게 배치되어 있다.
지각없는 독자라면 그 표지에 이미 반해버린다.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그 상술에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류시화는 그 표지디자인과 제목선정에 자기에너지의 7할 이상을 투자했을 것이다.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었다. 베스테셀러를 만들려면 내용보다 표지에 종이질로 활자크기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거기에다 양념으로 유머를 추가하고 페이지마다 좋은 그림을 끼워넣고. 책이 상품이되 지식이 상품이 아니라 종이가 상품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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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때 깨치고 운운하는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런말을 했던가? 내가? 그랬다면 그것은 깨침을 부정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불교신도가 아니며 해탈이니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님들이 돌연 오도송을 부르는 것을 나는 일종의 쇼로 본다.
일곱 살 운운은 내가 주장하는 자기복제이론과 구조론 집적이론 일반이론 디지털이론의 기본 아이디어를 구축하는 영감을 그때 얻었다는 말일 뿐이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 한 적이 있다. 꼬마 때 이 세상이 물질알갱이가 아닌 수학적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다.
책 이야기
누구나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읽는 것이다. 무협지가 딱 재미있다면 무협지를 읽을 일이다. 그러나 그사람의 수준은 무협지 수준이다. 무협지를 낮게 평한다면 무협지를 읽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통신에서 말하는 척도로 삼는
[시대의 지성 - 문명의 관점에서 역사를 전망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전인적 교양]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일 뿐이다.
나는 책안읽는주의자이다. [책안읽는게 뭔 자랑이냐?] 하고 대들 법한데 그런 사람은 대개 책을 전혀 안읽는 사람이다. 한달에 두어권 정도를 읽으면서 책읽는다고 착각하는.
책을 안읽는다는 것은 베스트셀러를 안읽는다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3대 사이비인 [마르크스주의 사이비교양, 라즈니쉬류 사이비교양, 라깡 들뢰즈 브레히트류 싸구려교양]들을 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각자는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읽는 것이다. 그건 나무랄 일이 못된다. 구름이 읽는 김래성의 청춘극장은 산호의 라이파이, 김용환의 코주부 교양이다. 그 수준의 교양은? 또한 구름을 보라. 레인보뜨님의 교양은 검궁인 사마달의 무협지 교양이다. 이현세만화로 이어지는 부류들. 또한 레인보뜨님을 보라. 수레바퀴의 교양은? 홍야님의 교양은? 이토이님의 교양은?
[이문열은 쓰레기다.] [류시화는 쓰레기다] 한다면 순전히 나의 척도인 [시대의 지성]에 비추어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이문열 수준에 있는 사람은 이문열을 읽으면 되고 류시화 수준에 있는 사람은 류시화를 읽으면 된다.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며 말리지는 않는다. 요는 그수준이 마땅히 교양인이 지향해야 할 최선의 모범은 아니다는 것이다.
[류시화는 자기연출, 자기상품화에 능한 자이며 그의 책은 그의 교양이고 그의 교양에 못미치는 자는 그것으로도 과분할진저]
노신, 호적, 임어당은 또한 그 시대 교양의 고봉이 된다. 말로, 지드, 롤랑이 또한 한 시대의 향도가 된다. 그렇다면 이나라 이시대 마땅히 태두가 되고 향도가 되어야할 대표교양은?
마광수? 김용옥? 김동길? 강준만? 안병욱? 류시화? 이문열? 황석영? 백태웅? 황필호? 이외수? 이도형? 류근일? 빠콩?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망라하고 그 시대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교양이 필요한 법이다. 마땅히 우리가 모범으로 본받아야 할 지성의 향도성은 누구인가? 없다. 조선민국에 없다. 어찌 불행이 아니랴? 지성이 죽은 시대, 교양이 죽은 시대다. 60년대만 해도 장준하가 있었고 함석헌이 있었다.
약간의 후보들은 있다. 고은 김지하 들을 비롯해서 김수환추기경 외 몇몇 종교인들이다. 그러나 대체로 활약하지 아니하고 침묵한다. 침묵해서는 아니된다.
시대를 대표하는 교양이 없다는 것 - 이것이 우리시대의 진정한 비극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본받아야 할 사표,
통신에서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류시화식 쓰기를 지향할 것인가? 이문열식 쓰기를 지향할 것인가? 강준만식 쓰기를 지향할 것인가? 모름지기 부지불식간에 모범이 있는 것이다.
동업은 강준만식 쓰기를 지향한다. 구름은 류시화식 쓰기를 권한다. 수레바퀴의 쓰기도 지향하는 식이 있다. 이문열식 빈정대기, 마광수식 헐뜯기, 황필호식 노가리까기, 이도형식 이빨질, 빠콩식 터뜨리기들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김성탄식, 호적식, 노신식, 임어당식을 본받으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다. 나의 식은 정립되지 않았다.
평자는 마땅히 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형화하며 모범삼아 권장할 일이다. 나는 그것이 이문열, 류시화는 아니다 하고 말할 뿐이다. 그들은 약은 자이며 시대의 향도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실제로 말할 때에도 약간 고어체로 말한다. 나와 대화해 본 사람을 알겠으나.
성씨론 - 골상학을 우습게 보지말라.
가끔 심각한 말을 하고 또 가끔 한심한 말을 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자유롭다. 상상력은 자유로움에 의지한다. 골상학 이야기는 좀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냥 재미로 들어달라.
나는 학자가 아니므로 내 말에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 뜻있는 사람이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데이터를 확보하여 통계를 내어본다면 의미있는 답이 나오리라고 확신한다. 연구가치가 있다.
그건 간단하다. 김씨는 의뭉하며 이씨는 어영부영하고 최씨는 지독하며 박씨는 빡빡하고 정씨는 당나귀고 천방지축 지랄방가는 할수없다. 이름 가운데가 동자인 사람도 의뭉하다.
가운데 자가 동자 : 마동탁(이현세) 엄동호(박봉성) 오동구(고행석) <=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얍삽하다는 것이다. 얍삽한 사람들 : 김동길, 김동리, 김동건, 김동렬, 선동렬, 신동희,
의뭉한 김가들 :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정치지향적 인간)
빡빡한 박가들 : 박정희 박거정 박태준 박철언 (승부사들)
지독한 최가들 : 최명재 최원석 최계월 (입지전)
당나귀 정가들 : 정태수 정주영 (불도저)
어영부영 이가 : 이부영 이철 이수성 (줄 잘못 서는게 특기)
김가들은 자기의중을 잘 안드러내고 가만 있다가 전체의견을 종합하여 그걸로 자기의견을 삼는 특징이 있다.
박가들은 자기 말은 절대로 맞다고 맹신하지만 승부가 끝나면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최가들은 타협을 절대로 안하기 때문에 밖으로 빙빙돈다. 경주 최부자들 (12대 진사 12대 만석을 하면서도 중앙의 벼슬은 결코 안함) 고로 최가들은 최원석(동아) 최계월(남양개발) 최명재(파스퇴르) 다 근거를 외국에 두고 밖에서 가져온다. 타협을 안하다 보니 밖으로 도는 것이다. 최영장군, 최명길정승부터 그랬음.
당나귀 정씨들은 고지식한 대신 저돌적이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단순무식한 철강으로 승부보려하다가 다 실패.
장고 끝에 악수두는 이가들은 언제나 줄을 잘못 선다. 이가들의 우유부단이 조선왕조를 망쳤다. 우물쭈물 꾸물꾸물. 요번 선거에 줄 제대로 선 이가는 이종찬 뿐. 이건희 너까지도 실패?
물론 이런 말이 절대로 맞는 것은 아니다. 근데 옛날 할아버지들은 이런걸 잘 알고 있었다. 기록해두면 좋을 것이다. 점장이들의 예지는 상당부분 이런데 의존한다. 이런 지식이 많기 때문에 적어도 확률 이상의 정보를 점장이들은 제공한다.
맞고 안맞고를 떠나 이런 지식은 상상력의 측면에서, 유익하다. 정보라는 것은 꼭 확실한 정보만 정보가 아니다. 틀린 정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이것이 틀린다고 무조건 외면해선 안된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오로지 외모와 궁합, 돈, 체력, 학벌만이 참고자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쓸데없는 것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상대의 성격과 태도가 정씨여서 당나귀인지, 최씨여서 지독한지, 김씨여서 얍삽한지, 이씨라서 맹탕인지 한번 살펴볼 것이다.
정씨가 당나귀라고 말했대서 그것을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일장일단이 있으니까 단순무식한 것도 매력일수 있다. 단지 하나의 참고가 된다는 것이다.
유전법칙 상 남녀의 혈통이 반반씩 합치니까 말이 안되는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성격의 남성적 측면 (승부기질, 사업감각, 정치체질, 외교기질)은 부계로 유전하고 반대로 여성적 측면 (감수성, 심미적 취향)은 모계로 유전할수도 있다. 골상학은 더 연구되어야 한다.
조순, 이회창 역할이 끝난 킬러.
야대(野大)들이 총리인준 가지고 한따까리 할라나 본데 여당들이 작심하고 야당격파작전이다. 알고보면 김대중 무서운 사람이다.
이 정국에서 우습게 된 사람이 조순이다. 가만있으면 서울시장 재선인데 볼때마다 우습다. 생각하면 슬프다.
이회창은 김대중과 이미지가 반대된다는 이유로 고용된 저격수다. 저격에 실패한 킬러는 미련없이 떠나는 거다. 눈치가 있다면 덕담 들었을 때 가라. 김대중이 노야들을 괜히 만나주나?
눈치없기는 조순할부지도 마찬가지, 웃는 얼굴로 대접해주는데 이유가 있다. 더 무안당하기 전에 보따리를 싸라. 그게 현명하다.
정치인이 정치를 떠나 갈데 없다지만 노야들은 변호사고 학자다. 대쪽은 소록도 정연씨가 불쌍하지도 않나? 그 아픔 안다. 정연씨는 외국으로 보내고 변호사 개업하라.
김대중이 웃는 얼굴로 추켜세울 때 등뒤로 [금융실명제위반]의 칼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거듭 말하노니 김대중 무섭다.
대쪽 이미지, 포청천 이미지, 무균질 이미지, 이미지는 거품이다. IMF시절에 실력으로 말할 때다.
※ 김동성 금메달은 얍삽하지만 실력이다. 그 장면 보고 분노한 12억 중국인과 수억 화교들이 일제히 한국을 향해 감자를 먹였단다. 낼 모레도 그 감자 더먹었음 좋겠다.
까웅의 바이올린
때려서만 소리가 나는게 아니고 문질러도 소리가 난다.
스치로폴로 유리창을 문지르면
삑삑 소리가 나지. 서양 깽깽이도 마찬가지.
기타줄이 울려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착각이다.
기타줄의 진동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란 모름지기 공기를 울려서 내는 것이지
기타줄이 궁뎅이를 흔들어서 울리는 것이 아니다.
즉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기타줄의 떨림의 크기는
음색이나 음량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는 기타줄을 짧게 혹은 길게 했을 때 동일한 진폭을
가지더라도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수 있다.
그렇다면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어떤 독립된 것을 타격하면 그 힘은 파동으로 변환되어
맞은 편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이게 1사이클이 되는데 타격이 1파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제 2파 제 3파가 계속 몰려오므로 되돌아오는 파와
제 2파가 부닥쳐서 새로운 파가 생기는데 이 파의 방향은
직각으로 꺽여서 기타줄의 끝까지 간다. 음색이나 음량의
결정은 이 파와 파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종이
울리는 맑고 큰 소리는 좌우의 떨림이 아니라
종횡의 충돌인 것이다.
절간의 대종을 울리고 난 다음에 들어보면
낮은 웅~ 소리를 내면서 종은 여전히 맹렬히 진동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나 종소리는 이미 나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경우는 좀 다르다. 활이 계속 누르고
현의 진동을 방해하므로 그 1사이클의 간격이 매우 좁아진다.
흔히 기분나쁜 소리를 찢어지는 소리라고 하는데
찢어질 경우 제1파가 제 2파와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만나야 할 접점이 찢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종이나 천을 찢어보면 알수 있다.
깽깽이소리는 일종의 찢어지는 소리라 할수 있다.
공명판을 두어 좀 울림을 주긴 했지만 음과 음의 합성을
차단한 효과라 볼수 있다.
어쨌든 현은 탄성을 가지고 있고 그 탄성은 진동을 만들어
내며 활은 그 진폭의 크기를 작게 할 뿐이며 진동의 파장은
좌우 뿐이 아닌 종횡으로도 성립하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도무지 책안읽는 한국인들에겐 "일단 아무 책이나 읽어라" 하고 권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소박하다.
뭐든 알아야 한다. 몰라서는 답없다. 영화를 보든, 음악을 듣든, 그림을 감상하든, 야구시합을 관람하든 알면 두배로 재미있다.
류시화 책이 잼있는 사람은 류시화 아닌 사람의 책은 재미없다. 왜?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가 재미있는가? 당신이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라. 나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촬영할텐데 생각하면서 보면 영화가 세배 잼있다.
어떤 음악이 좋은가? 당신이 곧 작곡가라고 생각하고 보라. 나라면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할텐데 하면서 들으면 세배 잼있다.
작가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책을 쓴다면 이 문장은 요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고 읽을 때 그 책은 더 잼있다.
나는 묻는다. 당신은 그림을 감상할 때, 음악을 들을 때, 영화를 볼 때 도무지 생각하면서 읽고 보고 듣는가? 생각을 안하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이 잼없고 잼없을 것이 잼있는 것이다.
왜 노땅들은 서태지 음악이 잼 없는가?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생각한다. 앗 나도 한번 해봐야지. 요건 요렇게 조건 조렇게 했군. 그래서 그런 효과가 났었군. 재미 열배다.
독후감을 쓰라면 뭐라고 쓸것인가? 영화감상평을 쓰라면 뭐라고 쓸 것인가? 스스로 작가가 되고 감독이 되지 않으면 겨우 "감동했다" 이 한마디밖에 안나온다. 어떤 문체가 어떤 묘사를 가능케 했고 어떤 촬영기법이 어떤 시각효과를 내는지 알지 않으면 뭘봐?
알아라. 알아야 면장이라도 한다. 생각하는 방법을 알아라. 독서법을 배와라. 영화감상법을 배와라. 그림감상법을 배와라. 인생이 열배 잼있다. 스스로 자기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재미없게 사는지 깨달아라.
나는 등산이 잼있다. 공기가 맑아서가 아니라 돌을 관찰하고 나무를 관찰하고 풍수를 헤아리며 기후와 환경과 인간사의 관계를 추적하므로 재미있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미남이데. 감동적이더군. 스릴이 느껴졌어." 이렇게 말할라면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먹은 것이다. 미장센이 어떻고 롱테이크가 어떻고 한다면 좀 보긴 본거다.
미니어쳐를 쓸 때 한국감독이 하면 조잡해 보이는데 헐리우드 감독이 하면 깜쪽같다. 왜? 그것은 미니어쳐가 정교하기 때문이 아니다. 미니어쳐를 굳이 정교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배라면 파도나 안개, 비행기라면 구름과 노을 등으로 주변을 슬쩍 커버하는 것이다. 조잡한 미니어쳐로도 조명을 어둡게 하고 시각효과로 보강하여 실제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를 알면 그게 탁 보인다. '앗 저 외국감독은 조잡한 미니어쳐로 진짜같은 효과를 내었군 대단한데' 이거 잼있다. 한국감독 "비싼 돈 들여 미니어쳐는 잘 만들어놓고 맨숭맨숭하게 찍어서 망쳤군 에라이 감자나 먹어"
그게 미니어쳐인지 시각효과인지 SFX인지 모르고 보면 무슨 재미가 있나? 재미를 모르니 맨날 홍콩 갱영화나 보는 것이다.
뭐든 알면 열배로 잼있다. 당신이 그 잼없는 것을 보고 잼있어 한다면 오로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 보자. 알고 읽자. 생각하고 느끼고 체험해보자. 당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이문열과 류시화]
사이비 지성과 참 지성
이문열을 사이비 지성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의 글에서 [세상을 향한 빈정거림]을 읽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으음 IMF 때문에 장사 안되는군) 이런 생각한다거나 스님이 염불하면서 (수수리 사바하 돈들온다 돈들어와 가고나면 내돈이다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이런 염불을 한다거나 하는 느낌이다.
그들에겐 진정한 믿음이 없다.
경멸과 비아냥으로 가득한 그들의 눈빛에서 타락을 읽는다. 눈이 맑지 못하다. 그대 신을 믿는가? 진리를 믿는가? 세상을 믿는가? 역사를 믿는가? 인간을 믿는가? 믿는 자의 눈빛은 맑다.
지성은 많이 알고 매너있고 교양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지성은 종교적 경건함이다. 신 앞에서 겸허한 태도,
나는 이문열, 류시화가 아마도 이회창에게 투표했으리라 짐작한다. 이런 짐작은 틀릴 수도 있지만 만약 맞다면 그 이유는?
[엽전들은 안돼~! 그래봤자 별수없다니까~! 백날 데모해봐라 되는 일 있나~! 원래 세상이란 그런 거야] 그것이 믿음 없음이다.
나는 그가 황석영 석방 서명에 참여하면서 아주 구차한 사족을 달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가 마광수 장정일 구속에 반대하면서 아주 치사한 사족을 달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왜 그는 늘 추한 사족을 다는가? 그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부터 유도된 유쾌한 낙관이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크게 웃을 수 있어야 하리라.
참 지성에 필요한 태도.
1. 믿어라. 모든 것을 믿을 것.
2. 낙관하라. 전체적으로 낙관할 것.
3. 참여하라. 현실에 참여할 것.
4. 비판하라. 가장 높은 표준을 세울 것.
5. 희생하라. 결과에 책임질 것.
1. 믿지 않는 자는 적(敵)이다.
2. 비관하는 자는 게으르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욱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낙관은 희망에 의지하며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찾아내는 것.)
3. 도피하는 자는 어리다.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정신적 미숙아)
4. 비판정신은 가장 엄격하고 높은 표준에 기초한다.
5. 이문열의 사족달기는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지성이다.
김동길식 경솔함, 김용옥식 좌충우돌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믿어야 하리라.
이러한 참지성과 사이비지성의 구분이 굳이 필요한 것은 [뭐뭐 하지 말라] [하면 안되고 하지 말 것이며 말아야 하고 말지니라] 하는 봉건적 태도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봉건시대의 계율은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말고 말며 말지니라 였다.
개명시대에는 그런 봉건구습이 통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계율은 (말라5계)가 아니하 (하라5계)여야 한다.
형제여. 부디 불교의 5계, 기독교의 10계를 극복하라. 화랑도의 5계는 하지말라계가 아니라 하라계였다.
인생론.. 어떻게 살 것인가?
[존엄] - 지상에는 50억 가지 삶이 있다. 그 중에 특별히 좋은 삶과 나쁜 삶은 없다. 존엄에 있어서 인간은 평등하다.
[평등] - 남자를 거세하면 여자가 되지만 여자를 거세해서 남자가 되지 않는다. 평등하대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따져보자.
[문제] - 내 이야기가 어렵대서 부담스러울 이유는 없다. 머리가 나빠 이해 못하는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 말한다. 답찾기가 아니라 문제찾기이기 때문이다.
[문화] - 지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모럴이 되고 문화가 되기 때문이다. 문화란 일종의 사회계약이다. 강제하지 않는 묵시적 합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충분히 검토되어야만 한다.
[지성] - 이문열의 주장은 이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계약을 제의하는 것이다. 나의 반대는 그 계약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남보증 설 때는 조심하라고 할애비가 그리 일렀거늘.
[행복] - 인생이란 하나의 문제풀기다. 행복이 곧 정답인가? 아니다. 정신이상자는 행복하지만 정답 아니다. 예수는 불행했지만 오히려 정답이다. 나무늘보의 행복을 그대는 질투할 이유가 없다.
[약속] - 세상엔 각자의 삶이 있으므로 우월은 없다. 그러나 문화에선 표준이 있어야 한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가능하다는 것이다. 괴벽한 삶도 아름다우나 약속이 안된다.
[군자] - 공자가 말한 군자(君子)가 현대적 개념으로 지성이다. 공자는 중국문화를 두고 하나의 사회적 약속을 제의한 것이다. 약속이 신뢰를 낳고 신뢰가 사회를 발달시킨다.
[선비] -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약속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의 차이이다. 믿음, 낙관, 참여, 비판, 희생은 군자끼리의 약속이다. 강물님이 말하는 조건이 아니라.
[괴벽] - 괴짜들의 삶도 멋있으나 약속을 깨뜨린다. 참 지성은 참 스승이며 스승은 가르키는 자가 아니라 약속가능한 것을 약속하도록 제의하는 자이다.
[도] - 스승이 도(道)에 모범 보이면 제자들이 따르고 확대되면 사회적 약속이 된다. 문화로 정착하면 문명의 발전이 된다.
[괴짜] - 스승이 괴짜이면 제자는 본받을 수가 없다. 약속할 수가 없다. 문화가 될 수 없다.
[평가] - 참 지성과 사이비지성의 구분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대해서다. 각자의 삶은 가치있으나 문화는 타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논한다. 이문열이 타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따지는 것이다.
[언행] -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고 주자는 군자당과 소인당을 비평했다. 이문열은 소인이라는 나의 구분은 정당하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자는 언행에 책임져야 한다.
[문적] - 이문열은 [이 세상에 참된 것은 없다. 너희는 참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하고 속삭인다. 나는 [참된 것은 있다. 너희는 참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라]고 말한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 예수고 나발이고 알고보면 암 것도 아이다. 붕알두쪽 꼬치 하나 똑같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 김대중이 같은 전지전능한 구세주를 기다리지 말라 빙신들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영웅? 족가고 인네. 멍청한 넘들. 그게 다 속아넘어가는기라카이까네이.
이문열의 변경 - 그래 우리끼리 그리 묵고 살아왔다 우짤래 흥 별꼴이야.
이문열의 오딧세이아 서울 - 야당한다고 찔락거리고 댕기는 넘들도 다 마찬가지라. 여당이나 야당이나 오십보백보인기라.
이문열의 선택 - 집에 가서 얼라나 바라. 지지바들아.
[파파의 비평]
사람의 아들 = 신은 예수의 방식으로 인간과 대화한다.
황제를 위하여 = 완벽한 영웅은 김대중이다.
일그러진 영웅 = 시대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역사의 순간에 역사의 현장을 지키는 자가 영웅이다.
변경 = 2류시민의 삶에 변명이 필요한가?
오딧세이아 서울 = 너의 타락을 변호하기 위하여 타인의 타락을 기대하지 말라.
선택 = 너는 존나이 맞고 두 대 더맞아야 된다.
이문열의 모든 견해는 영웅의 부정, 진리의 부정, 신의 부정, 가치부정, 자기부정, 지성의 부정, 변명, 죄의식과 양심 사이에서 무기력한 방황의 구시렁거림이다.
[형제여 용기를 가져라]
삶은 인간과 신의 대화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사는냐는 어떤 방법으로 신과 대화하느냐이다.
믿음은 가장 진실한 대화다.
진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지적 용기 뿐이다.
참여하라. 행동하라. 외쳐라. 신의 귀에 들릴 때 까지.
어떻게 살것인가? = 어떠한 언어로 신과 대화할 것인가? = 나는 나의 언어로 신과 대화한다.
[겨레의 자녀들이 금모으는 밤에]
[심미안(審美眼)]
지성과 지성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골동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이문열은 주장은 이문열 주장대로 가치있고 파파의 주장은 파파 생각대로 의미있다면 골동감정가는 할 일이 없다.
송나라 휘종이 천하의 진귀한 돌과 나무를 모아 들인 이후 수석과 분재의 문화가 생겨났다. 가치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은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수 없는 거지만 심미안이 있다면 옥석은 구분된다.
보편타당한 돌멩이는 그저 돌일 뿐, 빼어난 수석은 괴짜처럼 보이지만 전혀 괴짜가 아니다. 괴상한 돌이 수석이 되는 경우는 없다. 단지 심미안이 부족한 자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가치있으려면 일단 특이해야 한다. 무지한 자는 거기서 괴벽한 것과 참다운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골동감정가는 임의대로 가격을 매기지만 그 심미안을 닦는데 수십년의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수석은 일단 희귀해야 한다. 무지한 자는 모양이 괴상하면 희귀할 것이라 짐작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괴상한 것은 매우 흔하다. 오히려 평범한 것이 희귀하다.
수석이 되려면 일단 돌이 단단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다. 둘 째는 색깔이 싫증나지 않는 색깔(주로 광택있는 검은색)이어야 한다. 셋째가 형상이 특이해야 한다.
수석을 모르는 사람은 우선 모양이 괴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양이 괴상하면 돌이 무르다. 무른 돌은 광택이 죽어 싫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괴상한 돌은 하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돌은 검고 둥글둥글한 호박돌에 희미한 산봉우리 두엇 가운데 하얀 폭포 하나면 심석이 되고 오른쪽 귀퉁이에 조각달 하나 뜨면 천만원 짜리고 아랫쪽에 초가집 하나면 1억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삐죽삐죽하게 솟아나 산봉우리나 바위를 그린 산수경석이 되고 더 하찮은 것이 동물이나 물건을 닮은 물형석이고 가장 낮은 것이 꽃무늬있는 문양석이다.
가장 평범한 것에 가장 희귀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단단한 돌이 아니면 안된다. 단단해서는 괴상할 수 없다. 괴상해서는 희귀할 수 없다. 그것을 알려면 산하를 오래 헤메이어야 한다.
가치없는 돌은 언뜻 멋있어 보이지만 가만이 들여다 보면 인간의 손이 갈수록 더 나아질 것 처럼 보인다. 문양석이라면 좀 깍아내고 좀 닦아서 손이 가게 마련이다.
왜 그 돌이 가치있는가? 인간의 손길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돌 멋지지만 조금 더 다듬으면 더 멋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돌이면 가치없다.
왜 골동은 작은 한귀가 나가도 사금파리가 되는가? 한번 허용한 인간의 손길은 두 번 허용하기 때문이다. 한 귀가 나가도 된다면 두 귀가 나가도 역시 되며 그렇다면 누가 애지중지 하겠는가?
심미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문화라는 것의 본질이다. 문화는 무언의 약속이며 각자의 심미안들이 더해져서 이루어진다. 소박한 것은 자랑이 아니다. 지성은 문화다. 문화는 지극한 것을 추구한다. 지성은 항상 극점에 선다.
문화(文華) 그리고 혜안(慧眼) 또 관조(觀照)
[문화(文化)는 문화(文華)다]
수석이나 골동을 보면 심미안이 길러진다. 가치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알아보는 혜안을 갖게 된다. 그것이 수석과 골동의 사회에 기여함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보통사람들이 대부분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은 가치없다. 소박해서는 뒷산에 흔한 춘란 달마압종호가 왜 이천만원을 호가했는지 알수없다.
[독서인의 교양]
책을 읽는 것은 재미를 얻기 위해서여서 안된다. 사회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바른 안목을 갖기 위해서다. 재미를 얻을 양이면 영화를 보든지 만화를 볼일이지 책은 뭣하러 읽는가?
지성은 인간의 영역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한때 괴짜로 불리지 않았던 지성은 없다. 끝까지 괴짜로 남았던 지성도 없다. 보석은 돌 사이에 섞여 있지만 돌을 벗어나서 비로소 보석이 된다.
지성이란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거기 있음으로서 비교하여 군자와 소인을 가름하는 잣대가 되어지는 자를 일컬음이다.
널리 읽히는 좋은 책을 쓰고, 유익한 지식을 발견하고, 위대한 업적을 쌓아서 지성이 아니라 역사의 순간에 역사의 현장을 지켜 조금도 굽히지 않아서 지성이 된다.
[선행]
선행을 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어디서 나오는 돈인가? 부자가 선행을 한답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선행이 되는가? 모든 돈은 결국 자연에서 나온다.
돈은 자연의 것이며 신으로부터 빌린 것이다. 그대의 선행이 본래 신의 것인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한 격이 되지 않는가? 가장 훌륭한 선행은 신의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사업에 재투자하여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고로 선행을 한 자는 결국 타인의 것을 혹은 공공의 것을 자기 광내는 데 사용한 횡령범이다. 그대가 거지에게 주는 한푼은 신의 것을 임의로 비효율적인 곳에 내버리는 악행이 된다.
가장 좋은 선행은 자기완성이다. 그것이 신의 것을 가장 유효하게 사용한 셈이 되며 세상에 대한 가장 큰 기여다.
[위하여인가? 의하여인가?]
지성이란 타인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므로서 타인에 의해 유익해지는 자이다.
[왕후(王侯)의 반, 걸인의 찬]
왕후장상의 삶이 걸인의 삶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나의 몇가지 슬픔]
정월 초하룻날 지지배가
첫 손님으로 방문하면 재수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지지배는 설날 오전 내내 집밖출입을 못하였다.
이런 말은 우리 할부지들이
쓰잘데기 없이 지어낸 성차별 습속이 아니겠는가?
허나 취임 첫날부터 신정모라양 워드방에 입방정 떠는 꼴을
보아하니 [옛말 하나 안그르군] 아으 다롱디리.
2월 25일은 역사가 새로 시작되는 날.
그 하늘이 유달리 파랗고 높아서 좋았다.
대통령은 하늘이 내는 것이다.
오늘 우리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자.
한나라당의 오바질까지도 외국손님을 의식한
점잖은 행동으로 긍정 해석해 주자.
그런 날이 아닌가?
뭐 꼭 김종필일 이유는 없다.
박태준도 좋고 김근태도 좋은데 생각하면 인생만사 새옹지마
궂은 일이 굴러 복이 되기도 하는 법.
한나라당이 되려 고맙다.
우리 조급증 아닐까? 조급하여 원칙을 잊은건 아닐까?
IMF쇼크에 흔들리지 말고 진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새롭게 출발하는데 작은 약점이라도 있다면 비켜가는게
어떤가? 간단히 김종필이 용단을 내리는 방법도 있다.
[새정부에 바라는 것]
김대중정부의 고마운 점은
국민들의 사람보는 안목을 높여놓은 것이다.
이제 섣불리 대통령 하겠다고 설치지 않는게 좋다.
까짓 돌두환 물태우도 하는데 나라서 어쩌리 하고
어중이 떠중이들이 나올순 없겠다. 김대중 수준에 맞추기다.
이제 집에 3만권의 장서가 없거든 한달에 30권 읽지 않거든 대 통령 나올 생각말라. 그것만으로 성공이다. 더 기대하지 말자.
[필요한 것은 철학]
우리 고급언어를 쓰자.
투쟁, 대결, 일전불사, 날치기, 강행.
이런 말을 더 들어야 할것인가?
국민의 정부는 인권, 존엄, 전망, 역사, 협력, 대화, 존중, 상식의
좋은 말을 써주면 고맙겠다.
[좋은 언어가 좋은 행동을 낳는다]
시오노 나나미 재작년 하고도 재재작년 이야긴데 뒤늦게 남들 다읽은 책을 소개하는가 하고 떠벌이면 또 남자가 그따위니 장가를 못가지 하는 소리가 나올법 하여 근지러운 입을 누르고 보자.
근대해전사도 좋고 시오노 나나미도 좋다. 그러나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을 읽는 것이라는 것을. 핵심 밑줄 쫙~!
나나미 보다 나나미의 사상이 아름답다. 나나미식 영웅주의가 아름답다. 요는 나나미주의와 구름주의가 상반된다는 데 있다. 나나미는 인류역사상 가장 완벽한 인간(카이사르와 김대중)중의 하나였던 카이사르를 변명하기 위하여, 오로지 이 한명을 위하여 장대한 이탈리아 시리즈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먼저 나나미의 인간탐구대상 1호였던 마키아 벨리와 마키아 벨리의 연구대상 1호였던 체자레 보르자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나나미의 [내친구 마키아벨리]와 [물의 도시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
나나미는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초점은 인간에 맞추어져 있다. 역사의 인간은 영웅이다. 그러나 그 영웅을 필요로 한 시대적 배경과 영웅을 영웅으로 만든 인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가 문학에 가닿고 문학이 철학에 가닿는 것이다.
[전쟁은 역사/이며 영웅은 문학/이며 인간은 철학/이다.]
음모와 독약의 군주 체자레 보르자는 조조보다 백배 조조같은 자고 마키아벨리는 그 조조같은 체자레 보르자에게 술책을 건의한 자이며 나나미는 악마성의 전형 체자레보르자의 끝에서 카이사르를 만난다. 왜? 거기 무엇이 있기에?
체자레 보르자는 실패한 카이사르이며 카이사르는 성공한 마키아벨리스트이다. 나는 거기서 김대중을 본다. 나나미는 체자레 보르자를 오해된 영웅으로 묘사한다. 김대중이 그런 사람이다.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나 징기스칸은 과대포장된 영웅이며 박정희가 그런 사람이다. 체자레 보르자나 조조, 카이사르, 김대중은 오해된 영웅이며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매력에 빠져드는 인간이다.
영웅에 앞서 인간이다. 인간이었으므로 오히려 영웅으로 완성된다. 체자레 보르자는 정적을 믿고 교황자리에 안혔다가 배신당했다. 카이사르는 간단히 없애버리면 될 원로원을 끝까지 믿다가 죽었다. 거기서 인간을 만난다.
나폴레옹, 징기스칸, 알렉산더 같은 영웅들은 정적들은 간단히 죽여 없애버린다. 고로 비난받지 않는다. 깔끔하다. 그러나 우리 실패한 영웅들은 인간을 믿고 인간에 의지하다가 배반당한다.
조조가 간단히 유비를 죽여버렸던들 쉽게 영웅이 된다. 한고조 유방은 장량 한신 등을 간단히 죽여버린다. 고로 영웅이 된다. 초패왕 항우는 유방을 살려준다. 고로 비난받는다.
당태종, 이방원 등 정적을 간단히 죽여버린 자는 오히려 박정희처럼 미화되고 역사와 인간 사이에서 번민한 자는 오히려 간웅으로 악당으로 폄하된다. 그것이 역사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잔인한 것, 잔인할수록 미화된다. 약간의 인간애 때문에 번민하면 간웅으로, 악당으로 배척되는 법 김대중의 나쁜 평판은 대개 이같은 인간성 탓이며 박정희의 악마성은 폭로되지 않는다. 왜? 간단히 죽여버려 증거가 안남으니까.
"작품들은 한결같이 매끄럽다. 그러나 막상 당선작으로 흔쾌히
밀만한 힘 있고 혼 깊은 작품을 고르기는 힘들었다."
특정 신문.장르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 모든 신문 신춘문예 전 장르에 해
당되는 지적이다. 요즘 문학도들의 습작 태도에 대한 기성문단의 의문으로도
볼 수 있다.
"문장과 작품을 짓는 기술은 평준화됐다. 그러나 문학의 힘과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삶의 진실을 다루려는 욕구가 없으니 큰 울림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문학도들은 문학을 여기 (餘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때만 해도 정말 목 메달고 문학을 했었는데…."
작가 박범신씨. 그는 문학이라는 나무에 목 메달은 심정으로 습작에 임했다.
문학이 아니면 죽음 밖에 없다고.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소설창작
을 지도하고 있는 박씨는 요즘 문학도들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자기 고백용.과시용으로 문학을 여겨 문학 자체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약하다는 것이다.
"메시지 즉 주제 보다는 상황의 매끄러운 전개에 애썼다.
소설은 철학자들의 에세이와는 분명 다르지 않은가. 평이한 문장으로 내
자신을 드러내 그대로 보여 주려했을 뿐 이러쿵 저러쿵 주제적 진실을
독자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은게 당선의 영예를 안긴 것 같다. "
올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자 조윤정씨는 작품의 주제 보
다는 문장이나 작품 구성에 애썼다고 밝힌다. 그리고 다른 신춘문예
당선 소설들도 두루 읽어보니 재미 있게 잘 읽히기는 하나 도대체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느냐에 의심이 든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교재 삼아 공부한 90년대 작가들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주제 의식보다 표현을 앞세운 당선작들이 문학의 힘과 감동을 앗아간
것이다. 혼 없는 몸만 매끈하게 치장하고 있으니 허깨비나 다름 없다.
문장력과 상상력만 믿고 써내려간 작품이 독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릴 리 없다. 잘됐다고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작품도 읽는 순간
감성과 감각만을 자극할 뿐 오래도록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반성의 공간은
줄 수 없다.
한편 주제나 기법 측면에서 정통 문예미학에 충실한 작품들은 항상 그
상투성에서 문제가 된다. 기존 문학의 틀에서 한치도 벋어나지 못해
신선함을 도무지 줄 수 없는 작품들도 올 신춘문예에는 많았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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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경철 기자
구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드는가?
좋은 책은 서점에 많다. 고전은 다 좋은 책이다. 베스트셀러를
읽느니 고전을 마저 다 읽는게 나으리라.
[류시화는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그의 눈밖에 나면 책장사는 끝이다.
출판업계의 7할을 먹여 살린다.] 뭐 이런 말을 달고 다닌다.
류시화가 출판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하면
[내 마음의 닭괴기 수프]인지 먼지 하는 걸 번역하여
[마음을 열어주는 백한가지 이야기]로 제목 바꾸어 100만부 팔았다.
그러자 모든 책이 제목을 류시화식으로 바꾸었다.
지금 서점에 베스트 셀러는 다 [20대에 해야할 20가지 일]
뭐 이런 식으로 숫자와 가지가 들어가야 한다.
숫자와 가지가 없으면 책이 안나간다.
슬프다.
출판계가 그런 상술에 지배되는 작금의 세태가 마냥 슬프다.
아으 다른건 몰라도
출판이야 말로 지성의 영역이 통하는 데 아닌가?
그런데 한낱 가배야운 상술이라니.
박범신이 발마따나
[목매달지 않았거든 책을 쓰려들지 말거라.]
[목매단 흔적이 없거든 그놈의 책을 읽어주지도 말거라.]
나는 글이 매끈매끈한 류시화식 글을 혐오한다.
메시지는 없고 상황의 매끄러운 전개만 있는
단팥죽처럼 목구멍에 솔솔 잘 넘어가는
어떤 책이 팔리는 지는 나도 알고 있다.
요즘 처럼 IMF시대에는 80년대 초의 단(丹)처럼 크게 뻥을 치는 책 이 잘나가게 되어 있다. 작심하고 사기치는 예언서가 좋다.
[원효결서....한국이여 일어날 때가 되었니라. ]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피를 열번 토하지 않았거든 미처 붓을 잡아서 안되는 법이거늘.
옛날 석용산이 [여보게 저승갈땐 뭘 가지고 가지?]
이거 제목 하나는 기가 차게 뽑았는데 이 정도로 머리 잘돌아가는 자가 과연 중일까? 혹시 가짜 중? 하였다.
근데 과연 중이었다. 나는 그 책을 몇페이지만 읽어서
[전혀 생각이란 거 해보지 않고 썼군] 하고 내던지는데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몇줄을 더 읽어보았는데
[이 양반이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샘터 깨나 읽었군]
무엇인가? 석용산은 아무 생각없는 자다. 그러나 남들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눈치를 열심히 보는 자이다.
그는 사기꾼인 것이다. 차지혁이 같은 늠이다.
그리하여 PD수첩에도 나왔다.
[석용산은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
류시화나 석용산 이런 사람들은 생각을 안하고 사는 자이지만 대신
남들이 뭘 생각하는지는 열심히 살피는 자이다.
돈은 이런 자가 번다. 그들은 독서인들이 책읽기를 싫어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책읽은 척 지적 허영을 남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문장이 매끄러워 술술 잘 넘어가면서도 마치 깊이가 있는 듯이
사기치는 책..그런 책을 원한다. 그것이 작금의 세태.
십년전만 해도 나는 신춘문예 당선작 서너편은 읽어주었다.
그러나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을 한줄도 읽어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글의 매끄러움만 있고 피 토하는 울음은 없어져
버렸다.
신춘문예 당선자가 [주체적 진실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당선 영예를 준 것 같다] 이런 소리를 하는 나라.
싫다. 정말이지 싫다. 이런 나라에서 노벨상은 절대로 안나온다.
생각을 안하고 사는데 무슨 노벨상..더우기 나와서도 안된다.
이런 나라에서 영화를 만들던 연극을 만들던 헐리우드를 이길 수는 없다. 평론가들은 노상 헐리우드의 가벼움을 비판하지만 나는 아직
헐리우드만큼의 깊이를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류시화는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얍삽한 존재인지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슬프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여보게 저승갈 땐 뭘 가지고 가지.]
지적 허영과 가배야움을 동시에 충족시킨 두마리 토끼의 사냥
베스트 셀러. 인도를 안가보고도 인도를 팔아먹을 수 있는 자.
중질을 안해보고도 중을 팔아먹을수 있는 자가 있다.
나는 한동안 석용산이 진짜 스님이 아닐거라고 의심했다.
그 정도라면 스님노릇을 안해보고도 쓸 수 있고
스님이라면 그리 가벼운 하품소리가 안나오기 때문이다.
류시화는 인도를 가보고 왔는가?
갔다면 글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홍보용일 것이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은 여러번 본듯하지만 (제목만)
구름이 추천하니까 몇페이지는 더 읽어조야겠다.
언론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
세상 그 어떤 것이나 경쟁과 감시, 비판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국회는 선거가, 회사는 노조가, 상품은 소비자가, 학교는 학부모가 감시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감시받는 자가 감시하는 자의 관계가 대등하지 못할 때 감시는 불가능하다. 특히 학교와 학부모의 관계, 선진국에서는 학부모가 감시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져다 바치기 바쁘다. 그래서 전교조가 필요하다. 뭣이든 견제와 감시비판이 없으면 반드시 공산당이 된다.
공산당이라도 소련이나 중국처럼 시장규모가 있는 나라는 어떻게든 자정능력이 있다. 북한 알바니아 쿠바처럼 작은 나라는 답이 없다. 그것은 나라가 작기 때문이다.
우리 몇이 협잡하여 아프리카 미개한 마을에 가서 마음먹고 장악하려면 할수 있다. 인구가 적다면 말이다. 한국은 인구가 적은 편이다. 유럽은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어 인구가 많고 미국도 일본도 시장이 크다. 한국같이 무식하고 쪼매한 나라에 조선일보와 안기부 몇몇이 이나라를 말아먹자 하고 작당하면 충분히 말아먹을수 있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흔히 영화에 잘나오는 식으로 CIA의 몇몇이 음모를 꾸며 전체 미국국민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영화, [체인리 액션] 처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당장 북한이 군주와 언론이 짜고 나라를 통째로 자기 호주머니 구슬로 만든거 아닌가?
이나라 언론은 비판과 감시 견제가 안된다. [독자가 그 신문을 안보면 될 것 아닌가?] 이 말은 소비자가 악덕기업 물건 안사면 될 것 아닌가 하는 말과 같은데 당장 북한은 그럼 투표에 김정일이 안찍으면 될거 아닌가? 북한도 투표한다.
중요한 점은 조선일보가 장사를 잘하기 때문에 악덕신문사가 된 것이 아니라 안기부가 장사를 잘하는 신문을 골라서 부패시킨다는 점이다. 즉 원래 삐닥한 신문이 장사가 잘된 것이 아니라 젤로 장사가 잘되는 신문을 안기부가 말아먹었다는 것이다.
어떤 신문이든 우리나라에서 젤로 잘팔리는 신문이면 안기부가 침투하여 공작하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 내부에 그쪽의 끄나풀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조선 안보기 해서 조선이 안팔리면 대신으로 안기부는 동아나 한국에 침투할 것이다. 고로 도로아미 타불이다. 요는 그러한 음모가 통하지 않는 나라가 될 정도로 국민이 깨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말살운동은 한 신문사를 없애자는 운동이 아니라 국민이 깨어나자는 운동이다. 극소수 몇몇이 밀실에서 음모하여 한 나라의 대통령을 제조하는 그런 나라라면 슬프지 아니한가? 안기부와 조선은 그런 음모로 지난 대선에 개입하였고 그 증거가 한겨레에 보도되고 있다.
이나라 언론이 서려면 오로지 우리가 비판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은 원래 극우가 아니었다. 이승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제 조선은 또 변해야 한다. 엠비시는 PD수첩에서 스스로 자기고백을 했다.
왜 조선은 여전히 고백하지 않는가?
조선이 스스로 범죄행위를 고백할 때까지 우리의 조선말살캠페인은 지속되어야 한다.
류시화 이야기 속편
구름이 언급했대서가 아니라 진작 생각해 둔 적이 있기 때문에 썰을 푸는 것이다. 글고 내 글이 좋아졌다면 필력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글이란 작심하고 다듬으면 얼마든지 좋게 만들수가 있는 것이다.
군대 있을 때 이야기가 통신에 올려진 줄은 나중에 알았다. 그것은 남 읽으라고 쓴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것이다. 내 글의 대부분은 나 자신이 가장 큰 독자다. 에세이스트가 되려면 더 나이를 먹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생각을 저축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류시화는 과연 본명일까? 서태지나 이주노가 예명이듯 (양현석은 본명이다) 이름이 차지혁이면 가명일 공산이 크다. 차지혁이 소문을 첨 듣고 사기성을 느꼈다. 그것은 석용산이나 류시화의 그것과 같다. 이름 때문이다. 과연 본명일까?
류시화와 차지혁을 발음해보면 앞은 여성적이요 뒤는 남성적이라는 차이 뿐 느낌이 비슷하다. 아주 영리한 사람이면 이런 이름을 짓는다. 자기 이름까지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다.
소설가가 흔히 작명하는 이름은 다혜나 병태 나영이 지은이 이런 이름들은 성을 붙이지 않고는 좋은데 앞에 성을 붙이면 김다혜나 박다혜나 좋지 않다. 다가 타로 발음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시화는 어색하다. 류가 붙어야 그럴듯하다. 이건 첨부터 남편이나 친구에게 정답게 불리기 보다 공인이 되어 다중에게 무난하게 불리길 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차지혁도 망하지 않았다면 사기꾼은 아니다. 요는 이름까지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상술이다. 물론 나의 느낌이다. 정말 가명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이름 가진 사람을 경계한다.
만약 당신이 낯선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김아무개나 이아무개라고 말하면 상대는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류아무개나 차아무개라면 잘 기억한다. 김이박은 너무 흔하다. 우리나라에 김씨가 24프로 이씨가 16프로 박씨가 9프로 합쳐서 49프로다.
그렇다고 희성이 되어 [천방지축 지랄방가]도 곤란하다. 이건 상놈 성씨다. 골상학적 경험으로 말하면 천씨나 방씨 지씨 축씨 남씨 가씨 하씨 안씨 좀 그렇다. 무난한 것이 정씨, 송씨, 장씨, 조씨, 유씨, 오씨, 최씨 고씨 서씨 신씨 정도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상하게 학구적인 것이 류씨다. 문화 류씨, 본관부터 문화적인 느낌이 든다.
미애, 순자, 영희는 좀 촌스럽다. (차)지혁은 만화주인공이다. (류)시화는 작심하고 지은 그럴듯한 이름이다. 그럴듯하면 가짜다. 베스트셀러 제조기는 자기 이름부터 탄탄하게 연출해야 하는 것이다.
스님이 [여보게 저승갈땐 뭘 가지고 가지] 라고 해서 100만부 해치웠다면 또 수녀가 [하나님 수녀는 빨간팬티 입으면 안되나요?] 이런 제목으로 백만부 일도 아니다. 이런건 척하면 삼천리 아닌가? 그리하여 제목은 자꾸만 길어진다.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제목을 늘여라. 받쳐주는 힘이 있다면 [아버지]나 [서편제]처럼 짧아도 좋다. 그러나 시덥잖은 잡소리로 벌려면 [하나님 수녀는 빨간팬티 입으면 안되나요?] 이렇게 길게 늘여야 한다.
베스트셀러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출판가의 징크스다. 그 법칙에 맞추어 나오면 나는 일단 안본다. 그 법칙을 깨면 일단 본다.
♧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말하면 나는 그 책을 스무번도 더 읽었다. 류시화 책이라면 서점에 늘려 있어서 저절로 보게 된다. 한 구절을 인용할까?
[인연]
한 인도거지가 류시화에게 말했다. [난 자네를 이생(生)에서 만나기 위해 일생을 기다렸네 그러니 내 생활비는 자네가 책임져야 하네. 류시화는 별수없이 한달치 생활비를 거지에게 주었다.
물론 기억이 희미하니 정확하지는 않다.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사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즈니쉬 [배꼽] 아류에 해당하는 그런 책을 나는 읽지 않는다.
구름이 그 책을 말하길래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아 내 기억 속의 그책인가 긴가민가 하였다. 그따위 하찮은 책을 내가 제목식이나 기억할리 없기 때문이다.
그 책을 유독 기억하는 것은 (제목은 잊었지만) 표지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이도 최고급이며 칼라사진 삽화를 쓴다. 제목이 멋있을뿐더러 표지가 또한 걸작이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네명의 여자 사진이 시계안에 작게 배치되어 있다.
지각없는 독자라면 그 표지에 이미 반해버린다.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그 상술에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류시화는 그 표지디자인과 제목선정에 자기에너지의 7할 이상을 투자했을 것이다.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었다. 베스테셀러를 만들려면 내용보다 표지에 종이질로 활자크기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거기에다 양념으로 유머를 추가하고 페이지마다 좋은 그림을 끼워넣고. 책이 상품이되 지식이 상품이 아니라 종이가 상품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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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때 깨치고 운운하는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런말을 했던가? 내가? 그랬다면 그것은 깨침을 부정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불교신도가 아니며 해탈이니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님들이 돌연 오도송을 부르는 것을 나는 일종의 쇼로 본다.
일곱 살 운운은 내가 주장하는 자기복제이론과 구조론 집적이론 일반이론 디지털이론의 기본 아이디어를 구축하는 영감을 그때 얻었다는 말일 뿐이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 한 적이 있다. 꼬마 때 이 세상이 물질알갱이가 아닌 수학적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다.
책 이야기
누구나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읽는 것이다. 무협지가 딱 재미있다면 무협지를 읽을 일이다. 그러나 그사람의 수준은 무협지 수준이다. 무협지를 낮게 평한다면 무협지를 읽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통신에서 말하는 척도로 삼는
[시대의 지성 - 문명의 관점에서 역사를 전망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전인적 교양]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일 뿐이다.
나는 책안읽는주의자이다. [책안읽는게 뭔 자랑이냐?] 하고 대들 법한데 그런 사람은 대개 책을 전혀 안읽는 사람이다. 한달에 두어권 정도를 읽으면서 책읽는다고 착각하는.
책을 안읽는다는 것은 베스트셀러를 안읽는다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3대 사이비인 [마르크스주의 사이비교양, 라즈니쉬류 사이비교양, 라깡 들뢰즈 브레히트류 싸구려교양]들을 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각자는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읽는 것이다. 그건 나무랄 일이 못된다. 구름이 읽는 김래성의 청춘극장은 산호의 라이파이, 김용환의 코주부 교양이다. 그 수준의 교양은? 또한 구름을 보라. 레인보뜨님의 교양은 검궁인 사마달의 무협지 교양이다. 이현세만화로 이어지는 부류들. 또한 레인보뜨님을 보라. 수레바퀴의 교양은? 홍야님의 교양은? 이토이님의 교양은?
[이문열은 쓰레기다.] [류시화는 쓰레기다] 한다면 순전히 나의 척도인 [시대의 지성]에 비추어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이문열 수준에 있는 사람은 이문열을 읽으면 되고 류시화 수준에 있는 사람은 류시화를 읽으면 된다.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며 말리지는 않는다. 요는 그수준이 마땅히 교양인이 지향해야 할 최선의 모범은 아니다는 것이다.
[류시화는 자기연출, 자기상품화에 능한 자이며 그의 책은 그의 교양이고 그의 교양에 못미치는 자는 그것으로도 과분할진저]
노신, 호적, 임어당은 또한 그 시대 교양의 고봉이 된다. 말로, 지드, 롤랑이 또한 한 시대의 향도가 된다. 그렇다면 이나라 이시대 마땅히 태두가 되고 향도가 되어야할 대표교양은?
마광수? 김용옥? 김동길? 강준만? 안병욱? 류시화? 이문열? 황석영? 백태웅? 황필호? 이외수? 이도형? 류근일? 빠콩?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망라하고 그 시대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교양이 필요한 법이다. 마땅히 우리가 모범으로 본받아야 할 지성의 향도성은 누구인가? 없다. 조선민국에 없다. 어찌 불행이 아니랴? 지성이 죽은 시대, 교양이 죽은 시대다. 60년대만 해도 장준하가 있었고 함석헌이 있었다.
약간의 후보들은 있다. 고은 김지하 들을 비롯해서 김수환추기경 외 몇몇 종교인들이다. 그러나 대체로 활약하지 아니하고 침묵한다. 침묵해서는 아니된다.
시대를 대표하는 교양이 없다는 것 - 이것이 우리시대의 진정한 비극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본받아야 할 사표,
통신에서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류시화식 쓰기를 지향할 것인가? 이문열식 쓰기를 지향할 것인가? 강준만식 쓰기를 지향할 것인가? 모름지기 부지불식간에 모범이 있는 것이다.
동업은 강준만식 쓰기를 지향한다. 구름은 류시화식 쓰기를 권한다. 수레바퀴의 쓰기도 지향하는 식이 있다. 이문열식 빈정대기, 마광수식 헐뜯기, 황필호식 노가리까기, 이도형식 이빨질, 빠콩식 터뜨리기들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김성탄식, 호적식, 노신식, 임어당식을 본받으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다. 나의 식은 정립되지 않았다.
평자는 마땅히 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형화하며 모범삼아 권장할 일이다. 나는 그것이 이문열, 류시화는 아니다 하고 말할 뿐이다. 그들은 약은 자이며 시대의 향도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실제로 말할 때에도 약간 고어체로 말한다. 나와 대화해 본 사람을 알겠으나.
성씨론 - 골상학을 우습게 보지말라.
가끔 심각한 말을 하고 또 가끔 한심한 말을 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자유롭다. 상상력은 자유로움에 의지한다. 골상학 이야기는 좀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냥 재미로 들어달라.
나는 학자가 아니므로 내 말에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 뜻있는 사람이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데이터를 확보하여 통계를 내어본다면 의미있는 답이 나오리라고 확신한다. 연구가치가 있다.
그건 간단하다. 김씨는 의뭉하며 이씨는 어영부영하고 최씨는 지독하며 박씨는 빡빡하고 정씨는 당나귀고 천방지축 지랄방가는 할수없다. 이름 가운데가 동자인 사람도 의뭉하다.
가운데 자가 동자 : 마동탁(이현세) 엄동호(박봉성) 오동구(고행석) <=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얍삽하다는 것이다. 얍삽한 사람들 : 김동길, 김동리, 김동건, 김동렬, 선동렬, 신동희,
의뭉한 김가들 :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정치지향적 인간)
빡빡한 박가들 : 박정희 박거정 박태준 박철언 (승부사들)
지독한 최가들 : 최명재 최원석 최계월 (입지전)
당나귀 정가들 : 정태수 정주영 (불도저)
어영부영 이가 : 이부영 이철 이수성 (줄 잘못 서는게 특기)
김가들은 자기의중을 잘 안드러내고 가만 있다가 전체의견을 종합하여 그걸로 자기의견을 삼는 특징이 있다.
박가들은 자기 말은 절대로 맞다고 맹신하지만 승부가 끝나면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최가들은 타협을 절대로 안하기 때문에 밖으로 빙빙돈다. 경주 최부자들 (12대 진사 12대 만석을 하면서도 중앙의 벼슬은 결코 안함) 고로 최가들은 최원석(동아) 최계월(남양개발) 최명재(파스퇴르) 다 근거를 외국에 두고 밖에서 가져온다. 타협을 안하다 보니 밖으로 도는 것이다. 최영장군, 최명길정승부터 그랬음.
당나귀 정씨들은 고지식한 대신 저돌적이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단순무식한 철강으로 승부보려하다가 다 실패.
장고 끝에 악수두는 이가들은 언제나 줄을 잘못 선다. 이가들의 우유부단이 조선왕조를 망쳤다. 우물쭈물 꾸물꾸물. 요번 선거에 줄 제대로 선 이가는 이종찬 뿐. 이건희 너까지도 실패?
물론 이런 말이 절대로 맞는 것은 아니다. 근데 옛날 할아버지들은 이런걸 잘 알고 있었다. 기록해두면 좋을 것이다. 점장이들의 예지는 상당부분 이런데 의존한다. 이런 지식이 많기 때문에 적어도 확률 이상의 정보를 점장이들은 제공한다.
맞고 안맞고를 떠나 이런 지식은 상상력의 측면에서, 유익하다. 정보라는 것은 꼭 확실한 정보만 정보가 아니다. 틀린 정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이것이 틀린다고 무조건 외면해선 안된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오로지 외모와 궁합, 돈, 체력, 학벌만이 참고자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쓸데없는 것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상대의 성격과 태도가 정씨여서 당나귀인지, 최씨여서 지독한지, 김씨여서 얍삽한지, 이씨라서 맹탕인지 한번 살펴볼 것이다.
정씨가 당나귀라고 말했대서 그것을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일장일단이 있으니까 단순무식한 것도 매력일수 있다. 단지 하나의 참고가 된다는 것이다.
유전법칙 상 남녀의 혈통이 반반씩 합치니까 말이 안되는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성격의 남성적 측면 (승부기질, 사업감각, 정치체질, 외교기질)은 부계로 유전하고 반대로 여성적 측면 (감수성, 심미적 취향)은 모계로 유전할수도 있다. 골상학은 더 연구되어야 한다.
조순, 이회창 역할이 끝난 킬러.
야대(野大)들이 총리인준 가지고 한따까리 할라나 본데 여당들이 작심하고 야당격파작전이다. 알고보면 김대중 무서운 사람이다.
이 정국에서 우습게 된 사람이 조순이다. 가만있으면 서울시장 재선인데 볼때마다 우습다. 생각하면 슬프다.
이회창은 김대중과 이미지가 반대된다는 이유로 고용된 저격수다. 저격에 실패한 킬러는 미련없이 떠나는 거다. 눈치가 있다면 덕담 들었을 때 가라. 김대중이 노야들을 괜히 만나주나?
눈치없기는 조순할부지도 마찬가지, 웃는 얼굴로 대접해주는데 이유가 있다. 더 무안당하기 전에 보따리를 싸라. 그게 현명하다.
정치인이 정치를 떠나 갈데 없다지만 노야들은 변호사고 학자다. 대쪽은 소록도 정연씨가 불쌍하지도 않나? 그 아픔 안다. 정연씨는 외국으로 보내고 변호사 개업하라.
김대중이 웃는 얼굴로 추켜세울 때 등뒤로 [금융실명제위반]의 칼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거듭 말하노니 김대중 무섭다.
대쪽 이미지, 포청천 이미지, 무균질 이미지, 이미지는 거품이다. IMF시절에 실력으로 말할 때다.
※ 김동성 금메달은 얍삽하지만 실력이다. 그 장면 보고 분노한 12억 중국인과 수억 화교들이 일제히 한국을 향해 감자를 먹였단다. 낼 모레도 그 감자 더먹었음 좋겠다.
까웅의 바이올린
때려서만 소리가 나는게 아니고 문질러도 소리가 난다.
스치로폴로 유리창을 문지르면
삑삑 소리가 나지. 서양 깽깽이도 마찬가지.
기타줄이 울려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착각이다.
기타줄의 진동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란 모름지기 공기를 울려서 내는 것이지
기타줄이 궁뎅이를 흔들어서 울리는 것이 아니다.
즉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기타줄의 떨림의 크기는
음색이나 음량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는 기타줄을 짧게 혹은 길게 했을 때 동일한 진폭을
가지더라도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수 있다.
그렇다면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어떤 독립된 것을 타격하면 그 힘은 파동으로 변환되어
맞은 편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이게 1사이클이 되는데 타격이 1파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제 2파 제 3파가 계속 몰려오므로 되돌아오는 파와
제 2파가 부닥쳐서 새로운 파가 생기는데 이 파의 방향은
직각으로 꺽여서 기타줄의 끝까지 간다. 음색이나 음량의
결정은 이 파와 파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종이
울리는 맑고 큰 소리는 좌우의 떨림이 아니라
종횡의 충돌인 것이다.
절간의 대종을 울리고 난 다음에 들어보면
낮은 웅~ 소리를 내면서 종은 여전히 맹렬히 진동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나 종소리는 이미 나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경우는 좀 다르다. 활이 계속 누르고
현의 진동을 방해하므로 그 1사이클의 간격이 매우 좁아진다.
흔히 기분나쁜 소리를 찢어지는 소리라고 하는데
찢어질 경우 제1파가 제 2파와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만나야 할 접점이 찢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종이나 천을 찢어보면 알수 있다.
깽깽이소리는 일종의 찢어지는 소리라 할수 있다.
공명판을 두어 좀 울림을 주긴 했지만 음과 음의 합성을
차단한 효과라 볼수 있다.
어쨌든 현은 탄성을 가지고 있고 그 탄성은 진동을 만들어
내며 활은 그 진폭의 크기를 작게 할 뿐이며 진동의 파장은
좌우 뿐이 아닌 종횡으로도 성립하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도무지 책안읽는 한국인들에겐 "일단 아무 책이나 읽어라" 하고 권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소박하다.
뭐든 알아야 한다. 몰라서는 답없다. 영화를 보든, 음악을 듣든, 그림을 감상하든, 야구시합을 관람하든 알면 두배로 재미있다.
류시화 책이 잼있는 사람은 류시화 아닌 사람의 책은 재미없다. 왜?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가 재미있는가? 당신이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라. 나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촬영할텐데 생각하면서 보면 영화가 세배 잼있다.
어떤 음악이 좋은가? 당신이 곧 작곡가라고 생각하고 보라. 나라면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할텐데 하면서 들으면 세배 잼있다.
작가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책을 쓴다면 이 문장은 요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고 읽을 때 그 책은 더 잼있다.
나는 묻는다. 당신은 그림을 감상할 때, 음악을 들을 때, 영화를 볼 때 도무지 생각하면서 읽고 보고 듣는가? 생각을 안하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이 잼없고 잼없을 것이 잼있는 것이다.
왜 노땅들은 서태지 음악이 잼 없는가?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생각한다. 앗 나도 한번 해봐야지. 요건 요렇게 조건 조렇게 했군. 그래서 그런 효과가 났었군. 재미 열배다.
독후감을 쓰라면 뭐라고 쓸것인가? 영화감상평을 쓰라면 뭐라고 쓸 것인가? 스스로 작가가 되고 감독이 되지 않으면 겨우 "감동했다" 이 한마디밖에 안나온다. 어떤 문체가 어떤 묘사를 가능케 했고 어떤 촬영기법이 어떤 시각효과를 내는지 알지 않으면 뭘봐?
알아라. 알아야 면장이라도 한다. 생각하는 방법을 알아라. 독서법을 배와라. 영화감상법을 배와라. 그림감상법을 배와라. 인생이 열배 잼있다. 스스로 자기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재미없게 사는지 깨달아라.
나는 등산이 잼있다. 공기가 맑아서가 아니라 돌을 관찰하고 나무를 관찰하고 풍수를 헤아리며 기후와 환경과 인간사의 관계를 추적하므로 재미있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미남이데. 감동적이더군. 스릴이 느껴졌어." 이렇게 말할라면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먹은 것이다. 미장센이 어떻고 롱테이크가 어떻고 한다면 좀 보긴 본거다.
미니어쳐를 쓸 때 한국감독이 하면 조잡해 보이는데 헐리우드 감독이 하면 깜쪽같다. 왜? 그것은 미니어쳐가 정교하기 때문이 아니다. 미니어쳐를 굳이 정교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배라면 파도나 안개, 비행기라면 구름과 노을 등으로 주변을 슬쩍 커버하는 것이다. 조잡한 미니어쳐로도 조명을 어둡게 하고 시각효과로 보강하여 실제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를 알면 그게 탁 보인다. '앗 저 외국감독은 조잡한 미니어쳐로 진짜같은 효과를 내었군 대단한데' 이거 잼있다. 한국감독 "비싼 돈 들여 미니어쳐는 잘 만들어놓고 맨숭맨숭하게 찍어서 망쳤군 에라이 감자나 먹어"
그게 미니어쳐인지 시각효과인지 SFX인지 모르고 보면 무슨 재미가 있나? 재미를 모르니 맨날 홍콩 갱영화나 보는 것이다.
뭐든 알면 열배로 잼있다. 당신이 그 잼없는 것을 보고 잼있어 한다면 오로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 보자. 알고 읽자. 생각하고 느끼고 체험해보자. 당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이문열과 류시화]
사이비 지성과 참 지성
이문열을 사이비 지성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의 글에서 [세상을 향한 빈정거림]을 읽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으음 IMF 때문에 장사 안되는군) 이런 생각한다거나 스님이 염불하면서 (수수리 사바하 돈들온다 돈들어와 가고나면 내돈이다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이런 염불을 한다거나 하는 느낌이다.
그들에겐 진정한 믿음이 없다.
경멸과 비아냥으로 가득한 그들의 눈빛에서 타락을 읽는다. 눈이 맑지 못하다. 그대 신을 믿는가? 진리를 믿는가? 세상을 믿는가? 역사를 믿는가? 인간을 믿는가? 믿는 자의 눈빛은 맑다.
지성은 많이 알고 매너있고 교양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지성은 종교적 경건함이다. 신 앞에서 겸허한 태도,
나는 이문열, 류시화가 아마도 이회창에게 투표했으리라 짐작한다. 이런 짐작은 틀릴 수도 있지만 만약 맞다면 그 이유는?
[엽전들은 안돼~! 그래봤자 별수없다니까~! 백날 데모해봐라 되는 일 있나~! 원래 세상이란 그런 거야] 그것이 믿음 없음이다.
나는 그가 황석영 석방 서명에 참여하면서 아주 구차한 사족을 달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가 마광수 장정일 구속에 반대하면서 아주 치사한 사족을 달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왜 그는 늘 추한 사족을 다는가? 그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부터 유도된 유쾌한 낙관이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크게 웃을 수 있어야 하리라.
참 지성에 필요한 태도.
1. 믿어라. 모든 것을 믿을 것.
2. 낙관하라. 전체적으로 낙관할 것.
3. 참여하라. 현실에 참여할 것.
4. 비판하라. 가장 높은 표준을 세울 것.
5. 희생하라. 결과에 책임질 것.
1. 믿지 않는 자는 적(敵)이다.
2. 비관하는 자는 게으르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욱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낙관은 희망에 의지하며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찾아내는 것.)
3. 도피하는 자는 어리다.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정신적 미숙아)
4. 비판정신은 가장 엄격하고 높은 표준에 기초한다.
5. 이문열의 사족달기는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지성이다.
김동길식 경솔함, 김용옥식 좌충우돌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믿어야 하리라.
이러한 참지성과 사이비지성의 구분이 굳이 필요한 것은 [뭐뭐 하지 말라] [하면 안되고 하지 말 것이며 말아야 하고 말지니라] 하는 봉건적 태도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봉건시대의 계율은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말고 말며 말지니라 였다.
개명시대에는 그런 봉건구습이 통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계율은 (말라5계)가 아니하 (하라5계)여야 한다.
형제여. 부디 불교의 5계, 기독교의 10계를 극복하라. 화랑도의 5계는 하지말라계가 아니라 하라계였다.
인생론.. 어떻게 살 것인가?
[존엄] - 지상에는 50억 가지 삶이 있다. 그 중에 특별히 좋은 삶과 나쁜 삶은 없다. 존엄에 있어서 인간은 평등하다.
[평등] - 남자를 거세하면 여자가 되지만 여자를 거세해서 남자가 되지 않는다. 평등하대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따져보자.
[문제] - 내 이야기가 어렵대서 부담스러울 이유는 없다. 머리가 나빠 이해 못하는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 말한다. 답찾기가 아니라 문제찾기이기 때문이다.
[문화] - 지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모럴이 되고 문화가 되기 때문이다. 문화란 일종의 사회계약이다. 강제하지 않는 묵시적 합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충분히 검토되어야만 한다.
[지성] - 이문열의 주장은 이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계약을 제의하는 것이다. 나의 반대는 그 계약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남보증 설 때는 조심하라고 할애비가 그리 일렀거늘.
[행복] - 인생이란 하나의 문제풀기다. 행복이 곧 정답인가? 아니다. 정신이상자는 행복하지만 정답 아니다. 예수는 불행했지만 오히려 정답이다. 나무늘보의 행복을 그대는 질투할 이유가 없다.
[약속] - 세상엔 각자의 삶이 있으므로 우월은 없다. 그러나 문화에선 표준이 있어야 한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가능하다는 것이다. 괴벽한 삶도 아름다우나 약속이 안된다.
[군자] - 공자가 말한 군자(君子)가 현대적 개념으로 지성이다. 공자는 중국문화를 두고 하나의 사회적 약속을 제의한 것이다. 약속이 신뢰를 낳고 신뢰가 사회를 발달시킨다.
[선비] -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약속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의 차이이다. 믿음, 낙관, 참여, 비판, 희생은 군자끼리의 약속이다. 강물님이 말하는 조건이 아니라.
[괴벽] - 괴짜들의 삶도 멋있으나 약속을 깨뜨린다. 참 지성은 참 스승이며 스승은 가르키는 자가 아니라 약속가능한 것을 약속하도록 제의하는 자이다.
[도] - 스승이 도(道)에 모범 보이면 제자들이 따르고 확대되면 사회적 약속이 된다. 문화로 정착하면 문명의 발전이 된다.
[괴짜] - 스승이 괴짜이면 제자는 본받을 수가 없다. 약속할 수가 없다. 문화가 될 수 없다.
[평가] - 참 지성과 사이비지성의 구분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대해서다. 각자의 삶은 가치있으나 문화는 타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논한다. 이문열이 타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따지는 것이다.
[언행] -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고 주자는 군자당과 소인당을 비평했다. 이문열은 소인이라는 나의 구분은 정당하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자는 언행에 책임져야 한다.
[문적] - 이문열은 [이 세상에 참된 것은 없다. 너희는 참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하고 속삭인다. 나는 [참된 것은 있다. 너희는 참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라]고 말한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 예수고 나발이고 알고보면 암 것도 아이다. 붕알두쪽 꼬치 하나 똑같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 김대중이 같은 전지전능한 구세주를 기다리지 말라 빙신들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영웅? 족가고 인네. 멍청한 넘들. 그게 다 속아넘어가는기라카이까네이.
이문열의 변경 - 그래 우리끼리 그리 묵고 살아왔다 우짤래 흥 별꼴이야.
이문열의 오딧세이아 서울 - 야당한다고 찔락거리고 댕기는 넘들도 다 마찬가지라. 여당이나 야당이나 오십보백보인기라.
이문열의 선택 - 집에 가서 얼라나 바라. 지지바들아.
[파파의 비평]
사람의 아들 = 신은 예수의 방식으로 인간과 대화한다.
황제를 위하여 = 완벽한 영웅은 김대중이다.
일그러진 영웅 = 시대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역사의 순간에 역사의 현장을 지키는 자가 영웅이다.
변경 = 2류시민의 삶에 변명이 필요한가?
오딧세이아 서울 = 너의 타락을 변호하기 위하여 타인의 타락을 기대하지 말라.
선택 = 너는 존나이 맞고 두 대 더맞아야 된다.
이문열의 모든 견해는 영웅의 부정, 진리의 부정, 신의 부정, 가치부정, 자기부정, 지성의 부정, 변명, 죄의식과 양심 사이에서 무기력한 방황의 구시렁거림이다.
[형제여 용기를 가져라]
삶은 인간과 신의 대화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사는냐는 어떤 방법으로 신과 대화하느냐이다.
믿음은 가장 진실한 대화다.
진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지적 용기 뿐이다.
참여하라. 행동하라. 외쳐라. 신의 귀에 들릴 때 까지.
어떻게 살것인가? = 어떠한 언어로 신과 대화할 것인가? = 나는 나의 언어로 신과 대화한다.
[겨레의 자녀들이 금모으는 밤에]
[심미안(審美眼)]
지성과 지성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골동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이문열은 주장은 이문열 주장대로 가치있고 파파의 주장은 파파 생각대로 의미있다면 골동감정가는 할 일이 없다.
송나라 휘종이 천하의 진귀한 돌과 나무를 모아 들인 이후 수석과 분재의 문화가 생겨났다. 가치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은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수 없는 거지만 심미안이 있다면 옥석은 구분된다.
보편타당한 돌멩이는 그저 돌일 뿐, 빼어난 수석은 괴짜처럼 보이지만 전혀 괴짜가 아니다. 괴상한 돌이 수석이 되는 경우는 없다. 단지 심미안이 부족한 자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가치있으려면 일단 특이해야 한다. 무지한 자는 거기서 괴벽한 것과 참다운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골동감정가는 임의대로 가격을 매기지만 그 심미안을 닦는데 수십년의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수석은 일단 희귀해야 한다. 무지한 자는 모양이 괴상하면 희귀할 것이라 짐작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괴상한 것은 매우 흔하다. 오히려 평범한 것이 희귀하다.
수석이 되려면 일단 돌이 단단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다. 둘 째는 색깔이 싫증나지 않는 색깔(주로 광택있는 검은색)이어야 한다. 셋째가 형상이 특이해야 한다.
수석을 모르는 사람은 우선 모양이 괴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양이 괴상하면 돌이 무르다. 무른 돌은 광택이 죽어 싫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괴상한 돌은 하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돌은 검고 둥글둥글한 호박돌에 희미한 산봉우리 두엇 가운데 하얀 폭포 하나면 심석이 되고 오른쪽 귀퉁이에 조각달 하나 뜨면 천만원 짜리고 아랫쪽에 초가집 하나면 1억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삐죽삐죽하게 솟아나 산봉우리나 바위를 그린 산수경석이 되고 더 하찮은 것이 동물이나 물건을 닮은 물형석이고 가장 낮은 것이 꽃무늬있는 문양석이다.
가장 평범한 것에 가장 희귀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단단한 돌이 아니면 안된다. 단단해서는 괴상할 수 없다. 괴상해서는 희귀할 수 없다. 그것을 알려면 산하를 오래 헤메이어야 한다.
가치없는 돌은 언뜻 멋있어 보이지만 가만이 들여다 보면 인간의 손이 갈수록 더 나아질 것 처럼 보인다. 문양석이라면 좀 깍아내고 좀 닦아서 손이 가게 마련이다.
왜 그 돌이 가치있는가? 인간의 손길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돌 멋지지만 조금 더 다듬으면 더 멋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돌이면 가치없다.
왜 골동은 작은 한귀가 나가도 사금파리가 되는가? 한번 허용한 인간의 손길은 두 번 허용하기 때문이다. 한 귀가 나가도 된다면 두 귀가 나가도 역시 되며 그렇다면 누가 애지중지 하겠는가?
심미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문화라는 것의 본질이다. 문화는 무언의 약속이며 각자의 심미안들이 더해져서 이루어진다. 소박한 것은 자랑이 아니다. 지성은 문화다. 문화는 지극한 것을 추구한다. 지성은 항상 극점에 선다.
문화(文華) 그리고 혜안(慧眼) 또 관조(觀照)
[문화(文化)는 문화(文華)다]
수석이나 골동을 보면 심미안이 길러진다. 가치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알아보는 혜안을 갖게 된다. 그것이 수석과 골동의 사회에 기여함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보통사람들이 대부분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은 가치없다. 소박해서는 뒷산에 흔한 춘란 달마압종호가 왜 이천만원을 호가했는지 알수없다.
[독서인의 교양]
책을 읽는 것은 재미를 얻기 위해서여서 안된다. 사회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바른 안목을 갖기 위해서다. 재미를 얻을 양이면 영화를 보든지 만화를 볼일이지 책은 뭣하러 읽는가?
지성은 인간의 영역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한때 괴짜로 불리지 않았던 지성은 없다. 끝까지 괴짜로 남았던 지성도 없다. 보석은 돌 사이에 섞여 있지만 돌을 벗어나서 비로소 보석이 된다.
지성이란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거기 있음으로서 비교하여 군자와 소인을 가름하는 잣대가 되어지는 자를 일컬음이다.
널리 읽히는 좋은 책을 쓰고, 유익한 지식을 발견하고, 위대한 업적을 쌓아서 지성이 아니라 역사의 순간에 역사의 현장을 지켜 조금도 굽히지 않아서 지성이 된다.
[선행]
선행을 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어디서 나오는 돈인가? 부자가 선행을 한답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선행이 되는가? 모든 돈은 결국 자연에서 나온다.
돈은 자연의 것이며 신으로부터 빌린 것이다. 그대의 선행이 본래 신의 것인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한 격이 되지 않는가? 가장 훌륭한 선행은 신의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사업에 재투자하여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고로 선행을 한 자는 결국 타인의 것을 혹은 공공의 것을 자기 광내는 데 사용한 횡령범이다. 그대가 거지에게 주는 한푼은 신의 것을 임의로 비효율적인 곳에 내버리는 악행이 된다.
가장 좋은 선행은 자기완성이다. 그것이 신의 것을 가장 유효하게 사용한 셈이 되며 세상에 대한 가장 큰 기여다.
[위하여인가? 의하여인가?]
지성이란 타인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므로서 타인에 의해 유익해지는 자이다.
[왕후(王侯)의 반, 걸인의 찬]
왕후장상의 삶이 걸인의 삶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나의 몇가지 슬픔]
정월 초하룻날 지지배가
첫 손님으로 방문하면 재수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지지배는 설날 오전 내내 집밖출입을 못하였다.
이런 말은 우리 할부지들이
쓰잘데기 없이 지어낸 성차별 습속이 아니겠는가?
허나 취임 첫날부터 신정모라양 워드방에 입방정 떠는 꼴을
보아하니 [옛말 하나 안그르군] 아으 다롱디리.
2월 25일은 역사가 새로 시작되는 날.
그 하늘이 유달리 파랗고 높아서 좋았다.
대통령은 하늘이 내는 것이다.
오늘 우리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자.
한나라당의 오바질까지도 외국손님을 의식한
점잖은 행동으로 긍정 해석해 주자.
그런 날이 아닌가?
뭐 꼭 김종필일 이유는 없다.
박태준도 좋고 김근태도 좋은데 생각하면 인생만사 새옹지마
궂은 일이 굴러 복이 되기도 하는 법.
한나라당이 되려 고맙다.
우리 조급증 아닐까? 조급하여 원칙을 잊은건 아닐까?
IMF쇼크에 흔들리지 말고 진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새롭게 출발하는데 작은 약점이라도 있다면 비켜가는게
어떤가? 간단히 김종필이 용단을 내리는 방법도 있다.
[새정부에 바라는 것]
김대중정부의 고마운 점은
국민들의 사람보는 안목을 높여놓은 것이다.
이제 섣불리 대통령 하겠다고 설치지 않는게 좋다.
까짓 돌두환 물태우도 하는데 나라서 어쩌리 하고
어중이 떠중이들이 나올순 없겠다. 김대중 수준에 맞추기다.
이제 집에 3만권의 장서가 없거든 한달에 30권 읽지 않거든 대 통령 나올 생각말라. 그것만으로 성공이다. 더 기대하지 말자.
[필요한 것은 철학]
우리 고급언어를 쓰자.
투쟁, 대결, 일전불사, 날치기, 강행.
이런 말을 더 들어야 할것인가?
국민의 정부는 인권, 존엄, 전망, 역사, 협력, 대화, 존중, 상식의
좋은 말을 써주면 고맙겠다.
[좋은 언어가 좋은 행동을 낳는다]
시오노 나나미 재작년 하고도 재재작년 이야긴데 뒤늦게 남들 다읽은 책을 소개하는가 하고 떠벌이면 또 남자가 그따위니 장가를 못가지 하는 소리가 나올법 하여 근지러운 입을 누르고 보자.
근대해전사도 좋고 시오노 나나미도 좋다. 그러나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을 읽는 것이라는 것을. 핵심 밑줄 쫙~!
나나미 보다 나나미의 사상이 아름답다. 나나미식 영웅주의가 아름답다. 요는 나나미주의와 구름주의가 상반된다는 데 있다. 나나미는 인류역사상 가장 완벽한 인간(카이사르와 김대중)중의 하나였던 카이사르를 변명하기 위하여, 오로지 이 한명을 위하여 장대한 이탈리아 시리즈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먼저 나나미의 인간탐구대상 1호였던 마키아 벨리와 마키아 벨리의 연구대상 1호였던 체자레 보르자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나나미의 [내친구 마키아벨리]와 [물의 도시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
나나미는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초점은 인간에 맞추어져 있다. 역사의 인간은 영웅이다. 그러나 그 영웅을 필요로 한 시대적 배경과 영웅을 영웅으로 만든 인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가 문학에 가닿고 문학이 철학에 가닿는 것이다.
[전쟁은 역사/이며 영웅은 문학/이며 인간은 철학/이다.]
음모와 독약의 군주 체자레 보르자는 조조보다 백배 조조같은 자고 마키아벨리는 그 조조같은 체자레 보르자에게 술책을 건의한 자이며 나나미는 악마성의 전형 체자레보르자의 끝에서 카이사르를 만난다. 왜? 거기 무엇이 있기에?
체자레 보르자는 실패한 카이사르이며 카이사르는 성공한 마키아벨리스트이다. 나는 거기서 김대중을 본다. 나나미는 체자레 보르자를 오해된 영웅으로 묘사한다. 김대중이 그런 사람이다.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나 징기스칸은 과대포장된 영웅이며 박정희가 그런 사람이다. 체자레 보르자나 조조, 카이사르, 김대중은 오해된 영웅이며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매력에 빠져드는 인간이다.
영웅에 앞서 인간이다. 인간이었으므로 오히려 영웅으로 완성된다. 체자레 보르자는 정적을 믿고 교황자리에 안혔다가 배신당했다. 카이사르는 간단히 없애버리면 될 원로원을 끝까지 믿다가 죽었다. 거기서 인간을 만난다.
나폴레옹, 징기스칸, 알렉산더 같은 영웅들은 정적들은 간단히 죽여 없애버린다. 고로 비난받지 않는다. 깔끔하다. 그러나 우리 실패한 영웅들은 인간을 믿고 인간에 의지하다가 배반당한다.
조조가 간단히 유비를 죽여버렸던들 쉽게 영웅이 된다. 한고조 유방은 장량 한신 등을 간단히 죽여버린다. 고로 영웅이 된다. 초패왕 항우는 유방을 살려준다. 고로 비난받는다.
당태종, 이방원 등 정적을 간단히 죽여버린 자는 오히려 박정희처럼 미화되고 역사와 인간 사이에서 번민한 자는 오히려 간웅으로 악당으로 폄하된다. 그것이 역사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잔인한 것, 잔인할수록 미화된다. 약간의 인간애 때문에 번민하면 간웅으로, 악당으로 배척되는 법 김대중의 나쁜 평판은 대개 이같은 인간성 탓이며 박정희의 악마성은 폭로되지 않는다. 왜? 간단히 죽여버려 증거가 안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