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2760 vote 0 2002.09.06 (12:31:17)

기독교와 불교사상

학교 때 피천득(皮千得)의 인연(因緣)을 배웠으리라. 잘난 척 하는 국어선생은 이때다 싶었는지 안하던 짓을 하는 것이었다. (국어교사들 잘난척하는 것은 알아조야 된다. 국어선생 둘이 워낙 폼들을 재길래 역사맡은 우리 담임보다 스물살은 연배인줄 알았는데 나중보니 같은 나이)
"에헴 인연이 무엇인고?"
한사람 한사람 짚어가며 질문을 해대는데 그 어느 답변도 마뜩찮다는 듯이 잔뜩 인상을 쓰고 분위기를 험악하게 가져가는 것이었다. 기어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과학적으로 답변하는 버릇이 있다.
"인연은 불교용어로서 불교에서는 모든 일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원인이 인연입니다."
흡족한 답변은 못되지만 원채 말을 못하는 버릇을 가진 나로서는 그 학년에 올라온 후 가장 길게 말한 셈이 되므로 자족할만 했다. 선생은 흠칫하고 질문공세를 그만두었으며 내 뒤로 앉은 녀석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국민학교 3학년때 '꿈이 뭐지?' 하는 질문을 당하고 '꿈은 사람이 밤에 잠을 자다가 ......' 하다가 또 4학년때 자석실험을 하고 '실험결과가 뭐지?' 하는데 '자석과 쇠 사이에 일정한 힘의 방향이....' 하다가 손바닥을 맞은데 비하면 이건 작은 승리에 해당한다.
나는 지금도 그 초등학교 담임선생의 주장에 승복 못한다. 모름지기 언어라는 것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선생의 정답은 '꿈은 생각이다' '자석은 쇠를 잡아당긴다' 라는데 그것은 차라리 시적이며 은유적이다. 생각이 꿈이 되는 과정, 자석이 쇠를 잡아당기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의 고등학교 담임도 스스로 인연을 풀이하기를 '만남과 헤어짐' 하는 정도로 지극히 통속적으로 풀이했는데 승복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꿈(생각), 힘(자석), 인연들은 내 인생에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꿈은 뭘까? 힘은 뭘까? 인연은 뭘까?

언어란 모름지기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언어로 '믿음'과 '사랑'이 있다. 두 어휘를 해금하여 사면과 복권을 시행한 것은 서른살이 넘으면서다. 서른은 내 인생에 주요한 경계였으므로 그 문턱을 넘는 수단으로 두 언어를 해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과학적 인간'에서 '종교적 인간'으로 변모하였다.
'믿음은 틀린 말이다. 믿기 보담은 알아야 한다.' '사랑은 틀린 말이다. 사랑한다 보담은 받아들인다고 해야한다.' 그러나 이제 좀 더 큰 패러다임을 만들고 그리하야 믿음과 사랑을 포용하기로 하였다.
믿음과 사랑에 대한 거부는 논리와 체계, 검증을 목숨으로 아는 과학주의자의 태도에 기인하였으나 또한 야소교혐오증도 작용하였지 싶다. 종교란 것은 거룩한 것인데 야소장이들은 거리에서 신을 팔기 때문에 좀 수준이 낮고 덜떨어진 것처럼 뵈는 것이다.

이제 믿음을 말하려 한다. 도무지 무엇을 믿는가? 믿는다는 것은 뭘 어쩐다는 건가? 성경의 어느 페이지를 봐도 거기에 불신 만이 가득하다. 찌르르 하고 전기가 오는 데는 창세기 몇 페이지 뿐, 진정한 것이라면 굳이 약속하고 증언할 필요가 없다. 난무하는 증언의 량에 비례하여, 약장수가 거듭 다짐할수록 불신은 깊어가는 것이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다. 그러므로 부담이 없다. 그 허다한 언어에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방편이라고 변명한다. 즉 기독교는 성경의 단 한 구절이라도 거짓임이 판명되면 전체가 거짓이 되지만 불교는 그런거 없다.
불교는 초등반, 중등반, 고등반이 있어서 초등반은 법화경만 배워가고 중등반은 금강경까지 배워가고 고등반은 화엄경도 배운다. 그래도 답이 안나오면 그때는 스스로 깨쳐야 한다. 결국 최종 보증은 경전이 아닌 자기자신이다.

인간이 있고 그 인간에게 사랑(기독교)과 자비(불교)가 있다. 그 근거로서 하느님(기독교)과 부처님(불교)이 있다. 양자를 연결하는 가교로서 믿음(기독교)과 깨달음(불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는 통합반이고 불교는 월반제라는 거 뿐, 본질은 같다.
사랑과 자비를 비교하면 기독교가 더 실천적이지만 강요되는 기분이 있다. 하느님과 부처님을 비교하면 부처님이 더 모호하다. 여기까지는 기독교가 낫다. 불교의 우월성은 믿음과 깨달음의 차이다. 믿음에서 인간의 위치는 종속적이다. 그저 믿어라고 윽박지른다. 믿어지지 않는데 그 초등학교 담임처럼 우기는 것이다.
깨달음의 매력은 단계가 있고 그 진행과정에서 인간의 참여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에 인간의 역할은 배제되어 있으므로 심판의 날 인간 김동렬을 믿음을 체크해 보고 점수가 55점으로 나왔을 때 구제할지의 여부는 신의 입맛에 달려있다.
'으음 천국도 만원인데' 이래되면 지옥행이다. '천국이 널널한데' 앗싸 구원이다. 구원여부가 지극히 비합리적인 것이다. 나의 믿음점수 55점으로 천국행도 지옥행도 확신이 안된다. 원래 60점 미만이 낙제지만 영어 수학은 기본점수를 주는 법이니까 믿고 처분만 기다릴 밖에.
깨달음의 점수는 부처님이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채점한다. 구름의 업보론은 법화경 강론이고 이건 초딩과목이다. 금강경으로 가면 업보도 없고 업보가 다함도 없다. 제법 중등이 된다. 화엄세계는 시험 치루는 것이 아니고 작품평가 하는 과목이다. 문제를 내주고 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품을 맹글고 심사평으로 점수를 주는 것이 화엄의 매력이다. 미술전람회 처럼 정답은 없으나 우열은 있다.
그 과정에 인간이 참여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간의 종교이다. 기독교가 신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의 종교인데 비해.


2. 행복은 객관식이잖아요

구름을 위한 화엄경 이야기.

법화경이나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본질은 같다. 단지 공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불교란 결국 하나다.

시험에 비교한다면
법화경은 사지선다형이다. 악업을 쌓으면 무슨지옥에 가고 선업을 쌓으면 무슨 극락에 가고.
금강경은 주관식 문제다. 문제풀이 과정을 바로 쓰면 답이 틀려도 점수를 주는 수학문제와 같다.
화엄경은 작품을 보고 채점하는 미술시험과 같다. 맞는 것도 틀리는 것도 없다. 논술시험과도 같다. 정답은 없으나 평가는 된다.

인생은 결국 화엄경과 같다. 완전히 맞는 것도 완전히 틀리는 것도 없다. 극락도 지옥도 없다. 인생을 알뜰하게 살면 그것이 곧 극락이요 어리석게 살면 그것이 곧 지옥이다.
법화경은 석가가 중생들에게 한 말이요 금강경은 석가가 제자들과 함께 토론한 것이요 화엄경은 석가가 내준 숙제를 제자들이 레포트로 제출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어렵다. 시작이 어려운 것은 그 핵심과 상관없는 주변적인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집을 지으려면 집짓기 실력과 상관없이 좋은 집터부터 골라야 한다. 명당자리가 되는지 판별함은 물론 자녀교육을 위해 학군도 알아봐야하고 혹 우범지대인지 공해없이 쾌적한 환경인지도 살펴야 하고 건축규제가 있는지 행정도 알아봐야 한다. 이것은 다 능한 목수의 실력과 상관없는 일이다. 만물박사가 되어야 한다. 아 어찌 철학이 아닐수 있으랴. 이것이 화엄경이다.

과정이라고 쉽지는 않다. 과정은 으례 그렇듯이 상대적이며 역설적인 운동공간이 된다. 은행돈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 돈을 어디부터 우선 사용해야 할까? 기초를 튼튼히 하려거든 마감이 부실해지고 마감을 화려하게 하다가는 기초가 불안해진다. 100원을 아끼려다 비가 새는 쪽을 당할까? 천원을 아끼려다 집이 무너지는 우를 범할까? 상대적이며 역설적인 우선순위의 문제에 부닥친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금강경이다.

가장 손쉬운 것은 다 지어놓은 집을 사는 것이다. 그저 마음에 딱 드는 집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이왕이면 예쁜게 좋고 이왕이면 화려한게 좋다. 그 속이 비었는지 알찬지는 공사과정을 지켜보지 않앗으니 알 수 없는 일이고. 법화경의 세계다.

석가는 초전법륜에서 실패했다. 지나치게 높았던 난이도 탓이다. 그리하여 쉽게 풀어서 말한 것이 법화경이다. 법화경의 상당부분은 석가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인도사상을 수용한 절충과 타협이다.
법화경의 사물을 보는 안목은 이미 다 지어놓은 집을 고르듯 결과를 수집하는 시점이다. 이것은 가장 비철학적인 것이며 수준낮은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늘 부자가 좋은 집을 고르듯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은 불교의 깊은 경지에 대해 제자들과 함께 토론한 것이다. 깊이 들어가면 부닥치는 문제는 선택권이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없이 반씩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성의 세계, 색즉시공의 세계, 공즉시색의 세계이다. 역설의 세계, 불확정성의 세계, 양자역학의 세계이다.
이런 판단을 내리면 원하는 것을 얻을수는 있지만 대신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딜렘마의 세계이다. 그것은 항상 과정에서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시간과 공간의 치환문제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조금씩 해치울 것인가 짧은 시간에 단박 해치울까의 문제이다. 시간을 많이 들이다가는 하염이 없고 단박에 해치우려니 힘이 저축되지 않았다. 키워서 먹으려니 사료값이 아깝고 지금 먹으려니 간에 기별도 안간다. 아으 색즉시공이다. 색은 맞닥드린 공간의 경계, 공은 힘이 비축되는 시간의 경계, 양자는 서로 호환하며 인간을 고민하게 한다.

화엄경은 더 깊이 들어간다.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이 우주를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이다. 곧 시작의 문제이다. 시작이 반인데 시작할 수가 없다. 색즉시공하는 이론적 지식도 일단 시험을 치루기로 시작해야 답이 되는 것이지 애초에 시험자격이 없으니 끼워주지도 않는다. 아으 우리는 이 우주의 한 식구로 그 구성원으로 자격을 과연 인정받은 것일까? 이 지구는 너의 별인가? 그러하다면 그것이 풀밭에 노니는 사슴과 틈새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에게도 그러한가?
내가 천하를 받아들이면 천하가 나의 것이 되고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는 사라진다. 내가 낙관을 찍으면 그림은 작품이 되고 내가 이제 찢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으 삶이라는 것은 고흐가 페인트를 휘두르는 것과 같아서 그 값어치는 순수히 너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승인하는 것은 순수히 그 그림을 필요로 하는 우주다. 도공이 항아리를 깨는 것처럼 네가 깨어지고서야 비로소 네가 이루어지리라.
그리하여 네가 이 세상에 너의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하여 네 낙관을 찍으려는 찰나 신은 너라는 작품에 신의 낙관을 찍는 법이거늘 어찌 서럽지 않을까? 도공이 아끼는 작품을 부수듯 너는 너의 삶을 부술수 있되 동시에 신도 그의 작품을 내려치노라. 어찌 눈물이 아닌가? 진정한 것을 위하여는 희생도 아끼지 않으나.
인생은 너의 작품, 너는 신의 작품. 신 앞에서 너는 자유로우나 그것은 살을 찢을듯한 비참.

법화경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 금강경은 인간에게 지혜를 준다. 화엄경은 인간에게 인생을 준다. 행복은 인간의 촉감에서 맴돌고 지혜는 장사치에게 기쁨을 주지만 아으 인생은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완성되거나 무너지거나 할 뿐 아무 주는 것이 없다. 단지 너의 작품에 타인의 낙관을 찍을수 없을 뿐인 것을. 너는 너의 인생에서 너의 낙관을 찾았는가?

공부방법의 차이가 경전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일 뿐 불법은 하나다.
행복은 객관식, 깨달음은 주관식, 인생은 논술식 시험이다.

* * * * *

종교와 철학의 차이.

구름은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나는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입장은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리는 거고 철학적 입장은 하나가 틀려도 전체적으로 대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종교화 하였다는 것은 무오류주의로서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리는 종교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틀려도 대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천년 후에도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은 여전히 하나의 문제해결방식으로 주목된다.

기독교는 종교다. 철학으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불교는 더 철학이다. 그 교리가 옳건 그르건 간에 사유의 한 방식으로서 불교주의적 접근법은 천년 후에도 살아남는다. 아마 기독교보다는 불교가 오래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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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대로 할까요?

금방에 도둑이 들어 쇼룸에 있는 금붙이를 털어 갔다.
도난방지장치로 연결된 전선이 잘려지자 경비용역업자의 사무실에 비상벨이 울려졌으나 이른 아침이라 절도범들의 출몰시간이 지났다고 여긴 경비업체는 단순 오작동으로 판단하고 출동하지 않았다.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피고가 된 경비업체는 금붙이가 든 금고에 대해서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고 재판부는 통념상 안전 자체를 계약한 걸로 봐서 70퍼센트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런 유형의 사건은 많다. 약관이나 계약서의 조문으로 따지면 계약자에게 불리한 계약이다. 여기서 두가지 논리가 등장한다.

1. 법대로 하자파
2. 인정대로 하자파.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악한 유태인 샤일록은 가슴살 한뭉터기를 베어달라고 요구했고 재판관은 피는 한방울도 가져가지 말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피도 살에 포함되니까.

계약 자체에 하자가 있다. 목숨을 가져가기로는 계약하지 않았으므로 피고는 가슴살 1키로에 대한 보관증을 써주고 죽으면 시체에서 떼어가도록 했어야 명판결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후진사회일수록 문리적 해석에 의거한 법대로파가 우세하다. 그러나 선진사회에서는 인정대로 하자파가 득세한다. 과연 법대로 해야하는가? 인정대로 해야하는가?

법은 계약이고 계약은 신성한 것이므로 지켜져야 하는가? 아니면 법은 사회공유재산으로서의 법익이고 법익은 사회구성원 각자에게 공평하게 나눠가져져야 하는가?


2. 법은 법인가?

법대로? 인정대로?

법은 신성한 계약이고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 보수적 판결이고 법은 국토나 환경처럼 공유재산이며 공평하게 나눠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진보적 판결이다.

법대로의 논리는 근거가 없다. 계약이니 무조건 지켜져야 하며 계약은 신성하다는 사상이다. 이건 억지다. 뭐든 신성하다는 말이 나오면 억지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므로.

법은 사회전체의 신용이며 공익이다. 국립공원 같은 공유재산이다. 사회의 발달은 법의 발달로 나타나며 이는 국가발전과 같은 것이다. 법은 인정이다. 법은 눈물이며 법은 사랑이다.

잘못된 계약은 인정 안하면 그만이다. 사회가 법에 우선한다. 법이 안통하면 전쟁이다. 계약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법이 존재하는 것은 계약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익하기 때문이다. 내게 유익하지 않은 법을 무시할 권리가 내게 있다. 이게 진보적 사고.

옛날에는 법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조건 법과 계약을 지키면 법이 죽는 현상이 발생한다. 사회가 계약을 아예 안하는 것이다. 아무도 남을 위해 보증을 안서려 하고 거래를 안하려 하며 아무도 도장을 안찍으려 한다.

즉 어떤 위대한 법이든 만장일치의 계약이든 법 자체를 침해하면 안되는 것이다. 법만능주의는 법을 침해한다. 사람들이 법으로부터 도피하고 계약을 거부하며 도장을 안찍고 증언을 거부한다. 먼저 법이 죽는다.
법의 최우선 논리는 법 자체를 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남을 위하여 보증서고 계약하며 도장찍고 증언하기를 즐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법에 인정이 있어야 한다.

3. 악법은 법인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

계약이니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천만에. 소크라테스는 악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판결한 아테네 시민의 의사를 존중한 것이다.
그 법의 주인인 사회를 신용한 것이지 법을 신용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법 위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초법.

다시 금방으로 돌아가자. 경비용역회사와 금방 주인 중 누구에게 책임이 물어져야 하는가? 계약문서대로 하자고? 천만에 그건 법이 아니야. 공갈이지.

선진국은 배심원이 판결한다. 법대로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대로 판결한다. 그러므로 선진국이다. 왜 법보다 인정이 더 중하냐고?

금방주인은 대책없다. 대책을 세울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문제든 해결책을 제시하고 답을 낼수 있는 자는 조금이라도 위에 있는 자다.

법조문이나 계약이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더 사태를 타개할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가를 판단한다. 어떤 문제든 해결능력이 있는 자가 책임을 지는것이다.

이 문제를 워드방번개 찬성파와 반대파의 생각과 관련해 생각해 보자. 반대파는 벙개파들이 사사로이 뭉쳐 협잡했다고 주장하고 벙개파는 친목을 도모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느 것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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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근거는 계약이 아니라 합리성이다. 계약은 판결의 자료일 뿐, 판결에서 계약이 존중되는 것은 계약이 만능이고 신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시적인 증거로 채택될수 있기 때문이다.

판결은 다른 판결에 영향을 미치므로 판결을 의미있게 하기 위하여판결에 신용을 부여해야 하고 계약존중은 그 하나의 방법이 된다. 판결의 효력을 성립시키는 수단이다. 새로운 판례가 유효하게 효력을 확보할 방법이 있다면 계약이나 과거의 판례는 무시할 수 있다.

법의 본질은 사회 자체이며 그 사회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신용이며 그 신용이 담보하는 안정성이다. 계약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한가지 양상일 뿐. 사회가 존재하며 사회는 신용이라는 공익을 가지고 있고 그 공익은 계약의 안정성을 담보한다.

이는 사회에 의해 담보되지 않는 계약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전쟁, 혁명을 들수 있다. 전쟁으로 계약을 파기해 버리면 파기된다.

지금껏 계약이야 말로 법의 최종근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특히 보수적인 사고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계약은 언론이나 방송, 통신이 없던 봉건시절 사회적 신용과 권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만이 의미있다.

사회발달에 따라 매스컴이 발달하였다. 이에 사회 구성원 다수가 유익하다고 판단하면 그것이 계약을 대신한다. 물론 계약을 깨는 그 자체로서 해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안별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의 최종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론적 필연에 근거한 합리성이다. 무엇이 합리성인가?
합리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정해진 법칙이다.

강자와 약자가 계약을 했는데 판결이 약자를 추궁한다면 약자는 죽는 것 외에 대책이 없다. 답이 없는 것이다. 고로 판결은 강자를 추궁해야 한다. 왜냐면 강자에게는 항상 선택권이 있으므로 잃은 만큼 다른 데서 보충할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와 개인의 소송에서 회사가 지면 회사는 물건 값을 인상하여 메꾸면 된다. 개인이 지면 죽어야 된다. 이 경우 회사가 지는 걸로 판결이 나야한다. 그것이 법칙. 위 금방사건에서도 마찬가지.

5. 해결 가능한 쪽으로 판결한다.

공동소유의 샘물이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아기기저귀를 빨았다. 한 사람이 그러니까 너도나도 그랬다. 물은 오염되고 결국 아무도 그 물을 못 쓰게 되었다.

여기서 그 물에 기저귀를 빨지 말자고 합의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계약을 하고 처벌할수도 있다. 그러나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다른데 샘을 하나 더 파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발전은 샘을 지키자는 도덕과 계약, 그리고 계약존중보다 아쉬운 사람이 샘을 하나 더 파는 노력에 의해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샘을 지키는 도덕은 미개인들이 풍속을 고집하는 악습일 뿐이다.

뭐든 아쉬운 사람이 해야 한다. 연장자라고 안하고, 양반이라고 안하고 여자라고 안하고 이런 도덕이 자꾸 정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남이 뭘 한다는데 못마땅해도 방해하면 안된다. 시장바닥에서 시끄럽다고 장사못하게 상인을 내쫓으면 안된다. 뭐든 계약과 약속을 지키는 쪽으로 하면 망하고 일을 풀어나가는 순리대로 하면 흥한다.

다른 산택의 여지가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기존의 것을 존중해야 한다. 즉 어떤 사람이 기저귀를 굳이 빨겠다면 말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논의를 워드방 벙개에 댈 때 뭔가 어떤 짓을 하겠다는 것을 남이 말려서는 안된다. 그 해놓은 짓으로 피해가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남이 뭔가를 해서 피해가 발생하면 남더라 하지말라고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워드방 도배족들이 있다. 그들의 폐해가 심하다면 그들(김희선 나카타 구멍교주 레감자 등) 더러 도배하지 말라고 촉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맘대로 도배하게 놔두고 도배가 불가능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

음란물을 꼭 보겠다는 자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을 훈계하고 꾸짖을 것이 아니라 포르노전용관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해결은 항상 그런식으로 가야한다. 그것이 합리성이다. 둑을 막는 것이 아니라 물꼬를 터는 식으로 간다. 법(法)은 물(水)이 가는(去) 것, 둑을 막는 것이 공산주의고 물꼬를 터는 것이 자본주의다.

6. 법과 인간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법익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법익의 크기는 사회발전에 비례한다. 외국인에겐 법익이 상대적으로 적다. 법은 그 법익을 보호하고 또 법 그 자체를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양자간의 계약엔 항상 주도권을 쥔 쪽과 쥐지 못하는 쪽이 있다. 주도권을 쥔쪽은 선택의 여지가 있어 여기서 손실을 보면 다른 데서 보충할수 있는 사람이다.

경비용역업체는 7000만원을 배상하는 대신 다른 데서 경비료를 올려 채우면 된다. 금방주인은 방법이 없다. 이 경우 반드시 업체에 책임이 추궁된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경우 노동자는 해고를 당하면 대책이 없다. 사용자는 기술을 개발하든가 경영을 잘하던가 대책을 세우면 된다. 고로 사용자에게 항상 책임이 물어져야 된다.

자본주의는 항상 칼자루를 쥔 쪽에 책임을 물으므로서 그들이 살기 위하여 대책을 세우다보니까 발전하는 것이다. 그들이 배짱 편하면 나라가 망한다. 회사 쪽에 책임을 물어야 회사가 잃은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결과로 경제가 발전한다.

그러므로 판결은 항상 계약대로 공정하게 약속을 지키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쪽에 책임을 묻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권한이 있는 쪽에 책임이 있다. 이것이 진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법철학이다.

법은 공정하게 심판해야한다는 것은 희랍시대의 법철학이다.
법은 문제를 풀어가는 쪽으로 심판한다는 것이 진보주의다.

계약대로 심판하여 약자에게, 또는 강자와 약자에게 공평하게 책임을 물으면 약자는 죽는다. 약자가 죽으면 사회가 죽고 사회가 죽으면 법이 죽는다. 법은 맨 먼저 법 자신을 보호한다.

때문에 법은 항상 힘이 있는 자를 괴롭힌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무조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강자 위주의 우리나라 법논리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 말 한마디만은 꼭 해야 쓰겠다.

강기훈씨의 유서대필 사건이다. 그때부터 이미
국과수의 김형영이 허위감정을 했다고 밝혀졌는데
조선일보가 앞장선 안기부의 교묘한 언론플레이로
흐리멍텅하게 넘어갔다.

최근 그 김형영이 또 뇌물사건으로 조사받는 모양이다.
그대 야비한 언론의 행태도 그렇지만 이땅의 대다수
지식인들의 침묵을 나는 참을수 없다.

알만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이다. 남의 일인 것처럼..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안기부같은 권력이 개입하여
특정인을 희생시키는 배미숙님 사건 같은 경우는 유괴범
사건처럼 공분을 싸야 마땅한데도 괴이하게 이나라에서만
어물어물 넘어가는 것이다.

영국의 드레퓌스 사건의 경우 말로 같은 지성이 있어
시대의 양심을 변호하였다. 그런데 이나라는 도무지
지성이 없는 것이다. 특히 배운 놈들일수록 뻔한
악당짓을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처죽여야 하는데가 조선일보다. 그때 한해
40여명이 분신투신하였다. 그중 한 이혼녀도 있었는데
그때 조선일보 논설과 모 칼럼쟁이가 했던 야비하기
짝이없는 뻔뻔스런 주장..(그 천하의 악당은 지금도
큰소리 치고 산다)..노태우정권의 야만을 고발하기 위한
의로운 죽음을 미친년의 지랄로 규정한 사악한 조선일보

다른건 몰라도 권력을 가지고 특정 개인을 죽이는 안기부,
국과수, 조선일보 등은 지성이 나서야만 막을수 있다.
우매한 대중은 뭐가 참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 있고 상대가 없는 게임이 있다.
상대가 없는 게임의 경우 대중이 나서고 지성이 나서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유괴범 ..이것은 전 국민의 적이다.
마찬가지로 악랄한 것이 문귀동, 김형영, 안기부
자기얼굴을 가리고 검은 배후에 숨어서 다수가 아닌
한 개인을 희생시키는 음모자들..이런건 인권문제이므로
유괴범과 같이 생각되어야 한다.

얼굴없는 적과 싸울 때 국민이 일어서야 한다.
근데 이나라 국민은 침묵한다. 더욱 배운놈이 침묵한다.
특히 언론, 그중에서도 조선일보는 죽여야 한다.

강기훈의 유서대필사건이나 배미숙님 사건은
나중에라도 꼭 영화로 만들어져야 한다. 인권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그나라는 죽는다.

사안의 중대성, 우선순위가 있다.
정리해고나 이런 것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지만
얼굴없는 적과 싸우는 인권문제는 전체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양심수 문제도 마찬가지....
다른건 몰라도 언론에 있어서 전노정권의 부역자들
한겨레에서 보도한
안기부에서 관리한다는 친여일간지 네군데
칼럼쟁이들...야들은 돌로 처죽여야 된다.

권영빈, 유근일, 김대중, 또 누고?
갸들은 안기부에서 관리하는 칼럼쟁이 아닌가?




워드방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

민총이 파업한다길레 "이래서 안되는데"하며 걱정하면서도
내심으론 한바탕 해주기를 바래었다. 다만 굵고 짧게.

내가 차라리 파업을 기대한 것은
지도부의 약화로 지리멸렬한 지금의 형편이 안되어보였기
때문이다.

파업은 정리해고를 막는 눈앞의 님비주의보다
"노동의 정치세력화,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대명제를 위하여 무엇보다

리더쉽, 단결된 모습, 내적 역량의 강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듯이
파업을 통하여 적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결된 조직과 좋은 지도부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왕지사 단병호가 전면에 나섰으니
그를 중심으로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그가 머리가 비지 않은, 맹목적 강성이 아닌
유연하고 합리적인 인물이기를 기대할 뿐이다.

난 머리가 빈 좌파가 아니다.
그들을 경멸하면서 그들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더 멀리보고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시대의 지성/처럼
보여지길 원한다.

그러나 때때로 수레바퀴나 인자무적 같은 좌파들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해주기를 원한다.
그런 면에서 수레바퀴의 김대중편애는 맘에 들지 않는다.

파업을 하는데는 이미 물건너간 정리해고를 막는
/눈앞의 집단이기주의/보다 파업을 하므로서 단결된 모습을 보이고 노조 내부에서 검증되지 않는 배석법체제를 종식하고
실세 중심으로 지도부를 재편하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수레바퀴는 그런 점을 '파업의 가치'를 모르는 다수에게 설명 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파업을 바라지 않았다. 왜?
실패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나는 조사정 대타협의 전에 100만 이상의 노동자가 참가하는
하루짜리 전국적인 파업을 하고 김대중과 일대일 담판으로
빅딜을 하는 그런 그림을 기대했다. 백기투항하고 도장찍고 뒤늦게 무슨 파업인가 얼어죽을.

파업은 일시적으로 외국 투자가를 주저하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조급하지 말자.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도 있잖은가?/

조급해 하지 말고 더 멀리 보고 더 큰 그림을 그리자.
민주노총은 기죽지 말고 추하지 말고
새지도부를 중심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달라.



조선일보를 죽여야 하는 100가지 이유.

통신인들이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리해고를 막아야 하는가? 금을 모아야 하는가?
부도난 나라를 구해야 하는 것인가?
아닐세, 그런 문제는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네.

노동자들에게, 정치가들에게 맞겨두고
우리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 더 멀리보고 더 크게 보고
더 멋진 꿈을 꾸며 더 큰 내일을 격려해야 한다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
지금 왜 조선일보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우리는 조선일보 말살에 나서야 하는가?

남아공을 보세,
진실/화해 위원회일세. 우리는 진정으로 화해해야 한다네.
그 화해는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하네.
우리는 모두 용서해야 한다네. 우리는 조선일보도 유근일이 도 방우영이도 이도형이도 빠콩도 용서해야 한다네.
그러나 진실없이 용서가 가능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과 정의.
그것은 도리어 사랑과 용서 화해 해원상생을 위해서이네.

진실/화해 위원회를 설치하라.
이승만 이후 모든 시국사건을 재조사하라.
진실화해 위원회에 증언하는 부역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증언하지 않는 부역자는 가중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라.

박정희 이후 분신자살한 모든 영령들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공원을 건설하라. 유족들을 보훈대상자로 선정하라.
부역자들에게 제공된 모든 서훈과 특혜을 박탈하라.
교과서를 새로 서라.

이승만 이후 정치적 이유로 박해받은 모든 영령들에게
명예회복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라. 민주영령들을 위한
제단을 건설하라.

우리가 나서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논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모든 악에 총대를 맨 조선일보부터 처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실과 정의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의 편에서 한나라당보다 강력한 실세이기 때문이다.



※ 젊은이가 외면하는 신문에는 미래가 없다. ※
젊은이는 조선일보를 싫어한다. 고로 조선은 언젠가는 망한다.
선비는 선비의 방식으로 말한다.

"임어당의 회고---나는 손박사를 존경하면서도 유지를 받들 수 없었거니와 정신적 방랑을 억제할수도 없었지. 나는 육체적인 노력을 싫어했고 정세를 관망한 적도 없었지. 나는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지조차 분간할수 없었어, 나는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할 무슨 말을 한적도 없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지. 나는 냉정하게 초연하게 외교적으로 정치를 논한적도 없었거든"

그러나 임어당은 그렇게 했다. 선비는 마땅히 정세를 관망해야 하고, 전망을 내놓아야 하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분간해야 하고 냉정하고 초연하게 외교적으로 정치를 비평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선비는 그리 밤잠을 설쳐야 한다.

정리해고 노동해방 이런 목소리는 덜 선비적인 것이다. 선비는 인권, 양심, 자유, 정의, 역사, 진실 이런 것을 말해야 한다. 선비란 어떤 목적 (위대한 한국,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을 낮추어 보고 인간의 존엄과 인류의 진보를 높이 보아야 한다.

선비는 발견하는 자이지 발명하는 자가 아니다.
선비는 심판이 되려고 노력하지 선수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런 언어를 얻어 인용한다.
"산에서 사는 사람은 심정적으로는 언제나 산골소년이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산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산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산과 비교할 때 돈, 명예, 정치같은 것은 하찮은 걸로 보이기 마련이다. 고향의 산은 내게 내면의 힘, 그리고 아무도 내게서 뺏을 수 없는 독립심을 주었다."

지성과 교양, 휴머니즘, 인간 이성의 위대성, 역사와 정의 그리고 진실 또 믿음, 이것은 마땅히 선비가 쫓는 정신의 극진이다. 그 반대편에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이 더러운 것이 조선일보다.

이익과 승리, 애국주의, 열등감, 우월의식, 차별의식, 수단과 방법, 목적과 음모, 이것은 조선일보가 추구하는 악의 형편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얼마나 더러운가 하면 [그러나 만델라가 남아공 대통령직에 오를 가능성은 아직 요원하다. ANC의 일부 소장파는 만델라가 너무 온건하다고 불평이다. 증가일로에 있는 흑인 중산층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ANC를 외면하고 있다. 또다른 흑인은 ANC와 경쟁관계인 PAC나 인카타자유당을 지지하고 있다. --리더스 90년 9월호]

-- 홍야님이나 금산님이나 이토이님의 수준은 딱 이수준이다. --

임어당이 말했듯이 /바람이 어느쪽으로 부는지 분간해야 하는 것]은 선비의 임무다. 마땅히 10년 앞을 내다보고 어리석은 민중의 향도일수 있어야 한다. 전망을 제시하고 냉정하고 초연하게 말해야 한다.

그렇다. 선비는 조급해 하지 않으며 10년 앞을 내다보고 대비한다. 또 10년 전의 일을 잊지 않는다. 나는 김형영의 허위증언을 결코 잊지 않으며 문귀동의 행방을 여전히 수색한다.

한국인들은 잘 잊어버리지만 선비는 잊어선 안된다. 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8년전에 한 말을 결코 잊지 않으며 젊은이들에게 말해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보면 바보가 되느니라] 나는 조선일보의 선우휘가 20년 전에 한 말을 결코 잊지 않으며 젊은이들에게 말해준다. [가장 반지성적인 것, 지식인들이 타락할수 있는 모범, 조선일보.]

어떤 사람은 왜 조선일보만 씹느냐고 말한다. 나는 왜 조선일보가 한국의 모든 악을 선도하느냐고 말한다. 경향이나 중앙은 부화뇌동에 불과하다. 그들은 시대가 바뀌니까 잽싸게 수그릴줄 아는 그런 하찮은 존재다. 중앙은 요새 한겨레보다 더 김대중 편이다.










마음님도 강적이다.
난 농담으로 썼는데 농담인줄 번연히 알면서 그렇게 받다니
강적이 아닐수 없다.

주) 강적이란 ....매사에 저의를 두고 엉큼하게시리
상대를 떠보는가 하면 함정을 파는 용의주도한 자 (참조 -- 빠락사전 269페이지 밑에서 세째줄)

※ 안다는 것은 길을 안다는 것이다.
※ 길을 안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상관관계를 안다는 것이다.
※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또 무엇이며
앎과 모름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쳤을 때
당신은 오른쪽으로 비켜야 하는가? 왼쪽으로 비켜야 하는가?
길을 비켜주지 말아야 하는가? 뒤로 물러서야 하는가?

다 몰라도 되지만 만약 상대가 오른쪽으로 비킨다면 당신은 왼쪽으로 비켜줘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왼쪽으로 밀고 오면 당신은 오른쪽으로 비켜가는게 현명하다.

형제여. 실없이 똥고집을 부리고 버텨서지 말라. 꽁무니를 감추고 내빼지도 말거라. 그저 상대방이 오른쪽으로 비키면 왼쪽으로 비켜서라. 아니면 상대를 위해 그대가 먼저 어느 한 방향을 선택해보이는 것도 옳을 일이다.

[마음님께 드리는 잠언]

제목 : 분별과 다감 - "인간이 품을수 있는 훌륭한 이상은 미덕의 표본이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정과 호감을 주는 데 있고 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는데 있다."

제목 : 미학의 발견 - " 어떤 문명이 현학성을 탈피하여 비현학성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단순한 삶과 사고로의 의식적인 회귀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문명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
"인생의 비극을 먼저 깨닫고 인생의 희극을 느끼는 웃음의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현명한 사람일 수 없다. 우리는 웃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울어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깨달음이 나오고 또 깨달음에서 철학가의 웃음, 온정과 관용이 나오는 것이다. 출전 리더스 90.9

[철학이란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그대의 삶 그 자체를 긍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다섯가지는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분별과 다감, 미덕, 눈물 그리고 웃음]이다.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돈생?豚生)

1, 당신은 적어도 바람이 부는 방향을 분간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분별(分別)이다.
(분별없는 자 - 이회창 찍은 넘들..잉가이아임)

2, 당신은 적어도 상대방보다 먼저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다감(多感)이다.
(다감하지 못한 자 - 게으런 자, 경직된 자..가짜는느밈)

3, 경계면에 서라. 중간에 섞이지 말고 맨 가장자리에 위치하라.
극진(極盡)이 미덕(美德)이다.
(미덕이 없는 자..항상 중간에 끼어있는 자..한시만느밈)

4, 역사 앞에서 통곡하지 못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 가슴 밑바닥에서 거룩한 분노가 그대를 존재의 심연으로 침잠하게 하리라.
그것이 무거움이다.
(가벼운 자, 세상에 때처럼 묻어사는 자, 우낀느밈)

5. 눈물 끝에서 웃을수 있다면 그대는 깨친 이다. 최후에는 온 곳으 로 돌아가는 법, 마침내 순수로 돌아가기 위해서 여정이 있다.
그것이 소박(素樸)이다.
(소박에 이르지 못한 자 - 인상쓰고 다니는 자, 덜된느밈)


인생에는 다섯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분별(分別)을 위한 지(知)
다감(多感)을 위한 유(柔)
미덕(美德)을 위한 덕(德)
의식(意識)을 위한 정(情)
깨달음에 의한 박(樸)

박(樸)에 이르는 것이 최종의 목적,
지가 없으면 무식한 늠,
유가 없으면 굳은 늠
덕이 없으면 모자란 늠
정이 없으면 모진 늠
박이 없으면 암것도 아인 늠이다.

그대의 웃음이 어릿광대의 하품이 아니기 위하여
그대는 먼저 울줄 알아야 한다.




선비란 직업이 선비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글쟁이가 글쓰기 위해 설정하는 자기캐릭터이다.

선비가 되라는 말은 글에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이토이님처럼 왔다갔다 하면 일관성이 없는 것,
먼저 좌파든 우파든 하나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다음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접근법이 [세상을 보는 하나의 안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읽는 독자들이 아하
세상에는 이러한 견해와 저러한 견해가 대립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채는 거지
그냥 옳은것만 모범답안만
말하려 하면 뭐가 뭔지 알수없게 되는 것.

어떤 사건을 보고 떠오르는 느낌대로 생각나는대로
써서는 선비의 글이 아니다. 한걸음 물러나 원칙과 견지,
지양과 지향, 전략과 전술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다음다음 상황을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총처럼 파업한다그랬다가 안한다 그랬다가
그장단에 춤추는 격이 된다.
일희일비 하지 말고
하루에 세 번 변하는 정치판의 장단에 춤추지 말고
자기장단, 자기의 안목을 발표하는 것이 선비의 글쓰기 방식.

워드방에 글처럼
인기영합적인 정치 판 장단에 놀아나는 글과는 달라야지비.




그렇다. 글발이란 적어도 논쟁의 형식을 가질때에는 우선 편가르기 부터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게임이며 게임은 논쟁의 게임이다. 곽재 미쳐서 조선일보 처단운운 하는 것이 아니다.

토론실에 [조선일보 폐간운동전개]라는 토론이 개설되어 있다.
그러면 내 글발은 토론체로 들어가는 것. 토론체란 상대방으로부터 반론을 이끌어낼 저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찌르는 소리다.

일단 편부터 가르고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논쟁에 가담하려거든 아무 편에나 붙어라. 토론의 제목이 [언론개혁]의 매끄러움을 버리고 [조선일보 폐간]의 거칠음을 취하는 것은 그래야 조선일보가 눈이라

도 꿈쩍 하지 않을까 하는 충분한 의도를 가진다. 분명한 것은 우리 가 언론개혁의 주장을 가지고 조선일보사 앞에서 백날 데모를 해도 눈도 꿈쩍 않는다는 것이다. 방우영이 족벌일가 화형식을 해야
[밖에 뭔 일이라도 있남?]하고 내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대감댁에 뭔 하소연 할 일이라도 있어서 찾아가면
마당쇠늠이 떠억 막아서서 [왠 잡인이냐? ] 할것이라 그놈의 마당쇠 부터 흠씬 두들겨주는 것이니 오지게 터져야 할 것이 조선일보라.

그렇다면 독재의 마당쇠 조선일보란 늠부터 잡도리 하렸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철학, 지성/의 편에 있는 사람
- 예를 들면 [아스라]님, - 들은 다들 언론에 불만이 많은 것이
다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언론, 방송, 교육, 이런 쪽에 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사고와 관심이
그쪽에 가 있는 이유인거슬.



독재의 마당쇠 조선일보.

내가 제일 미워하는 늠이 유괴범과 사기범이다. 이놈들은 강도, 절도 보다 악질이다. 담을 높이고 빗장을 잠가 막을수 있는 죄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세균처럼 은연중에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타락한 언론이다. 그 중에서도 몇몇 칼럼쟁이들, 김대중, 유근일,
권영빈 이런 악당들은 불의를 위해 밤 잠 안자고 논리를
개발하는 자들이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야들은 아무 생각없다. 항상 길을 여는 것은
조선일보이며 악을 위하여 논리를 개발하는 것도 조선일보다.
미숙님사건 같이 억울한 사연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조선일보요
강기훈 유서대필같이 교묘하게 (김형영의 허위감정은 그때 이미 드 러났으나 독재의 마당쇠 조선일보의 교묘한 여론현혹으로 넘어감)

국민을 상대로 사기치는 것이 조선일보다. 즉 야들은 지능범인 것이 다. 그렇다. 조선일보는 지능범이며 확신범이므로 내가 나서는 것이 다. 악을 저지를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사탄의 오른팔을 자임한다.

악은 그들이 지성(知性)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사기꾼 주제에.
정권이 바뀌었다. 언론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언론은 투표로서 바꿀수 없고 권력으로도 바꿀수 없다.
오로지 돈 만이 그들을 지배할수 있다.

그러므로 주적이 타락한 언론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라고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87년 여름 전북 고창 농민 200명이 삼양사에서 농성을 했다.
*. 삼양사는 재벌 동아일보의 토지회사(다수의 계열사를 거느림)
삼양라면 및 삼양화학과는 무관

동아일보 사장 인촌 김성수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일본인이 개발한 고창 간척지를 해방혼란시절에 슬그머니 먹은 후
이승만의 토지개혁때 뇌물협잡으로 그 광대한 토지를 전국에서 유일 하게 토지개혁에서 빼고 (관료와 협잡하여 황무지로 조작함)

50년간 수천억의 소작료를 빨아갔다.
고창농민들은 동아일보에 처들어가서 똥(人糞)을 사무실 구석구석에
처발랐다. 그러자 동아일보사는 본사를 충정로로 옮겨버렸다.
(똥먹은 신문사를 어찌 쓰나?)

물론 이러한 사건은 신문사끼리의 협잡에 의해 보도되지 않았다.
88년의 어느날 어느신문 하단에 고창농민들이 동아일보사로부터
거꾸로 거액의 소송을 당하고 사과문(광고)을 발표한 것을 보았다.

동아일보는 고창농민의 피를 50년간이나 빨아먹고도
그들을 고발하여 또 돈을 뜯어먹은 것이다.
정의로 말한다면 동아일보부터 폭파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불의를 결코 잊지 않는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아직 이나라에 있다.
그것이 고창농민의 피로 이루어진 동아일보사다.










♧ [초모렁마님께]

나쁜 신문 안보고 좋은 신문 보는 것은 현명한 대응이 되지 못합니다. 쌍방향 통로를 개설하고 끊임없이 감시 비판하므로서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가는게 중요할 뿐이죠.

[조선일보 말살] 캠페인 한다고 말살 되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뜨끔하여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게끔 시위하는 거죠. 저는 지금 중앙일보를 보고 있습니다. 이 신문이 좋아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조만간 다른 신문으로 바꿀거지요.

저는 한때 하루에 일곱 개 이상의 신문을 보았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좀 남아서 말이죠.

아침에 집을 떡 나서서 스포츠서울을 한부 산 다음에 읽으면서 시청쪽으로 가는 겁니다. 덕수궁 지나서 오른쪽에 서울신문사 왼쪽에 조선일보사가 있죠. 염천교 쪽으로 빠지면 중앙일보사가 있고 광화문에 동아일보사가 있습니다. 신문사 벽에 붙여둔 신문만 봐도 벌써 여섯 개 신문을 본 셈이죠.

경희궁터 앞에 경향신문을 붙여둔 데 있고 장충단 공원 앞에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를 붙여놓은데가 있어요. 한국일보사는 경복궁에서 비원쪽으로 가다보면 있는데 넘 멀어서 잘 안가죠. 지하철 내에 남들이 읽다 둔 신문을 집어보기도 하죠.

제가 그 전에 석달동안 문화일보를 보다가 이제 넉달 째 중앙일보를 보는 것은 그 신문들이 알차고 좋아서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일보는 도서나 공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싣고 중앙일보는 섹션화 되어 있습니다. 물론 두 신문이 다 한글 가로쓰기를 한다는게 점수를 딴거죠.
저는 진보주의자, 앞장서 나가는걸 좋아합니다. 근데 뭐가 진보죠? 정치적인 좌파가 진보가 아닙니다. 신문의 입장에서 보면 한글가로쓰기, 문화 연예 스포츠면 늘리기, 컬러화, 사진많이 싣기, 섹션화가 진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는 가장 보수적인 신문에 속하죠.

IMF시절에 종이값이 올라서 중앙일보의 증면주의는 벽에 부닥쳤지만 신문의 바람직한 길은 일단 그쪽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좋고 나쁜 신문의 판단기준은 정치적 색깔도 고려되지만 진보적 색채의 가미여부로 판단합니다. (정치적 진보가 아닌 언론의 진보)

한겨레는 별로 재미도 없지만 첨단과학이나 학술적인 측면의 정보를 특집으로 잘다루고 또 문화유산이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데 점수를 줄만합니다. 한겨레에서 발간하는 [한겨레21]은 표지에 아주 불쾌한 몽타쥬(지난주의 가면쓴 안기부)를 싣고 내용에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반공만화 비슷한 반안기부 만화를 싣고 하는게 꼭 70년대 반공잡지 같아서 안봅니다. 정치적인 측면을 너무 유치, 조잡하게 표현하므로 혐오감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같은 한겨레에서 발간하는 [씨네21]은 뭐 요즘은 안보지만 높이 평가하는데 제가 말하는 진보주의에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내용구성이나 교양수준이나 모두 한겨레21의 유치찬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한겨레가 완전 공자맹자 보수인데 왜 씨네21만 진보인가 했더니 그 편집진이 다르더군요. 씨네21은 편집진이 젊어요. 또 여성이 많고.

정치적으로 진보를 표방하더라도 노땅이 만들면 내용이 보수가 되어버립니다. 편집이나 칼럼이나 이런데서 젊고 참신한 감각이 하나도 안보이는 거죠. 한겨레21은 고구려시대입니다.

그럼 어떤 신문을 보아야 하는가? 일단 젊은 신문 진보를 표방하는 신문을 봐야합니다. 어떤 신문이 진보적이냐? 최신 과학, 학술정보를 많이 다룰 것, (한겨레) 노동계 여성계 등 소외된 쪽의 정보를 많이 다룰 것, (한겨레) 문화, 교양 측면을 많이 다룰 것 (문화일보), 연예, 스포츠에 지면을 늘릴 것, (중앙일보) 경제관련기사를 소화할 것 (중앙일보), 이 정도로 봅니다.
옛날에는 스포츠서울의 애독자였는데 요즘 스포츠서울은 타락하여 재미없어졌습니다. 스포츠신문의 생명은 만화인데 재수없게 이현세만화 따위를 싣다니, 이현세는 잉가이아임 <= 지기야 함,

♧ [초모렁마님께] 2.

그리하여 왜 조선일보를 지기야 하는가? 이것은 폭로입니다. 조선일보의 오래묵은 사기극에 대한 폭로, 왜 조선일보가 사기인가? 말했듯이 저는 한동안 경제신문(매일경제)까지 하루에 8종 이상의 신문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들 신문들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신문기자들은 기사를 서로 베끼기 때문에 다 비슷비슷합니다. 독자들은 읽을거리가 많은 조선일보를 택하죠. 그놈이 그놈이니까. 중요한 것은 음모입니다. 이 음모는 보통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때만 음모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물론 관찰이 치밀한 제가 그 음모를 포착하는 거죠.

예를 들면 김기설 유서대필 같은 사건에서 김형영의 허위감정 같이 불리한 기사가 터지면 음모팀이 작전을 개시하는데 독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은 돌연 엉뚱한 기사를 터뜨려 물타기 작전을 시도하는가 하면 여론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가는데 요는 이것이 사전에 독자를 속이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선거에서 안기부의 북풍음모를 한겨레가 폭로했는데 그 내용을 말하면 1. 오익제 서신을 집배원이 배달하게 하고 안기부 요원이 현장을 덮친다. 2. 관변단체가 국민회의 당사 앞에서 시위를 한다. 3. 조선일보 등의 칼럼니스트를 시켜 국민회의 비난칼럼을 쓰게한다.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 부부간첩단 사건에서 1. 이들 부부간첩을 시켜 북한으로부터 잠수함을 남파하게 한다. 2. 부부간첩이 북한 잠수함과 접선할 때 덮쳐 재작년의 동해안 잠수함침투사건을 재연한다.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목적은 선거에서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한 거죠.

부부간첩 중 강연정이 자살함에 따라 이 기도는 실패했는데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김대중은 이미 떨어졌을 것입니다. 안기부 파일은 이미 국민회의 쪽에 넘어가버려서 대체로 실패했는데 (안기부 내에 국민회의 선이 있음) 요는 그 파일에서 중앙, 조선의 칼럼니스트들이 지적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민은 다 모르고 있는 거죠.

이것은 조직적 범죄행위입니다. 조선이나 중앙이나 평소에는 다른 신문과 아무 차별성이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고비에 이르면 돌연 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같이 하루에 열 개의 신문을 비교해 보는 사람에게는 그 점이 포착됩니다.

똑같은 기사를 일부러 제목의 크기를 작게하는가 하면 전혀 다른 제목으로 뽑는데 평소에는 안그러다가 작전이 걸릴 때다 싶으면 나타납니다. 지난 선거에서 권영빈 유근일 등이 [국민의 65프로가 반대하는 김대중]하는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문구가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두 칼럼이 내용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기사를 안기부에서 만들어서 건네주었다고 봅니다.

생각해 보세요.천하의 칼럼니스트가 다른 신문의 칼럼을 표절해서 쓰겠습니가? 두 사람이 다 글쓰는 데는 도사인데 표절이라니요? 이건 안기부에서 넘겨준 글입니다. 그런게 딱 보입니다. 칼럼 중 아하 요기서부터 요기서 까지 이 양반의 글이 아닌데 하는게 제 눈에 딱 포착이 됩니다. 글쟁이들은 스타일이 있잖아요.

지난 선거에서 안기부파일은 국민회의 쪽에 100프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김대중의 패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차피 선거는 안기부대 국민회의의 싸움이지 한나라당이 선거합니까?

조선일보가 문닫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같은 사람의 눈에는 작전이 들어가면 다 보입니다. 양심이 있거든 조금이나마 고백하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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