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1
【 제 안 하 기 】

1.『철학 에세이』

에세이라고 하면 중수필(重隨筆)인데 가벼운 미셀러니와는 구
분되어야죠. 에세이 중에서도 빠스칼의 빵세나 몽테뉴의 수상
록들 처럼 철학적 깊이가 있는 경파(硬派)수필이 있고 찰스 램
의 문학적 세련미가 넘치는 연파(軟派) 수필이 있습니다.

수필들이 사유(思惟)의 깊이보다 읽는 재미에 치중하다 보니
점점 이야기가 개입하여 꽁트에 가까운 생활수기로 변질되어
버리는 느낌을 갖습니다. 중수필이 못되는 거죠.

읽는 재미가 아닌 사유의 아름다움에 수필의 참된 가치가 있
는 게 아닐까요? 진정한 수필은 사건전개가 배제되고 사유의
과정이 노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스토리가 개입하여 작가의 사유과정이 배제되고 꽁트처럼 보
여지는 수필이 대다수인 지금 '빛나는 언어'를 추구하는 전통
적 수필을 써보겠다고 하면 어려울까요?

시계바늘 따라 째깍째깍 요금이 올라가는 통신이라는 매체는
'생각의 깊이'를 담은 중수필을 쓰기에는 부적절한 수단일수
있습니다만 모니터로 읽는 것만이 다는 아니고 또 갈무리하여
프린터로 뽑아보는 재미를 아시는 분 있다면 이 글월을 바치겠
습니다.

저는 문장가가 못됩니다. 대신 생각하는데 재주가 있죠. 수필
은 모름지기 '빛나는 언어'와 '사유의 아름다움'에 의존하여야
한다면 문학보다는 철학, 언어보다는 사유에 치중하여 '생각하
는 즐거움'을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수필에는 언어가 있고 사유가 있고 멋이 있고 낭만이 있으며
깨달음과 지혜가 있습니다. 명철(明哲)과 혜안(慧眼) 그리고
관조(觀照)와 사색(思索)이 갖추어지되 흥미진진함이나 괴담,
한탄과 넋두리는 내쳐야겠죠.


2. 『방법(方法)적 사유(思惟)』

글재주가 없는 대신 생각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터 백일장에 상 한번 받은 적 없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
없이 하는데는 일가를 이루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에서 또 양에서 저를 능가할 만치 생각을 한 사람은 아마
도 세상에서 더 없을 것.

생각에 몰입하느라 밥먹는 시간이 아끼다보니 급히 먹는 버릇
이 생겨 한동안 만성체증을 앓았을 정도죠. 노래 전혀 못함,
당구 쳐본적 없음, 바둑 최하급, 장기 못둠, 고스톱 (컴퓨터게
임 네오고도리 약간)못함, 술 못함, 담배 안함. 왜냐하면 이것
들이 시간을 빼앗으므로 저의 가장 큰 즐거움인 생각하기를 방
해하기 때문.

생각과 생각의 끝에 터득한 바 생각에도 요령이 있고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턱대고 머리를 쥐어짜 생각하는 것
이 아니라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검증해 가며 방법적으로 사유
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방법(方法)적 회의(懷疑)가 생각키우네요. 생각
하기에도 가는 길이 있습니다. 석가의 8정도처럼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생각의 공식이 존재합니다. 그걸 터득했
다는 거죠. 생각의 포드시스템, 사유의 대량생산. 대량공급.

어떤 문제가 있다면 답도 있을 것. 문제가 시간상에서의 변화
를 담고 있다면 답 또한 딱딱한 알갱이가 아니라 흐르는 물처
럼 유연한 변화과정이어서 정확히 포착하기가 어려울 테죠.
상대적이며 역설적인 운동공간입니다. 답은 정확히 포착되지
않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문제풀이 공식은 정확히 포
착됩니다. 거기서 체계를 얻어 생각하기에 적용한다면 곧 '방
법적 사유.'

한국과 일본이 축구시합을 한다면 한국이 이길지 일본이 이길
지 알수 없지만 한국이 이긴다면 일본은 반드시 집니다. 둘이
동시에 승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것이 게임의 규칙이자 상대
적인 관계입니다.
유효한 즉 게임의 규칙은 그 절대적인 성질로 하여 모든 논리
체계의 최종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게임의 규칙을 정확히 파
악하고 이용하는 것이 방법적 사유하기.
방법적 사유가 모든 문제에 정확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1, 문제를 단순화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게 하고]
[2.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긋게 하며]
[3. 정확한 접근경로를 알려주고]
[4. 특정 사안이 정답일수 있는 확률을 제공하며]
[5. 답이 틀릴 경우 오류시정을 통하여] 다음에는 정확히 맞힐
수 있는 기초(데이터)를 제공합니다.

차범근 감독이 전술을 잘못 쓰면 질 수밖에 없지만 왜 졌는지
안다면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터. 방법적 사유는 뭐가 문제의
본질인지, 어떠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알
수 있는 한계점인지, 불분명할 경우 정답일 확률은 어느 정도
인지, 틀렸을 경우 어디가 틀렸는지 파악하게 하여 적어도 최
선을 다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생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점 근처까지 도달
해 보았습니다. 계산이나 측정, 실험, 연구가 아닌 순수한 사
유로서 이를 수 있는 인식의 경계점에서 만난 것은 접근경로입
니다. 방법적 사유는 곧 올바른 접근경로입니다. 방법적 사유
가 곧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으나 가장 빠른 길을 제공하
므로서 최선을 다할 수는 있게 합니다.
철학에세이는 저의 여러 가지 생각과 또 생각하는 방식, 그리
고 방법적 사유를 펼쳐 보이는데 의의를 둡니다.

[모든 문제에 정답을 제공할 수는 없지만 정답에 이르는 올바
른 길은 제공할 수는 있다. 정답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상대적
이며 역설적인 운동공간 안에서 문제와 답 자체가 시공 (時空)
상에서 가변적이어서 확률로만 포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며
곧 인간의 인식한계이다. 응하여 인간 또한 상황의 변화에 따
라 유연한 대응체계를 확보하므로서 최적접근 할수 있다.]

[변화를 변화로 이기는 것이 방법적 사유이다]


3.『최선을 위한 다섯 가지 준비사항』

철학가는 답을 가르켜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접근경로를 가르켜
주는 사람,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 철학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 그것은 최선을 다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다섯가지 준
비사항입니다.

1. 단순화.....문제의 핵심을 파악한다.
2. 최종목표.....궁극적으로 도달 가능한 위치를 파악한다.
3. 접근경로.....문제해결의 우선순위를 파악한다.
4. 최고효율.....이길 확률과 들어가는 비용을 산출한다.
5. 오류시정.....실패했을 경우에도 데이터를 확보한다.

인생은 머나먼 항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지만 최선
을 다할 수는 있는 법,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 어떻게 대
처해야 하는지, 얼마나 쉬어도 되는지 안다면 최선을 다한 셈
이 되므로 미련이 없어. 실패하더라도 데이터를 확보해 두면
뒷사람을 위해 유익함이 있는 법, 인생의 항로에서 항해일지를
기록해두므로서 최선을 다한 항해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방법적 사유에 기초한 시스템접근은 체계가 존재하므로 검증
이 가능하다.]

[시스템접근 = 복기가 가능한 바둑두기]

2월 7일
《끝】

제목 : 나는 누구인가?

【 유 년 기 】

1. 『산 밑에』

경주 서쪽 건천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단석산입니다. 신
선사(神仙寺)라는 절이 있는데 우리나라 신선숭배사상의 메카
가 되죠. 신선사상은 곧 화랑도사상입니다.
마을사람들은 탱바우산(斷石山) 탱바우절로 부르죠. 소년화랑
김유신이 동굴에서 수도하던 중 신선으로부터 보검을 얻어 바
위를 '탱강' 잘랐다 해서 탱바우죠. 지금은 절과 석굴사원이
되어있지만 근처 바위에 신선(神仙)과 관련한 명문이 새겨져
있어 국선(國仙)이라 불렸던 화랑도의 흔적을 찾아보게 됩니다.

65년 봄 단석산 아래 장성백이 마을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경주 남산 아래 포석정 있는 포석마을로 이사를 왔습니다. 경
주남산이면 한국 불교의 요람, 100여곳의 절터와 50여체의 석
불이 있는 곳. 신선사상의 메카에서 불교사상의 고향으로 이사
를 온 셈이죠.
경주고교 교가는 /수정 앞남산에서 옥돌이 난다/는 구절로 시
작합니다. 경주남산은 경주남석이라 불리는 백수정(白水晶)과
흑수정으로 유명하죠. 마을 앞 개울바닥에는 옥돌을 파낸 커다
란 구멍이 있숩니다.
꼬마였을 때 땔나무를 하러 혹은 옥돌을 찾으러 왼종일 남산
을 헤매다니곤 했습니다. 그때 본 남산의 절터와 폐탑, 불상들,
성터 돌무더기들의 신비하고 그윽한 분위기가 내 철학적 정서
의 원천을 이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2. 『유년』

옆집 소꿉친구 특이의 바지를 내려버렸다. 누룽지를 혼자먹으
려는게 미워서였다. 엄마 아빠는 밤새도록 가마니 두장을 짰다.
큰집 사는 관이가 그림책을 보여주지 않는다. 혼자 남겨두고
형들끼리 의곡리에 낚시바늘 사러 갔다. 갈가마귀들이 보리씨
앗을 다까먹기 전에 곰배질을 마쳐야 된다. 염소가 방안에서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처음으로 냇가에서 미역을 감았다. 엄
마한테는 비밀이다. 순구내 개는 덤벼들 듯이 사납게 짖는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고 마당에 큰 미꾸라지가 떨어졌다. 미
꾸라지는 비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를 타고 내려온다.
붕어 세 마리를 우물에 넣고 키운다. 엉머구리 잡아 때기장을
처버렸다. 이사를 두 번이나 더 갔다. 창림사 절터에 커다란
돌농이 있다. 능갓에 사는 땅군아저씨의 허리춤에는 뱀이 아홉
마리 들어있다. 공동묘지에 토째비불이 왔다갔다 한다. 메뚜기
를 구워서 형 도시락 반찬으로 하였다. 물방개는 멋진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한번도 날지 않는다. 할랑개비가 때때를 업고
다닌다. 누에들이 뽕잎 먹는 소리가 꼭 비오는 소리 같다. 눈
이 한발이나 오고 대나무가 휘어져 뒷마당을 덮어버렸다. 날마
다 어디론가 멀리 간다. 가재 잡으러 절골에 가고 미꾸라지 잡
으러 도디기 간다. 나무하러 게눈바우 가고 초파일 날은 상실
절터까지 간다. 조금씩 조금씩 더 멀리 간다.



3. 『소년』

영화로 말하면 '토탈 리콜'이다. 공상과학소설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리라. 타인의 기억을 마치 컴퓨터칩 조립하듯 뇌에 의식
하면 타인이 자기가 된다. 기억 속의 그는 나인가 남인가?
나(自我)는 나의 육체가 아닌 영혼, 인간에게 정신이 있다.
그 정신이 컴퓨터 디스켓과 같은 저장된 정보에 불과할까? 아
니다. 아니라고 확언할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러고 싶다.

소년의 내게 공포였던 것은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7
년 전에 8년 전에 나는 없었다. 지금은 있다. 없다가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없다가 돌연 있는 것도 있는 것인가?
다리없는 몽달귀신이나 얼굴없는 달걀귀신이 무섭듯이 과거없
는 나란 어지간히 무섭기에 충분하다. '기름 아껴야지' 초저녁
부터 호롱불 끄면 한이불 덮고 긴긴 겨울밤을 온갖 상상하며
지새우곤 하는 것이었다.

논리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 과거가 없다는 것은 막연한 공포
를 주기에 충분하다. 도무지 무엇이 나인가? 나를 느끼고 싶어.
소년의 꿈. 은하계가 내 호주머니 구슬 속에 들어있는 영화
'맨 인 블랙'에서 처럼 자기존재라는 것이 성같이 튼튼하고 쌀
밥처럼 그득한 무언가가 아니라 거품같고 꿈같고 허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의 짜르르한 느낌을 기억하는가? 밤잠 이루
지 못하지.
나는 존재한다. 과거가 내 기억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
기 때문이 아니다. 나(自我)라는 것이 나의 기억에 불과하다면
존재란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정신은 의식. 나(自我)도 의식이다. 의식은 기억이 아니다.
의식은 저장된 정보가 아니어서 그 이상이다. 정신은 생물학적
으로 정교한 메모리 칩이 아니다. 무엇인가?

낯선 곳을 방문할 때, 생전 처음 보는 것을 보고 섬뜩해 할
때 쥐나 뱀을 보고 징그러워 할 때 그것은 기억에 있고 없고와
상관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존재를 그득하게 느끼는 것은 기억하기 때문이 아
니라 의식하기 때문. 그것은 무언가 보고 들었을 때 생각키워
서가 아니라 거꾸로 아무 생각없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저장되는 것이지만 의식은 구성되는 것. 기억은 빌어
올수 있지만 의식은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빌 수 없어. 나(我)
라는 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라 나의 의식. 나의 편안함, 나의
떳떳함. 나의 자연스러움, 나의 관조(觀照). 나의 달관(達觀).
그것을 얻으면 해탈(解脫).

기시감(旣視感)이란다. 낯선 곳인데도 이미 여러번 와본 듯한
느낌, 익숙히 겪어본 듯한 느낌. 기시감은 없다. 단지 생소해
야 할 때 긴장감이 없으니 역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 존
재는 기억이 아닌 의식의 의존하며 의식은 아는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에 대응한다.
낯설은 곳에서는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그것이 의식. 인
간은 되려 기억이 아닌 의식에 지배된다. 쥐는 처음 봐도 징그
럽고 강아지는 처음 봐도 귀엽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의식.
나(自我)는 기억의 집합이 아니라 의식의 구성체. 전달된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 호환(互換)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固有)
한 것, 그것이 정신이다.

소년 겨울밤 길어서 군불 뜨뜻한 아랫목 일어나기 싫어 눈만
멀뚱, 모기 뜯는 여름밤도 뒤척이며 잠못 이루어 무서워 하며.

2월 8일

《끝】


1. 심경에 부딪히다.
2. 청담을 찾아가다.
3. 언어의 지킴이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끝】

제목 : 심경에 부딪히다.

【 심경(心境)에 부딪히다 】


김광섭(金珖燮)님의 [수필문학 소고]는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
더라.

/수필(隨筆)이란 글자 그대로 붓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 그
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心境)적이며 경험적
이다./

심경(心境)이라니 무슨 뜻일까? 차라리 심경(心鏡)이라고 하
면 이해가 빠를 것을. 마음의 지경? 마음의 거울?

김광섭선생은 심경이라는 오묘한 말 한마디를 던져놓고 풀이
하기를 이렇게 어렵더라.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것이나 비록
객관적 사실을 다룬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하게 짜내는, 심경적이라기 보다 자연
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중략)~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 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는 형식이다. 제작이라고 하나 수필에 있어서
는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이다. 다시 말
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아하! 선생께서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알겠다. '의식적 동기
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이다.' 바로 그거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이나 모름지기 문학이라는 것은 독자들에
게 읽히려고 쓰는 것이다. 독자들이 읽어주어야 한다는 강박,
바로 그것이 선생께서 부정한 '의식적 동기'가 아닐까?
나는 이제 수필을 쓰고자 한다. 내가 쓰고자 하는 수필은 선
생의 말씀대로 심경(心境)에 부딪힌 그런 수필이다.
'심경에 부딪힌다.' 선생은 왜 부딪힌다는 표현을 썼을까? 나
는 차라리 '심경(心鏡)에 비추인다'고 말하고 싶다. 아 그러나
부딪혀야 하리라. 더 부딪혀야만 하리라. 마음의 지극한 경계
에 치악산의 타종하는 까치처럼 부딪혀야만 하리라.
우리는 배워서 안다. 에세이와 미셀러니는 다르다는 것을. 에
세이는 그야말로 심경에 부딪혀 피토하고 쓰러지는 울음이요,
미셀러니는 시장거리 아줌마의 신변잡기다. 에세이를 써야하리
라.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가득차더니
기어이 심경에 부딪혀서 피토하듯 울컥 써져야 하리라. 그래야
붓이 먼저가고 사람이 붓따라가는 隨筆이 되리라.

수필을 쓸수 있을까? 심경에 부딪혀 본 적이 있는가? 가히 수
필의 전성시대라 할수있다. 도처에서 에세이를 만난다. 그러나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 심경에 부딪히지 않은 글들, 붓이
앞서가고 작가가 붓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붓 끌고가는
에세이들, 정확히 말하여 미셀러니라 불리어져야 할 에세이들
을 본다. 진짜 수필을 써야 하리라.

소년의 나를 흥분시킨 책들이 있다. 서점 한구석에서 먼지 뒤
집어쓰고 있는 묵은 책들에도 새로 붙인 인상된 가격표가 붙어
있어서 가난한 소년을 위축시킨 그 책들 말이다.
그것은 /빠스깔의 빵세, 몽테뉴의 수상록, 잠 못이루는 밤을
위하여, 채근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니체의 짜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들이다.
소년은 서점 한 구석에서 혹은 도서관의 서가 한 모퉁이에서
좋은 구절하나, 혹은 빛나는 글귀 하나에 감동하곤 했었다. 거
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아마도 '심경에 부딪힘'이 있었을 것이
다. 공고한 지성, 빛나는 인격, 멋들어진 교양, 지적인 세련됨
그런 거. 소년의 나 숭배하였던 것은 그러한 인격적 고결함이
었다. 소설에서도, 시에서도, 아닌 수필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
하곤 하였던 것이다.

/시골에 가면 초목처럼 무성하고 싶다 - 헤즐리트/

산문정신의 정수라 할만하다. 그 인격은 그 글에 힘으로 나타
나는 법. 문체가 비굴하고 조악하다면 인격 또한 마찬가지. 소
년을 매료시킨 것은 그 주장의 그럴싸함이나 내용의 흥미진진
함이 아니라 문장이 가지는 힘이었다.
글자 한자 한자에 힘이 들어있다. 기개가 있고 얼이 있다. 이
시대 글쟁이들 글에 가장 없는 것들이 소년의 나를 흥분시켰던
고전들, 특히 수상록으로 쓰여진 그 수필들에 있었다.
그 인격이 그 글에 비추어 보이네. 하여 나는 '心境(심경)에
부딪힘'을 '心鏡(심경)에 비추임'으로 표현하고 싶은 거. 수필
을 써보라. 네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보라.

우리 세대를 386세대라고들 한단다. 60년대에 나서 80년대를
앓던 30대들, 이 나라를 한참 이끌어가야 할 30대들이 이른바
엑스세대니 신세대니 하는 젊은이들보다 사고나 감각이 뒤처진
대서 그런 조롱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때때로 세대 차를 실감한다. 젊은 그들은 랩음악과 인터넷에
익숙하고 햄버거와 피자에 길들여졌으며 자유분방하고 생기발
랄하다. 그러나 무언가 빠진거 같다. 나의 소년이 빵세와 수상
록, 채근 담 따위에 감격할 때 그들은 제법 소쉬르와 라깡, 브
레히트, 들뢰즈를 운위하였던 모양이다.
고전이 아니면 책이 아니라고 믿었던 뽕짝문화의 맨 끝줄에
서서 80년대를 앓았던 386세대야 말로 진지함과 치열함이 남아
있는 마지막 세 대일 것이다. 제법 의식화를 말하고 인터넷과
햄버거 랩음악으로 무장한 소쉬르, 라깡, 들뢰즈를 아는 펜티
엄 세대와 차별을 느낀다. 그들이 심경(心境)을 알까?

에세이가 사라진 시대다. 그들의 글에는 심경에 부딪힘이 없
다. 대신 능란함과 흥미진진함이 있다. 서술이 치밀하기에 주
장이 그럴싸하고 깔금하기를 햄버거 피자같은 산뜻함이 있되
줏어듣고 줏어섬기기 바쁠 뿐 심경에 부딪히지 않더라. 울림이
없고 떨림이 없다. 낭독될 뿐 메아리치지 않더라.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청담(淸談)이다.

무인년 앞두고

《끝】

제목 : 청담을 찾아가다.

【 청담을 찾아가다 】


이런 문장을 발견한다.

/밥상을 물리고 할 일 없어 옛 문서 바구니를 쏟아놓았다. 그
중에 신구(新舊)의 여러 채권문서가 수백통 있는데 더러 죽었
고 더러 살아있지만 받을 길은 까마득하다. 에라 모르겠다.
몽땅 불살라 버린 뒤, 우러러 하늘을 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거늘,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닌가?/

또 어데서 이런 글귀를 발견한다.

/괴벽이 없는 사람하고는 교제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깊은 정이 없기 때문이다. 흠이 없는 사람하고는 교제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참다운 기분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 것은 청대 문장가 김성탄(金聖嘆)의 불역쾌재(不亦快哉)
라는 문장의 한 구절이고 뒤에 것은 동시대의 장대(張岱)가
쓴 한 글귀이다.
제법 장쾌하고 당당해 보여서 좋다. 말을 짜맞추어 내는 능란
함이 보이지 않고 억지로 감동을 짜내려는 것도 없다. 소소한
것을 논하고 있으나 지극한 것과 통한다. 목적과 의도를 가지
고 그럴싸하게 꾸며내는 글이 아니라 심경에 부딪혀서 툭툭
튀어나오는 글이다.

수호지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김성탄이 비평한 70회본 수
호지고 하나는 흔히 충의수호지(忠義水湖志)라고 말해지는100
회본이다. 수호지를 읽다보면 앞부분은 순 산도적들의 고약한
이야기인데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구하는 충신, 지사의
열전으로 변해버린다.
앞부분은 저잣거리 주막집에서 혹은 여염집 사랑채에서 호롱
불 켜고 둘러앉아 나누던 민중의 담론이요 뒷부분은 약은 머
리 이리저리 굴려서 억지로 짜깁기한 권력의 담론이다. 그런
냄새가 문장에서 난다. 수호지 특유의 호쾌한 맛이 사라져버
리고 이야기가 구질구질해지는 것이다.
김성탄이 구질구질한 뒷부분을 잘라버린 것은 위에서 그 채권
문서를 불살라버린 것과 통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
을 본다. 그가 본 하늘은 그의 심경(心鏡)에 비추어 본 하늘
일 것이다. 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를 것은 너무도 당
연한 이치다.

심경에 비추어 보자. 장대가 말한 '깊은 정'은 무엇이고 '참
다운 기분'은 무엇인가? 또 왜 그 참다운 기분은 괴벽이 있는
자 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가? 장대가 쓴 오이인전(五異人傳)
에는 다섯 괴짜 이야기가 나온다. 돈에 미친 사람, 술에 미친
사람, 기분에 미친 사람, 골동에 미친 사람, 서사(書史)에 미
친 사람들이다.
인간들은 점점 현명해지고 약아졌다. 랩음악을 듣고 햄버거
를 먹으며 인터넷으로 노는 그들은 민첩하고 발랄하다. 그런
요즘 아이들이 괴벽을 이해할까? 이인을 인정할까? 때때로 두
렵다.

예전에 '한국의 기인 70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
다. 한국이라고 해서 괴짜가 없을 리 없다. 경허, 만공, 한암
이 생각나고 천상병, 이상, 중광, 이외수가 생각난다. 그들은
괴짜다. 아마도 '깊은 정'과 '참다운 기분'을 가득하니 소유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하늘이란 언제나 푸를
수밖에 없으리라.
취미 중의 하나는 골동이나 유물, 유적에 대한 관심이다. 인
간들 가운데도 골동이 있다. 이 사이버공간에도 그런 인간들
이 있다. 그러나 때로 두렵다. 386세대야 말로 이인을 인정하
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피자먹는 펜티엄세대들은 골동이 되지 못한다. 겨우 히피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히피들에게는 그 '참다운 기분'도 '깊
은 정'도 있을 리 만무다.

석용산 스님의 뒷얘기를 듣는다. 아아 그럴 때 귀를 막고 눈
을 돌리고 싶다. 들리는 바 그는 약고 날래며 조잡스런 사람
이란다. '석용산은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 종내에는 전
설도 신화도 이인도 사라져 버리고 히피와 쓰레기와 비참함과
구질구질함만이 남아나질 않을까?
인터넷, 세계화 시대에 인간들은 더 무기력해 지고 더 약삭 빨라지고 비참해지는 갑다. 이인은 없고 히피만 남는 시대에
우리가 정녕 무엇을 잃었는가를 돌아봐야 하리라. 그것은 청
담 이다.

임어당(林語堂)의 글에 청담론(淸談論)이 있다. 임어당이 말
하는 청담론은 고상한 선비의 사교적인 대화를 말하는 듯 하
다. 내가 말하고 싶은 청담은 더 '참다운 기분'과 '깊은 정'
이 있는 민중의 담론이다. 어느거나 청담은 곧 수필이 된다는
데서는 일치다.
수필이란 모름지기 청담이 아니면 안된다. 심경에 부딪힘이
있고 깊은 정이 있고 참다운 기분이 있으면 절로 청담이 되리
라. 그러나 교양있는 화술보다는 투박하더라도 툭툭 던져지는
민중의 담론이어야 진정한 에세이리라.

생각컨데 임어당이 본 하늘은 좀 흐리고 좀 노을도 있고 아
기자기 하여 김성탄이 본 온통 푸른 하늘과 달랐으리라. 어줍
잖게도 그의 청담론에는 템포가 있고 뉘앙스가 있고 야실야실
한 기분이 있다. 좀 가꾸어진 꽃밭이 된다.
날로 타락하여 심경에 부딪히지 않은 '의도와 목적'이 가미
된 잡문이 되고 말더라. 그것이 시절, 청담은 세련된 화술도
교양있는 대화도 아니다. 마음의 지극한 경지에서 그저 툭툭
튕겨져 나오는 투박한 글발이다. 그래야 한다. 수호지 한 구
절을 읽는 호쾌한 맛이다. 더 참다운 기분, 헌걸찬 데가 있어
야 하리라. 비로소 문장을 버려놓은 시초에 임어당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청담은 그렇다. 심경에 부딪힌, 하늘을 우러
러 구름 한 점 없는, 참다운 기분이 드는, 깊은 정이 배어져
나오는 그런 대화다. 기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끈끈하고 묵직
한 대화. 그것을 종이에 옮겨놓으면 그대로 수필이 된다.

며칠 전 경남 최후의 오지라 할 수 있는 천황산 배냇골 너머 원동리 못미쳐 어느 전통찻집에서 그 주인이 벽에 써놓은 글
귀 한토막이 이렇더라.

/씨부리지 마라. 다 알고 있다./

아아 그것은 청담이다. 세련된 화술도 사교적인 대화도 선비
의 점잔빼는 소리도 아닌 그것은 문득 화화상 노지심이나 흑
선풍 이규가 등 뒤에서 툭 튀어나와 내지르는 일갈이다.
쥔양반은 서각하는 도문(刀文) 이상국님인데 역시 기인이더
라. 감지 않은 머리에 수염이 장비 같고 무뚝뚝하니 툭툭 던
지는 말투가 토장맛이다. 그런 사람만이 청담을 할수 있다.
혹 물금 지나 삼랑진 못 미처 원동에 들르실 분은 반드시 그
찻집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필이 따로 없다. 그 찻
집이 통째로 수필이다.

임어당의 중국식 햄버거 한조각 그 야실야실한 맛이 이렇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나와 논할 수 있는 여성은 고사하고라
도, 이야기를 곧잘 들을 줄 알고 또 얌전하고 생각이 깊은 얼
굴을 하고 있는 여성이 몇만 있다 하더라도 담화는 늘 유쾌한
자극을 받게 된다. 나는 바보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나이들
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유쾌하다고 언제나 생각하
고 있다./

설날 전야

《끝】

제목 : 언어의 지킴이로.

【 언어의 지킴이 】


붓 가는 대로 갈겨 놓은게 수필이 아닌가? 천만의 말씀, 붓
이 아무데로 가나? 또한 붓이 가는 길이 있는 법이니.

문장에는 반드시 형식이 있다. 소설은 한 명의 작가가 익명
의 다중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방식이요, 시란 작가가 곧 자기
자신 내지 단 한명의 독자에게 나지막이 들려주는 감흥이요
수필은 좋은 날 정자에 모인 친구 서넛이 이런 저런 세상사를
논하는 유쾌함이라.

수필을 청담(淸談)이다 한담(閑談)이다 하는 것은 그런 뜻이
리.

정형시는 구와 절에 운이 있고 자유시는 그 운에 파격을 더
하며 운문시는 운이 느리고 산문시는 운이 빠르다. 시는 운이
며 운은 리듬이고 리듬은 호흡이다. 어떠한 형태이든 시에는
반드시 리듬이 있다. 그것이 시가 단 한명의 독자를 위해 들
려주는 이야기 방식인 이유이다.
사람마다 그 호흡이 다르게 음미되기 때문이다.
문장이 시에서 시작하여 수필로 소설로 발전하여 가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말이 운을 얻어 문장이 되매 처음이요 향을 실
어서 수필이요 색을 더하여 소설이 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시가 먼저고 수필이 다음이고 소설은 나중에 엮어지더라.
1인에서 호흡(운), 2인에서 향(문체), 다중에서 색(구성)의
이치라.
이미 생각한 사람이 영탄하여 시, 생각하는 사람이 여유를
찾아 수필,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각할 거리를 찾아 소설
이니 사유의 진행을 따라 먼저 문체를 얻지 못하면 산문이 되
지 아니하는데 이치가 묘(妙).

에세이란다. 미셀러니가 아닌 에세이 말이다. 미셀러니는 소
설에 가까워진 변종이다. 친한 벗이 아니라 익명의 다중들에
게 들려주는 형식이다. 그것은 라디오에나 나오는 주부생활수
기 비슷한 것이다.
서점에 '월간 에세이'라는 잡지가 있다. 이름이 에세이이니
에세이여야 하리라. 그러나 그 문장은 벗들이 정자여 모여 나
누는 한담도 아니요, 심경에 부딪혀 툭툭 튀어나오는 청담도
아니요 생활수기집이더라.
바야흐로 에세이가 죽은 것이다. 신문 잡지가 문장을 이끌면
서 칼럼이 익명의 다중을 상대로 하다보니 기어이 문장을 죽
인 것이다. 본래 에세이는 출판문화가 없던 시절 서생들이 지
우와 나눈 한담을 모아 문집을 남김으로서 이룩된 것이다. 기
백만의 독자를 가진 언론의 칼럼과는 토대가 달랐던 것이다.

사문난적이라고 했다. 문장은 수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렸다. 시절이 바뀌니 문장도 변해야 하지만 또한 되돌아봄이
없다면 그 변화가 어찌 올곧을 리 있으랴.
에세이가 죽었다. 청담도 한담도 사라지고 잡담이 기승한다.
아으 선배들의 문장이란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라도 반드시 지
극한 것과 통하는 법이었는데 그러한 멋이 사라진지 오래다. 게시파들의 말다툼처럼 짜증서러울 뿐이다. 어찌
일갈이 없으랴.

김성탄(金聖嘆)은 말한다.

/거리를 지나다 보니 두 놈이 시비를 벌이고 있는데, 서로
눈꼬리를 치켜 뜨고 목덜미까지 시뻘개져서 같은 하늘 아래
절대로 못 살 듯이 싸우더니만 금새 서로 높다랗게 공수하거
나, 손을 낮추고 허리를 굽히며, 말하는 모양새도 고어를 쓰
는 등 하여간 그들의 수작은 1년이 가도록 끝날 줄 모르게 너
저분 했다. 이때 갑자기 장사 하나가 팔을 걷어 붙이고 위엄
을 부리면서 큰 소릴 치자 그 싸움이 당장에 풀리거늘 이 또
한 불역쾌재(不亦快哉)라./

소소한 것이 지극한 것과 통한다는 의미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또한 인격의 도야가 없이는 결코 장면을 포착하지 못
하리라. 싸우는 두 놈은 여당 과 야당이요, 이에 득달같은 장
사란 바로 민의의 심판으로서 12,18의 대선이 아닌가?
발톱 밑의 작은 가시를 빼지 않고 먼길을 나서는 일은 어리
석은 짓이다. 얼마 가지 않아 털썩 주저앉게 되고 말지. 새
정부가 양심수 석방을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치다. 발톱 밑
의 가시는 작은 것이고 양심수 석방은 큰 것이지만 둘은 통한
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 청담의 어법이며 마땅히 '생각의
오랜 머무름'에 의지하거늘.
말하고자 하는 바 제법 라깡, 들뢰즈, 소쉬르, 브레히트를
안다는 펜티엄세대들이 구사하는 그 언어에서 청담이 빌붙을
데가 없더라는 거, 한겨레신문의 논조처럼 아득바득하고 비꼬
는 투고 냉소적이고 야유투성이다. 조선일보라고 양반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사문난적의 원조는 마르크스주의가 된다. 십여년 전 서점에
서 동녘사 간의 '철학 에세이'라는 책 한권을 발견하고 기뻐
하여 펼쳐보니 철학도 에세이도 간곳 없고 신흥종교의 교리문
답이 떠억하니 진열되더라.
'현대철학동호회'라고 있다. 철학의 두 글자만으로 반겨하며
들러 본 즉 웬 예배당인지 절간인지 목탁소리 찬송예배 참회
방언 요란터라. 또한 충격 받았네. 사전에서 글자 한자 한자
를 지워나가는 빅 브라더의 나라를 연상하지 않을 수 있나.

청담이어야 할 수필을 '귀족들의 고급한 사교'로 바꿔놓은
배후에 야실야실하게 말을 까는 난적 임어당(林語堂)이 있고
한담이어야 할 수필을 생활수기로 타락시킨 배후에 인연의 사
문 피천득이 있다. 문적 이문열이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것
은 결코 아니라.
이상(李箱)의 소설 나부랭이는 되도 않았지만 상의 행적은
그대로 수필이다. 다방 69가 한담이었다면 작소(鵲巢)는 청담
이다. 상이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틀림없이 에세이스트가 되
었을 것이다.
상이야 말로 개화시대에 언어의 죽음을 재빨리 간파한 지킴
이다. 글자 한자한자에 참다운 기분과 깊은 정으로부터 유로
된 무한한 힘이 있다. 임어당과 피천득은 기승한 재담가일 뿐,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로부터 예지를 끌어내며 우매한 자
의 입을 닫게 한다'고 말한 사람은 골초 임어당이다. 나는 녹
차를 책상머리에 두고 그냥 하나씩 씹어먹는다. 신사가 파이
프를 매만질 때 숙녀는 내오는 커피향을 평하지만 오렌지족은
구분없이 들러붙어서 칵테일을 빨대로 빨아먹는다.
그것은 향과 색의 차이이다. 웨이터가 율동으로 보여주는 칵
테일에 색이 있고 내가 씹어먹는 녹차에는 향이 있다. 색을
평하는 것이 잡담이라면 향을 평하는 것은 한담이 되겠다. 말
많은 그대를 침묵하게 할 도문 이상국님의 '씨부리지 마라 다
알고 있다'는 기분이 있어 작소(鵲巢)가 청담인 이유일거슬.

무엇보다 문장이 살아나야 한다. 향이 있고 기가 있어야 한
다. 추사선생이 일갈하야 오원 장승업을 우울하게 하였다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말이다. 천지간에 말과 글이지
만 들은 견문이 넓되 '생각의 오랜 머무름'이 없더라. 마음에
서 튀어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입에서 발려나오는 소리더라.
철학 에세이를 쓰려한 데는 그러한 인상이 배경이 된다. 서
강한담(西江閑談)이다. 해는 동산에 떠오르고 노을은 서강에
비끼는 것, 어찌 묵은 정이 없으랴.

정축 마지막 날

《끝】
1. 문장강화1. 철학을 구하거든 철학을 떠나라.
2. 문장강화2. 낭만이자 축제에서 문학
3. 문장강화3. 골동유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끝】

제목 : 문장강화1. 철학을 구하거든 철학을 떠나라.


【 철학을 하려거든 철학을 떠나라 】


철학가는 철학을 해야 하는데 보통은 소설을 쓴다. 샤르트르
가 그렇고 까뮈, 브레히트도 그렇다. 철학이 문학이란 방법으
로 표현된다는 것은 정당한가?

철학가는 혹 정치가이기도 하였고 또 수학자이기도 하였으며
자연학자이기도 하였으며 의사이기도 예술가기도 하였다. 철
학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어느 분야이든 그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한 발을 문 밖으로 내밀고 바깥세계를 빠끔히 내다보다
가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여 그것을 변명하다보면 절로 철학이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철학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철학합네 하는 그런 사람들의
철학이란 신통치 못한 법이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위하여'
철학 '하는'게 아니라 체험에 '의하여' 절로 철학 '되는' 것
이라야 진짜다. (위하여, 하는×) (의하여, 되는○)

몇 년 전 미국의 모 유명대학에서 서양철학 과정의 석사학위
를 받았다는 이와 이런저런 논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물었
다. "철학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그가 답하였다. "철학은
세상을 명석하게 인식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것
은 사회발전에 충분히 이바지한다" 옳은 말이나.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가 만약 진정한 철학도로 남으
려거든 먼저 철학을 떠나라. 네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사(哲學史)일 뿐이다. 너는 몇몇 철학가의 이름과
그들의 저서와 그들이 만든 관용구를 암기하였을 것이다. 그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
철학가들의 상품일 뿐이다. 너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너는
정치가가 될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될 수도 있고 문학가가 될수
도 있다. 어느 분야든 거기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 사회는
너를 배척할 것이며 너는 그 사회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그것
을 변호하는 논리를 개발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너의 철
학이 된다. 그러지 않고 네가 배운 언어들, 그것이 라깡인지
소쉬르인지 들뢰즈인지 브레히트인지 모르지만 그것들을 입에
담아봐야 기껏 철학교수가 되어 남의 철학을 변통하는 장사치
로 성공할 뿐이다."

그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씩씩대었다. 나는 모질게 말하였
다. "라깡의 언어는 라깡의 상품일 뿐 너의 것이 아니다. 네
철학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너의 강단에서 너의 철학을 판매하
느냐 남의 철학을 중개하느냐의 차이다. 철학교수라는 자들이
자기철학을 가진 경우를 본적이 있나? 그것은 불가능하지. 왜
냐하면 자기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강단을 떠나
서 이 사회에 뛰어들어야 하거든. 그 똑똑하다는 너의 스승
철학교수가 저 마광수나 김용옥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
들의 허투루 수작은 스스로 찾아낸 아이템이지만 네 철학교수
란 남의 상품을 파는 중상이 아니더냐?"
나의 언어는 거칠었고 그는 충격 받았을지 모른다. POTE707
님과도 논쟁이 이어졌다면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였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만나고 싶다. 그는 똑똑하므로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십년이나 혹은 이십년 후에 였으면 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거칠었던 언어를 정당화할 아무런 증명이 없
다.

철학가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왜 철학가는 문
바깥으로 한발을 내밀고 골목을 기웃거려야 하는가? 이 문제
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거기에다 형이상학의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다른 모든 학문분야에서 독립시키고자 하는 것
이다. 우선은 이 글발을 더 늘여 써야 하리라.

규룡형이 정외과를 다닐 때 교수는 매우 게으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공부는 너희들이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게 아니잖
아" 그의 수업은 학생들이 레포트를 발표하고 서로 토론하게
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보통은 구석에서 졸고 있는 것이었다.
형이 발표를 하는데 "정치외교란 보편적으로 보아서 어쩌구
저쩌구~~" 자는 줄 알았던 선생이 잠귀가 밝아 어찌 들었는지
"잠깐~! 그 보편적이라는게 무슨 뜻이지?" 형이 답하길 "보편
적이란 곧 일반적이라는 의미로서 어쩌구 저쩌구~~" 봐주지
않는다. "잠깐~! 그런데 그 일반적이란 말은 또 무슨 뜻이지?"


보편적인 게 일반적인 것이면 일반적인 것은 곧 보편적인 것
이지 뭐! 아 그런데 학문이란 논리적이어야 하고 체계가 있어
야 하고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란다. 여기서 논리와 체계와 검
증 이 세가지가 보통 서양 철학사가 이룬 성과라 할만한 것인
모양이다. 예의 그 미국유학파 철학석사가 믿는 구석으로서의
철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 논리와 체계와 검증이란다.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을 비교해서 서구가 조금 더 우월하다고
주장되는 근거로 이 세가지를 내세우는 모양이다. 동양사상사
에는 이 세가지가 없다. 제법 서양철학을 배웠다고 '철학합네'
하는 것은 뭐 '보편적이라는게 뭐지?' 하면 이러쿵저러쿵 대
답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하는 모양이더라.

허나 나는 추궁하련다. 그 논리와 체계와 검증의 그릇에 어
떤 메뉴의 요리를 담아내려 하는가? 그 논리의 논리와 그 체
계의 체계와 그 검증까지를 검증해야만 쓰겠다. 규룡형은 그
보편과 일반에 막혔다지만 나라면 무어라고 대꾸했을 것이다.

특수성의 반대인 보편성이란 여기에서 통하는 것이 저기에서
도 통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다양성의 반대인 일반성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며 그러기 위
해 의속성의 반대인 정체성을 가져야 하고 그것은 다른 어느
것에 딸리어 빌붙지 아니하고 거꾸로 다른 것을 종속시키는
성질을 말하며 그것은 상대성의 반대인 절대성에 의해 확보되
는 바 시간상에서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곧 신비성의 반대
인 사실성으로 증명되는 바 숨지 않아 나타나 보이는 성질을
말한다. 결론은 최후에는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성에서 일반성으로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논
리이고 이 서로 이어지는 연속선에 전후좌우의 방향성이 존재
하여 전체로 하나의 팀이 되는 것이 체계이며 어떻든 최후에
는 눈에 보이는 것이 검증이다.
철학도는 이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경험의 소산일
뿐이다.
하다보니 그렇더라 하는 것일 뿐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왔는
지는 여전히 모른다. 요는 그 경험이 곧 철학에서 연역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정치나 예술이나 문학에서 귀납하
여 나왔더라는 것이다.

어떤 철학가가 그것을 정리하여 '이러합네' 하고 말해보았자
남의 성과를 뒷설거지 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철학가가 되려
수학자나 자연학자나 정치가나 문학가인 이유이며 또 서양철
학의 한계이다. 서구정신의 한계이며 현대문명의 한계이다.
하여 그대 진정 철학을 하려거든 먼저 철학에서 떠나라고 말
하는 것이다. 먼저 다른데로 가서 그것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남의 성과에서 논리와 체계와 검증을 추수하려 들지 말고 스
스로 자연과 사회에 부딪혀서 그것을 발굴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혀 논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검증되지도 않는
동양정신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가 하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밭이다. 그리고 그 밭에는 임자가 없다. 우리
는 그 밭에서 스스로 씨뿌리고 가꾸어 보므로서 또 거기서 논
리와 체계와 검증을 발굴해낼 수 있다. 적어도 아직 손타지
않은 전인미답이다.

진정한 희망을 위하여는 먼저 절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발바
닥 끝까지 절망하고서야 약간의 빛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체험하려 한다. 나는 또 문학의 밭에서 논리
와 체계와 검증을 발굴하려 한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인가?
그게 학문이 되고 과학이 되는가? 된다. 암만 되고 말고.

[문학은 과학이다.]

* POTE707님 ...통신논객

《끝】


제목 : 문장강화2. 낭만이자 축제에서 문학


【 낭만/ 축제/ 문학 】



그는 단지 포크 하나를 그렸을 뿐이다.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평범한 데서 대단한 아름다움
을 찾아내다니 걸작이 아닐 수 없다' 하고 격찬하였다. 그러
나 관객들이 다 그 그림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겨우 접시
에 포크 하나를 그려서 화가가 된다면 어디 화가 못될 사람이 있겠는가?'

또한 평론가의 계몽이 없을 리 없다. '그렇지만 이미 그가
포크를 그려버렸다네. 모방이 되지 않으려면 그대는 차라리
프라이팬이나 구두주걱이라도 그려봐야 할걸세'

비참인 것은 그가 이미 포크를 그려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때늦어 나이프나 내프킨을 그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 되
겠는가? 팝아트는 앤디 워홀이, 큐비즘은 피카소가, 비디오아
트는 백남준이 선수를 쳐버렸다.
좀 늦게 태어난 우리에게 어떤 건수가 남아 있겠는가? 늦게
도래한 자에게는 더 노가다(물리력)가 요구되는 것이 정한 이
치다. 연대 순으로 따져 늦게 될 수록 돈이, 노력이 더 많이
투자된다.
비디오 아트는 팝 아트보다, 팝 아트는 큐비즘 보다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 아방가르의 세계에도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은 자가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크게 먹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더라.
좀 연구하여 컴퓨터아트를 만들어 비디오아트를 제압해 보려
하지마는 역시 돈이 들고 노력이 든다. 백남준은 고물 텔레비
젼 앞에서 자석으로 장난하다가 수직동기를 건드려서 우연히
비디오아트를 개발했지만 이제 내가 낡은 컴퓨터를 가져다 두
고 자석이나 돌멩이나 뭔가로 어찌 해보려 해도 컴퓨터 값이
만만찮다.

음악도 마찬가지. 옛날에 가수들은 편하게 노래불렀다. 이미
자나 송창식이나 참 편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서
태지의 노고를 알고 있다. 창작의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노가
다의 물리력이 어지간하다.
가사는 더 길어지고 박자는 더욱 빨라지고 춤은 더욱 격렬해
진다. 관객은 한 곡의 노래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취
하려 한다. 관객은 또 얼마나 이기적인가?

판소리는 왜 그리 길고 시조창은 또 왜 그리 긴가? 하고 우
리는 선조들을 비웃곤 한다. 그러나 장난이 아님을 알아야 한
다. 경쟁을 하다보면 결국은 무지무지 길어지게 되어있는 것
이다. 랩음악은 판소리처럼 되어버릴지 모른다. 육각수는 '흥
보가 기가 막혀'를 몇번이나 반복하였던가?
군대에서의 기합 선착순을 연상시킨다. 꼴찌에게는 갈채가
아닌 피로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냉엄한 것이다.
거기에 동정도 연민도 불필요한거슬.

낭만의 거품을 걷어내고 우리는 이제 냉정해져야 한다. 음악
이 길어지고 미술이 비싸지는 것이 쥬라기 시절이나 혹 백악
기 시절에 삼엽충의 다리가 많아지고 암몬조개의 나선고리가
길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으 예술이라 해서 고상하고 별다른 것이 아니어든 또한 수
억년 전 바다 밑이나 강변 진흙 개 진창에서 있었던 일을 답
습하는 것 뿐이 아니던가? 거기에 인정이나 동정이 가하리요?

암모나이트나 삼엽충이나 시상화석이 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 세월이 흐르는 정도에 따라 처음에는 점점 숫자가 늘어
나는 즉 삼엽충의 마디수가 늘어나고 암모나이트의 나선고리
수가 늘어나는 일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말기에 오면 제멋대로
변종이 생겨나 버리는데 그 다음에는 일제히 퇴장해 버린다.
즉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늘어나다가 나중에
는 다양해져 버리는 것이다.

이점 음악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 시조
도 처음에는 짧아서 단가라 불렀는데 점점 길어지다가 나중에
는 엇시조니 사설시조니 다양한 변종이 생겨나고 종내에는 없
어져 버리는 것이다.
음악 장르도 미술 영역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적용된다. 중세
의 미술을 말하자면 사실주의에서는 점점 더 정밀한 사실주의
가 되고 건축양식에서는 점점 더 엄격한 양식이 되다가 일정
한도를 넘으면 급기야는 다양한 변종이 생겨나서 엉망이 되어
버리고 그 다음은 일제히 퇴장한다.
오페라건 패션유행이건 마찬가지여서 인간의 꾀부리는 재조
란 십억년 전 조개화석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원리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거슬.

공룡이 덩치가 커져서 멸종했다는 말도 있고 혜성이 충돌해
서 멸종했다는 말도 있지만 맘모스도 에뮤도 이러한 순서를
거쳐서 멸종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상품이라고 예외는 아니어
서 거리에 나가보라. 성능경쟁, 음질경쟁 화질경쟁이 광고도
요란하여 축포처럼 울려퍼지고 축제의 밤처럼 난삽해지고 축
제의 뒤끝처럼 쓸쓸히 퇴장하고 마는.

과학자는 연구소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하릴없이 배회하는데
예술가는 구렛나루 텁수룩히 기르고 파이프 꼬나 물고 오만
포옴을 다잡는 데서 별스런 것이랴. 결국에 매너리즘의 모가
지처럼 점점 길어지다가 종래에는 다양한 잡종이 되고 퇴장하
여 화석이 되고 만다는데 이의를 달수 없는 일이어늘.
그러므로 예술이니 문학이니 과학보다 한수 위로 특별히 쳐
줄 일은 도무지 없는 것이렸다. 신비가 죽고 기적이 죽고 낭
만이 죽고 삶이 죽고 그대 또한 언젠가는 겨우 화석으로 남아
다행이려니.

《끝】


제목 : 문장강화3. 골동유감


【 골/ 동/ 유/ 감 】


IMF시국이라 호화 사치품 값이 떨어지는 분위기다. 서화, 골
동품 값도 거품이 내려야 할게 아닌가 하는데 웬걸 국보급 골
동 값은 두배로 뛰고 있단다. 연인즉슨 일본에 밀반출되는 골
동품은 달러값에 연동 되는지라 일부 재벌들이 골동을 사재기
한단다. 세미프로 도굴맨인 일용씨 말이니 맞을 듯.

이런 시국에 아직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하
려는 것이 아니다. 요는 그 골동의 값어치라는 것이 과연 근
거 있는가 하는 거다.
일요일 오후에 KBS에서 /TV쇼 진품명품/이란 것을 한다. 시
청자들이 광이라도 뒤져서 찾아온 간장종지나 떡살개나 묵은
족자 하나라도 전문가들이 감정해주는 프로다.
일용씨 한테 들은 얘기인데 그 감정가들의 감정이란 것이 자
기의 높은 안목으로 보건대 약간 구린데가 있단다. 헐해 보이
는 것은 비싸게 평해주고 오히려 비싸야하는 진짜 물건은 싸
게 때려서 저들과 선이 닿는 인사동 골동상에서 뒤로 사들일
거란다.
내 관심은 골동을 감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거다.
문화재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리요. 참 문학 이야기
를 한다면서 골동 얘기를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문학도 그런 식으로 감정단을 구성해서 감정을 한번 해보자
는 거다. 책이 많이 팔리고 적게 팔리고는 출판사의 홍보기술
에 달려있지만 훌륭한 평론가라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진가
를 찾아내고 헛된 작품의 거품을 걷어내야 하는 거다.

'취미가'에서 프라모델 경연대회인지 무슨 대회를 열어서 저
들끼리 상도 나눠갖고 하는데 종이값이 올라서 칼라지면을 뺀
'밀리터리 모델러' 편인 구름은 불만이 여간 아닌 모양이다.
"모형작품의 가치를 그런 식으로 품평회 열어 점수 매기다니
턱없다. 1달러 짜리 그림이 100만 달러가 되기도 하고 참말로
예술이란 것은..... 구시렁구시렁"

1센트 짜리 우표가 100만 달러짜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표상들이 값을 잘못 매겨서 1센트짜리가 1억배 비싸
져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표상들이 제대로 값을 쳐주어
서 비싸진 거다. 여기에 얼마든지 혼선이 있다.

가치라는 것은 시절따라 상황따라 상대적이다. 그러나 모든
상대성은 어떤 절대성의 기초 안에서만 유효하게 성립한다.
무슨 말인가?
우표값이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 하지마는 아무리 비싸도 전
체 우표시장의 시장규모 한도 안에서 성립하는 것. 결코 그것
을 초월하지는 않는다는 거.
그렇다면 모형작품의 가치도 그 시장 안에서 시장의 유동성
정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물론 지금 조립모형은 이렇다
할 시장이 없으니까 예외로 쳐야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시장
이란 곧 돈으로 거래되는 시장만을 굳이 의미할 필요는 없다.

문학에 대해 평한다면 그 문학의 가치는 상업적 가치도 있고
순수한 문학적 가치도 있다. 이것은 별개일수 있다. 상업적
가치는 시장규모가 결정하고 문학적 가치는 그 작품이 문화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가 결정한다.
상업적 가치는 출판사가 알아서 챙겨주고 문학적 가치는 평
론가가 알아서 챙겨준다. 물론 평단이 침체되어 있는 지금 우
리나라 사정이야 고려되어야 하지만 실인즉 그렇다.
시장에서는 평론가, 출판사, 독자의 세 변수가 움직이는 방
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복잡성을 나타내지만 작품 그 자체의
고유한 절대적인 가치는 절대로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금이
땅속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보든 알아보든 금의 값어치
는 고유한 것이다.

시장의 평가를 떠나서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한다. 이것은 문
학에서도 골동에서도 조립모형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치가 상
대적이라는 것은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가 상대적이다는 것이
다. 그것은 시장의 수급상황에 따라 변하는 돈의 문제이지 문
학의 문제나 골동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취미가의 심사위원들이 공정하였는가와는 별개로 그 모든 작
품의 고유한 절대가치는 절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
장에 등장하면 상대가치로 퇴행하지만 그것은 시장의 문제이
고 돈의 문제이지 작품의 탓은 아니다.
물론 심사위원단의 습성이란 가장 우수한 것을 선별하는 것
이 아니라 가장 뒤탈이 없을 것을 선정하는 법이다. 아무러나
대종상보다야 잘 고르면 된다. 애니깽이 뭐냐 말이다. 참말로.

그렇다. 문학에도 그림에도 음악에도 우표에도 고유한 절대
가치가 존재한다. 그것은 작품성이고 예술성이며 음악성이고
희소성이다. 다만 우리 혜안을 가지지 못하여 그것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물론 이 고유한 값어치는 돈이라는 화
폐수단에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흔히 비교하는 걸로 알렉산드르 뒤마의 삼총사와 스탕달의
적과흑이 있다. 둘은 동시대에 나서 비슷한 시기에 대작을 발
표했다. 뒤마의 삼총사는 크게 성공했고 스탕달의 적과흑은
당대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중 평론가들의 노력에 의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왜 평론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무수한 독자들에게 읽힌 삼총
사 보다 몇몇 소수 문학도에게나 읽혀진 적과흑에 더 주목하
는가? 그것은 삼총사보다 적과흑이 우리 인류에게 미친 영향
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째서 무수하게 읽혀지는 삼총사보다 별로 읽혀지지 않은
적과흑이 더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은 베스트 셀러가 독자의
심중에 영향을 미치는데 비해 진정 위대한 작품은 예비작가들
의 심중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삼총사는 독자들에게 읽
는 재미를 주지만 적과 흑은 작가들에게 소설이란 어떻게 써
야하는지 모범을 보여준다.
적과흑은 사실이지 재미없다. 그러나 비교해보자. 삼총사는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적
과 흑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여
러 가지 생각들을 다루고 있다. 스탕달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소설가들은 '소설은 사건을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하는 고정
관념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사건이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
라 생각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제시하는 것은 문학에든 골동에든 음악 미술이든 고유한 가
치,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들이 그것
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돈으로 평가되는 일부분의 가치에 휘
둘릴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돈의 잘못이지 문학 예술의 잘
못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훌륭한 평론가이지 문학 예술의 가
치란 알 수 없다 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 취미가, 밀리터리 모델러 .....모형잡지
일용씨..... 전통찻집 하는 골동품 전문가 (약간 아마추어)
구름 .....GO SOCIETY.3 열린사회의 논객


《끝】
1. 문장강화4.....산문정신으로 돌아가라.
2. 문장강화5.....방법적말하기로서의 산문
3. 문장강화6.....비로소 노래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끝】


제목 : 문장강화 4..... 산문정신으로 돌아가라.

【 산문정신으로 돌아가라 】



문장이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적어도 다섯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소재(素材), 담화(談話), 주제(主題), 구성
(構成), 문체(文體)이다. 비로소 갖추어야 한 줄 문장이 되고
하나가 빠지면 문장이 안된다.

그리하여 문장은 이솝이 씨뿌리고 호머가 읊조리고 세익스피
어가 일구었던 것이다. 공자가 시경을 엮고 당시(唐詩), 송사
(宋辭), 원곡(元曲)을 거쳐 명대에 소설(小說)이 나오는 것은
정한 이치대로 가는 것이니 문장이 되려면 이 다섯가지가 구
비 되어야 하고 그중에 하나가 빠지면 문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어서 연암(燕巖)이 허생전을 짓고 다산(茶山)이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문학 예술에는 상업성을 떠난 고유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말
했다. 그것은 독자에게 읽히느냐의 여부를 떠나, 시장에서 팔
리느냐의 여부를 떠나 존재하는 문학예술의 고유한 값어치라.
인간의 기호와 무관하게 미학적으로 내재하는 원리가 있다.
설사 인간이 눈멀어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리
더라도 금은 금이고 옥은 옥인 것, 그 빛남을 가릴 수 없을진
저,

소재는 그냥 말씀이다. 말은 문장이 되기 전에 인간의 말하
는 그대로의 말이다. 그것이 소재이다. 말일 뿐 문장이 아니
다. 이 소재가 담화를 얻고 주제를 받고 구성과 문체를 획득
하여 비로소 문장을 이루는 것이다.

담화(談話)는 말하는 방식이다. 말은 말인데 어떻게 말하지?
담화가 있어야 된다. 이솝의 말은 짧고 호머의 말은 긴데 한
국의 속담은 문장이 못되고 마는 것이니 담화가 아니된 까닭
이다. 이솝이 은유하는 담화를 개발하고 호머가 서사하는 담
화를 개발했거니 우리 속담에는 은유도 비유도 있건마는 담화
가 없으니 그것이 문장이 못되는 것이다. 말은 한다고 문장이
되는게 아니라 담화를 얻어야 겨우 문장이 된다.
시나 소설이나 독립된 장르로 문장이 되나 속담은 담화에 적
절히 인용될 뿐 독립하여 장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문장에
미치지 못함이다.

우리 소설의 뿌리는 전설이나 민담이다. 담화가 발달하지 못
하였다. 이나라에 문장이 발달 안하는 것이 그리 이유있다. 비교해보자. 헬레니즘을 이룬 그리스 신화나 헤브라이즘을 이
룬 유태설화가 다 담화가 발달한 경우다. 인도의 베다도 발달
한 담화인데 중국의 경우는 담화가 별로다. 그러니 중국에도
노벨문학상 기대말어.

주제는 담화를 인간사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담화가 곧 문장
이 되지 않으니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하는 이유를 얻지 못한
까닭이다. 적어도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동아세아의 담
화 부재는 철학의 빈곤에 기인한다. 인도철학의 넉넉함은 인
도설화의 넉넉함으로 이어진다. 사상이 서고서야 담화가 선다.
(우리나라 전설의 7할은 인도 불교설화이다)

구성은 기승전결의 문장구성이다. 시가 될것인가? 속담이 될
것인가? 겪언이 될 것인가? 소설이 될 것인가? 이것을 결정하
는 것이 시스템 구축으로서의 구성이다. 곧 문학이다. 여기서
문장이 스스로 완성하고 독립하여 학문이 된다. 구성이 안되
면 문학이 아닌 그냥 문장이고 담화고 말일 뿐 과학으로서의
학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문체는 산문(散文)이다. 문체의 발달은 산문의 발달이다. 이
것이 핵심인 것이 문체반정이 나올 정도로 사생결단이다. 수
필 이야기는 결국 문체이기가 된다. 수필을 쓰라는 것은 산문
을 이루라는 것인즉 문체를 획득하라는 것이다.
임어당이 임어당인 것, 김성탄이 김성탄인 것, 피천득이 피
천득인 것은 산문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산문을 득
하였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아즉 문장이라고는 말할수 없을지
니 하여 이상(李箱)을 숭배하는 것은 그가 산문을 알았기 때 문이다.
이문열을 문적이라는 것은 여즉 산문을 모르기 때문이고 사
회주의리얼리즘을 문장에서 빼는 것은 산문이 아니되기 때문
이다. 이미 산문이 되는가?

문학은 과학이다. 거기에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가 상업성과
독자의 기호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까닭이다. 수학이나 물리
학이 과학인 것은 그것이 장사가 되고 인간이 원하고를 떠나
일반자로서의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한 독립, 피타고라가 과학한 것이 돈벌려고도 재미로도 아니다.
문학은 과학이어야 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은 문학의 과학성
을 부정하고 있으니 일반자(一般)로서의 순수과학이 먼저 존
재하고 인간이 그 과학을 빌려쓰는 것이지 인간의 편의를 위
해 과학을 창조해 낸 것이 아니요 독립하여 문학이 먼저 존재
하고 인간이 빌려쓰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고 문학을
위조해낸 것은 아닌 것. 이를 깨쳐 아는 것이 산문정신이니
진정한 문학의 출발점이라. 그대 먼저 산문정신으로 돌아가라.

*. 진자의 등시성은 발견된 과학의 이치요 기계시계는 발명된
응용상품. 유도전류의 이치는 순수과학, 전기구동모터는 제조
된 응용상품이다. 허나 문학은 상품과 과학이 한덩어리 되어
있다. 문학에도 그런 순수과학을 구분하여 작품성, 문학성,예
술성이라고 말하는 거. 먼저 산문을 알아야 할 일이니 과학을
모르고 문학을 하는 자는 장사꾼일 뿐.

2월 첫째 주

《끝】

제목 : 문장강화 5.....방법적 말하기로서의 산문

【 방법적 말하기로서의 산문 】

입속에서 맴도는 생각이 비로소 문장이기 위해서 /방법적 말
하기/로서의 산문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산문의 이치는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순수하게 존재한다. 발견되는 원리일
뿐 제조, 발명, 가공되는 상품이 아니다.
문학작품은 물론 상품이지만 작품이 상품이지 문학이 상품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 의해 제조된 상품으로서의 문학은 서가
에나 도서관 한구석에 자리하지만 일반자로서의 문학은 인간
과 상관없이 불멸히 존재한다.

형제여~!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를 떠나 방법적 말하
기로서의 산문정신으로 돌아가라~!. 말하려 들지 말라. 먼저
침묵하고 기어이 깨달아라. 거기에서 산문을 득하라.
산문(散文)이라면 운문(韻文) 아닌 산문을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에선 넓은 의미로서의 방법적 말하기라 운문도 산문에 포
함된다.
무엇인가? 이치의 획득이다.

고대문학이 (시가詩歌)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산문을 획득하
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입속에 맴도는 말을 엮어 문장을 이룰
이치를 획득하지 못하였으니 형식을 주어 운문이 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산문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당시, 송사, 원곡을
거쳐 명대에 소설로 발전한다.
매월당의 금오신화나 중국의 요재지이, 전등신화 따위가 바
로 소설이 되지 못하는 것은 산문을 획득하지 못한 까닭이다. 말하여 산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얻어 산문을 이룬다. 금오신화는 여즉 문장의 가치보다 훈화(訓話)의 가치로 선다.
수필이 문학의 꽃인 것은 산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은 담화를 길게 늘이고 구성을 부여하면 된다. 거기에 문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산문은 곧 문장의 뼈대가 되는 문체다. 문장가가 문장가인 것은 문체를 발견하기 때문인 바 문체가
죽으면 상품일 뿐 과학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다.
수필은 문체가 전부다. 문체가 없는, 산문이 죽은 수필은 그
저 생활수기일 뿐이다. 시가는 운문의 형식에 기대고 소설은
담화와 구성에 기대지만 수필은 오로지 문체에 기댄다. 그것
이 산문이다.

이솝이 말한 바 있으나 전래민담을 주워모은 거고 호머가 노
래하였으나 운문을 탈피하지 못하였으며 세익스피어가 희곡을
썼으나 담화와 구성을 이루었을 뿐 진정 문체는 완성하지 못
하였으니 소설이 아닌 희곡의 한계다. 여기까지 운문의 역사.
스탕달이 적과 흑을 써서 인간의 내면을 묘파하고 (그것이
어찌 운문으로 가능하랴. 세익스피어의 서사시 흉내와는 다른
것을) 톨스토이가 우주적 시야로부터 한 인간의 내면으로 시
점을 압축해가는 방법적 말하기를 득하였으며 토스토옙스키가
반대로 주위환경을 묘파하므로서 내면을 드러내는 방법적 말
하기를 이룬 것이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써서 하드보일
드로 일가한 것이나 산문정신의 귀감이 될 법하다.

인간이 문자를 얻고서도 /방법적 말하기/를 몰라 방편으로
시가(詩歌)를 제조하니 노래로 문학을 대용하였다. 산문을 얻
는데 5천년이 흘렀으니 수학보다 어려운 것이 문학이다.
운문엔 문체가 없다. 운문 그 자체가 문체인 까닭이다. 산문
은 곧 문체를 말하는 바 운문도 문체라면 산문에 속한다. 운
문이 운문인 것은 운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운은 리듬이며 리
듬은 호흡이다. 산문은 그 리듬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문장
에 감추는 것이니 산문에게도 운이 없고서야 문장이 아니된다.

방법적 말하기로서의 산문이 일반자로 독립하는 것은 문체라
불리는 문장의 호흡이 문장 그 자체의 원리로 내재해 있어 화
성인이 쓰든 토성인이 쓰든 지구인간 쓰던 결국은 같은 난관
에 봉착하는 즉 인간의 심사 이전에 독립하여 자재하는 글자
와 글자, 구절과 구절, 글귀와 글귀 사이에 이룸이 호흡을 얻
어 숨쉬어 생명처럼 생동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극명 드러나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말하는 것,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
기에 접근하는 것인 까닭이다.

*. 이나라에 문호가 없는 것은 산문정신 -- 방법적 말하기가
없는 까닭이다.

2월 첫째 주

《끝】

제목 : 문장강화6..... 비로소 노래하라.

【 비로소 노래하라 】


음악이 음악인 것은 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곡이 없다면
음악은 과학이 될 수 없다. 피타고라스가 물 담은 컵들을 진
열해 놓고 막대로 쳐서 음률을 구분했을 때 그것은 음향일 뿐
음악은 아니다. 그는 수학자이지 음악가는 아니었던 것이었다.

음악은 리듬과 멜로디, 하모니로 이루어지지만 본질은 멜로
디다. 리듬은 멜로디의 구성소일 뿐이며 하모니는 멜로디의
확장된 형태일 뿐이다. 곡은 곡조, 멜로디가 곡이며 음악가는
멜로디를 만드는 사람이다. 연주자나 가수는 음악계의 종사자
일 뿐 음악가가 아니다. 본질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좋은 노래는 많다. 그러나 그것은 시가(詩歌)이지 음악은 아
니다. 비로소 음악이 되는 것은 멜로디를 얻어서인 것이다.
멜로디를 창조하는 사람은 작곡가이며 바흐나 모짜르트나 베
토벤이나 그런 악인들이다.
연주가 악기에 의존하고 가수가 시가에 의존하는데 비해 곡
은 순수하게 독립하여 개별자로 존재한다. 정체성을 획득하고
스스로 완성되는 것이다. 거기서 음악은 상품이 아니고 인간
을 위하여 이바지 하는 종속변수에서 벗어나 스스로 과학이
된다. 음악은 과학이다.

이러한 예술의 성질, 곧 예술성을 문학에 대면 문학성이다.
문학은 산문에 이르러 비로소 시가로부터 독립하므로 산문정
신을 논하여 문장강화다. 음악이 곡조면 문장은 산문이다.
이문열이나 사회주의리얼리즘이나 이런 류를 비판해야 하는
것은 '노가바'에 비유할수 있다. 노래가사 바꿔부르기다. 곡
은 두고 가사만 바꾼다. 가사는 문장이지 음악이 아니다. 고
로 노가바는 음악이 아니다.
작가가 혹 널리 익히는 좋은 소설을 썼다 해도 그것이 문체
를 획득하지 못하는 한 노가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협지
따위의 3류가 3류인 것은 엄밀하여 노가바에 해당하기 때문이
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마찬가지. 황석영이 좋은 문장을 썼
다해도 문호가 되지 못하는 것은 고리키의 어머니를 한국어로
번안한 국제노가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의 문단풍토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와서 안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노가바라서. 거기 산문이
죽고 거기 곡이 없으며 개사된 번안곡들 그득할 뿐이다.

그대 문학도여. 작사가가 되려 하지 말고 가수나 연주자가
되려하지 말라. 작곡가로 우뚝하니 서라. 그대의 곡을 쓰고
그대의 곡을 해석하라. 그대의 산문을 쟁취하라.
운문이 무엇이냐? 정형시란 개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유시가 되고 산문시가 되면서 문장이 되어가는 것이다. 물
론 연주자도 가수도 악사는 되니 정형시도 문학은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은 산문정신에 있다. 그 정형을 끝없이 때
려부수는 데서 문장이 나온다.
트로트가 팝으로 변하는 것은 곡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음악. 노래하는 시인도 손기술이 뛰어난 연주자도 아닌 오로
지 음악 그 자체에 정통하고서야만이 이룰 수 있으리라.
담화에 능하고 구성에 재주 있더라도 문체에 관(觀)하지 못
하면 기껏 개사할 뿐이다. 그것이 혹 읽는 재미를 얻어 팔리
더라도 상품일 뿐이다. 일반자로 독립하여 문장이려면 산문을
얻어야 한다. 문체에 관(觀)하여야 한다. 방법적 말하기다.

문호가 되어야 하리라. 대가가 되어야 하리라. 먼저 일가를
이루어야 하리라. 그러려면 연주자나 가수의 종속적 위치를
벗어나 스스로 곡을 쓰는 작곡가가 되어야 하리라. 담화나 구
성의 재주에 의존하지 말고 산문을 얻어야 하리라.

2월 첫째 주

《끝】









1. 서/ 강/ 한/ 담
2. 설날고금
3. 진정한 믿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끝】


제목 : 서/강/한/담

【 서/ 강/ 한/ 담(西江閑談) 】


고향마을은 남산 밑에 있는데 동구에서 보면 동산이 된다.
길은 북에서 남으로 달리고 벌판을 지나면 서쪽으로 강이 흐
른다. 정히 동서남북이다.
머리가 굵어지고 간혹 마을을 떠나서는 방향감각에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의당 산은 동산(東山)이고 강은 서강(西江)
이며 벌판은 남녘들이고 도시는 북쪽에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외지에 오니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열네살 때 안강 못 미처 있는 사방 약수터에 갔다가 무심코
산있는 쪽이 동쪽이거니, 해가 두어발이니 오후 4시 쯤이거니
했다가 혼난 기억이다. 그 산은 해뜨는 경주 남산도 해지는
벽두산도 아니었던 거. 그때 느꼈던 알싸한 공포와 혼란을 잊
지 못하지.
방향감각, 시간감각은 상당한 강박이 된다. 처음 낯선 데로
와서 어리둥절하며 혹시 길잃으면 어쩌랴 했던 유년의 두려움
은 인상에 각인되어 잠재의식으로 굳어진다.

다섯 살 때 산내면에서 경주로 이사온다, 꼬마는 버스 창밖
으로 보아 지나온 길을 기억하고 있다. 팔려가는 진돗개가 섬
을 잊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듯이 애절하게. 다행히 이사온
포석마을도 고향 장성백이 처럼 산은 동쪽, 강은 서쪽, 길은
남북을 달리고 있었으므로 쉽게 적응한다.
나중 꼬마 때 기억을 더듬어 찾아본다. 버스 차창으로 지나
친 마을들, 꼬마는 "엄마 여기가 어디야?" 하고 물었고 어머
니는 "여기가 동방이란다" 하고 대답했었어. 기억한다. 버스
는 동방을 지나왔다. 그러나 경주와 산내 사이에 동방은 없다.
동방은 불국사 쪽에 있는데 거기엔 내 기억 속의 그 돌담과
그 거리풍경이 없다. 기억은 오래도록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것은 마치 방향이 뒤틀려버린 사영공간의 미로 속에 빠져버
린 것과 같다.

고향의 산과 강은 올곧은 동서남북, 경주는 시가지도 그리
바둑판이다. 어디로 가든 동서남북을 먼저 파악하는 버릇이다.
초행길이 밤이라 방향 모르면 여러번 다녀도 헤매곤 한다. 방
향이 분명하면 처음 본 시가지라도 기억한다. 외지생활이 오
래인 지금도 간혹 무심코 산을 보거던 동쪽이거니 강을 보거
던 서쪽이거니 방향을 착각하곤 한다.
방향과 시간이 틀린다는 것은 우주의 근본이 뒤틀려버린 것
과 같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엄청
난 혼란이다. 내 모든 인식과 믿음과 당위의 보루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된다.

인간의 인식과 행동에 시스템이 있다. 먼저 근본이 되는 뼈
대를 인식하고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지식을 수용하고
축적하고 또 행동한다.
낯선 데로 와서 그 거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먼저 좌표가
되는 방향을 기억해야 한다. 표준이 되는 방향감각을 잊어버
리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져버려 아무것도 기억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 혼란이 오면 머리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나의 방향감각은 어린 시절 내 고향의 산과 강이 만들었다.
그것은 내게 익숙하다. 그 고향마을과 같은 지형의 도시에 있
을 때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이제 어데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가 충분히 정리된다.

흔히 가정의 결함을 이야기한다. 결손가정이 되면 그 소년의
정서는 불안한 것이 된다. 요즘 클린턴이 일련의 스캔들로 궁
지에 몰리고 있다. 또한 어린시절의 불안했던 가정생활이 거
론된다.
아버지 어머니 형과 아우가 또 하나의 좌표가 되듯이 산과
강도 마찬가지. 고향의 산과 강은 내 일평생 그 모든 인식의
시스템에서 바로미터가 된다. 유년시절 자주 이사를 가서 그
때마다 방향감각에 혼란을 일으킨다면 그 소년의 정서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보름달이 뜬 밤 꼬마는 동구밖 길을 걸으면서 구름이 달 따
라가는 것을 본다. 아니 달이 구름 따라 가는 것이다. 아니
달과 구름이 나를 따라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달과 구름을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상 하나.
아홉 살 쯤 처음으로 남산 꼭대기 전망대에 올랐다. 경주 시
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동산 너머에 또 산이 있고 서산 너머
에도 산이 있다. 강은 어데론가 흘러가 버리며 서울은 저 멀
리 알 수 없는 어디엔가 있다. 인상 둘.

아기는 엄마가 안보이면 운다. 엄마는 다시 나타나고 아기는
거기서 믿음 가진다. 지금 보이지 않지만 곧 나타날 것이란
믿음, 그 믿음으로 하여 아기는 세상을 전체적으로 받아 들인
다. 부모가 헤어진다면 아기는 믿음을 배반당한다. 어머니의
존재로 하여 이룩되었던 미래의 모든 계획이 날아가 버리며
학습한 가치가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러한 회의는 자기존재의
근본에 대한 회의로 이어져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 존재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죽음이다.
고향의 산과 강 또한 마찬가지. 그 산이 동산이었듯 이 나라
의 등이 동쪽에 있는 태백산맥인 것도 당연하고 경주시내가
마을에서 북쪽에 있듯 서울이 북쪽에 있는 것도 당연하고 그
강이 서쪽에 있어 경주 서천이었듯 이 나라의 강도 한강 금강
할 것 없이 서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서울 와서도 성북은 가
고 싶지 않다.

이제 지구는 둥글다고 허공에 매달려서 동서남북은 사라져
버렸다. 상대성과 불확정성, 양자이론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믿는다. 동쪽의 반대편에 서쪽이 있고 남쪽의
반대편에 북쪽이 있는 것. 서울에도 부산에도 해는 뜨며 그쪽
이 곧 동쪽이다. 지구가 둥글고 우주가 허공에 매달려 있어도
더 근본이 되는 어딘가에 반드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존재 한
다.

다섯 살 때 고향 장성백이를 떠나오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
는 풍경을 하나 놓치지 않으려 했듯이 내 일생의 화두는 그런
것이다. 존재의 근본이 되는 어떤 규칙성. 소년 적부터 그 화
두에서 한시도 떠나 본 적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진보주의자고 변화를 환영하지만 근본이 되는
것, 고향 같은 것, 어머니 같은 것, 전통적이며 고유한 것으
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는 조금도 참을수 없는 즉 때로 완고
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를, 고향을, 근본을 모르고는 낯선 동리에 와서 방향감
각을 상실해 버린 것 같은 불안에 빠져 한걸음 움직이지 못하
지. 세상이 다 변해도, 인터넷이고 세계화래도 기본은 변해서
안돼. 그것은 어머니 같은 것, 고향 같은 것, 그러한 본질을
완고하게 지키므로서 오히려 엄마 믿는 아이처럼 용감하게 뒹
굴을수 있는 거.

서/강/한/담이다. 산이 동쪽에 있고 강이 서쪽에 흐르듯 너
무나 당연하고 흔들리지 않아.
소년 적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수? 방향이 온통 뒤틀려버린,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의 병, 사영공간의 미로처럼 세상이 꼬
여버린. 시간과 공간이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그런 무서움
에 잠 못 이루고 밤새 뒤척인......!

*. 산이 서쪽에 있고 마을이 서산 아래 있다면 아침에 반짝
볕들 뿐 오후 내내 볕이 들지 않는데 어찌 살것인가? 인간은
이슬 마르고 기온 올라간 오후에 활동을 많이 하지. 혹 서산
밑에 살거든 동산 밑으로 이사오는게 현명하다. 벌판은 남녘
들이어야 여름 볕을 길게 받고 도시는 북쪽에 있어야 남향집
을 지어 겨울 바람을 막는다. 이것이 섭리.


《끝】


제목 : 설날고금

【 설날고금 】


까치설날이다.
까치라는 말은 산까치 때까치 하는 까치가 아니고 사실은 잘
못된 말이다. (동요작가의 실수) 원래는 아지설, 아기설이다.
( 까치 = 아치 = 아지 = 아기) 송아지 망아지의 아지인데 경
상도에서는 그냥 작은설이라고 한다.

설날이 내일인데 오늘이 작은설이 되는 것은 설날의 삼가함
이 오늘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늘 밤 자정에 설이니까 내
일부터 설인 것이 아니라 실은 오늘이 설이다. 왜냐하면 옛날
의 날자 감각으로는 아침 해가 돋아야 하루가 시작되는 법인
데 한 해의 시작은 오늘 밤부터이므로 내일은 이미 설 다음날
이 되어버리니까. 이것은 날자 감각의 차이. 옛날 농투성이
사고방식으로서는 해가 떠야 날이 시작되고 따라서 책력을 아
는 선비들이 무지한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어느 날이 설인지
설명하기가 곤란하여 아으 다롱디리, 오늘은 작은 설, 내일은
큰 설 타협을 보았던 것이리라. 시각으로 따져도 자(子)시는
밤 11시 부터 새벽 한시니까 설을 나눠가질 밖에 도리없다.

설이 왜 설인고? 혹자는 서러워서 설이라고 한다는데 (옛날
라디오에서 설만 되면 이런 꺼벙한 소리 하는 사람이 많았지)
설은 선다(일어서다)는 의미이며 이는 시작한다는 뜻이란다.
또 낯설다, 새롭다의 설도 되겠다. 한 살, 두 살 할 때의 살
로 보는 이도 있는데 살은 살다의 삶이므로 좀 어색하다.

바닷가 사람들은 썰물을 들물이라고 하고 밀물을 설물이라고
하는데 보통 '물이 선다'고 한다. 선다는 것은 썬다는 것이
아니고 든다(들물)는 것은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고 실은 정반
대로 덜어진다(減)다. 13년 전 어부노릇 할 때 설물(밀물)과
썰물(들물)을 거꾸로 알아들어 혼난 적이 여러번.
말은 흔히 거꾸로 전달된다. 어원 추적엔 엉터리가 많다. 쉽
게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7할은 가짜라고 봐야 하는 것은 어
원만큼은 적당히 거짓으로 지어내도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
다. 맞다는 증거도 틀리다는 증거도 없으니까.
내 이야기는 서너가지 다른 이야기들을 검토해서 그 중 신빙
성 있는 것을 내세우는 거. 물론 100퍼센트 정확하다곤 말할
수 없지.

언어에 대해서는 흔히 잘못 알게 되는데 오늘이라고 하면...
올(오다) + 날 = 오날 => 오늘 이렇게만 여기는데 오류가 있
다. 물론 애매한 바가 있으나 이것도 (씹 => 씨 + 입)론 처럼
함부로 결론을 내리면 되는게 아니고 경상도 말로 흔히 오지
다 하는데 잘 된 것을 올되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오는 다가오다의 오가 아니라 올되다의 올
이다. 올해라 하면 오는 해의 올해가 아니라 오지다 = 옴팡지
다 = 오로지 = 올된, 그 의미는 /참된, 여물은, 전체의, 제대
로 된, 맞는, 당한/의 의미다.
경상도 사람은 흔히 팔다를 사다라고 말하고 사다를 팔다라
고 말한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추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교과서의 고시조)
/얼마 샀니? 오백원 샀어/
이것은 오백원 어치를 샀다는게 아니라 팔았다는 의미다. 물
건을 팔았으니 돈을 사는 거다. 말은 거꾸로 전달된다.
시골 할머니들이 '오능게'라고 하면 오는 해, 곧 올해로 알
아듣기 쉬운데 실은 내년을 의미한다. 내년이야 말로 올 래
자(來) 내년이다.
올 + 해 = 今년
올 해 = 來年 = 來(올)年(해)
그러니까 올해는 1998년이고 오능게(오는해)는 1999년이다.
올해는 이미 왔는 고로 올(미래형)해라고 하면 틀린다. 올해
의 올은 올되다, 오지다의 올이고 오는해의 '오는'은 다가오
다의 오다이다.
한자로는 올해는 금년이고 올(來)해는 내년이어서 혼란에 빠
져버린 고로 오는해를 우리말이 아닌 한자어로 내년 혹은 명
년이라 쓰는 거.

고어로 오늘은 오날, 어제는 어제, 그저께는 아레, 내일은
할제, 모레는 모레란다. /아레 <= 어제 <- 오날 -> 할제 =>
모레 => 글피/인데 할제는 어제와 발음이 비슷해서 혼란이 있
는고로 내일(來日)로 변해버렸다.
어제와 할제의 제는 이제, 저제, 그제의 地境(칸마디) 개념
이다. 할은 양성모음으로 다가올 것을, 어는 음성모음으로 지
나간 것을 나타낸다. 아레와 모레의 레는 이레(7일) 여드레
(8일) 아흐레(9일)의 숫자개념이다.

설은 삼간다는 의미가 있다.
언어야 말로 삼가해야 이해가 될 것.....조심조심...!
그새 날이 바뀌어서

설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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