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3960 vote 0 2002.09.06 (12:31:33)

제목 : 진정한 믿음

【 진정한 믿음 】


교통사고다. 승용차가 불붙었는데 운전자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십여 명의 행인이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
도 막 불길에 휩싸이려 하는 운전자를 구하려 뛰어들지 아니
한다.

이때 우리의 호프, 의리의 사나이 돌쇠 등장한다.
"아으 이땅에 진정한 의인은 없는가? 왜 아무도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하려 들지 않는가 저깟 불길이 뭐가 무섭단 말인가"
하고 뛰어들려는 찰나 퍼뜩 떠오르는 생각. 이렇게 많은 사
람들이 모두 비겁자 일리야 없다. 뭔가 이유가 있다. 그렇다
면 다들 무엇을 기다리는지 팔짱끼고 지켜보기로 하자.
그 사이에 이십 여 초가 그냥 지나가더니 꽝 ~*! 자동차는
폭발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운전자를 구하느라 달려든다.
다들 자동차의 폭발을 겁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불행을
모른채 할 비겁자는 아니었지만.

돌쇠가 지켜보고 있은 20초라면 운전자를 세 번 구하고 남을
시간이다. 그러나 아무도 구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도 자동차
가 언제 폭발할지 알지 못한다. 자동차는 영영 폭발하지 않을
수도 있고 1초 만에 폭발 할 수도 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
하는가?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야 했는가? 현명하게 자동차의
폭발을 기다려야 하였던가?

위 사건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 두번 쯤
이런 경우를 당할 것이다. TV에 흔히 나오기로 많은 행인들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아무도 구하려 들지 않은 냉혹한 세태를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심리는 그렇다. 아무도 뛰
어들지 않으니까 혹 중대한 무슨 이유가 있나 싶어서 지레 겁
먹고 못 덤비는 것이다. 남이 하면 하는게 소심한 우리 이웃.

생각하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같이 익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보도되는가? 현명하게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
람은 살도록' 침착해야 하는가? 의협을 발휘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구조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구조해야 한다. 나의 의견은 그렇다. 그
대 진리를 믿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 필요한 것도 믿
음이다.

미국에서 특히 이런 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있다. 원체
위험투성이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의인을 영웅시 하는 문화
가 정착되어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긴급출동 911, 부터
잡지나 TV드라마는 물론 소설,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런 경우
를 많이 다룬다.

근래 본 것으로 '크림슨 타이드'와 '랜섬'을 들 수 있다.

크림슨 타이드에서는 가상의 핵전쟁을 그리고 있다. 러시아
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반군이 핵기지를 점령하여 정부군이 공
격할 경우 미국을 선제 핵공격하겠다고 위혐한다. 미국 핵잠
수함이 반군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캄챠카반도로 출동하고 교
전이 벌어진다. 사령부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라는 명령이 떨
어지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상태에서 사령부와 교신이 두절
된다. 수심 500미터의 바닷속에서 함장과 부함장의 미묘한 대
결이 시작되며 함내반란과 역반란이 일어나고 영화는 인종문
제와 미국위주의 애국주의를 곁들이며 관객들에게 어려운 판
단을 요구한다.
중단된 마지막 교신 내용을 선제핵공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
일 것인가? 하지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경우 부
함장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함장의 전사 특유의 직감적
인 판단 중 어느쪽이 옳은가?

함장은 백전노장으로서 군인 특유의 승부기질과 직감을 가지
고 있다. 부함장은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로서 엘르트 특유의
냉철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사사로운 감정과 인종주의가
개입하면서 이야기는 꼬여들기 시작한다. 함장은 부함장을 질
투하는 감정에 말려들어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랜섬의 경우는 유괴범의 협박이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유괴
범이 항공사 사장 아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몸값을 주는 대신 400만달러를 유괴범에 대한 현상
금으로 걸어버리는데.

영화는 영화다. 영화에서는 항상 주인공의 판단이 옳은 걸로
결말지어진다. 특히 헐리우드의 미국식 애국주의는 뻔할 뻔자
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한 법, 부함장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고 인질이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
은가? 아무래도 이 경우는 영화를 보고와야 판단이 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속임수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판단이 옳다는 것--
위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그 이성의 판단이 끝내 옳은가? 우리 이제 순진하지 말자, 속
지 말자. 영화는 영화일 뿐.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 바깥에서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
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으음~! 써놓고 보니 누가 한 말
같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위 교통사고의 경우와 핵미사일 사건, 또 유괴납치에서 그
어떠한 판단도 온전히 옳다 혹은 그르다고 말할수 없다. 토왕
성 폭포에서 조난당한 경북대 팀을 구하러 갔다가 비명에 횡
사한 그들처럼 어리석을 수도 있고 또 의로울 수도 있다. 우
리는 정녕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
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동차 사고의 경우......자동차는 곧 폭발할 것만 같다. 그
러나 당신은 뛰어들어 구해야만 한다. 폭발하는데 걸리는 시
간 계산에는 당신의 공포가 개입하여 있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핵 미사일의 경우......최후의 결정권은 인간이 아닌 신에게
있다. 인간이 신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된다. 이 경우 인간은
최대한 신에게 결정권을 주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
유괴범의 경우......유괴범이 어떻게 할 것이라는 예측하기
야 말로 교만한 것이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했는가만
중요하다.

결론하자.....이런 문제는 인간 이성의 기능을 초월한다. 영
화들에 불만스러운 것은 결국 냉철한 이성이 승리했다는 것인
데 과연 인간의 이성이 신을 이길까? 답은 그 차원에서 나와
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으
로 대처하는 것보다 사회적인 합의에 따른 원칙대로의 판단,
규범대로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점은 종교적인 차
원에서 어릴때부터 충분히 교육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경우에 저렇게 행동하라'
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규범으로 자리잡아야 하지 그때그때 상
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대처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규
범은 '결정은 최대한 신에게 맡기고 인간은 다만 최선을 다한
다'는 형태로 정리되어야 한다.
해당 사건에서는 결국 이성적인 판단이 옳았다 할지라도 사
건은 반복되는 법. 인간이 자기지능과 냉철함과 지식과 재주
로 한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건에 영향을 주어
전체적으로는 더 안되게 하는 법.

자동차 사고에서 사람들은 "자동차가 곧 폭발할 것이다"하는
알수없는 문제를 알려고 했다. 이렇게 불확실한 것은 이성으
로 판단하지 않고 신에게 맞긴다는 사회적 합의가 요구된다.
핵미사일 문제도 러시아 반군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려 하고
있다는 인간이 판단하지 말아야 할 문제를 논리적인 생각으로
판단하려 하고 있다. 알 수 없는건 신에게 맞기기로 합의하자.
유괴범문제는 좀 복잡하다. 주인공은 뛰어난 두뇌로 유괴범
의 심리를 간파했지만 이건 월권이다. 그런건 간파하지 말기
로 합의하자.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유괴범에 굴복하지 말아
야 한다는 것에 또 합의하기로 하자. 그래야 유괴사건을 종식
시킨다.

이런 문제는 그 사건자체로 범위를 축소시켜 놓으면 답이 없
다. 필요한 것은 사회전체의 합의로 예측가능성을 높이는데
있다. 사건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예측 안되는 쪽이다.
사회적 합의는 예측가능성을 높여 범인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신에게 맞기는 걸로 사회가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면 범인의
행동반경은 좁아진다. 그것이 옳다.
미국식 영웅주의와 애국주의, 그들은 흔히 이성과 과학의 힘
그 힘의 논리를 찬미한다. 좀 더 배우고 똑똑한 쪽이 결국은
승리했다. 주인공들은 영리하고 막강하다. 그러한 과학과 힘,
이성에 대한 찬미는 또 범인을 악을 미화한다. 헐리우드 영화
에서 악당은 비중있게 묘사되고 과학자이거나 의사이며 천재
다. 그래도 주인공보다는 약간 지능이 낮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헐리우드식에 대항하는 논리로서 사회
적 합의의 유효함을 내세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성과 과학
의 힘이 아니고 규범과 합의, 인정, 협력 그리고 믿음이다.
깨달은 이 만이 진정한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끝】


13. 그대는 숙녀인가?

남자들은 대개 여자들이 밥맛이다 하고 여자는 또 남자가 밥맛이다 한다. 통신에서 이런 논쟁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논란은 좀 유치하다. 난이도를 높여버리고 말자.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는가? 여기에 두가지 대답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경우와 있다고 답하는 경우. 그러나 전자는 논의가치가 없으므로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합의하자.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렵지만 1퍼센트라도 가능한 경우가 있을 것이니 그것만 문제삼기로 하자. 그것만이 이 역사가 진보하는 방향과 일치하니까.

사회가 발달하여 인간이 생존의 부담에서 자유로와지고 그 결과로 노처녀와 노총각이 늘어났다. 봉건시대에는 생존이라는 부담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시집장가를 가야만 되는걸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장가를 시집을, 안가거나 못가는 동포들이 늘어남에 따라 또다른 생존방식과 문화를 발굴치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변화이며 진보의 방향으로의 변화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하자님의 여성동포들에 대한 불만은 일리있다. 거기에 대한 LOSTWAY님의 남자들에 대한 불만도 일리 있다. 그러나 대개 논의할 가치도 없는, 다수일반에 대한 무의미한 힐난일 뿐이다. 진지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챔임져야 할 상위 1프로를 공략해야 한다.

압구정동이나 명동의 거리에서 만나는 처녀들이 화장이 진한 것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망신이지만 그건 어린 백성이 차마 살아볼라고 하는 짓이니 넘어가자. 허나 고급문화 쪽으로 옮겨와서 우선 서점에 들러본다면.

약간 페미니즘적 색채로 무장하고 여성들에게 용기를 붇돋워준다는 내용의 자서전들 있다. 내용은 대개 '여자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하는 건데 하나같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표지에 실었다. 얼른봐서 여성잡지인줄 알겠다.

/우리 이제 나를 위해 살자/ 45세 한국 최고 노래교실 스타 문인숙여사. /여자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정덕희교수의 성공메시지. 이런게 눈에 띈다. 이런 자서전류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여자는 예뻐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예쁘다. 이거다.

인환의 목마와 숙녀 한구절이 생각난다.
/3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통속적이다. 거기에 교양도 예지도 멋도 아취도 없다. 고샅에서 따놓은 딱지 자랑하는 꼬맹이 같다.

구름의 사랑론도 잘 읽었지만 통속적이다. 통속적이란 답이 안나오는 하위 70퍼센트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역사는 대책이 있는 상위 1프로가 이끌어가게 마련, 남보다 한 발 앞서가고 남보다 한걸음 멀리보는 그들을 잡고 시비하자.

명동이나 압구정동이나 광복동이나 동성로나 충장로에서 만나는 그녀들, 그들의 행복을 질투하지 말자. 내버려 둬. 어차피 답이 안나오는 인생들 아닌가? 난이도를 높여 보자.

임어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나와 논할수 있는 여성은 고사하고라도 이야기를 곧잘 들을줄 알고 또 얌전하고 생각이 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라고 말했을 때 임어당은 왜 /얌전하고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라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라고 했을까?

왜냐하면 그런 여자는 없기 때문이다. 유사이래 생각이 깊은 여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실제로 없다. 원래 여자는 생각이 없는 생물이다. 하여 나는 겨우 /생각이 있는 얼굴을 한 여자/로 만족하련다.

뭐 암 생각 없더라도 생각있는 표정을 지을줄 알면 숙녀다. 여자가 아닌 숙녀에 대해 제법 논하자는 거다. 숙녀란 무엇인가? 곧잘 말하여 담화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제법 질문 몇 꼭지를 던져 남자로 하여금 담화하게 하는데 성공하는 여자다. 들을 귀는 있는 여자가 숙녀다.

여자란 생각없기 때문에 TV에 김희선이 처럼 아무 말도 못하거나 바보스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을 잘해야 하는건 남자다. 여자는 적어도 질문을 던질 줄은 알아야 한다. 그것만으로 담화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안되는 것은 /여기서 친구란 친구사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기투합 할수 있는 것...이것은 부부간에도 또 친구간에도/ 담화가 안되기 때문이다. 부부간에 사랑이 있어도 의기투합이 없으면 가짜다. 그건 아무리 진한 사랑이래도 진한 생식본능일 뿐이다. 사다새도 원앙이도 하는 그런 사랑 말구.....

담화가 되는, 비밀의 공유, 의기투합 되는 ......필요한 것은 그것, 그것이 남자끼리는 가능한데 남녀간에는 안된다. 여자가 숙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그대 자신에게 자문하라. 여자여 그대는 숙녀인가? 들을 귀는 갖추었는가?

남자는 항상 어떤 계획을 가진다. 의식이 있는거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계획을 함께한다는 거다. 그러나 여자는 원래 아무 계획 없다. 차라리 힐러리가 낫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있다. 그녀는 숙녀다.

남자가 여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뭔가 계획을 꾸며보려는 본능이다. 남자가 여자로부터 실망하는 것은 더이상 진도가 안나가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나면 만나서 뭔가 어떻게 거창하게 도모할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뭐 더 이상 나오는게 없다. 그것은 남자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그걸 모른다.

사랑도 남자에게는 하나의 계획일수 있다. 여자에게는 보험일 뿐이다. 결혼하면 남자가 달라지는 것은 계획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본부놀이다. 또래들은 일단 본부를 지어놓으면 별거별거 다 할거 같은데 이미 지어놓고는 더 이상 할 놀이가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실망하는 것은 여자의 무계획에 대한 실망이기도 하고 자신의 무설계에 대한 실망이기도 하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담화가 되어야 하고 담화가 되기 위해서는 여자에게도 뭔가 의기투합이 있어야 한다.

공동목표, 공동선, 정의, 사회적 규범,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의기투합이 있어야 한다. 근데 여자는 평생 그런걸 생각 안하기 때문에 도원결의가 안되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믿는 것은 그리고 친구가 되는 것은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의기투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격도 취미도 다르지만 같은 공동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의기투합한다. 나는 이 사이버공간에서 몇몇 사람을 만났다. 그 중 몇몇과는 인생의 항로가 다르고 취미도 생각도 다 다르지만 의기투합이 되더라.

그것은 자신의 작은 이해관계와 안전보장을 먼저 따지는 약은 생각보다 우주와 신과 진리의 편에 서므로서 작은 섭섭함들을, 작은 부딪힘들을 그냥 털어버리는 허허로움에서 나오는 자유스러운 기분이다.

여자는 남자와 만나면 뭔가 우스개 얘기라도 해야한다고 믿는다. 본전을 뽑는 본능이다. 즐거워야 한다고, 유익해야 한다고 믿는다. 남자는 의가 통하는가를 판단한다. 여자가 구하는 것은 현재이며 남자가 구하는 것은 미래이다.
그리하여 남자가 여자를 떠나는 것은 거기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는 것은 남자 때문이기도 하고 여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자끼리 친구가 되는 것은 현재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고 먼 미래에 언제라도 다시 만나게 될거같은 느낌 때문이다. 같은 항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같은 편에 선다는 것,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이 주요하다.

*** 여자가 생각없다는 것은 절대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측면을 따져보자는 것으로 우호적으로 해석해 주기를 ***


14. 그대는 신사인가?

'그대는 숙녀인가' 하고 따졌으니 또 '니는 잘나서 신사인가?' 하고 힐난할 법 하다. 뭐가 신사일까 따져보자.

숙녀, 신사 하는 개념은 성모숭배, 기사도의 서구적 전통에서 유래한 바 우리 정서와 좀 안맞다. 고로 내가 주문하는 숙녀, 신사는 /왼쪽에서 걷는 숙녀는 숙녀가 아니고/하는 서구풍습을 배제하고 우리네 선비, 한량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무엇보다 이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수준에 대어 볼 일이다.

선비는 좀 노땅이고 한량은 좀 난잡하다마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시대의 모럴이 있는 법이다. ---- 그것은 시대의 모럴이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의가 통하는 사람이다. 의가 통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추구하는 공동선이 일치한다는 말이다. 정의감이나 윤리의식이나 진리에 대한 ...결국은 모럴이다. 그대에게 모럴이 있는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그와는 십년 후에나 혹은 이십년 후에라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칠 법하다. 그것은 느낌. 나는 산을 좋아한다. 그도 산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몇십년 후의 어느날 우연히 산에서 만나지 말라는 법 없다. 그렇듯이 좋아하는 것이 같으면 그것은 의가 통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럴이 그 개념자체가 여자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여자가 무언가 좋아한다는 것은 대개 현재에 유익한 어떤 것이다. 남자가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유익함을 떠나 사회적 정의감, 공분, 의리 이런거다.

별로 질이 좋은 녀석은 아닌데 자꾸만 마주치는 녀석이 있다. 만화건 소설이건 남자는 그렇게 마주침으로 하여 정드는 법이다. 마주치는 것은 내가 즐겨찾는 데를 녀석도 즐겨찾기 때문이다.
꽤 질이 좋은 사람 같지만 행여나 손해되는 일이 생길까봐 단단히 대비하는 사후의 여파를 충분히 고려한 발언만 하는 자와는 통하지 않는다. 막힌다. 또 장대(張岱)가 말한 /흠결이 없는 자에게서는 깊은 정도 참다운 기분도 느낄수 없다/ 하는 뜻일러라.

모럴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좁게 해석하여 윤리 도덕으로 치부하지 말자. 넓은 의미로의 사회의식, 시민의식이다.
1. 자유 --- 초월적이어야 한다. 얽매이지 말라.
2. 믿음 --- 낙관적이어야 한다. 대비하지 말라.
3. 진보 --- 참여적이어야 한다. 배회하지 말라.
4. 표정 --- 관조적이어야 한다. 울지 말라.
5. 미학 --- 존엄적이여야 한다. 비굴하지 말라.

이것은 시대의 모럴로서 신사의 자격시험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졌다면 그대는 신사일수 있다. 물론 기준은 순전히 내가 임의로 정한다.

자유가 없는 자 하고는 암말도 할수 없다. 깊은 정을 위해서는 목에 칼날이 들어오지 않는 다음에야 무슨 짓이든 가능해야 한다. 뭐뭐 때문에, 뭐뭐 해서 하고 항상 이유가 있는 자하고는 마주치기도 싫다. 자유 = 이유 안가지기다.
믿음이 없는 자는 신의 고민을 대신하여 잔머리를 굴리는 약은 자다. 믿음이란 자신의 꾀보다는 역사와 신에게 맞기는 것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이 인간의 판단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겨우 재조를 부려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어 놓을수 있지만 근본 그런 모든 기회는 신이 주는 것이다.
진보를 믿지 않는 자는 적이다.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자는 자기만 아는 좁은 자다. 그런 자와는 상종을 안하는 것이 신사다. 진보란 이익보다 대의와 명분과 공분을 먼저 생각하는 것, 사회와 인류와 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표정이 쥐와 같은 자는 실제로 쥐의 후손이다. 오랜 골상학 연구의 결론을 말한다면 그 사람의 상이 좋지 않으면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눈을 보면 안다.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움직이기 위해 생각하는지.
미학을 모른다는 것은 멋을 모른다는 것이다. 미학은 인격적 존엄이다. 미학이 없으면 인간이 비굴해진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멋은 결국 정신의 고결함에서 나오는 것,

내가 싫어하는 인간, 결국 신사가 못되는 인간은 이유가 많은 인간이다. 그들에게는 뭐 질서와 규칙과 법칙이 다 이유가 되는데 결국에 가서는 그게 그게 돈과 권력으로 연결된다. 마지막에 가서는 항상 돈에 부딪히는 것이다. 인간이 돈과 권력을 완전히 떠나면 어떠한 제도도 법칙도 인간 위에 위치할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 신사인가, 신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들은 신을 믿기 때문에 자유롭고 자유로우므로 세속적 피폐함을 벗어나 멋을 아는 것이다. 그 멋은 행동으로 표정으로 사회적 참여로 역사에 대한 근원적 낙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5. 나는 숙녀를 사랑한다.

좋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네게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 네게 맞는, 네게 좋은 사람을 찾기 보다 먼저 너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빠르리라.
왜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하는가 하면 좋은 사람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볼 일이다. 좋다는 것과 낫다는 것은 다르니 그 점에 주목하자.

논하려는 것은 좋은 여자가 아닌 나은 여자다. 좋은 여자는 내 주관적 판단에서 내게 좋은 여자이고 나은 여자는 나와 무관하게 이 세상을 위하여 유익한 여자이다. 또는 남자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마는.

사랑스런 여자는 좋은 여자일 뿐 나은 여자는 아니다. 예쁘고 귀엽고 정답고 사랑스럽고 그런 관념을 떠나 나은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숙녀를 논함이다. 물론 숙녀의 기준은 내 임의로 정하는 거다.

남자에게 자유와 신뢰와 진보와 표정과 미학을 주문하였거니 여자에게도 마찬가지가 주문되어야 하리라. 본질에서 인간은 남자나 여자나 같으니까. 다만 차례가 바뀔 뿐이다. 여자에게라면 나는 자유와 신뢰보다 표정과 미학을 먼저 요구한다. 같은 남자라면 쉽게 접근할수 있지만 여자라면 접근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순위에 처지는 것이다.

그것은 남녀간의 성역할의 차이이다. 이점 역할이 굳이 봉건적 관점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부정할수도 없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성 역할이 다르다. 이점 페미니즘을 떠나 인정되어야 하리라.

숙녀의 자격은 이렇다.
1. 미학 --- 세련되어야 한다. 우둔하지 말라.
2. 표정 --- 우아해야 한다. 천박하지 말라.
3. 진보 --- 동반해야 한다. 분별하지 말라.
4. 신뢰 --- 포용해야 한다. 일희일비 하지마라.
5. 자유 --- 발랄해야 한다. 집착하지 말라.

미학이다. 세련됨은 뭐 천하게 유행을 쫓아다니는 그런걸 말하는게 아니라 지적인 세련됨을 의미한다. 여자는 생각을 안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고상하다는 것은 불능이다. 고로 대신 눈치가 발달해야 한다. 즉 고상하지는 못해도 고상한 것을 알아채는 감각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눈치없으면 숙녀 못되지 뭐.
표정이다. 여자는 생각을 안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지적인 측면에서 속일수 없다. 즉 사고수준이 눈빛에서, 행동거지에서, 말하는데서 다 드러나버리는 것이다. 남자는 잔뜩 폼잡고 침묵하면 고상해 보이지만 여자는 그런거 없다.
말이 입에 붙어서 나오는 여자는 참말이지 밥맛이다. 여자들이 말을 잘하는건 생각을 안하는 덕이다. 반사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흥~! 하고 콧방귀를 잘뀌는데 이는 남자들이 생각을 한바퀴 굴리는 음흉함을 가진데 비해 가벼워서 그렇다. 속이지 못하는게 여자. 표정에서 몸짓에서 다 들켜버리는게 여자. 우아함은 좀 속이는거다.
진보다. 보수적인 여자...조선시대의 관념을 가진 꽉막힌 여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동반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 남자가 하는 일은 몰라도 된다 하는 부부유별식 사고방식이 여자가 남자에게 당하는 이유. 어차피 세상은 진보하고 그건 변화이며 대개 남자들이 가져오는 법이므로 여자가 더 적응력이 떨어지는건 어쩔수 없는 것 분발이 요구된다.
신뢰다. 여자들은 흔히 남자들이 추근댄다고 말하지만 이는 여자들이 단기적, 현상적으로 보이는 부분만 평가하려는 데서 온 것이다. 남자라면 상대방의 태도에서 그 다음과 그 다음다음을 읽는 것이다. 남자가 어딘가에 접근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경험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 상대방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인생자체에 대한 대비이다.
남자가 말을 걸어온대서 추근댄다, 성희롱이다 하고 여기는 거야 말로 좁은 것이다. 여자는 어떤 것에 접촉할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구하기 위해 접근하지만 남자는 습관적으로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두는 것이다. 여자는 필요한 것만 챙기지만 남자는 필요하지 않아도 대비하여 미리 경험해두려는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피곤한거다. 집착하는 거. 문제가 있으면 그걸 비껴갈 수도 있고 피해갈수도, 돌아갈수도 있는 법인데 여자의 경우 홧병이나도록 인내하거나 깨어지거나 둘 중에 하나다. 답이 없는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결코 비켜가거나 우회하지 못하더라.
남자들의 능란한 비켜감을 '이중적이다' 하지만 실은 여자가 답답한 거다. 남자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피한다. 그건 지혜다. 여자에게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숙녀가 필요하다. 숙녀란 정숙한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여자가 아닌 나은 여자다. 남자에게 유익한 여자가 아닌 이 세상이 굴러가는 편에 가 있는 여자다. 먼저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리라.

*** 여자가 생각없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측면이 있다는 걸로 우호적인 해석을 부탁 ***


16. 순정의 여자

아침에 TV드라마를 조금 보았는데 아흐 기도 안차는 것이었다.

그래 여자들은 순정만화 좋아하고 그거 인정한다. 그래도 비판은 있어야 한다. 한심한 건 한심하다고 해줄밖에~! 내용이 어떠냐 하면 아주 잠깐 보았지만 대충 분위기가 이렇더라.

연인관계의 남녀가 있고 양가 집안 식구들이 등장하는데 ~!

1, 여자는 남자 집안에서 여자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안받아들인데서 삐쳐있다.
2. 남자는 아버지가 연인을 신부감으로 허락 안한데서 삐쳐있다.
3. 어머니는 부자사이에 트러블이므로 삐쳐 있다.
4. 아버지는 아들인 돈없는 집안 신부감을 골랐다고 삐쳐있다.
5. 여자의 어머니는 딸에게 해줄 혼수가 없다고 미안해서 삐쳐있다.
6. 여자의 여동생은 언니가 그 집안에 매달리는게 꼴불견이라고 삐쳐있다.
7. 여자의 둘째동생은 큰언니가 삐쳐있다고 삐쳐있다.

드라마는 입이 한 발이나 나온 7명의 얼굴을 차례로 비추는 걸로 침묵한다. 모조리 삐쳤으니까 대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한심한 드라마도 주부들은 재밌다고 눈이 빠지게 보고 있을 거 아닌가?"
물론 재미없으면 안보면 될거 아닌가? 하고 공격할법 하다. 물론 난 안본다. 그러므로 되었다. 그러나 비판되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여자는 어떤 경우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는 이렇다. '그래도 여자는 참는다. 왜냐면 착하고 예쁘고 무엇보다 주인공이니까.' 여자가 참고 있으면 남자가 살살 댈래서 문제를 해결해주잖아.

해결은 언제나 남자가 하고 여자는 단지 참기만 하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시대 세계화시대 상황은 급변하는데 참기만 해서 어떻게 진도를 나갈까?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위 드라마에서도 결국은 아들의 혼사를 반대하던 아버지가 맘을 바꾸는걸로 일거에 해결된다. 여자는 참고 기다린 보람을 건진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하는데 이런 느려터진 문제해결방법이 유효하랴?

남성이 우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다. 남성우월주의는 남성이 우월하므로 남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발상이고 페미니즘은 남성이 우월하므로 여성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맹목적인 성평등주의는 올림픽 종목에서 남자와 여자가 같이 시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매달이 한 개라도 돌아갈까? 여자종목은 여자가, 남자종목은 남자가 하는 것은 남성이 우월하기 때문이다. 남성우월주의는 그러니까 여자는 집에서 애기나 보고 스포츠는 하지말라는 거다. 나는 여자도 운동하라는 것이다. 대신 여자종목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신과 역사와 미래라는 변수이다. 우선은 진화론에 입각한 경쟁의식을 떨쳐버리고 신 앞에서의 평등을 생각해야 한다. 남녀는 평등하지만 그것은 인격적 평등, 존엄의 평등일 뿐이다.

남녀는 다르다. 남자에게는 남자의 세계가 여자에게는 여자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어차피 역사는 진보하고 세계는 정보화 시대로 재편된다. 남자가 변화에 더 빨리 적응하고 여자는 더디게 적응하며 어차피 여자도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떠나 어쩔수 없는 자연법칙이다.

나는 여성들이 그러한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채근하는 것이고 아침드라마는 그 변화에 역행한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고보라는 것이다. 여성들이 적응 못하는건 그런 한심한 드라마나 보니까 적응 못하는 것이다.


17. 사회적 시스템론.

클린턴은 곤경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하는 말로 클린턴의 페미니즘이 승리한 경우란다. 힐러리가 주도하는 민주당의 여성정책이 먹혀든 경우이다. 이것을 모범적 성공사례로 평해도 좋을까?

미테랑이 험구를 피해간 데 비한다면 미국인은 훨씬 더 위선적이다.. 그것이 프랑스와 미국의 수준차이, 다른말로 철학의 차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청교도적 결벽증? 어쨌든 나는 솔직한걸 좋아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의 경우를 몇가지 든다면 ...
모라류의 전투적 여성주의 => 여성들을 자체분열시킨다는 면에서 모범이 못된다.
IF류의 남근혐오주의 => 동성애 등 히피적인 측면과 모호하게 혼합 된다는 측면에서 모범이 못된다.
구름의 부부유별 명심보감주의 => 페미니즘인지 모르겠다.
슈퍼우먼주의 => 일부 여류자서전에 나오는 모범내조 + 모범캐리어 우먼 ---> 불가능한 목표를 내세운다.
비**의 사회시스템주의 => 정체파악 안됨. 더 집적거려 봐야.
김완섭의 창녀주의 => 양아치근성을 속이지 못한다.
빠락의 역사 전망주의 => 그래봤자 남자가 하는 소리다.

김완섭이 창녀론에서 여성을 편드는 것 같은 말투를 구사하면서 교묘하게 여성에 대한 편견을 부채질하고 여성을 비하했다 하면 맞는 말이다. 중요한건 그는 남자라는 것이다. 나도 적인 남자다. 남자 입에서 더 좋은 소리 안나온다.

여성들이여. 그대의 적인 남자들에게 여성을 찬양하고 이른바 매너와 에티켓과 핸섬함과 기사도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이야 말로 편견에 가득찬 봉건적인 구습일지니. 여성인 그대가 만약 적인 남자에게 여성에 대한 찬양과 고무를 기대한다면 가장 반페미니즘적이다.

여성의 문제는 근본 여성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주장해야 한다.

IF의 속장에 묘한 그림이 있는데 87년 대선때 여의도 유세장면을 모자이크 한거 같다. 그것을 주부들의 군중집회로 묘사하면서 그 묘사된 플래카드에 /만국의 주부여 단결하라/ /주부도 ㅁㅁ하자/ /주부가 주인되는 세상/ /주부의 ㅁㅁ만세/ 이런걸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남근혐오주의나 동성애주의가 페미니즘으로 오도되어서는 안되리라. 촉구해야 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의 회복이다. 흔히 말하는 사회시스템론은 보봐리 이야기로 어릴 때 부터 여자들에 대한 편견을 심고 어쩌고 해서 그렇다는데 일리 있으나 답이 안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핑계를 만들고 의존적이다는 측면에서 반페미니즘적이다. 응석인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남자들에게 배려해달라고 조르는 건데 그게 문제. 여자들은 삐쳐서 응석을 부리고 조른다는거 우야든동 스스로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남자 탓 남의 탓. 사회 탓.

투사가 되라. 남자가 해줄수 있는 것은 잘못된 법률을 고치는 것이 전부다. 거기까지는 빠락도 협력한다. 그 이상은 여성 스스로 헤쳐나가라. 정보화마인드에서 여자가 뒤지는 것은 여자가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흥미를 못느끼기 때문. 이건 재미 하나도 없는 순정만화를 굳이 보는 것과 같이 여자들은 원래 그런 생물이다.

남자들이 보는 만화는 남자나 여자나 같이 본다. 인어공주든 알라딘이든 그렇다. 여자들이 보는 만화는 여자만 본다. 그게 본질. 황미나와 김동화 이진주의 경우는 모호하지만 이진주와 김동화는 남자다.

물론 사회시스템도 고쳐져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부부유별 남존여비를 없이해야 한다. 남자는 장군, 여자는 간호사 하지말고 여자장군도 있다고 교과서에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이건 본질이 아니다. 순정만화가 존재하는 한. 아침드라마가 존재하는 한. 여성 스스로 그런걸 만족해 하는 한. 불평이나 늘어놓고 남의 탓 하는 한.

역설적 사고....김대중이 이인제 YS에게 200억 받았을걸 해서 지지가 똑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거품이니까 한방에 날아간거.....남자가 사회가 어찌 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취약하니까 거기에 당하는거.....동정위주 배려위주 페미니즘 보다는 차라리 모라가 통쾌하다.

여자여 그대의 적인 남자에게 따뜻한 말한마디를 기대하지 말라.


18. 동물들의 섹스

전술했듯 학문이기 위해서는 논리와 체계 그리고 검증이 있어야 한다. 신화의 수준에 머무르는 잘 알려진 거짓말의 하나로 동물의 왕국을 들수있다. 흔히 TV에서 하는 동물들의 짝짓기다.
문제는 그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전혀 검증이 안된 막연한 추측들이다. 이를테면 물개들은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종족의 씨를 퍼뜨리기 위하여 수컷끼리 결투를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건 거짓이다. 물개들이야 아무 생각없다. 그들은 끌리는대로 하는 것이다.
물개들이 언제 단합대회를 열어 /우리 참 우수한 종족을 함 보존해보자/ 하고 합의한 바 없다. 이는 대부분의 동물들 그 복잡한 구애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물개들의 그 쟁투하는 이유가 타당하다면 들판에서 아무때나 야합하는 개들은 뭐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가?

우리는 과학의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적으로 따져보자.그런 복잡한 구애의식은 파리들도 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종족의 일방적인 번식이 아니라 적절한 자기통제다. 어떤 종류의 지렁이는 먹이가 부족하면 생존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에 들어간다. 하면은 동면과 달리 그냥 자는거다. 먹이가 풍부해질때까지 번식을 멈추고.
대부분의 하등동물은 본능적으로 종족의 수를 제한하는 프로그램을가지고 있다. 그들은 생존경쟁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절 하는 것이다. 동물들의 복잡한 구애의식은 이러한 자기제어의 일환이며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악어알은 성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기온이 올라가면 암컷이 되고 온도가 내려가면 수컷이 된다. 수컷은 생식을 못하므로 이것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개체의 수를 조절하려는 노력이다.
왜 홍학의 암컷과 수컷은 춤을 추는가? TV에서는 무책임하게 우월한 수컷의 씨를 받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체간의 유전적 우열차이는 거의 없다. 어미가 건강하다고 해서 그 유전인자를 받은 새끼도 건강한 것은 전혀 아니다. 어미의 건강여부는 개체변이인데 개체변이는 유전하지 않으니까.
어떤 중류의 피리새는 수컷이 집을 잘지어야만 받아들이고 또 어떤 종류는 노래를 잘불러야 하고 또 어떤 종류는 춤을 잘추어야 되는데 이것이 과학적인 개체간의 우열등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애의식이 있는 것은 호르몬 조절을 위해서다.
사람은 아무 때나 결합하지만 동물들의 암컷과 수컷은 발정기가 되어야 결합하는데 여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구애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들의 구애의식은 워낙 천차만별이라서 --- 어떤 종류의 스프링벅은 걸음을 예쁘게 걷는 수컷이 선택된다 --- 실제로는 의미가 없다.
요는 암컷과 수컷이 결합하는 적절한 타이밍인데 암컷의 배란과 수컷의 사정이 일치된 타이밍에서 결합되기 위해서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수컷 딱새의 요란한 춤은 암컷 딱새의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켜 난소의 발달을 돕고 배란을 촉진시킨다. 바로 그것이 목적인 것이다.

물개의 경우는 독특한데 수컷이 싸우는 이유는 싸워서 승리한 쪽에만 정충의 생산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즉 패배한 쪽은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씨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정력에 좋다는 해구신은 대부분 투쟁에 패배한 수컷의 것이므로 소용없다. 이것은 물개들이 좁은 자리에 너무 많이 몰려있기 때문에 교미의 수량을 적절히 조절할수 없다는 곤란에서 촉발된다.
자연에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암수가 만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최대한 교접하기 유리한 쪽으로 발달하지만 물개들은 그게 거꾸로 너무 쉬워서 오히려 억제하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것이다. 만약 물개가 서로 싸우는 프로그램을 안가진다면 그들은 밤낮 붙어서 그짓거리만 할것이 아닌가?
개체수가 적고 고립되어 있는 종의 경우는 수컷끼리의 경쟁이 없다. 물개의 투쟁은 유전적 다양성을 방해하고 근친혼의 비중을 높여 오히려 진화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개들은 아무때나 붙어먹으니까 훨씬 높은 유전적 다양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개과에 아종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레밍의 자살처럼 대부분의 동물들은 개체수를 제한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들의 구애의식은 과잉번식을 막기 위한 것이고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 충돌한다.
식물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씨앗을 열심히 날려대는 쪽은 대부분 잡초이며 황폐한 강산성의 토양이나 석회암지대 같은 척박한 토양, 또는 홍수나 사태로 인한 불모지대에 잘자란다.
씨앗을 잘 안퍼뜨리는 쪽은 주로 발달한 화본과로 이들이야 말로 토양을 점령하므로서 경쟁우위를 가진다. 화본과 식물은 지력이 좋은 우수한 토양환경에 정착하며 씨앗을 퍼뜨리는게 아니라 토양 자체를 점령한다. 대나무나 잔디는 뿌리를 파고들어 토양을 점령해 버리므로 씨앗을 날려보낼 이유가 없다. 이 또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자기조절이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많은 경우 단성생식을 충분히 할수 있으며 가뭄에는 단성생식 우기에는 양성생식을 하는 종도 있다. 짝짓기의 진정한 목적은 생존경쟁과 우성생식이 아니라 개체수 조절을 통한 환경친화이다.


19. 사막의 생명수

이런 얘기를 들었다.

여행자가 사막에서 길을 잃었는데 쓰러지기 일초전에 샘을 발견했다. 샘은 시멘트로 봉해져 있고 수동식 구식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알겠지만 구식펌프는 위에 물을 한바가지 붓고 손잡이를 저어줘야 픽픽 하고 물이 나오는 것이다. 다행히 샘가에 펌프에 부을 물한바가지가 놓여 있다. 그리고 옆에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부은 후 펌프질을 해서 물을 사용하시오. 뒤에 올 사람을 위해 한바가지는 떠놓고 가시오/

그 바가지의 물을 마셔버리면 그 펌프는 사용못한다. 여행자는 심한 갈증에 죽을 것만 같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일단 바가지 물을 마시고 원기를 차린 다음 구조된 후 전화를 해서 어찌 물을 가져오고 --- 이런 예외적인 경우는 인정 안된다. 분명히 뒤에 올 사람이 있다. 그대가 물을 마셔버리면 펌프는 작동 못하고 그 샘은 영영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더 많은 여행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대가 마시지 않고 그 물을 펌프에 부은 후 펌프를 작동해보니 이거 고장나서 물 안나온다면 그대는 죽는다. 그래도 그대는 바가지 물을 마시지 않고 부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왜? 무엇 때문에?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믿고 물을 부을 것인가? 안믿고 살기 위해 마실 것인가? 믿는다면 뭘 믿는가? 그것은 진정한 것인가?

관념의 게임일 뿐 인간은 실제상황에서 군중심리, 고독감, 오기 등 다양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확답할수 없다. 그러나 말하라. 말해야만 하리라. 나는 추궁하련다. 그대는 어이할 것인가? 그대에게 그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부을 정도의 순진성과 믿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어떻게 설명할래?

이를테면 전쟁터에서의 경우 이런 경우를 쉽게 당한다. 내가 살면 동지가 죽고 동지가 살면 내가 죽고....그러나 이건 군중심리, 전쟁의 공포, 오기 등이 뒤범벅되므로 각양각색이다. 군중, 사회, 가족에 대한 의무감 등을 배제하고 철저히 고독한 그대 자신으로 돌아가라. '나는 아내와 자식이 있기 때문에 못해' 이런거 논외로 치고 철저히 고독한그대 자신으로 돌아가서 판단하라. 그대는 혼자이며 이 세상에 가족도 친구도 없다. 오직 사막과 죽음과 펌프가 있을 뿐이다.

생각해야만 하리라 인생에 이런 경우를 얼마든지 당한다.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이런거 빼고, 군중심리에서 나온 용사의 만용을 빼고 철저히 혼자인 그대는 어이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연히 그 물을 펌프에 붓는다. 왜? 믿음 때문이 아니다. 내 경우는 권태 때문이다. 나는 별로 살기가 싫다. 신이 나를 테스트한다면 나도 신을 테스트하겠다. 그게 나의 이유/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그런 상황을 당하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행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전에 충분히 생각되어야만 한다. 미리 생각해두라. 지금 생각하라.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위대한 영웅이 죽음 앞에서 떳떳한 것은 대단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충부히 생각해두었기 때문이다. 예수도 생각했으리라. 마음에 대비했으리라. 선한 결단은 선의에서 보다는 충분한 사색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을 구하러 왔으며 왜 왔는가? 내 경우는 신이다. 신이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그의 고독과 우울을 의해서 나는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다.

청명한 겨울 하늘 보고 뿌듯해 하듯,
한줄기 이는 바람에 서늘해 하듯
그리고 더 많이 체험하라.



20. 농염(濃艶)미와 담백(淡白)미

화장엔 담장(淡粧)과 농장(濃粧)이 있다. 분장과 위장, 가장과 변장, 은폐와 엄폐도 있지만 논외로 치자. 실내에서나 혹은 지하철 안에서 가까이 마주치는 얼굴엔 담장이 좋겠고 특별한 행사로 외출일 때는 농장도 상관없겠다.

외국과 비교해서 분명 한국여인은 농장을 하는 편이다. 요는 한국여인의 농장습관이 전체적으로 한국인들의 미적감각에서 그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흔히 '일본여자들 참 못생겼다' 하는데 일본인들이 대꾸하기를 '그래도 한국여자들처럼 변장이나 은폐 엄폐 수준은 아니다' 한다니 국제적으로 소문난거다. 그렇다면 문제 있다.

요즘 거리에 연변동포들이 곧잘 눈에 띈다. 남자들은 구분이 안되는데 여자일 경우 얼굴만 보고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대화를 해보면 말투에서 표시가 나지마는 앞서 화장기술에서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연변동포들은 눈썹을 그리되 선이 한국여성들처럼 날카롭지 아니하고 둥그스럼하게 복스러운 얼굴로 그려놓았다. 미스북조선 하면 통통하게 살찐 귀염성 있는 건강한 얼굴이고 미스코리아 하면 바비인형처럼 눈은 푹꺼지고 턱선은 도드라져 쾡한 얼굴이 되어야 하고 탤런트가 되려면 갸름하니 날래고 그렇게 인상지어지는거 있잖은가?

혹 TV로 60년대 영화를 보거나 씨네21에 60년대 영화포스터를 보면 화장기술의 변천사를 알수있다. 연변아가씨의 화장기술은 아매도 60년대 김지미나 엄앵란, 최은희의 그 맏며느리감에 넉넉한 복스러운 건강미가 모범되어 보인다.
물론 화장기술을 빼고 실제로도 연변여인은 골상에서 제법 차이가 있다. 동글동글한 얼굴이다. 그러나 한국여인네는 그런 얼굴이라도 화장기술로 은폐한다. 눈자위는 짙게 칠하여 쾡 들어가보이고 눈썹은 제비꼬리로 감아쳐 좀 날카롭고 좀 선병질적이고 신경질적이 되었다.

그 여인네의 화장기술에서 시대정신을 읽는다. 좀 각박하고 좀 배타적이고 좀 짜증스러운 작금의 세태를 읽는다. 입술을 허옇게 칠해놓거나 꺼멓게 칠해놓은 여자도 있다. 그런 화장에선 /흥 별꼴이야~!/ 하는 냉소가 읽혀진다. 그럴 때 우울하다.
결국 돈을 벌어가는건 화장품장사인데 그 화장품 팔아먹는 프랑스 여인네는 절약하여 담장이고 소비하는 한국 여인네만 봉이라서 농장이면 어찌 우울하다.
한 나라의 미의식은 그나라 지적수준에 절대비례한다. 역시 한국은 좀 후지다. 그것은 시대의 담론이 없기 때문이다. 지성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거 시시콜콜 잘 따지는 나라가 프랑스다. 거기에 잘 넘아가는 나라가 이나라다. 패션이든 화장품이든.
역설인 것은 철학이 발달한 나라, 지성이 구태여 말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패션과 화장품이 발달하였지만 언어가 요란하되 그 소비는 후진 나라에서 다하더라는거.

농염한 것은 여름에 피는 장미화, 담백한 것은 가을에 피는 국화. 인형처럼 정숙할 때는 농염도 좋고 움직여 발랄할 때는 담백이 좋다. 담백미는 쌀밥에 반찬을 더하듯 받아들이는 기분이 있고 농염미는 완숙하여 압도하는 기분이 있다.


21. 너의 주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는 좀 꼬질꼬질한 데가 있다. 30년도 더되지 싶은 낡은 가죽가방 옆구리에 끼고 역시 때가 꼬질꼬질한 헤진 양복 입고 /예수 믿으세요/하고 노방전도하는 개척교회 목사는 당연히 키작고 안생겨 까무잡잡한 얼굴이다.
카톨릭과 불교는 그래도 제법 품위를 찾는다. 나는 목사들의 평균신장 보다 스님과 신부들의 평균신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신부복이 검은색이라서 커보인 건지는 몰라도 왠지 목사하면 키작고 꼬질꼬질한 인간군상을 연상한다. 편견이겠으나 이유있는 편견이 아닐까?

예수의 죽음은 불우했다. 유다는 팔았고 베드로는 부인했다. 웬만한 사이비종교라도 열두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제자라면 그렇게 콩가루집안이지는 않으리라. 누구 나서서 몸바쳐 스승을 구하려는 이 하나 없었더라.
더욱이 부활은 예수가 처음이 아니요 그전에도 많은 부활소동이 있었다. 그래서 부활소동 할까봐 큰 돌로 동굴입구를 막아두었다지 않는가? 기독교의 매력은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가난함과 어설픔이 아닐까 한다. 그 불완전함에 신비가 고일 여지가 생긴다.

사이비종교들의 특징은 애써 말을 짜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모르몬교나 증산도나 좀 답답해보이는 교파들의 한계는 말을 끝내 짜맞추고 굳이 증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중핵은 신인데 거기 신비가 깃들어야지 말이 꼭꼭 들어맞아서야 될일인가? 증명하려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 믿음은 포월(包越)한다. 얼싸안고 함께 넘어서는 것이어야지 똑부러지게 이치에 맞고 조리에 맞아서는 안되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존재의 한계를 알고 있거던, 모자라는 인간의 지혜에 꼭꼭 들어맞아 이해가 편안하면 드넓은 우주의 신비에 가닿지 못하는 법일지니.

출생도 알 수 없는 근본없는 자, 예수라는 한 사나이 있어 그 근본없음으로 하여 도리어 동방박사가 찾아오고 성모가 독생자를 낳는 신비를 얻는 것이 종교의 매력이기도 하다. 예수가 명가의 후손이라 왕후장상의 장남이었다면 어찌 동방박사가 감히 문턱넘어 찾아올수 있을까? 그 진실여부는 차지하고 무릇 신비란 가난한 여백에만 깃들이는 법이거늘.
빛나는 것은 더해진 솔직함이다. 베드로나 그 제자들의 남긴 바 가감없이 전달된 예수의 마지막 토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에서 굳이 미화하지 않고 채색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털어버리는데 또한 매력이겠더라. 만약 베드로가 글줄이나 읽어 배운 학자였다면 그런 진솔함이 없을 터. 인간적인 토로는 불리하다 감추고 미화할거 미화하여 어지렵히고 말았으리라.
그렇지만 이런 정도는 좀 유치스럽다. 나의 주목을 끌은 것은 창세기의 호쾌함이다. 마 알수없다 하고 입안에서 웅얼웅얼 하는 기타종교에 비해 창세기는 탁 쏘아붙이는 당당함이 있다. 7일간 하고 날자를 못박은 것은 우습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고 축복해버리는 데는 탄복할 뿐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심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성경의 기록을 믿는가? 그들의 증언을 믿는가? 예수가 했다는 약속을 믿는가? 도무지 인간은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성경이라 해보았자 좀 오래된 책 나부랭이요. 예수가 했다는 말이야 귀에서 입을 넘어온 것이며 천국과 심판의 약속이라야 인간의 작은 심사에 대한 것인데 그것이 근거가 되랴?

믿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 그렇다면 성경과 약속과 증언을 믿는 것이 신을 믿는 것인가 인간을 믿는 것인가? 의심하라. 네 귀를 의심하고 네 눈을 의심하고 네 혀를 의심하라. 못 믿을게 인간. 신을 믿는다면서 혹 인간을 믿는 우를 범하지 아니하였던가? .
나는 인간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인간의 언어도 약속도 증언도 아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믿지 아니하고 들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내가 믿는 것은 인간의 종교심 그 자체다. 내가 믿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의 존재 그 자체다. 내가 믿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실존 그 자체다. 내가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종교성 그 자체다. 나는 인간들의 눈과 귀와 혓바닥 사이에서 생겨난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 그 인간들의 피와 체온을 믿을 뿐이다.

나는 신을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은 눈에 보이는 신의 모습이나 귀에 들리는 신의 약속이나 인간들의 혓바닥을 통과한 증언이 아니라 신의 신비 그 자체다.
그것은 그림의 여백과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지만 보이지 않으므로서 더욱 보이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유한함을 보고 그 빈자리에서 드넓은 여백을 발견한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며 신비만이 통과할 수 있다. 세치 인간의 혀와 눈과 귀는 충실히 검문된다.

그대 침묵하라.


22. 인터넷을 떼는 여자.

구름이 두달 만에 인터넷을 떼겠다는데 좀 놀란다. 떼다니 그런 접근법도 있었군. 생각해보면 괜찮은 문제해결방식의 하나가 된다. 똑 부러지듯이 탁 떼어버릴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기 때 배꼽을 탁 떼어버린 이후에 뭐하나 제대로 떼어본 일이 없다. 컴을 다루는 것도 그렇다. 아직도 자판이 서툴다. 아마 영원히 서툴 것이다. 그냥 개발새발 내 생각하는 속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더 해서 무엇하랴.
도스를 쓸 때도 명령어를 대여섯 이상 알지 못했다. 알아서 무엇하리. 난관에 부닥치면 그제서야 이리저리 찾아보면 된다. 윈도를 쓰는 지금도 능숙하지 못하지만 불편은 못느낀다. 가끔 새로운 기능을 발견하고 '아하 요런 것도 있었군' 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책을 사서 보고 배운다던가 하는 일은 결단코 없는 것이다.
컴을 구한 후 딱 두권의 관련서적을 샀는데 몇페이지를 훑어봤을 뿐이다. 책은 볼수록 머리가 나빠진다는게 나의 지론이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이다.
인터넷은 몇번 접속해 봤는데 시간죽이기에는 딱 좋겠더라. 물론 인터넷을 배운답시고 책을 사서 읽는다던가 하는 일은 결단코 없다. 나의 방법은 그렇다.
윈도를 익힐 때 그랬듯이 나의 방법은 간단하다. 1. 윈도를 설치한다. 2. 컴을 켠다. 3. 뭐야 뭐이런게 다 있어 하고 욕을 태배기로 해준다. 4. 슬슬 가지고 논다. 5. 뭐 그냥 쓴다.
인터넷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1. 넷츠고에 가입한다(비용절감) 2. 그냥 쓴다. 끝이다. 홈페이지? 만들면 되겠지 뭐. 그걸 또 책을 사서 연구해야 하남? 그렇다면 난관이겠군.
접근하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접근하기다. 책을 보고 연구를 하고 뭔가를 떼고 하는 것은 나의 체질에 안맞다. 그냥 무턱대고 사용해 본다. 난관에 부닥치면 첨부터 다시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남들이 시행착오를 겪고 고생을 할만큼 하고 대책을 세울만큼 세웠다 싶을 때 그때 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는 넘이 번다고 하잖았는가? 아직은 이른가?


23. 불우 예수를 위하여.

종교인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대는 진실로 믿는가?" 진실한 믿음 가지고 있다면 내가 어떤 표현을 쓰던 기분 나쁠리 없다. 두려워 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의심이 생기는 것, 믿음이 약한 때문일지니.

예수쟁이들과 토론한 일이 있다. 기독교도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가?

예배에도 법회에도 미사에도 참석해 본 일이 있지만 예배가 젤로 재미없었다. 분위기가 좀 산만하고 시장바닥이어서 종교심이 더 달아나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열광하는 듯 했으나.
불쾌한 것은 목사의 말솜씨였다. 그들은 함부로 설득하려 하는 것이었다. 세치 인간의 혀로 말이다. 난 느끼고 싶었는데, 인연을.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인간의 귀와 입 사에에서 맴도는 언어와 논리가 아니라 체험과 운명 그리고 신비였거니.
성경책을 펴놓고 이 페이지에 이렇게, 저 페이지에 저렇게 씌어 있으니 증거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이야 말로 치기의 극치가 아닌가? 예수는 말로 설득한 적 없다. 그는 웅변가가 아니었다. 산상수훈은 말보다 분위기가 죽인거 아닌가?

인연이다. 나는 좀 인연주의자다. 적이든 동지이든 만남은 소중한 것이다.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달리 이유가 없다.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이 하늘 아래서 그들을 만났던 것이다. 충분하다.

어릴 적 동네는 웃깍단과 아랫깍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과수원 하나를 경계로 웃깍단은 불교를 믿는 구마을파, 아랫깍단은 기독교를 믿는 새마을파, 동리 사람들은 새마을지도자를 누구로 하느냐, 부녀회장을 누구로 하느냐, 이장을 누구로 하느냐를 두고 대립하였는데 편은 늘 켸켸묵은 사고를 가진 웃깍단과 신식에 물든 애랫깍단의 대립이었다.
소년은 웃깍단 소속이었으므로 자연히 불교파에 가담하여 /눈감으라 해놓고 신도둑혀 가더라/ 하는 아랫깍단의 야소파들을 비웃곤 하였다. 그러나 새벽 네시면 어김없이 울려퍼지는 교회종소리에 잠깨면 신과 인간과 구원을 생각하곤 하는 것이었다.

만남이야 말로 신비가 아닌가? 나는 그런 식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만났다. 그 만난 만큼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것은 다 인정해야 하리라. 인연이다. 불교와도 기독교와도.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가 그의 아들임을 믿고 구원에 대한 약속을 믿는단다. 그러나 나는 알수없다. 도무지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인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 나는 삶과 죽음을 모르는데 구원은 무엇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내게 어떤 종류의 유익함을 가져다 준다는 것 아닌가? 유익함이라. 그런게 있을까?
사양하겠다.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세상에 나서 내가 보고 들은 것, 느낀 것, 그리하여 아는 것, 나의 전부, 이것이 다가 아니었으면 할 뿐이다.
참으로 나를 두렵게 한 것은 이것이 전부라는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다라면 그밖에 아무런 세상이 없다면 살았어도 죽음이나 한가지일 터. 세상에 나서 별거별거를 구경하고 삶을 체험하고 그리하여 인생을 알고 그리하여 내가 규정한 인식한계 안에서의 세상, 이것이 다가 아니기를 믿는 그것이 신비다.

예수가 무슨 말을 하였건 나는 애초에 귀머거리라 새겨듣지 않을란다. 장님이라 보지 않을란다. 형제를 위하여 아무 증언하지 않을란다. 그러나 인정하련다. 그래 넌 예수다.
예수는 죽었고 부활하였다. 바울이 보았고 베드로가 보았고 열두 사도가 보았다. 그리하여 천년이 지났고 또 천년이 지났다. 또 천년이 온다. 그 사이에 큼지막하니 들어앉은 것은 그로하여 비롯된 역사, 바로 그것을 인정할 뿐이다.
보테회장이 무슨 당의 책임자인지 아닌지 묻지 말아야 하듯 캐묻지 말아야 하리라. 묻지도 듣지도 않으리라. 그렇지만 그로하여 이루어진 역사가 거기에 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언제나 역사의 편에 선다.

신비는 말로 표현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 증거하라고 조른다. 신의 거룩함을 인간의 세치 혓바닥으로 증명하라고 조른다. 그리하여 채택된 모든 증언들을 나는 인정하지 아니한다.
신은 침묵하였다. 인간들이 말하였을 뿐이다. 신을 믿고자 한다면 신의 침묵에 귀기울이라. 그 찬양의 언어들과 난무하는 증언들에 초라해지는 것은 불우 예수이지 누구 남이 아니었더라.



24. 인연 또는 상실 (걸프형에게)

기독교도들은 신을 믿고 예수를 믿고 천국을 믿는단다. 나는 그것이 인간을 믿고 언어를 믿고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내게 물어달라. '그럼 너는 뭘 믿는가?' 하고.

나는 신비를 믿는다. 나는 믿음 그 자체를 믿는다. 나는 인간의 종교심을 믿는다. 나는 그 인간들의 종교심이 만들어 놓은 그 오랜 기다림을 믿는다.
어렵다고? 그래 쉽게 말하자. 믿음은 천년 이천년을 배달되어 왔다. 2000년 전의 사나이 예수가 과연 독생자인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그 믿음이 인간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배달되어 이천년을 이어온 배경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가진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내 사상의 근저에는 불교가 비중을 차지한다. 인연이라고 말하자. 인연은 무엇인가? 네가 있고 내가 있다. 물리적으로 너와 나 사이에 경계가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경계는 없다. 그것이 인연이다.

걸프가 있고 걸프가 있다. 하나는 참걸프고 하나는 개걸프다. 걸프와 걸프가 서울하늘 아래 만나서 같은 공기를 숨쉬었다. 무엇이 인연인가? 만남의 테두리 안에서 걸프는 더 큰 걸프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 선의와 악의가 교차되었다. 그리하여 개걸프의 것이 참걸프가 되고 참걸프가 개걸프가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다. 걸프는 그 인연에 책임지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이 하늘 아래에 내가 나고 내가 숨쉰다. 나는 내 몸뚱이를 넘어 내 가족 내나라 내 이웃으로 확장된다. 이 세계가 온통 내가 된다. 그리하여 내가 내 우주를 다 책임맡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다.

걸프형에게 말하고 싶다. 형은 아무도 용서할수 없고 처벌할수 없으며 심판할수 없다. 모든 것을 긍정하고 담백하게 가라. 그것이 인연이다. 내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외면할수 없이 책임지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은 형의 인생에 지워진 짐, 결코 내려놓을수 없으리.

보나마나님께도 구름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세상에 사람이 나서 만나고 이미 만났음으로 하여 그의 인생이 내 안으로 침투하게 되고 이제 그것을 거절할수 없다. 얼싸안고 생채기로 앓으며 포월하여 가는 것이다. 달리 인연이랴.
고약한 사람과는 그저 상종을 안하면 된다고 말하지마라. 그것은 상실이다. 인생은 그런거. 그렇게 사람끼리 부딪히다가 한 세상 가는거다. 그 인생을 외면할 수 없는 거. 그가 괴롭히면 나는 그 상처를 앓는 거다. 아름답지 못하였으나 상실일 수는 없다.

너의 인생이 내 인생 안으로 침투하고 내 인생이 너의 인생 안으로 침투하여 하나가 되어 버리므로 행복이거나 상처되거나 상실하거나. 그것이 인연이다.
다시 믿음이다. 무엇을 믿는가? 인연으로 하여 하나됨을 믿는다. 침투한다. 나의 생이 너의 안으로, 너의 생이 나의 안으로 침투한다. 상처가 되고 사랑이되고 행복이 되고 상실이 되고 너와 내가, 역사와 내가 신과 내가, 하나가 되고 결코 떼어낼수 없음으로 믿음 뿐이다.

상실이거나 혹 인연이거나 상처이거나 혹 사랑이거나 버릴수 없어 저승까지 지고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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