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3657 vote 0 2002.09.06 (12:30:23)

열사논단.

전라도 아그들 긴장 풀렸나?

진작부터 한마디 하려다 참은건데
레인보트님이 한말씀 베풀으시니까 나도 슬그머니 거들어부리는
형식으로다가 속에 담은 말을 뱉어부러야 쓰것다.

정권 바뀌니 과연 좋다. 좋아~! 바야흐로 태평성대 호시절이라.
법장이 방구로 운을치고 늑대가 하품으로 화답하니 이게 다 백성이
살기가 너무좋아 함포고복 배뚜두리는 소리라. 격양가 드높도다.

[그렇게 긴장이 풀려도 좋은가?]

과거 워드방이나 열린 나라나
대개 열심히 쌈질하는 축은 경상도 아그들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통신을 안하는 것은 아니어서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통신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든 논쟁이 이어지면
결국은 지역감정으로 비화되고 그리되면 선상님만 손해본다는거.

구름 등이 입바른 말을 할 때 나는 이런 의미의 말을 한적이 있다.
[구름 니는 경상도기 때문에 옳은 것을 옳다고 당당하게 말이나 하고 산다.
전라도 사람들은 아예 암말도 못하고 입닫고 있다.]

전라도쟁이 중에 당당하게 말하는 이는 동업을 비롯한 극소수이고
논쟁은 그들을 측면지원 하는 경상도 출신의 DJ파와
경상도 반DJ파 중심으로 이어졌다. 워드방에서도 그렇고 열린나라에서도.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정면으로 붙으면 지역감정 유발되고
그럴수록 선상님만 손해보니까 벙어리 냉가슴으로 참은 사람 많았다.
나는 부러 전라도의 입장을 대변한답시고..선상님께 누가 끼치든 말든
그들의 한맺힌 속마음을 읽어 대리투쟁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정권이 바뀌었다.
그날 지지자들이 일산자택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는 앞에
DJ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거기에서 준엄한 메시지를 읽어야 했다. 동업도 거기에 대해 한마디
한적 있지만 메시지 [아그들아 싸움은 이제부터다] 이거.
그대 전라도 아그들은 벌써 잊었나?

DJ는 늙었다. 자민련과 한나라당 안팎의 적에 둘러쌓여 있다.
하루하루를 유리위를 걷는 심정으로 산다. 그대들은 벌써 망각하였는가?
30년간의 원한이 눈녹아 사라지고 벌써 기분 째지게 행복한 나날로
바뀌었는가? 긴장하라. 그대들이여.

어느 미친놈이 방아쇠 한방이면 디제이는 간다.
여우같은 종필이가 언제 무슨 수작 할지 모른다. 늑대같은 한나라당
김윤환 일당 잔머리 돈나 굴리는 소리 안들리는가?

벌써 긴장이 풀려서 되겠는가? 나같은 경상도파 디제이 지지자들은
용병에 불과하다. 워드방에 권현문 야부터 젤로 먼저 긴장이 풀렸다.
보테아자씨도 긴장이 풀렸고. 정권이 바뀌었으면 달리지는 것이 있어야지.

정신 못차리면 정권은 또 넘어간다.
나는 용병의 심정으로 말한다. 전라도 아그들한테만 말한다.
보떼아자씨 같은 경상도쟁이야 투표해도 사표되는 경상도표다.
표 결집력 있는 너그들이 긴장 풀리면 끝이다.

아직은 긴장이 풀리면 안된다. 워드방이고 열린나라고
일부 전라도 아그들이 긴장 풀려서 헤롱헤롱 하는거 보인다. 아무데서나
광주 팔아먹을려는거 보인다. 잠바떼기는 뭐하노 저런 것들 안잡아가고,

김대중이 10년만 젊었어도 상황은 달라졌으리라.
부디 레인보뜨 아자씨의 말쌈을 새겨듣고 적어도 올 한해는 긴장하고 살어라.
적어도 이 정권이 2년은 가야 안정을 얻는기야.

지금 내각은 실험내각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주의 이나라에 아직은 멀었다.
나는 역사와 진리 앞에서는 낙관주의자이지만 현실앞에서는 지독한
회의주의자다. 정권 바뀌고 인물 몇 갈아치웠다고 벌써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쿠데타의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보는가?

아서라 말아라. 아직은 살벌하다. 양심수는 여즉 감옥 안에 있고
한총련은 여전히 취루탄만 잡순다. 정신차려야 한다.
하루하루를 유리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살어야 한다.

정권 바뀐 직후에 일부 탱자같은 경상도 좀팽이들이 야유와 비아냥을
흘리고 다닐 때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전라도들은 마음껏 기뻐하라. 승리자의 영광을 드높이 외쳐라. ]
그러나 이제 아니다.
그때의 말은 지금 상황(일부 경상도쟁이들의 뒷다리걸기)을 예견하고
기정사실화의 방법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정권이 바뀌었을 때는 기세좋게 밀어붙여 적진을 유린하고 전리품을 수거하여
바뀐 상황을 확실하게 인지시켜조야 뒷탈이 없는 것이다.
그때는 조마조마하여 가만이 엎드려 있다가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언론도 알아서 기고, 재벌도 알아서 기고,
관료들도 알아서 기니까 이게 왠일이냐 싶어서
긴장이 풀려서 너들까지 헤롱헤롱 풀어진다 이거지.

정신차려라. 재벌은 기회를 노리고 관료들은 복지부동, 군부는 밀실음모
언론은 꼬투리잡기 너희들이 기고만장 할수록 적들도 예민해진다.
총성 한방에 모든 일 없었던 일로 될 수있는 상황이
유리위를 걷는 지금이다.

늑대 따위가 하품하고 다녀도 되는 호시절이 아니다.































니니페님께는
쫌 깝깝하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
아직 요점을 못잡고 있다. 뭘 어쩌자는 것일까?

만화에 대해서 아줌마부대가 뭐 이런저런 구시렁거림이 있고
청보법이 어떻고 하지만 그것이 본질문제는 아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난 작가부족이라 생각한다.
하고많은 말들을 잠재우려면 결국은 실력이 필요하다. 서태지가 그러했듯이
위대한 작가 한명이 백마디 말을 필요없게 하는 것이다.

영화도 그렇고 만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한국 만화계에 한명의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본 작가는 겨우 누들누드 철견무적의 양영순 정도다.

대본소 만화 이현세 고행석 박봉성 그거 진짜 만화 아니다.
신문 만화도 진짜는 아니고 명랑만화 그런거 만화 아니다.
만화를 펜으로 그리든 붓으로 그리든 그것도 본질은 아니다.

진정한 만화는 만화의 본래적인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
내용이 감동적이고 그럴싸한 것은 소설이고 명작이고 문학이지 어찌
만화이겠는가? 만화는 만화여야 한다.

그림이 본질이고 나머지는 모두 보조적인 거다.
아직은 이나라에 거장이 없다. 그래서 힘이 없다. 입으로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오직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

영화라도 마찬가지다. 홍상수 임순례 따위의 허접쓰레기는
언제나 주변의 역할를 할 뿐이다. 주변에서 틈새시장을 노리고 우째
살아남아 보려는 노력도 가상하기는 하다만 너무 힘이 없다.

서태지처럼 당차게 치고나가는 맛이 없다.
김흥국이 같이 재주부려서 살아남는 방법도 방법이지만 눈물난다.
만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붓이 어떻고 펜이 어떻고 민족주의가 어떻고
이거 본질이 아니다.

기본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본질의 영역에서 정면대응 못하고
변두리에서 틈새시장이나 찾아먹어서는 안된다. 우리것, 우리얼, 우리식,
이게 다 틈새시장 노리기 생존전략 인거라. 눈물난다.

저들끼리 재미로 노는 컬트쟁이들이나 하는 수작이지.
나는 아직 님이 무슨 아이디어를 전망을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을 확 뒤집어 버릴 만한 그런 것은 정치적으로 뭐 비판으로
데모로 되는 거시 아니고 틈새시장에 적응해서 될일도 아니고

오직 실력으로 정면돌파 만이 방법이다.
만화에서도 영화에서도 서태지처럼 시원한 한줄기 소나기
때려줄 때가 되었는데 아직은 소식이 없다.

영웅을 기다릴 뿐.

























[서태지를 기다린다. ]

만화나 영화에 대해서 마 정부규제가 어떻고
만화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주장하는 아줌마부대가 어떻고
청소년 보호법이 어떻고

영화검열이 어떻고 재벌자본이 어떻고 이거이 다 꾸질꾸질한 변명임을
알아야 한다. 규제와 검열을 철폐한다고 희망이 있간?

이란 바라. 세계에서 영화검열이 젤로 지독한 나라다.
그 다음이 중국이고. 잘 나가고 있자나?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정지영이 같이 할 일없이 머리띠 매고 돌아다닌다고 영화가 되간?
[부언하면 안생긴 할마시(김지미)보다야 백번 낫다...할멈은 **다.]

홍상수 임순례 같은 머저리들이 대안영화를 맹근다고 소꿉장난 하면
영화가 되간? 난관을 돌파하는데는 오로지 단 한명의 천재가 필요할 뿐이다.
백명의 중간보스들은 다음선거에서 추풍낙엽으로 떨어져야 한다.
말짱 황이다.

그렇다면 일단 서태지를 이해해야 한다.
근데 마랴. 알고보머 서태지 이 잉간 암것도 아이다. 폭삭 속았수다.

왜 서태지인가?
랩음악이 처음 한국에 상륙했을 때 홍서범 등이 [삿갓삿갓 킴] 하면서
흉내를 내었으나 대개 실패했다. 왜? 그걸 알아야 한다.

외국영화를 번역 내지 번안한 영화를 보면
외국영화에서 배우가 돌연 오페라를 한다. (특히 뮤지컬)
그냥 평범한 대사를 노래로 불러제끼는 것이다.

이때 한국 성우들은 쩔쩔맨다. 노래실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번역된 우리말을
그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번역의 책임일까?
매우 어색하다. 이때 한국관객들은 절망한다. 우리말은 안돼~!

과연 그럴까? 서태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피해갔나?
우선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음절의 파괴이다.
[나@안 알@아요 이@ 밤이 지@나고 지@나면 누@군가가
나@를 떠@난다는 것을 ]- 얼른 들어보면 우리말을 이상하게 뜯어붙여
버린 것 같다. 우리말의 훼손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우리말과 영어의 본질적인 차이는 악센트가 우리말은 음절의 앞부분에
영어는 뒤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세계에 공통된 것이 (예 아니오, 엄마 아빠)인데
(예 아니오)를 특별히 강조할 때
可 영어-> 예썰@ 일본말-> @하
不 러시아어 ->니예트@ 일본말-> @이이에 (이이에는 한국말 으응으임)
영어권에서는 예와 노의 뒤에 악센트가 붙는데 비해
일본어나 한국말은 그 앞에 악센트가 붙는다. 아니오란 말은 노 앞에
악센트가 붙은 말이다.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 (마)와 (빠) 앞에 악센트가 붙은 것이 한국말
마미 파파하여 뒤에 강조가 들어간 것이 영어권이다.

우리나라 성악을 들어보면 대개 영어흉내를 내고 있다.
악센트가 뒤에 들어간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성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매기의 추억]은 좀 이상하다. 민요 [한오백년]과 비교해 보자.
뭔가 비슷한 점이 느껴질 것이다. 일부 가사 앞부분에 억양이 들어간
것이다. 이런 점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비교해보면
금새 표시가 난다.

서태지의 위대한 점은 그의 노래가 모두 친숙한 민요나 판소리 혹은
유행가와 같이 음절 앞부분에 악센트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만약 [난 알아요]를 서태지가 아닌 사람이 랩으로 불렀다면
[@나안 @알아요]를 [나안@ 알아요@]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 장사가 망한다.

나는 왜 이 점을 강조하는가?
우리는 흔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하면서 뭐 우리식대로 하면
뭔가 될것처럼 말하면서 무엇을 우리식으로 해야되는지 모르고 있다.
서태지의 랩은 한국식음악이 아니다. 민요나 판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들어보면 우리가곡이 대부분 영어발음을 흉내내는데 비해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가곡은 9할이 쓰레기다)
서태지는 그냥 우리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음악이든 영화든 만화든 우리식대로 해야 되긴 되는데 그 주제나 스토리나
이런걸 우리식대로 한다고 해서 우리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서태지의 음악은 철저히 미국식이지만 그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선
한국식으로 가버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늘 거꾸로 하곤 한다. 우리식대로 해야 하는 것은
미국식대로 가버리고 미국식으로 가도 좋은 것은 우리식으로 하다가
망하곤 한다.

한국적 스타일을 개발하라. 만약 거기에 성공한다면 투캅스처럼 외국영화를
고스란히 베껴도 상관없다. 투캅스의 주제나 설정은 다 베낀 것이지만
그 웃음은 지극히 한국식유머다.

본질이 우리것일 때 아무리 모방이고 표절이라도 상관없다.
바로 그러한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레스토랑에 가서 된장에 김치를 먹으면
한식이라는 야그다.

만화든 영화든 결국은 핵심을 짚어주는 단 한명의 천재가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 본질하고는 상관없는 데서 한국식을 찾아헤매곤 한다.
한복을 입고 집신을 신은채 빵을 먹으면 한식이라는 착각이다.
그거 양식이다.

한국음악과 미국음악의 차이는 음악의 차이가 아니라 발음의 차이이다.
음악은 세계공통어라서 나라마다 치이가 있을 이유없다.

그림이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핵심을 짚어조야 된다.
웃음과 제스쳐가 한국식 유머, 한국식 몸동작이라야지 소재나 주제나
줄거리가 한국식이면 한국식이 아니다.

붓으로 그려도 펜으로 그려도 한국식은 아니다. 그림에서 한국식 미감은
따로 있다. 한복을 그리고 한국된장독을 그린다고 한국그림은 아니다.
이현세 만화는 아무리 한국이야기를 담아도 전혀 한국만화가 아니다.

일본의 모든 만화에서 일본식 건축, 일본인형, 일본그림의 선을 발견하지
못한다 말인가? 일본식 직선, 일본식 곡선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톰과 제리의 미국식 선과 다르다는 것을 느껴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 한국의 그림이나 건축이나 복식에서 나오는 한국식 선을
제대로 반영한 한국식 만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선으로 한국의 굴절각도로 그리면 그것이 한국그림이다.
내용이 미국이야기라도 선이 한국의 선이면 그것이 한국만화다.

대만만화 자이츠충의 선이 중국인 만이 그을수 있는 중국식 선임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나 일부 만화가- 그들은 이희재나 양영순이나 그렇다.- 들에서 한국인만이
그을수 있는 한국인만의 굴절각도를 발견하곤 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각도이고 한복이나 한옥의 굴절각도이다.
그것을 담은 선을 찾아낸다면 내용이 아무리 미국이야기라도 한국만화이다.

그리고 오직 거기에만 한국만화 그리고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다.
소문에 듣자하니 투캅스쓰리는 완전히 조져놓았다 한다.
한국식 제스처와 몸동작 그리고 유머를 조져놓았다면 미래가 없고
이야기줄거리와 교훈 주제를 조져놓았다면 희망이 있다.

(그 여배우가 훌떡벗고 데미무어를 흉내내는 유머는 전혀
한국식유머가 아니다. - 그게 조지는 것이다.)






























논리가 말하는 방법과 수학이나 물리학이 말하는 방법은 다르다.
수학은 계산만 맞으면 되고 물리학은 실험결과만 맞으면 된다.
그러나 논리학은 그 내부시스템에 있어서 맞아야 한다.

오반님이나 몇몇 님들의 착각은 그런데 기인한다.
논리시스템이란 [갑은 을이다.] 했을 때 과연 갑이 을인지가
문제가 아니고 [갑이 을이면 갑 아닌 것은 을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가 아닌 영역에서는 갑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므로
갑이 아닌 것이 을이든지 아니던지는 신경안쓴다.
늘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문제이다.

일테면 점의 정의가 무어냐가 중요한게 아니고
점이 뭐라고 정의되는 순간 선이나 면의 정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점에 위치만 있고 다른 것은 없는 것은 점이 다른걸 가져버리면
선이나 면은 놀아야 한다는 점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은 선이나 면이 놀지 않는데 가서 놀아야 하는고로
위치만 남기고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다.

DJQND님이 지적은 적절했다고 보는데
님이 지적하신 dimension이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통일하여 재분류할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나의 견해다.

나는 배운 물리학을 야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분류법을 선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를 린네의 학명붙이기와
같이 계통을 따져 분류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물리학에서는 분류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dimension이 서로
다르다고만 되어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규명이 없다.
왜냐하면 이건 물리의 문제이기 보담은 논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와 논리학자와 합동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위에 말했듯이 내가 말하는 바는 [갑이 을이다]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갑이 을이면 을은 병이어야 한다]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FORCE와 ENERGY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용어상의 차이가 좀 있는데 나는 분류법을 말하고 있는거지
용어를 설명하자는 것이 아니다. 고로 나의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개념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테면 내가 입자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질량을 가진 소립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는 질과 힘의 중간에 와야 한다는
좌표확인의 문제이다.

고로 입자가 뭐인가는 입자를 쪼개서 확인되는 문제가 아니고
질과 힘이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영역이 겹치면 안되니까.

그러므로 파락의 입자는 매우 유동적이다. 즉 아직 연구성과가 불분명한
자기장이나 중력장도 경우에 따라 하나의 입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입자는 인력과 척력, 반발력과 흡인력, 구심력과 원심력 등
두가지 서로 맞서는 힘을 동시에 가진 경우이다.
만약 소립자가 그러하다면 입자이며 그러하지 아니하다면 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빠락의 입자구분은 더 많은 것이 입자가 될 수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입자가 뭐든 간에 힘이나 질이 뭐하면
입자도 같이 뭐하게 되므로 엎어치나 매치나 같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빠락의 질이란 개념은 두 개이상의 입자가 물리적 대응상태를
가진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비로만 파악이 가능한 경우는 모두 질이다.

일테면 무게이다. 면적이나 길이는 자로 재면 되지만 무게는 하나만
잴수 없다. 무게는 항상 저울위에 추와 측정대상을 동시에 올려야 된다.
비교의 방법으로만 파악가능한 것은 그것이 꽃이든 바람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모두 질이다.

이는 물리 이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빠락의 [질, 입자, 힙, 운동, 량]은
보편개념이므로 일테면 [죄질이 나쁘다] [양질의 식사] 할 때의 질도 역시
[상호비교의 방법으로 파악가능한] 질의 성질이다.
논리의 용어는 공변되는 것이어야 한다.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어떠한 운동이든 반드시 시간개념이 들어간다.
시간성이 개입한 것은 모두 운동이다. 그것을 측정하는데 시계가 필요하다면
그것이 운동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힘의 요소는 방향성이다.
힘은 그 어떤 종류의 힘이든 반드시 공간적 방향을 가진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그 등뒤에 붙어버리면 당할수 없는 것이 힘이다.

흔히 하는 말로 [담비가 호랑이 똥구녁에 붙어서 호랑이 잡아먹는다]
카는데 그것이 힘이다. 힘은 아무리 강해도 등뒤에 붙어버리면 암것도
아니게 된다. 마찬가지 운동은 아무리 강해도 시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럼 에너지는 뭔가? 우리가 통념적으로 쓸 때 에너지는 힘을 말한다.
그러나 DJQND님이 지적하신대로
에너지는 질, 입자, 힘, 운동, 량 모두가 에너지가 될 수있다.

질 - 비의 방법으로만 파악된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파악이 안된다.
입자 - 두 개 이상의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호랑이 똥구녁에 담비가
붙을수 있지만 입자는 두 힘을 동시에 가지므로 담비도 덤빌 수 없다)
힘 - 하나의 방향만을 가지고 있다.
운동 - 시간 상에서만 파악이 된다.
량 - 시간이든 공간이든 어떤 방법으로라도 직접 측정이 가능하다.

연습문제 1.- 빨간색이 있다. 질인가 양인가?
질일 경우 빨강은 파랑과 비교한다. 양일 경우 빨간색의 채도로 측정한다.

연습문제 2.- 강도를 잡았다. 질인가 양인가?
질일 경우 절도와 비교한다. 양일 경우 들고간 흉기를 측정한다.

이런 구분이 필요한 것은 량은 직접 측정이 가능한데 운동이나 힘이나
입자나 질은 특정한 방법을 써야만 측정되기 때문이다.
운동을 파악하려면 일단 양을 알아야 하고 힘을 파악하려면 먼저 운동을
알아야 하고 입자를 파악하려면 먼저 힘을 알아야 하고
질을 파악하려면 먼저 입자를 파악해야 한다.

DJQND님의 말은 이들이 각각 dimension이 달라서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고 나는 그 dimension들의 차이를 규명해낼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로 말하면 종과 속과 강 목들이 서로 dimension이 다르지만 실은
하나의 더 큰 dimension에 의해 통일되는 것과 같다. 속과 종과 과, 목,
강, 문, 계들은 서로 별개의 dimension이지만 그들 사이에
일정한 서열이 있는 것이다.

W=Fs (F=힘, s=거리)에서 에너지가 일이 되고 일이 힘이 되고
거기다가 거리까지 붙었는데 여기서 일이나 거리라는 개념은 물리용어가
아닌데 차용하므로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면 개는 개과의 개종인데, 개를 분류하면서 과나 종이라는
용어를 쓰지않고 새빠두나 바둑이라는 용어를 마구 쓰는 것과 같다.
일은 운동으로 바꿔야 하고 거리는 양으로 바꾸어야 한다.

잠깐 ~@!! [적어도 님은 물리학의 영역에서 린네의 분류법과 같은
엄밀한 학명분류가 필요하다는 대의에는 동의해야 한다. 꼬 그 분류법은
물리학 영역을 넘어서 학문일반에 통용되는 보편원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데도 동의해야 한다. ]

거리는 시간의 길이든 공간의 거리든 마찬가지기 때문에
[갑이 을이면 갑 아닌 것은 을이 아니어야 한다]는 논리규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최종단계에서 운동과 량과의 상관관계로 규명이 된다.
우리가 에너지의 크기를 측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비로 판단하는 것이다.

고로 질량이라는 말에서 이미 질 개념이 사용되어버린 것이다.
질량은 량의 비례이다. 가속도는 운동의 시간적 비례량이다.
F=ma란 운동의 비례수치와 량의 비례수치를 곱한 것이다.

즉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운동과 량과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힘을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DJQND님이 잘 지적했듯이
에너지는 힘(운동과량)과 거리의 비로 판단된다.

여기서 거리는 결국 량이며 양은 비례량이므로 에너지량은 힘 곱하기 비이고
여기서 에너지량을 측정한 까닭이고 량을 떠나서 에너지 자체는
힘이다. 간단히 비유하면 거리가 1이면 힘이 1인 것이다.
즉 거리가 같을 때 에너지는 힘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이 힘이야 말로
순수한 에너지인 이유이다.

빠락이 이야기 하는 것은 논리이므로 물리학이 물질파악에만 이용되는데 비해
사회 모든 영역에 적용이 가능하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그 모든 것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과학의 특수성이 비해 철학의 보편성이다.
이를 두고 진리의 성질은 공변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것은 과학자의 사실측정이 아니라 논리학자의
분류법이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어떤 실험결과가 나오든 분류구분은 똑 그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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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달걀의 문제는 진화의 문제가 아니고 논리적으로 명명법의 문제다.

자동차가 고장이 났는데 원인을 알아보니까 어떤 눔이 도로바닥에다
드릴 날을 박아놓았다. 그렇다면 이는 바퀴의 문제인가 도로의 문제인가?

여기서 보편법칙
[ 도로는 바퀴를 손상시킬수 있어도 바퀴는 도로를 손상시킬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바퀴도 탱크바퀴면 도로가 손상된다. ]
이건 논의가 빗나간 경우다. 왜냐하면 펑크난 바퀴는 바퀴일수 없지만
손상된 도로는 여전히 도로이기 때문이다.

도로가 바퀴보다 먼저이므로 뒤진 것이 앞선 것을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엄마가 아기를 안낳을수는 있어도 아기가 엄마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이치다. 아기가 나는 순간 엄마는 이미 결정된 일이다.
아기에겐 선택권이 없다.

우리는 흔히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서 바퀴는 도로를 손상시키고
그 손상된 도로가 다시 바퀴를 손상시킨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런 경우는 없다.

엄마가 자식을 나쁘게 만들지 자식이 엄마를 버려놓지는 않는다.
바퀴가 도로를 손상시키면 그것은 도로공사에서 땜질하면 그만이고
도로가 바퀴를 손상하여 교통사고나면 도로공사 사장 감옥가야 한다.

이 논리를 모든 경우에 적용할수 있다.
야당이 잘못하니까 여당도 잘못했다는 양비론.
노조가 잘못하니까 회사도 잘못했다는 양비론.
학생이 데모를 하니까 정부도 최루탄 쏴도된다는 양비론.
이것이 다 닭과 달걀 중 어느것이 먼저인지 몰라서 생긴 순환논리의 오류이다.

야당이 잘못해도 여당책임. 노조가 잘못해도 회사책임.
학생이 데모해도 정부책임이다. 어느 한쪽에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악순환이 끊어지고 진정한 화해가 성립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닭과 달걀이 문제인지 인정해야 한다. ]

불확정성의 원리를 비롯한 양자역학의 주요부분은
달걀은 확인했는데 미처 닭은 확인이 안된다는 것이다.
초끈이론에서 보듯이 닭(입자) 보다 한수 위인 초끈이론의 끈 역할을 하는
상위개념을 파악할 때 모든 패러독스들이 해결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은 미완성의 이론이다. 자동차는 파악이 되는데 도로가 파악이
안되어서 도로의 굴곡이 자동차의 위치에 미치는 영향을 계측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서 앞으로 갈수록 변수가 하나씩 추가가 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존재는 확인되면서도 크기가 파악이
안된다면 거기에 뭔가 하나 빠진 것을 찾아 추가하면 꼭 맞는 것이다.

낙타 17마리를 큰 형은 절반, 두 번째는 3분지 1, 막내는 9분지 1을
나눠가지라 하고 유언을 했는데 선한 랍비는 낙타 한 마리를 빌려주는
방법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양자역학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아직 우리는 어디서 빌려올 낙타 한 마리를
찾지 못하고 함부로 [이거 답없다] [세상에는 답없는 문제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양자이론이 정립되려면 양자보다 더 큰 개념이 찾아져야 하는데 그
개념이 없이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를테면 아인시타인은
시, 공간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보다 더 큰 개념 [시공]을 주장했다.
시공은 시간이나 공간과 다른 보다 큰 별개의 개념이다.

즉 달걀을 논의하면서 닭을 찾아낸 것이다.
근데 양자역학에서는 이부분이 빠져있다. 달걀만 가지고 왜 달걀인지
알수없다고 말한다.

이는 논리의 영역이다. 불확정성을 말하면서 왜 그것을 확정시킬 보다 큰
개념에 대한 명명이 없느냐는 물음이다. 분명히 말하면 예언하지만
어떤 위대한 물리학자가 전혀 새로운 개념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모든 논란은 끝난다.

아직은 그 개념이 없으므로 양자역학을 가지고 현실을 빗대어 설명하는 데는
상당의 무리가 있다.









익스님께~!

서태지이야기는 만화운동 내지 문화와 정치와의 연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진 특정인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한 것이지
규제와 검열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다.

규제와 검열에 대해서라면 [외설이 금제의 이유가 될 수없다]는
요지의 나의 옛날글이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나는 마광수나 장정일의 소설 일부가 외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설이라 해서 예술이 아니란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외설(상업적 목적의 음란행위)이면서 예술일수도 있다.

근래의 누드크로키대회처럼 상업적 이유로 돈을 받고 외설관객을
입장시킨 행위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의 소지는 있다.
법으로 규제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시민단체가 혹 위험수위를
넘지 않는지 감시에 나서야 할 대상은 된다고 본다.

외설이 단지 외설이라는 이유로 금제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금제는 법이나 제도로 일방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양식과 시민의 의식과 여러가지 복합적인 힘들의
조우에 의해 조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청보법의 일부조항은 문제이지만 그 취지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불량만화 퇴치를 주장하는
아줌마부대의 활약도 일방 매도될 수는 없다고 본다.

민주주의 사회는 정부의 법률과 제도의 힘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압력단체가 상호견제
감시함으로 하여 질서가 담보되는 것이다.

외설을 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며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시민단체의 자유이다. 양자의 양식에 의해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서
권력의 개입없이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성숙된 시민사회다.

장정일 구속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권력의 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지 외설이 정당한가의 문제와는 상관없다.

외설은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는 차단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인들에게는 무제한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대형출판사나 공공단체나 언론방송이 외설에 나설 때는
시민단체가 불매운동 등으로 강력히 항의해야 한다고 본다.
선진국에서는 그렇게 한다.

일본문화에 대한 대응도 그런 식으로 가야한다.
정부에서는 무조건 풀고 시민들은 감시하고 양자의 역할분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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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양보할수 없는 기본적인 게임의 규칙이 있고
상황에 따라 유연히 대응해야할 전술적인 부분이 있다.

인권문제나 규제, 금지 등은 기본적인 게임의 규칙이다.
고로 우리는 절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부와 타협이나
양보를 할수없다.

사전검열이나 규제는 외설이든 뭐든 무조건 철폐되어야 하며
어떠한 종류의 타협도 있을수 없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작가나 사상가가 사회의 금기를 깨뜨리기
위해 하나의 시도로서 이상한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전략적대응으로 나서야 한다.

말하자면 축구시합에서 게임의 규칙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룰은
양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지만 감독이 내는 작전의 변화는
얼마든지 양보도 타협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충지대로서 압력단체의 공간이 주어져야 한다.
외설이나 도덕문제는 압력단체들끼리의 상호견제와 감시 속에서
조정되어야 하며 기본적인 인권문제는 무조건 허용되어야 한다.













경상도쟁이의 한마디.

경상도 넘들은 꼴잡하게 잔머리 굴리고 우유부단한 거 싫어해.
박수 칠 준비도 되어있고 뒷통수 칠 준비도 되어 있는게
경상도 사람들이야.

김대중이 과감하게 개혁노선을 내걸어서 양심수 석방하고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여 계몽군주로 나서면 야코 팍 죽어서
따라오게 돼 있는게 경상도 사람이야.

힘을 구사하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전두환이 처럼 힘의 논리를 내세우는 솔직담백형이야.
둘은 꼿꼿하게 지조를 지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지사형이야.
어느쪽이든 경상도는 껌벅죽게 되어있어,

근데 김대중은 마 경상도 사람들의 심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거야. 난 김대중이 잘하고 있다고 봐.
그러나 이나라 국민 수준은 그게 아냐.

그들은 국민들을 향해 [이노무 손들 정신 못차릴래~!]하고 뺨따귀
후려갈길줄 아는 계몽군주를 원하고 있단 말이야.

김대중이 정권 잡은게 뭐 이나라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이제
지역대결구도에서 진보대 보수로 정치구도가 바뀔 전조로 해석한다면
어린애야 너그들. 꿈깨라 꿈깨~!

민주주의 이나라 아직 멀었어. 정권 바뀐거는 다른 거 없어.
도덕적으로 김대중이 우위에 있었단 말야~! 거기에 경상도넘들이
야코가 죽은거야. 그럴수록 김대중의 선택은 하나야.

야코죽은 경상도넘들 이기회에 기를 더 팍 죽여놔야 된다말야.
근데 아니잖아. 마 내가 보기엔 잘하고 있다만 무지렁이 백성 입장에서
보기엔 아니야. 꼴잡하게 잔머리 굴리고 있는걸로 비친다 말야.

이제 한나라당은 완전히 경상도당으로 굳었어. 이대로 통일될때까지
갈거야. 한나라당을 지역당으로 만들어준 것은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실수고 김대중 입장에서도 실수야. 이건 완전히 조진거야.

원래 한국넘들은 약자를 동정하는 버릇이 있어. 잘하든 못하든 약자라는
이유로 동정받는다 말야. 김대중은 도덕적 우위와 힘의 우위 중
힘의 우위를 택했어. 그러면서도 여전히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

경상도넘들은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어. 그럴수록 야코를 죽여야 해. 근데 도로 기 살려놨어.
김대중은 계몽군주를 포기하고 민주대통령이 되겠단거야.

웃기지 않아? 민주주의가 먼지도 모르는 넘들 앞에서 민주대통령이
되겠어? 경상도를 제압하는 것은 오직 하나야. 도덕적 우위와
카리스마. 이제 카리스마도 가고 도덕적 우위도 갔어,

한국넘들은 아직 민주주의를 버거워 해. 상암동 축구구장 하나만
봐도 그래. 김대중은 마 여론에 따르겠다는 거야. 근데 여론은
그게 아냐. 그런건 나랏님이 알아서 신속하게 결정해야지

왜 백성들에게 떠넘기나 이거지. 이나라 수준이 그래.
교육문제고 뭐고 김대중은 여론을 따라가는 거야. 그러나 이나라
백성은 아직도 깜짝쇼에 익숙해 있어. 결사반대가 아니면 맹목적 추종.

생각하고 판단하는걸 두려워 한다고. 민주주의가 버거운거야.
그런건 대통령이 다 알아서 챙겨줘야 되는걸로 안단말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해. 결론은 하나야.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고
그 결과 전혀 민주주의 때문이 아닌 오로지 야당이 도덕적 우위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정권이 교체된 거야.

광주..? 그것이 민주주의 하고 무슨 상관이나 있나? 어디 주제넘게
감히 진보대 보수를 꿈꾸고 있어. 그건 30년 후에나 가능해, 꿈깨~!
광주는 딱 하나야~! 경상도 넘들에게 도덕적 열등감을 심어준거,

민주주의 아직 멀었어. 도덕의식은 좀 나아졌지. 민주주의가 독재를
극복한 거이 아니라 도덕이 부패를 극복한 것이 이번 선거야.
아직도 경상도 넘들에겐 민주주의 보다는 도덕적 청렴결백이 더

먹혀들어. 이회창이 인기가 괜히 있는게 아냐~! 김대중이 경상도를
제압하는건 하나야. 오로지 양심수 석방, 민주개혁, 과감한 재벌압박으로
인기전술을 써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카리스마를 조작하는거야.

그러나 이건 내가 가장 반대하는 거지. 그랬다가 나한테는 존나
욕먹겠지만 경상도 사람들에겐 대환영이지. 경상도넘들 심리는 하나야.
[이노무 손들 너그들이 나라 망쳤어 정신 못차릴래~!] 하고 귀싸대기를
후려 갈기는 것. 패면 팰수록 눈물 흘리며 고맙다 카는게 경상도야.

김대중은 서구형 정치가야. 상식과 양식과 여론 그리고 조정의
정치가지. 정치를 가지고 예술을 할려고 해. 근데 이게 경상도 곰탱이들
한테 먹히간? 경상도 넘들에겐 오로지 계몽군주로 군림하고
심리전술로 압박해서 항복을 안받으면 안돼.

일단 첫 싸움에선 김대중이 졌어. 한나라당 이대로면 안망해.
경상도당으로 남아 한 10년 갈거야, 그러면 김대중이 진거야.
도덕적 우위에서 졌다말여. 서구형 정치를 좋아하는 내 기호엔 맞지.

된장뚝배기 정치 좋아하는 한국넘들에게 안맞아.
민주주의 꿈깨고 도덕적 우위로 몰아쳐야 해. 정신 못차리는 넘들 많아.






























먼저 질에 대해 말씀드리면 질은 말그대로 질입니다.
質(바탕 질)이죠. 바탕이란 바닥이란 말입니다. 바닥은 밑바닥이라서
그 아래가 없어요.

높이라면 아무리 낮아도 더 낮은게 있고, 크기라면 아무리 작아도
더 작은게 있고, 길이라면 더 짭은게 있죠. 입자나 힘, 운동과 량은
더 작고 모자라는게 있어요. 그러므로 계측이 되죠.

근데 질은 타자와의 비교 외에는 파악이 안됩니다. 질이 아닌 것은
[계측]의 방법으로 알수 있는데 질은 [구분]의 방법으로만 알수있어요.

그것은 인간의 성질이나 물질의 질이나 그림의 질감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물리학을 떠나서 천하의 그 어떤 질 중에 계측 가능한게
있으면 단 하나라도 대봐요? 없잖아요.

고로 이건 보편진리입니다. 내가 임의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니까 만약 그렇지 않은 것이 있거던 대보라 말입니다.

[질이 아닌 것은 모두 그보다 더 작고 약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다.
질은 바탕이라서 그게 없다. 질은 약분하거나 제하거나 감할수 없다.
질은 계측할수 없다. 오로지 구분이 가능하다.]

이 우주 안의 존재의 기본구성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복이고 둘은
잡입니다. 합쳐서 複雜입니다. 근데 複(겹옷 복)은 감하고
제하고 약분하고 해서 규모를 줄일수 있어요.

근데 雜(섞일 잡)은 제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르거든요.
이건 계측이 안되므로 자로 잴수도 산술로 계산할수도 없어요.
이해를 해서 되는게 아니고 무조건 외워야 하는게 雜이죠.

우리는 복잡한 이 우주를 계측과 구분이라는 두가지 방법으로
파악합니다. 계측은 복을 측정하는 것이고 구분은 잡을 분리하는 것이죠.
이것이 인간이 천하 사물을 인식하는 기본방식입니다.

질은 곧 잡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기본성질이죠. 더 나눌수도 곱할수도
더할수도 뺄수도 없는 밑바닥, 오로지 여타의 것과 비교구분만이
가능한 것..그것이 질이며 나는 물리학적 질을 임의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서 그렇지 않은 질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지적해보라 말입니다.

참 질은 <좋다 나쁘다>의 비교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냥 인간이 천하를
인식하는 두가지 방법, 계측과 구분 중 구분으로만이 알수있는 것은 다
질입니다. 질에서 곧 惡質을 연상하는 것은 넌센스.

모든 과학영역을 포괄하는 분류구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굳이 물리학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 방면의 전문가도 아니구요.

하옇든 학교공부는 이해와 암기 두가지 방법으로 하는데 이해하면
되는 것은 질이 아니고 암기해야만 하는 것은 다 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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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말이 나왔는가 하면 원래
제안하는 용어는 [보편자 개별자 구조 작용 현상] 인데 이 개념이
통신인에게 어렵다고 생각해서 쉬운 용어로 대체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님께서 힘이라는 용어가 마음에 안들면 구조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나의 구조론을 참고하시던지. 논리적 용어로는
[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입니다.

더 풀이하면 (보편자-배경)은 요소와 효과 사이~!
(개별자-실체)는 내포와 외연 사이~!
(구조-연관)은 실체와 관계 사이~!
(작용-이행)은 원인과 결과 사이~!
(현상-귀결)은 본질과 현상 사이~! <사이란 표현에 주목>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이기 위해
특정한 성질을 가져야 하는 바 즉 어떤 것이 있는데 있다는 것을
성립시키기 위해 아무 성질이 없으면 있는것이라 할 수 없는 바

그 기능은
유도기능과 대응기능과 의속기능과 인과기능과 표상기능인 바
즉 천하에 어디든지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유도되고(이끌어오고)
여기에서 패러독스(무에서 유가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이끌어오지?)

둘째 대응되고 (대응된다는 것은 둘이 맞선다는 뜻 - 페러독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없는데 어떻게 대응되지?
- 대응하려면 하나가 더 있어야 하고 그러면 늘어나야 하니까)

셋째 의속되고(의속은 하나가 하나속에 종속-패러독스- 작은 것에
큰 것을 담을수 없는데 어떻게 의속되지? )

넷째 인과되고(인과는 하나가 하나의 결과-패러독스-결과는 원인의
원인일수 없는데 어찌 결과하지?)

다섯째 표상하고(표상은 나타냄-패러독스-현상은 본질(유도)에 의해
한정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한정되지?)

의 다섯가지 논리의 난관을 여하히 돌파하는가? --
각각 배중률과 동일률 모순률 인과율 한정률의 개입을 카바해야 함.

그러니까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위 논리페러독스들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예의 하나를 물리용어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유도기능(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 먼저 어디에서 이끌어올 것인가?)
의 문제는 반드시 배중률에 걸리고 이걸 돌파하려면 요소와 효과
사이에서만 찾아야 하며 거기에서 발견된 개념은 보편자인 바

그것을 자연에서 찾으면 질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언어에서 나온 것인데 인간의 언어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떤, 어떻게 하여지게, 하였나 되었나]
의 열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와 술어가 결집하여 문장을
이루는 까닭에 만약 누가 뭔가를 말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반드시
위 열가지를 물을수 있습니다. 그 열가지에 다 답하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 중 하나가 답이 안되면 그것은 무엇도 아닌거죠.

이는 언어영역에서의 일종의 좌표입니다. (언제 어디서?)는 예의
유도기능, 질에 대한 물음이고 (누가 무엇을)은 입자(개별자)에 대한
물음이고 (왜 어떤)은 구조연관에 대한 물음 ...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이야기 하는 보편자, 유도기능, 요소와 효과 사이.
이런 표현이 이해가 안되면 간단히 (아 질을 야그하는구나)
(질은 비교에 의한 분류구분의 방법으로만이 파악가능한 것을
말하는 구나) 하고 짐작하면 정답이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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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구 모든 것을 에너지란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함은 모든 것을
색즉시공 한마디로 설명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도딱는 소리라서.
전혀 논리의 시험관문을 넘어선 것이 아니어서~!

말했죠 저는 어떤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의 배경과 실체와
연관과 이행과 결과의 다섯가지를 질문하며
유도와 대응과 의속과 인과와 표상을 질문하며 우리말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떤, 어떻게 하여지게, 하였나 되었나]
를 질문한다고.

에너지란 한마디로 과연 나의 이 질문들에 답할수 있다고 보시는지?
한마디로 카바가 가능하다는 말은 아미타불 육조혜능스님이나
달마대사의 선문답 어법이고 논리는 속속들이 캐묻는 법이라서

나는 어떤 것이 있다면 반드시 자기복제이론(유도기능을 설명)과
집적이론(대응기능을 설명) 구조론(의속기능을 설명)
일반이론(인과기능을 설명) 분류이론(표상기능을 설명)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냥 에너지란 한마디로 덮어버린다 함은 선문답같다고 봅니다.

자동차가 있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하죠.
1, 유도기능(자동차는 공장에서 나온다.-언제 어디서?) 근거
2. 대응기능(내가 운전한다-누가 무엇을?) 동기
3. 의속기능(개솔린과 동력엔진으로- 왜 어떤?) 목적
4. 인과기능(바퀴를 굴려 도로를 밀어-어떻게 하여지게?) 방법
5. 표상기능(목적지로 나아갑니다.-하였나 되었나?) 결실

근데 님은 에너지를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난 이렇게 설명해놓고 예의 배중률 동일률 모순률 인과율 한정률로
검사를 반드시 하기 때문에 나의 이 열가지 질문 -
위의 (언제, 누가, 왜, 어떻게, 하였나)의 시간변수와
(어디서, 무엇을, 어떤, 하여지게, 되었나)의 공간변수를 다 대답해야만
나는 그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를테면 양자역학은 예의 열가지 질문에 서너가지도 대답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불완전한 성과로 보는 것입니다.

논리에 대충은 없습니다.
그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비행접시든 유령이든 타임머신이든
이 열가지 검사항목에 하나라도 하자가 발생하면 그건 가짜예요.

말하자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이러한 검사의 결과 타당하다고
해서 선택된 어휘라는 것입니다. 내가 통신에서 가짜라고 주장하는
여러 가지들은 대개 이러한 논리적 검토 끝에 내려진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검사법을 통과하지 않은 이상 양자이론이고
확률론이고 불연속론이고 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연구가치 있는 설의 하나일 일 뿐 아직 확정적인 지식이 될
자격이 없어요.

불확정성론은 풍선의 비유를 들죠. 풍선에 물을 집어넣고 그것을
진공의 상자안에 넣어두면 공기의 기포가 발생하겠죠.

전자의 위치가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 기포의 위치가 확정적이지
않은 것일테죠. 그 기포는 바깥의 압력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거죠. 기압이 올라가면 기포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내려가면

풍선의 바깥쪽으로 몰려나오고- 양자이론도 마찬가지 그 진공상자의
진공이 요동치고 있다면 병목현상에 의해 님의 말씀대로
전자가 100개도 나오고 200개도 나오겠죠.

요동치는 (기압이 변동하는) 진공상자(완전진공은 아닌)에 넣은 물풍선
속의 기포방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면 그런 경우는 굳이 양자역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관찰 가능한거 아녜요?

양자역학도 마찬가지 그 공간이 요동친다고 봅니다. 일정한 진폭이
있겠죠. 다만 인간이 그 진폭을 계산 못할 뿐. 요동속을 통과하는
소립자는 위치를 확률로만 계산 가능하겠죠?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속았네요? 우리 주변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는데요?

핀볼게임에 흔들기가 있어요. 그 속을 쇠구슬이 통과하는데
구슬이 어디로 갈지는 과연 양자역학이죠. 확률로만 알죠.
근데 대개 왼쪽으로 잘가요. 그건 내 컴 게임이 그렇더라구요.

양자역학으로 닭과 달걀의 문제를 말한다는 것은 그런 것..
판이 흔들어서 구슬이 구르는 것이지 구슬이 판을 흔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

어떤 원인과 결과가 있을 때 그 결과 되는 또는 의속되는 부분의
불확정성은 그 상위부분의 불확정성에 책임전가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거에요.

내 말은 단순해요. 심오한 의미가 없어요. 난 물리학자가 아니니까.








[에너지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가?]

말했듯 세상의 존재를 파악하는데는 천하의 복과 잡(複雜)에 대해
계측(計測)과 구분(區分)의 두가지 방법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관심이 1차적으로 가닿는데가 계측이다.
뭐든 줄자를 들고와서 자꾸만 재볼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소용되는 논리가 因果律이다.

재는 것은 앞에서 뒤까지 재는데 앞이 인이고 뒤가 과다.
인과율을 모르면 잴수없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알수없으니까.

어붕님이 (윈용 한글에서 djqnd라고 쳐놓고 한영키나 스페이스바를
누르면 자동으로 [어붕]으로 변해버린다. 골때리는 일이 아닐수 없다)
[에너지로 모든 것을 설명할수 있다] 하는 것은 인과율을 토대로 한

계측인식의 관념에서 하는 말이다. 구분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답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다. 구분은 모순율(矛盾律)에 의거하여
둘 중 어느쪽도 다른 쪽의 원인이 아니되면서 동시에 병존하는
것을 파악한다.

계측에 의한 [순서대로 줄서기] 가 인류의 오랜 인식패턴이어서
뭐든 서열을 정하려 하는 것이다. 남존여비하여 남자 1번 여자 2번.
군신유의하여 임금1번 신하2번. 과연 그런가? 아니어서 병존이다.

계측인식이 아닌 구분인식을 배워야 한다. 당장 어붕님의 [에너지를
통한 모든 인식가능론]도 익숙한 계측인식의 사례이다. 넓게 보면
마르크스주의도 독재도 또 대부분의 잘못된 정치적 주장이나 견해도

인과율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데 모순율은 이거 영 해골이 꼬여서
생긴 병폐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병존] [여당과 야당의 병존] [남자
여자의 병존]을 납득못하므로 서열을 정할때까지 투쟁하는 것이다.

구분인식을 배우려면 기하학을 배워야 하며 기하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한다. [논리야 놀자]수준의 인식으로는 안된다. 진짜 논리는
기하적 사고에서 나온다. 둘 중 하나가 답이겠지 하다가는 코싼다.

각이 90도이면 대각은 무조건 90도이다. 이 둘은 원세트이며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몇가지 논리가 나오는데 -

1)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다.
2) 하나만 계속 커진다.
3)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가 작아진다.
4)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도 같이 커진다.
5) 큰 것과 작은 것이 비에 의해 환원된다.

삼각형의 어느 한 각이 120도이면 나머지 두각의 합은 60도이다.
합쳐서 180도인데 왜 180도일까?

사각의 내각의 합은 360도이다 왜 360도일까?
3각은 180, 4각은 360도이면 50각은 720도일까?































오반이는 넘 무식해서 논의에 끼는 것이 우습다.

어데서 무식한 마르크스 이야기를 하고있노 에이?
마르크스가 물리학자든 논리학자든? 니 지금 양질전화 이야기하나?

질이나 양이나 다 상대적인 개념이란 말여.
그걸 파악 몬하고 물, 얼음, 수증기 이카면 안돼재.
이건 [이중기준의 오류]라 카는 것인데

물은 H2O지. 이건 질이지. 물이 1킬로그램 있지. 이건 양이지.
H2O가 NACL로 변하면 질이 변한거야.
양을 아무리 바꿔도 물을 100톤을 갖다놓아도 물이 황산구리가 되거나
물이 가성소다가 되는 일은 없어.

무식한 무식한 무식한.
초딩 1학년 자연교과서에 나오는게
다음 중에서 물체를 찾으시오. 해놓고 나무 풀 옷 이런거 나오잖어.
오반은 그때 매양 놀아서 지금 물체/와 물질/과 물성/을
구분을 몬하게 있는거여.

물은 수소나 산소하고 비교되는 [물질]이고
얼음이나 수증기 물은 [물체]고
온도나 열은 [물성]이야 멍텅구리 학생아.

초딩 1학년 자연책 백번 읽고 와서 물질이 뭔지 물체가 뭔지 물성이
어떤건지 알아와여 논의에 낑가주께.

니 말대로 양이 질이 될라고 하면 ]
열을 100도에서 천도로 올리니까 열이 열이 아닌 돌이 되었다거나.
얼음을 두께 10센티인데 두께 100센티로 꽝꽝 얼리니까 얼음이
얼음이 아닌 뭐가 되었다거나
물이 한바게쓰 있는데 100바게쓰 부으니까 황산구리가 되었다거나.

양질전화는 없어, 물리학에 물자도 모르는 마르크스가 헛소리 한거야.
물에다 열을 가한 것은
(너는 열을 많이 가하여 많을수록 양이 증가해서)
물이 수증기가 되었다지만 이는 착각이고

물 0.1그램에 열을 많이 가할 필요가 있간?
물 0.000000000001그램에 열의 양을 전혀 증가시키지 않아도
물은 수증기가 되는데?
물 1000억톤에 열을 아무리 가해도 이거 수증기가 안되는데?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될려면 열의 양이 얼마든 물의 양이 얼마든
무관해야 되는거야. 안글냐?

오반은 초딩 1학년부터 다시 해야 혀.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것이나 씨앗이 열매가 되는 것이나
이런건 질의 변화가 아니야. 그건 그냥 성장이야.
질은 바탕이야. 물분자 분자 알갱이 하나 가지고 따지는게
질이야 알간?































왜 논리학을 배워야 하는고 하면
오반처럼 무식한 소리 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열은 양이 아니고 열도 그 자체로 질이다.
양은 열량이 양인데
[열=질, 열량 = 양(열의 높고 낮음)]
양이 질이 되려면 열이 증감할때마다 열이 열 아닌 것으로
되어야 하는데 열이 욜이 되거나 율이 된적 없다.
-----------------------------------------------
특히 홍야님의 황당한 물리학은 매우 꾸짖어조야 된다.
일테면 홍야님은 우주가
[진공의 요동에 의해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이걸 듣고 [음 그렇군 이제 알았다]
카는 이는 선상님께 종아리 백대 맞어야 된다.

●저 서울가는데여 어디로 가면 됩니껴?
○저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세여.
●음 그렇군 서울은 [저사람한테물어보래] 방향으로 가면 되는군.
이제 알았어. 자 기사양반 출발합시다. [저사람한테물어보래]쪽으로
가면 서울나온데여.
◆열받은 운전기사- 니기미~!@#$%^&*

진공의 요동론은 이제까지의 물리학이 거의 물질의 근원을 밝혀냈다
싶을 즈음 새로운 관문이 하나 나타나고 의문들이 그 관문너머로
모조리 떠넘겨졌음을 의미한다. 즉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만 하는 것은 최소구성소다. ] <- 이는 가정이다.
그것은 가장 작은 하나의 알갱이다. 우주는 그 알갱이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마지막 알갱이라고 착각하고 쾌재를 부르며
찾아낸 것은 알갱이가 아니라 커다란 또하나의 우주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태껏 [진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진공은 [우주존재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진공에 앞서 모든 답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진공이 요동한다는 것은
[진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뭔가이다]
[진공은 우주존재에 개입한다]
[답은 진공의 저너머 그다음 또너머 그 다음 또너머에 있다. ]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향해 한걸음 전진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로부터 백걸음 도망간 것이다. 우리는 더 알수없게 되었다.

돌턴이 원자가설을 세우면서 [물질의 최소단위는 분자가 아니고 원자다].
[이제 정답은 나왔다. ]하고 선언하자 과학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원자번호 1번부터 106번까지 다찾았다. 그리하여 뭐가 밝혀졌지?

정답은 원자에 있지 아니하고 보다 더 작은 소립자 그 소립자 보다
더 작은 소립자에 있지도 아니하다.
전자, 중성미자, 렙톤. 쿼크들이 물질의 기본입자란 것은
원자번호 1번부터 106번까지 찾아내는 중에 한창 열올리던 과학자들의
환희(그것음 잠시의 착각이었다)와 같다.

홍야옹-> [현재의 물리학의 수준은 물질과 공간의 궁극적인 실체의
파악에 거의 도달하였다. 전자 중성미자 등의 렙톤들과
쿼크들이 물질의 기본입자임은 거의 확실하다.]
빠빠락-> [물질의 본바탕은 전혀 입자가 아니다. 돌턴으로부터 이어져온
입자의 환상을 깰 때 진정한 물리학이 출발한다]

최근 주장되는 초끈이론 등에서 보듯이 소립자 붐은
한낱 어린애들의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입자는 매우 큰 입자와 작은
입자들이 있는데 큰 입자들은 입자의 형태를 가지지만 작은 입자들은
입자의 형태나 성질을 가지지 않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입자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것이 양자역학이다.

큰 입자들이 그러니 작은 입자들도 그러려니 하는 것은 착각이다.
안되겠다 싶으니까 [불확정성의 원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는 것은 우스운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그런 것을 발견한다.
------------------------------------------------------
홍야옹은 쪼끔 모르면서 쪼끔 아는걸로 착각하니 문제다.

만학의 근원은 물리라고 내가 설파한 적이 있다.
물리 다음이 수리영역이고 수리 다음이 섭리(미학)이고
그 다음이 논리영역 그 다음이 언어(철학)영역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물리는 우리가 아는 물리학이 아니다.
물리는 형이상학이고 물리학은 과학이다. 과학은 형이하학이다.
즉 논리 보다 섭리(미학)와 수리와 물리가 위에 있지만

즉 수학과 논리학이 물리학 보다 아래에 있다는게 홍야님 생각이고
수학과 수리를 구분하고 물리와 물리학을 구분해서
수리 논리 물리가 다 형이상학인데 형이상학이 형이하학의
위에 있다말여. 글구 과학은 형이하학이라 말여.

그럼 형이상학은 뭐고 형이하학은 뭐냐?
형이상학은 대상이 없이 내재적인 시스템을 따지는 것이고
형이하학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따지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영역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겸하고 있다. 이론물리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검증되는 부분은 아인시타인이 [어케어캐 해서 요로코롬 된다]
카면 요로코롬만 검증되고 그 근거인 어캐어캐는 검증이 안된다.
근데 논리적 검토에 의해 [어캐어캐 = 요로코롬]이 성립하면
요로코롬의 검증 만으로 어캐어캐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 어캐어캐는 수학 논리학보다 위에 있고 요로코롬은 수리나 논리의
아래에 있다. 고로 물리학의 검증되는 부분은 수학 논리학보다
더 낮은데 있는 것이다.

홍야옹이 수학과 논리학을 낮춰보는 것은 어캐어캐와 요로코롬을
분간하지 못하니까 하는 소리다. 물리도 근원에 있어서는 전혀
검증이 안되는 형이상학이다. 그걸 인정하는 것은 논리시스템이
어캐어캐(검증안됨)와 요로코롬(검증됨)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
학문하는 이의 자세는 무릇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소립자붐은 한때의 유행일 뿐이다. 학문하는 자가 유행을 타는
것은 매우 나쁜 경우다.

원자번호 1번부터 106번 까지를 찾을 때도 과학자들은 날마다 탄성을
지르고 이제 이것만 찾으면 물리학은 끝,
책걸이날 만세다. 송편빚고 찌짐붙이고 막걸리 묵자~! 야호~!

물리도 논리도 수리도 아직 멀었다. 수학책은 앞으로 더 두꺼워지고
논리와 물리는 더욱 보강된다.

뉴튼이 기계론적 세계관을 만든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를 비롯해서
그 뉴튼의 추종자들이 만든 것이다.

존재의 기본은 순서(복)와 방향(잡)인데 기계적 특성은 순서에만
개입하지 방향은 개입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시계나 자동차도
결정된 것은 순서이지 방향이 아니다.

어리석은 뉴튼의 추종자들이 뉴튼보다 백걸음 더나가서 뉴튼을 함부로
왜곡해서 뉴튼을 뉴튼보다 더 뉴튼답게 만들어서 기계론적 세계관을
만든 것이다. 마르크스도 그 아류의 하나이다.

물리학이 발달하자 순서가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뉴튼을 왜곡한 뉴튼의 추종자들이 깜짝 놀라서
그 책임을 몽땅 뉴튼한테 떠넘기고 [뉴튼이 틀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시계는 여전히 하나의 정교한 기계이고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다.
불확정성은 뉴튼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불확정성은 애초부터 나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왜?
나는 소년적부터 자연에서 관찰하여 순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확률로만 접근 가능한 부분을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불확정성에 깜짝 놀라며 새로운 세계관 운운하는 자들은
자연을 덜 관찰한 이들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확률이 개입하는 모든 부분은 순서가 아닌 방향이다.
대수학은 순서를 따지므로 [수학=순서]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데
이는 기하학을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기하학은 방향이며 방향은 동시에 하나의 공간에 여럿이 병존한다.
즉 각이 90도이면 뒤에 또하나의 대각이 똑같은 크기로 반드시
숨어있다. 언제나 둘 이상이 세트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다.

불확정성에 놀라는 이들은 그 숨은 대각을 모르는 자들이며
불확정성이 기계론의 시각을 깨뜨렸다고 보는 이는 각과 대각이
다시 하나의 비에 의해 환원됨을 모르는 이들이다.

즉 뉴튼을 왜곡한 자들이 충격을 받는 것이다.
스승은 [갑은 크고 을은 작다]고 말했는데
제자 1은 [갑은 무지 크고 을은 무지 작다]
100년 후 제자 2는 [갑은 댁질이고 을은 죽여야 된다]
300년 후 제자 3은 [어? 그게 아니네 갑이 을보다 쪼까 더 클 뿐이네
스승이 틀렸군.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분명히 수의 세계, 물리의 세계는 확률로만 파악되는 불확정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불확정의 영역은 한정되어 있다.
아무데나 불확정은 아니다.

뉴튼의 기계가 자연존재의 일부에만(순서영역) 개입하듯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도 일부분(방향영역)에만 개입한다.
양자를 통일해야 답이 나오지 어느 하나가 맞고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다.

[순서는 정해져 있고 방향은 한정된다]
방향의 한정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나의 옛날 이바구
디지털확장(유한확장)와 아날로그확장(무한확장)을 참고할 밖에.

확률이란 곧 확장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양자역학에는 아직 확장개념이 도입되어 있지 않지만 조만간
어떤 위대한 물리학자가 나타나서 양자역학에 확장개념을
도입하므로서 [불확정성 암것도 아닌 것에 깜짝 놀랐네]하게 만들것임.

이는 수학과 논리학이 물리학(검증되는 부분)을 앞서간다는 거임.





























스카이是非是非님이 논리에 흥미를 느껴버려 是非 ?

앞서 얘기는 오반에게 몇 개의 질문을 던져놓고 나중 마저 풀어주려던 건데
그걸 나의 결론으로 오해한 스카이是非님이 是非를 걸와왔군여~!
오반의 호응이 없어도 썰을 풀밖에~!

문제 1 => 물 0.1그램에 열을 많이 가할 필요가 있간?
문제 2 => 물 0.000000000001그램에 열의 양을 전혀 증가시키지 않아도
물은 수증기가 되는데?
문제 3 =>물 1000억톤에 열을 아무리 가해도 이거 수증기가 안되는데?
문제 4=>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될려면 열의 양이 얼마든 물의 양이
얼마든 무관해야 되는거야. 안글냐?
문제5=> 물분자 분자 알갱이 하나 가지고 따지는게 질이야 알간?

위에 일일이 물음표를 붙여놓았는데서 보듯이 이건 내가 오반에게 한번
생각해보라고 묻는 질문이지 답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문제 자체에 약간의 불분명이 있는 것은 오반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한
함정인데 엉뚱하게 스카이是非님이 빠져버렸다.

문제1부터 보자. 자연의 상온에서 밀폐되지 아니한, 공기가 충분히 유통되는
적당한 습도의 공간에 물 1그램을 던져놓으면 100도가 되지 않았는데도
물은 기체가 된다. 참고로 말하면 수증기는 액체이지 기체가 아니다.

문제 2는 1번과 같은 얘기인데 물이냐 수증기냐는 열과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물분자 상호간의 응집력, 반발력과 상관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문제 3도 마찬가지. 특별히 100기압 상태라 하자. 물을 가열한다고
기체가 될까? 물분자의 열적상태는 열 이외에 기압, 습도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위 3문제를 깨달으면 문제 4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제 5는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물분자의 질은 분자구조이다. 즉 단 하나의 물분자를 가지고
액체냐 기체냐 고체냐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열이 개입하는 것은 두 개
이상의 물분자간의 응집력과 반발력에이다.

온도가 낮을수록 물분자 상호간의 반발력은 줄어들어 물은 고체가 된다.
반발력 0은 절대온도 -273도.
온도가 높을수록 물분자 상호간의 반발력은 커져서 물은 액체, 기체로 된다.
물분자의 활동성이 클수록 물분자의 응집력은 커져서 액체, 고체로 된다.
물분자의 활동성이 작을수록 물분자의 응집력은 작아져서 액체 기체로 된다.

여기서 물분자의 열적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온도와 활동성 두가지이다.
온도는 반발력에 영향을 미치고 활동성은 응집력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온도와 유관한 반발력은 쉽게 이해할수 있겠지만
압력과 유관한 활동력은 잘 이해가 안될 것이다.

문제 = 물 천억톤을 아무리 가열해도 기체가 안되는 이유는 ?
정답 : 초고압 상태이기 때문이다.

바다밑(심해저) 물은 온도와 무관하게 기체나 고체가 되지 않는다.
물이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 것은 1기압 상태에서이다.

초고압상태에서 물분자의 활동성이 적으므로 아무리 온도가 내려가도
얼수없다. 얼면 부피가 10퍼센트 증가하는데 고압 때문에 부피가 증가할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온도와 상관없이 항상 가장 압력이 낮은 수면에서부터 언다.
물1리터를 병에 담아두고 위에는 약간의 열을 밑바닥엔 드라이아이스를
두면 위에서부터 얼지 밑에서부터 얼지 않는다.

오염된 물도 잘 얼지 않는다. 소금이나 설탕이 들어간 물은 물분자의
활동성을 빼앗기 때문에 잘 얼지 않는다. 요즘 한강이 잘안어는 이유?

문제 : 바람이 살살 부는 영하 1도의 물이 빨리 얼까?
바람이 전혀 안부는 영하 2도의 물이 빨리얼까?
정답 : 바람이 살살부는 영하1도의 물이 빨리 언다.

한겨울의 논바닥에 농부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늘려있다.
그 발자국엔 전혀 물이 고여있지 않다. 밤새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더니
다음날 그 발자국엔 얼음이 채워져 있다. 분명히 발자국엔 물이 없었는데
물은 어디서 왔을까?

발로 밟아보면 얼음속은 텅비어 있다. 즉 허공에 얼음이 언 것이다.
왜 얼음은 공중에 얼까?

계곡에 가보면 표면이 매끈하게 얼어있는데 그 속이 텅 빈경우를 볼 수 있다.
얼음이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어는 것이다. 이유는?

얼음이 어는 선은 바람이 지나가는 선에 평행하게 된다.
얼음은 결정구조를 가지므로 눈송이 모양을 따라 평행하게 진행하면서
어는 것이다.

한겨울 얼어붙은 저수지의 남쪽에 산이 가로막아 햇볕이 들지 않을 때
수면보다 훨씬 높게 올라가며 얼어있는 경우를 볼수있다.
그 얼음은 흙속에서 새어나온 물기가 얼어붙은 것일까?
아니면 수면의 얼음이 바람에 밀려 육지로 올라가면서 얼어붙은 것일까?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하여 땅속에서 배어나온 습기가 얼어붙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 바위산이라서 전혀 습기가 나올 데가
없는데도 얼어있다.

진안 마이산의 거꾸로 어는 고드름을 본 사람은 수면의 얼음이 공중으로
올라간 것임을 알게 된다.

모르는 사람을 위한 참고 : 겨울에 무주 진안 마이산에 가면 거꾸로 어는
고드름을 볼수있다. 그러나 관찰력 있는 사람은 마이산 안가고도 얼마든지
얼음은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언다는 것을 안다. (주변에 많다)

자 체조대형으로 벌렸. 국민체조 시이~작.
웬 느닷없는 국민체조냐고?

물이 언다는 것은 물분자의 분자배열구조가 질서정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물분자는 질서를 갖추면 부피가 늘어나고 무질서해지면 부피가 줄어든다.

체조대형으로 벌린다는 것은 활동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물이 얼려면 눈의 결정구조를 가져야 한다. 결정구조를 가지려면 분자들이
강한 활동성으로 움직여야 한다. (얼음이 공중에 얼 듯)

언다는 것은 체조대형으로 벌려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피 10프로
증가) 그러나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열심히 움직인다.

자 이제 왜 한여름에 느닷없이 우박이 떨어지는지 알겠지요?
온도보다는 기압과(순간적인 초저기압) 바람(바람이 없으면 함박눈이 되재요)이
영향을 미친다구요.

우리가 얼마나 자연을 잘못알고 있었는지 이제 알겠죠?

연습문제.....수소분자를 1000억도 곱하기 1000억도로 가열해도 핵융합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정답: 압력을 증가시키지 않았기 때문.

물이 기체나 고체가 되는 것은 주로 압력과 온도가 물분자의 전기적 극성을
변화시켜 분자 상호간의 전기적 반발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인데 이는
적절한 압력(여러개의 분자들)에서만 일어나므로
질적인 변화(분자구조의 변화)로 볼수없다.

운동장에 100명의 아이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기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은 액체.
체조대형으로 벌린 것은 고체다.

이것은 모두 양의 변화이지 전혀 질의 변화가 아니다.
단 하나의 물분자가 상태가 변할 때 질의 변화이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예습문제....온도와 압력이 같이 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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