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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671 vote 0 2016.04.12 (15:45:06)

     

    고정관념을 깨자


    노자의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이 임팩트가 있다. 당연히 강자가 약자를 이긴다. 당연한 것을 뒤집으면 사람들은 상큼한 충격을 받는다. 왜? 인간의 뇌는 예측이 빗나갈 때 강하게 반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는 말은 사실 모순이다. 약자가 이기면 사실은 그 자가 강자인 거다. 결국은 강자가 약자를 이긴다. 요는 역설의 언어다. 확실히 임팩트가 있다. 역설을 구사하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끈다.


    노자와 니체가 대표적이다. 그들이 즐겨 구사하는 패러독스가 독자들의 뇌에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었다. 사실 별거 아닌데 굉장히 인상적이다. 왜일까? 인간의 뇌를 모방했다는 알파고의 ‘딥러닝’이 그러하다.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뇌는 부단히 예측한다. 예측이 빗나가면 비상이 걸린다. 그 부분만 주의깊게 학습한다. 그것이 딥러닝이다. 예측이 틀릴 때 뇌는 흥분물질을 분비하고, 모세혈관은 많은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것이 임팩트다. 학습의 메커니즘을 깨달을 일이다. 학습은 어떤 문제의 답을 찾는게 아니라 ‘문제해결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다. ‘문제발견≫대칭구도≫시행착오≫오류시정≫문제해결’의 공식이 작동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뇌가 그 일을 한다. 끊임없이 예상한다. 예상대로 되면 뇌는 그 부분을 스킵한다. 예상이 빗나가면 뇌 안은 시끌벅적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상이 빗나가는 역설적 상황에 더 민감하다.


    이를 학습에 적용할 수 있다. 학습은 학습 그 자체의 결을 따라야 한다. 뇌가 잘 반응하는 쪽으로 학습하기다. 그냥 죽어라 암기하기보다는 부단히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예측이 빗나가도록 모험을 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일부러 반대쪽으로 슬쩍 가보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가 대결하면 약자에게 돈을 걸어보자. 스포츠라도 약팀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 예상을 깨고 약자가 이길 때 뇌가 반응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틀린 쪽을 찍었다가 뒤통수 맞고 돌아와야 한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대로 아무런 의심없이 고개를 끄떡거리고 받아들이는 학생은 창의력이 없는 학생이다. 일부러 말썽을 피우고 반대쪽을 탐험해야 한다.


    물론 실패한다. 그래도 즐겁다. 그 과정에 교훈을 얻고 데이터를 얻는다. 학습하는 프로세스가 만들어진다. 일부러 시행착오를 유발하고 다시 이를 수정하는 시행착오-오류시정 전략으로 가야 제대로 학습된다.


    공부 못하는 사람은 예측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쪽으로 가보지 않는다. 왜? 대칭구도를 못 만들기 때문이다. 정설과 역설의 대립지점을 찾지 못한다. 아기들은 ‘우리편과 나쁜편’으로 편을 갈라주면 좋아한다.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면 눈을 반짝이며 집중한다. 그럴 때 뇌가 흥분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편가르기 수법을 즐겨쓴다. 의인은 외부의 강자에게 대항하여 편가르고 악당은 내부의 약자를 배척하여 편 가른다.


    사람은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는게 아니라 ‘예측 프로그램’을 돌리지 않아서 공부를 못하는 거다. 예측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대항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반대쪽으로 가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창의다.


    뱀이 무서운 이유는 예기치 못하기 때문이다. 풀섶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다. 결코 뱀이 강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다. 보통은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데, 드물게 약자가 한 번 이기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것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역설은 임팩트가 있다. 유가 강을 이긴다는 노자의 역설이 먹힌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고 들자면 역설이란 사실 언어적인 표현력의 한계로 인하여 생겨난 혼선에 불과하다.


    어떤 판단을 할 때 관측자는 바깥에 있어야 한다. 패러독스라는 것은 관측자가사건 안에 있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언어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우주 안에 역설은 없다.


    판단기준은 판단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규칙을 깬 것이다. 이세돌은 바둑으로 모든 사람을 이겼다. 그런데 이세돌 자신과 바둑을 두면? 이런 헛소리 하면 안 된다. 구조론으로 보면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이긴다.


    다만 중간정산을 하면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1차전을 져주고 2차전, 3차전을 이기는게 구조론의 전략이다. 그런데 1라운드를 이겨놓고 시합을 중단하면? 그건 반칙이다. 헷갈릴 수 있다.


    구조론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말은 맞는 말인데 싱겁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아니다. 구조론도 재미가 있다.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프로그램을 돌릴줄 모르기 때문이다. 강자냐 약자냐에 낚이지 말라.


    강자와 약자라는 대칭구도에 낚여서 헷갈릴 뿐, 의사결정으로 보면 언제나 강자가 이긴다. 의사결정을 더 잘하는 쪽이 강자다. 이것이 구조론의 역설이다. 그런데 소집단이 대집단보다 의사결정을 더 잘 한다.


    동탁 하나가 16로 제후군보다 의사결정을 잘 한다. 잔 다르크 한 명이 프랑스의 귀족연합군 다수보다 의사결정을 더 잘 한다. 중국의 북방 유목민이 특유의 역할분담으로 한족 농경민보다 의사결정을 잘 한다.


    의사결정을 잘하는 소수가 의사결정 못하는 다수를 이긴다. 빠른 소수가 느린 다수를 이긴다. 움직이는 동動이 머무르는 정靜을 이긴다. 헷갈릴 때도 있다. 변두리가 중앙을 이긴다. 중용中庸이 이용利用을 이긴다.


    둘은 얼핏 모순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선순위가 있다. 장기전으로 보면 명확해진다. ‘약한 물이 강한 바위를 뚫는다.’ ‘강한 칼이 약한 나무를 자른다.’ 두 명제는 모순이다. 역시 의사결정을 잘 하는 쪽이 이긴다.


    약한 물은 유체이므로 잘 움직여서 의사결정을 잘 한다. 강한 칼은 칼날이 얇고 예리하므로 통나무보다 의사결정을 잘 한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전혀 모순이 아니다. 의사결정으로보면 칼이 오히려 더 약자다.


    다수는 언제나 소수에게 지는가? 아니다. 다수도 역할분담을 하면 강해진다. 조직에 뼈를 심으면 강해진다. 민주주의를 훈련하면 강해진다. 매뉴얼을 만들면 강해진다. 보통은 소수 사무라이가 다수 농민을 이긴다.


    그러나 훈련받은 농민은 오히려 사무라이를 이긴다. 사무라이는 잘난척 하느라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지만, 농민은 복종하기 때문이다. 척계광의 원앙진도 그러하다. 처음은 귀족의 자제를 훈련시켜 실패했다.


    나중 농민의 자제를 훈련하자 성공했다. 농민은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기전으로 가면 강자가 약자를 이기고, 장기전으로 가면 훈련된 약자가 분열된 강을 이긴다. 이때 반드시 다음 단계가 있어야 한다.


    귀족의 자제는 다음 단계가 없지만, 농민은 신분상승이라는 다음 단계가 있다. 충주성의 노예와 평민들이 김윤후의 지휘를 받아 몽골군을 물리친 것과 같다. 잘난 귀족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다들 도주했는데 말이다.


    3센티의 굵기의 철근과 2센티 굵기의 철근 중에 어느 쪽이 잘 휘어질까? 당연히 2센티 굵기의 철근이 잘 휘어진다. 그런데 3센티 굵기의 철근 가운데다 약간의 흠을 파주면? 3센티의 굵은 철근이 더 잘 휘어진다.


    전체로는 강자가 강자지만 부분으로는 또다른 사정이 있다. 강자에게도 약한 급소가 있다. 전체로 보면 언제나 의사결정을 잘 하는 쪽이 이긴다. 단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강자의 약한고리를 노려서 때려야 한다.


    숫자가 많아서 의사결정을 잘 못하는 지점이 강자의 약한 고리다. 그 부분을 때려야 한다. 그냥 쪽수로 대결하면 당연히 대집단이 소집단을 이긴다. 그래서 전략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의사결정을 더 잘 할까?


    그것이 구조론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연동시키면 의사결정이 쉽다. 일의 다음 단계가 있으면 의사결정이 더 쉽다. 내부에 결이 나 있으면 의사결정이 쉽다. 유체에 핵을 던져주면 잘 뭉치므로 의사결정이 쉽다.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면 의사결정을 잘 한다. 내부에 대칭을 만들어주면 의사결정을 잘한다. 외부에 가상적을 만들면 내부가 단합된다. 시간 상의 두 사건을 호응시켜주면 완전성을 얻어 구조를 잘 복제한다.


    완전성을 얻으면 공명하고 전파된다. 대칭과 호응으로 완전성을 얻을 수 있다.하나씩 작업하면 느리고, 역할분담으로 포드시스템을 꾸리면 빨라지고 완전성으로 무한복제하면 순식간에 성공한다. 바이럴 마케팅이다.


    바이럴 마케팅은 그냥 되는게 아니고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것이 완전성이다. 다수가 호응하게 해야 하며 이때 호응하는 사람의 이익이 다음 단계로 갖추어져야 한다. 일의 기승전결 흐름을 타야 완전하다.


    선이 굵으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잘 연동된다. 스타일 위주로 가고 인상주의와 낭만주의로 가면 대중이 호응하므로 잘 연동된다.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따라 치고나가는 에너지가 있어야 다음 단계가 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형식은 의사결정형식이다. 회의로 할 것인지, 독재로 할 것인지, 다수결로 할 것인지, 나이순인지, 짬밥순인지, 주고받기 거래로 할 것인지, 일괄타결인지, 각자도생인지 사전에 정해야 한다.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변방에서 시작하면 가속도를 얻어 중앙을 칠 수 있다. 중간허리를 보강하면 팀이 강해진다. 축구라면 미드필더고, 전쟁이라면 장교단이고, 회사라면 간부다. 경험있는 베테랑들이 있어야 한다.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시작하면 교착되어 의사결정을 못한다. 동적상태에 두면 의사결정을 잘하고 정적상태에 두면 의사결정 못한다. 원칙위주 합리주의로 가면 좋고, 이익위주 실용주의로 가면 반드시 배신한다.


    장기전은 오자병법이 옳고 단기전은 손자병법이 옳다. 초반에는 오자병법이 좋고 막판에는 손자병법이 좋다. 정규전은 오자병법이 옳고 유격전은 손자병법이 옳다. 상황이 좋을 때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세력전략이 맞다.


    환경이 나쁠 때는 리스크를 줄이고 보는 생존전략이 옳다. 축구는 선수비 후공격이 좋고, 야구는 선투수 후타자다. 우승팀이 되려면 투수가 좋아야 하고, 약팀을 순위권까지 끌어올리려면 무조건 타자가 좋아야 한다.


    전체로는 생존≫세력≫생존으로 가야 한다. 확산≫수렴≫확산이다. 다원화≫획일화≫다양화다. 다원화는 초반에 정찰대를 사방으로 보내는 것이고, 획일화는 적의 약한고리인 한 점을 타격하여 파죽지세를 얻는 것이다.


    마지막 다양화는 이익을 고루 나줘주는 것이다. 상부구조를 우선하면 의사결정에 성공한다. 51퍼센트가 되면 순조롭고, 49퍼센트가 되면 누군가 배신하고 발목잡는다. 중간단계를 거치면 반드시 방해하는 자가 있다.


    이기는 방법은 둘이다. 단기전의 노자와 장기전의 공자가 있다. 단기전은 구조론을 몰라도 누구나 감으로 안다. 장기전을 하려면 구조론을 익혀야 한다. 왜? 역설 때문이다. 의도와 반대로 되는 것이 역설이다.


    이겼는데 져 있고 졌는데 이겨 있다. 항우는 전투에 이겼지만 여론전에 졌다. 유방은 졌지만 외교전에 이겼다. 일은 늘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잡하다. 구조론이 쉬운건 아니다. 그러나 알면 재미있다.


    왜? 뇌를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다음 단계를 예측하게 하고 그 예측을 깬다. 이중의 역설이다. 정설은 당연히 강자가 이긴다. 한 번 역설은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 두 번 역설은 시스템이 독불장군을 이긴다.


    정설은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거다. 남탓한다. 진보도 남탓하고 보수도 남탓한다. 틀렸다. 한 번 역설은 알고보니 내가 잘못했다는 깨달음이다. 틀렸다. 두 번 역설은 알고보니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근원의 깨달음이다.


    역설은 재미가 있다. 뇌를 흥분시킨다. 노자도 역설로 떴다. 힘으로 이기는 자가 지혜로 이기는 자를 못당한다는게 노자의 역설이다. 틀렸다. 개인의 지혜로 이기는 노자가 팀의 신뢰로 이기는 공자를 못 당한다.


    하수는 항우의 힘으로 이기고, 중수는 노자의 지혜로 이기고, 고수는 공자의 신뢰로 이긴다. 이중의 역설이다. 노자는 개인이고 공자는 팀이다. 팀은 신뢰가 중요하다. 대중은 팀플레이보다 개인의 영웅담을 좋아한다.


    니체도 역설로 떴다. 질서로 이기는 자가 에너지로 이기는 자를 못당한다는게 니체의 역설이다. 뻔한 영웅담의 공식과 맞다. 질서는 기독교의 절대주의 질서다. 에너지는 니체의 상대주의 권력의지다. 둘 다 틀렸다.


    개인의 권력의지가 집단의 존엄의지를 못 이긴다. 진짜는 신 앞에서의 대표성이다. 역사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대결한 역사다. 절대주의도 틀렸고 상대주의도 틀렸다. 절대주의는 힘을 쓰고 상대주의는 힘을 만든다.


    절대주의는 힘을 써서 소모되므로 결국 패배하고, 상대주의는 혼자서는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결국 패배한다. 큰 힘을 만들어내려면 반드시 일의 다음 단계를 제시해야 한다. 대칭과 호응을 통한 완전성의 획득이다.


    그리고 완전성의 소통에 의한 무한복제와 에너지 증폭이다. 이건 수순을 알아야 하는 고급기술이다. 개인의 힘으로 덤비는 수공업이 역할분담의 포드시스템을 못 이기고, 포드시스템이 바이럴 마케팅을 못이긴다.


    수공업은 항우가 에너지를 소비하고, 포드시스템은 제갈량이 에너지를 짜낸다. 완전성은 에너지를 생성한다.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는 완전성이 최종적인 정답이다. 이중의 역설이다. 역설 뒤에 또다른 역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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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구조론인가? 쾌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뇌가 구조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뇌는 언제나 예측하게 되어 있고, 예측에는 대칭을 쓰고, 그 예측이 깨지는 시행착오에 강하게 반응하고, 그 시행착오가 수습되는 오류시정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한 번 역설은 시행착오를 유발하고, 두 번 역설은 시행착오를 수습합니다. 인간은 깨질때 흥분하고, 수습될 때 전율합니다. 줄곧 깨지면서도 굳세게 그 길을 가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진리의 호응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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