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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수원나그네
read 2593 vote 0 2016.02.03 (15:53:58)


http://www.greenreview.co.kr/archive/20140604_KimJongchul.htm


  이미 약속된 강의라서 안 올 수도 없고, 몹시 고민스러웠습니다. 요즘 통 공개적인 자리에 나와서 발언할 기분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아직 물속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집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 좋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또 몇 달 안 가서 다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대체 우리가 사는 꼴이 뭔가 싶어요. 지금 우리는 선장 욕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객을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먼저 탈출한 그 가증스러운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지만, 어쩌면 굉장히 불쌍한 사람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사람 자신이 명색은 선장이라고 하지만, 선박회사나 사회에서 아주 천민 취급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데다가 그것도 임시직 선장이었다고 하잖아요. 자부심을 갖고 자기 직분에 충실할 만한 조건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아직 우리가 잘 모르지만, 캐면 캘수록 엄청난 구조적 비리가 개입돼 있었다는 게 밝혀질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 처리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따지고 보면, 이번 세월호 침몰 사태도 결국 천안함 사건을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한 결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천안함이 정부나 어용언론들이 주장하듯이 정말로 어뢰 공격을 받아서 폭침을 당했다면, 그때 함장을 비롯해서 해군과 관계 지휘자들이 엄중한 문책을 당해야 마땅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도리어 승진했습니다. 기가 찬 일이죠. 뭔가 구린 데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신상철 씨 같은 분이 계속해서 이야기해왔지만, 그때 몇몇 양심적인 의사들은 천암함 침몰로 죽은 수병들의 사인이 익사라고 증언했습니다. 어뢰 공격을 받아 순간적으로 폭격을 당했으면 화상이나 타박상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익사라고 그랬어요. 조용히 가라앉아서 물에 잠겨 익사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폭침이라고 우기고, 그런 주장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종북좌빨’이니 뭐니 하면서 ‘비국민’ 취급하는 게 이 나라 지배층이 하는 행태입니다.

  제가 왜 천암함 사건 처리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것이 그냥 한때의 지나간 문제가 아니라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어용언론이 계속 억지논리로써 진실을 은폐하고 가니까 결국 그 영향으로 이 나라의 공적 기관들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정직하게 이루어질 수 없고,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불신과 속임수가 만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심지어 진보적인 언론이라고 지목받는 언론사의 논설위원 가운데서도 지금 천안함 ‘폭침’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결국 해난구조 문제를 비롯해서 이 나라 통치 시스템 전체가 허위와 거짓 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죠. 하기는 우리나라는 뭐든지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과 사태를 정확히 엄밀히 따지고,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전통이 약한 게 아닌가 싶어요. 오래된 말이지만,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만, 고려라는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서 나라에서 대책을 강구하더라도 사흘만 지나가면 유야무야된다는 얘기입니다. 

  예전에 제가 있던 대학에 나이 많은 미국인 교수가 한 사람 있었는데, 미국공보원 원장으로 일하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이 양반이 학교에서 발행하는 영자신문에 고정 필자로 자주 글을 썼습니다. 한번 우연히 그 양반이 쓴 글을 봤는데, 한국 사람하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흥미로운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 공통점이란, 첫째는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 둘째는 사람들 성격이 비슷하여 거짓말 잘하고, 사기꾼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탈리아인이나 한국인 중에는 미국에 한두 명이라도 친척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얘기였습니다. 결국 한국인들을 경멸하는 얘기죠. 우리나라에 오래 살아온 미국인 중에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월호 사태를 보면서 저는 이 미국 사람 생각이 났어요. 앞으로 이탈리아와 한국의 공통점 하나를 더 추가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조난당한 배의 선장이 먼저 탈출한 일이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던데요. 해경의 행동이 이탈리아에서는 너무 달랐어요. 이탈리아의 해경 지휘자는 탈출한 선장에게 배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더군요. 그 장면은 동영상을 통해서 여러분도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좀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뭐가 그리 잘났습니까? 또 일본사람들은 뭐가 잘났고요. 미국에서도 태풍이나 홍수 등으로 재앙이 발생하면 하층민들과 유색인종들은 아무런 국가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냥 버림을 당한다는 것, 우리가 익히 보아왔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집니다. 후쿠시마 사고 처리하는 꼴 보세요. 지금 아무것도 제대로 수습된 게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한국사람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민족적인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선진국들은 잘하는데 우리만 왜 이런가, 그런 식으로만 이야기를 몰고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근대문명의 본질입니다. 이번 사건은 근대문명의 근본적인 반생명성, 파괴성,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얼굴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문명이라는 게 본래 생명과 민중을 보살피고 돌보는 그런 문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마몬’을 섬기는 시스템입니다. 세월호처럼 비통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 민족이 특별히 모자라서가 아니라 근대화를 앞뒤 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밀어붙여온 탓입니다. 근대화에 반드시 따르는 부작용에 대해서 사회 전체가 깊이 숙고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분별없이 외형적인 건설, 확장에만 미친 듯이 매달려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가 정당성을 가진 정부이고, 정말 책임을 느끼는 정부라면 상당수의 인명을 구해낼 순 있었겠죠. 아니, 그런 사고 자체가 나지 않도록 안전 점검을 제대로 하고 있었겠죠. 규제완화라고 끊임없이 외치면서 다 제멋대로 풀어져 있는 판에 안전검사 제대로 할 리가 있었겠어요? 〈한겨레신문〉 기자들이 사고 난 뒤에 그저껜가 완도에서 제주도로 가는 선박 운행, 이제는 어떻게 좀 제대로 하나 싶어서 조사해보니까 여전하더래요. 승객 명단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신분증 검사도 안 하더래요. 현실이 이렇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제대로 하겠어요? 만날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인간 취급도 못 받는데요. 야, 이 개새끼야 어쩌고 하는 소리 끊임없이 들으면서요.

  하여간 우울하고 침통합니다. 이번에 희생된 아이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 아이들인들 그동안 뭐 그리 행복하게 살았겠습니까? 가정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사회라는 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행복하게 자라게 내버려두는 곳입니까? 아마 다섯 살 때부터 학원이라는 데 영문도 모르고 다녔을 거고, 오직 위안거리라면 학교에서 또래들하고 잠깐잠깐 장난치면서 스마트폰 들여다보고 게임하고 그런 거였을 겁니다. 그게 우리 아이들의 생활이잖아요. 아이들만 그런 것도 아니죠. 여러분들은 재밌게 살고 계신가요?

 

  오늘 할 이야기는 대여섯 시간에 걸쳐 이야기해도 부족할 텐데, 지금 본론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제가 어지러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 말이 나왔으니 제 마음속 얘기를 좀 하고 싶어집니다. 분위기를 보니 제가 좀 마음 놓고 얘기를 해도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냥 이런 식으로 가서 우리들에게, 그리고 세계에 장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서 굉장히 미안합니다. 저도 사실 여러분 못지않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캄캄합니다. 설령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의 삶 자체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톨스토이가 죽기 사흘 전에 집을 나갔잖아요. 우리 생각에는, 다 죽게 된 늙은이가 가출하는 게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일생일대의 결단입니다. 톨스토이 자신은 몇십 년 동안 고민하던 것을 마침내 결행한 겁니다. 자기가 사흘 뒤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서른 살에 가출하는 것이나 여든 살에 가출하는 것이나 의미는 똑같습니다. 실존적인 의미와 무게는 같은 거예요. 톨스토이는 오십 지나서부터 삶에 대해 근원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대작가가 되었지만 자기가 그동안 살았던 건 완전히 헛것이었다, 완전히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모든 소유로부터 해방되는 것, 스스로 가정을 버리고 나와야 된다는 데 이르렀죠. 그게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진실하게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쉽습니까? 그래서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결행한 게 죽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사흘 뒤에 죽는 것을 알고 한 게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에서 결행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여기 앉아 계신 이십 대 청년이나 내일 모레 나이가 칠십이 되는 저나 결국 똑같이 앞이 캄캄해진다는 얘깁니다. 가끔 저 같은 사람이 괜히 농담 삼아 “나야 뭐 이제 다 살았으니까 아무래도 좋아”라고 말하지만 그거 헛소립니다.(웃음) 저도 뭐 방사능 오염된 음식 같은 건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다시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이런 식으로 가서는 우리들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명백히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짓, 정말로 웃기지도 않을 만큼 어리석은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 스스로 삶의 토대를 파괴함으로써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류역사상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 유엔 같은 공식적인 국제기구에서도 다급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보수적인 인물인 유엔 사무총장도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성명서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독립적인 과학자, 활동가들은 지금 대부분 절망적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비관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자료들은 늘 보고 있지만, 밖에 나와서 발언은 잘 안 합니다. 해봤자 경청하는 사람도 없고요. 어쨌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쓸데없는 짓 제발 그만두고, 허황한 욕망들을 가라앉히고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그래 놓고 우리가 진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은 생각을 할 여유고 뭐고 없이 그냥 무조건 폭주를 하고 있잖아요. 한국사회가 특히 그렇다 하는 것은 한국이 소위 압축적인 성장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제일 방해가 되는 게 뭐냐 하면 불과 얼마 전까지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가난하게 살았다고만 할 수 있는지, 아니 가난이란 게 과연 무엇인지 좀 객관적으로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그 가난한 시절로는 절대로 돌아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끔찍합니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 심지어 이 나라의 최고 지성들이라는 사람들까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이기 때문에 “생각을 깊게 좀 해봅시다”라는 얘기를 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우리는 ‘슬로우다운’해야 합니다.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그런 뒤에 이 방향이 맞는지, 맞지 않다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시민적 양식을 총 결집하여 치열한 토론을 해야 합니다. 좌우 이데올로기 이런 거 이제 필요 없습니다. 이 나라가 왜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좌우 대립으로 불모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기가 막힙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파도 문제가 많지만, 좌파의 문제의식도 사태의 핵심에서 벗어나서 겉돌고 있습니다.

  왜 겉돌고 있느냐 하면 경제성장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좌우의 논리는 모두 성장시대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장시대가 끝난다면 좌파의 것이든 우파의 것이든 그것들은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논리일 뿐인 거죠.

  경제성장 시대가 끝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끝난다는 뜻입니다. 왜?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석연료가 다 떨어져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는 화석연료를 더 써서도 안 되고, 쓸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문명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소위 사회이론가, 정치사상가들이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입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에너지 없이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에 자본주의 문명은 거의 전적으로 석탄, 석유 에너지에 의존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석유입니다. 석유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산업활동 전반에 걸쳐서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잠깐만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석유를 산업적으로 대규모로 채굴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부터였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인류가 소비해온 석유의 총량은 대략 2조 배럴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소비해온 2조 배럴 중 첫 1조 배럴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130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990년까지 그랬다는 거죠. 그러면 나머지 1조 배럴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즉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채굴 가능한 석유는 1조 배럴 정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석유를 사용한다면 앞으로 10년도 못 쓴다는 말입니다. 지금 인도하고 중국하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석유 쓰기 시작했잖아요? 중국 인구만 하더라도 서유럽 인구를 다 보탠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인도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중국이나 인도의 전체 인구가 다 중산층이 되는 건 아니죠.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나가면 세계의 석유 수명이 곧 끝날 것은 자명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셰일석유와 셰일가스 붐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그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셰일석유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마치 이 셰일석유 때문에 앞으로 100년 동안은 석유문명이 더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보수적인 기관인 국제에너지기구조차도 셰일석유도 2017∼18년경에 생산피크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의 진보 매체라고 하는 〈한겨레신문〉이나 〈시사IN〉과 같은 곳에서 이 셰일석유에 대해서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보도가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셰일석유는 경제성도 경제성이지만, 엄청난 환경파괴를 일으킵니다. 셰일석유는 지하 2천 미터, 3천 미터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혈암층에 엄청난 수압을 가해서 파쇄하는 방법으로 채굴합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물의 낭비, 독성물질에 의한 대규모 지하수 오염, 진동, 소음, 먼지 등등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생태계 파괴를 자행하는 공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에 빈발하는 지진도 셰일석유 채굴과 관계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 전역에서 셰일석유나 셰일가스를 개발하는 지역에서는 주민들로부터 굉장히 큰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몇년 안 가서 셰일석유도 파국을 맞을 것입니다.

  요컨대 문제는 가망 없는 짓들을 하면서 석유문명을 지속시키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어쨌든 셰일석유 같은 비전통적인 석유자원을 개발한다고 해서 석유문명이 계속될 리는 없지요. 더욱이 기후변화 문제를 생각하면, 절대로 화석연료는 더 이상 대규모로 써서는 안 됩니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어쨌든 이제 석유는 예전처럼 값싸게 풍부하게 공급되는 시절은 끝났습니다. 사실 1970년대에 오일쇼크가 두 번 있었죠. 그때 인간사회는 깨달았어야 합니다. 석유문명이 계속되지 않는 날이 곧 닥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준비를 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군사독재 시대에 고도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석유가 워낙 싸게 공급되었기 때문이죠. 그 밖의 요인은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 세계적으로 전반적인 경제부흥이 가능했던 것도 마찬가지죠. 그때는 석유 1배럴이 5달러, 비싸더라도 10달러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 석유생산 피크를 지나면서 이제는 아무리 내려가도 100달러 이상입니다. 2008년 뉴욕 금융파산 사태와 지금도 계속되는 유로권 경제위기, 세계적인 준공황상태도 근원적으로는 이런 석유 상황에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조금 뒤에 다시 말씀드리죠.

  이러나저러나 석유문명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석유에 대해 뭔가 대체할 만한 게 있느냐?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쉽게 상투적으로 생각하죠. 신기술이 개발될 거다. 그런데 그거 믿고 있다가 세상 끝나버리면 어떻게 하죠? 그리고 신기술이 개발되어도 큰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 개발되면 더 큰 재앙일 것입니다.

  제가 이런 강연을 하고 난 뒤에 종종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과학기술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거죠. 가령 상온에서의 핵융합 기술이 성공한다면 다 해결이 될 건데 왜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제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절대로 그런 기술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웃음) 하느님이 인간의 장난을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 그건 안 봐줄 겁니다. 왜 제가 그렇게 믿느냐 하면, 만약에 핵융합 기술 같은 것이 상용화된다면, 그날로 인간사회는 끝장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만약 핵융합 기술로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면 거의 무한정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로 지구는 극심한 열오염으로 생태계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점도 중요하지만, 우선 에너지를 아무 제약 없이 사용하게 된다면, 인간다운 사회의 근본 토대를 구성하는 정신적·도덕적 기율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아무리 엉터리 사회라고 하지만, 이 정도라도 우리가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물자와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절제에 대한 감각 혹은 의식은 인간사회가 자기를 규율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런 자제력을 완전히 잃게 되면 인간사회가 어떻게 될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지금은 아무리 생각 없이 낭비를 일삼는 사람일지라도 최소한 절제를 지킵니다. 왜 지킵니까? 첫째는 전기값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전기에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비용에는 경제적인 비용도 있지만 환경적인 비용,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비용도 있습니다. 밀양 사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도시생활을 하면서 좀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훼손되고, 어느 곳에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다는 어렴풋한 의식이라도 있기 때문에, 즉 풍요로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속에는 어떤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전기에 대해서 백퍼센트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그나마 이것이 그래도 우리가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윤리와 도덕심을 유지하는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일 핵융합기술이 실제로 생활에 도입된다면 그야말로 전기를 무한대로 쓸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절약이라든지 뭘 아낀다든지 그런 개념이 인간생활에서 사라지겠죠. 그러고도 사람다운 삶이 가능할까요?

  저는 황우석이란 사람이 연구한다는 것을 논문 조작이 문제되기 훨씬 이전부터 굉장히 경멸했습니다. 배아줄기세포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의술인지 의료공학인지 계속 이런 식으로 발달해간다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될지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거 아닙니까? 나이 들어서 간이 망가졌다. 그럼 줄기세포인가 뭔가 하는 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이 간세포를 만들어내면 되겠죠. 그러면 또 아무 절제 없이 술을 퍼먹고 흥청망청 멋대로 놀 수 있겠네요.(웃음) 그런 세상이 되면 나이 칠십 팔십 된 노인들도 이십 삼십 대 청년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며 지내겠죠. 그러나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노인들이 청년처럼 행동하면서 지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결국 그런 세상이 되면 모두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이 되면, 우리가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숲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지요. 아름다움에 그냥 다 취하잖아요. 까닭 모르게 생명감이 느껴지고 생에의 의욕이 생기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무한히 살게 된다면, 그게 가능할까요? 저 나무와 꽃들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고양감이 솟아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느낌, 이 절실한 느낌은 결국 언젠가는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결함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어서 비로소 세상이 온전한 것이 된 거죠. 이 점에서 서양의 지적 전통에는 천박한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죽음을 치유해야 할 결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가 하는 소설을 쓴 사람 있죠? 밀란 쿤데라라는 사람 아시죠?(웃음)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아세요? 자기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결함이 많기 때문이라는 거죠.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인간이 매일같이 똥을 싸야 되느냐고요. 이게 말이 됩니까? 존 버저라는 작가 들어보셨죠? 젊었을 적부터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알프스 계곡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자본주의 문명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비판적인 발언을 꾸준히 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영국 출신 작가인데요. 그 양반이 어느 에세이에서 밀란 쿤데라의 이런 태도를 대단히 경멸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존 버저는 스스로 육체노동을 하고 손수 인분을 삭혀서 거름을 만드는 일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외적인 지식인이죠. 똥이란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결코 쓸모없는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똥이 없으면 농사도 밥도 아무것도 안 됩니다.  

  똥이나 죽음을 그냥 단순한 결함으로 보는 서양 사람들의 인식구조는 우리가 이해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괴물들이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만든 세상이 완전한 것은 죽음이 있고, 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자연 속에서 생명이 영구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직선이 아니라 순환적인 패턴을 그리며 돌아가야 합니다. 즉, 생장소멸(生長消滅)의 사이클 말이죠. 남의 똥이 내 밥이 되고, 내 똥이 또 남의 밥이 되는 이런 구조, 이런 패턴, 이런 사이클이 계속되면서 지구상의 생명이 진화를 해왔거든요. 인간도 이 지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이런 식으로 순환적인 삶의 패턴으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이 순환적인 패턴에 균열을 만들고 그 대신 직선적인 진보라는 패턴을 만들어낸 것이 자본주의 근대문명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게 가능했던 것은 지하에 숨겨져 있던 광물자원, 특히 석탄과 석유라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분별없이 캐내어 대규모로 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으로부터 계산해 봐도 이것은 벌써 250년 정도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산업화 사회가 된지 몇십 년밖에 안 되었지만,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백 년은 된다고 볼 수 있죠. 일제에 의한 식민 통치가 시작되기 이전에 대한제국 시절부터 화석연료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도쿄보다 한성에 전차가 먼저 생긴 거 여러분 아시는지요? 고종이 황제라고 호칭을 바꾸고,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바꿔서 한번 해보겠다고 몇년 동안은 상당히 열을 올려 근대화를 추진했습니다. 근대화라는 건 물론 공업화죠. 철도도 만들고 발전소도 만들고요. 그런데 우리 근대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우스꽝스러운 대목이 뭐냐면 망하기 직전에 나라 이름이 거창해진다는 점입니다. 명색이 제국이라면 그래도 한두 개 식민지가 있어야 되잖아요.(웃음) 아무튼 고종황제 때부터 초보적이나마 근대화가 시작되었다면, 그때부터 우리도 순환적 삶의 패턴을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본에는 메이지유신 이전 도쿠가와막부 말기부터 서양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습니다. 어느 해 영국 선박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때는 아직 석탄으로 배가 움직일 때라 충분한 석탄연료가 공급될 때까지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갑갑해하던 영국사람이 당시 일본인 관헌에게 이럴 게 아니라 석탄을 채굴하는 근대적 기술을 영국이 제공해줄 테니까 좀 능률적으로 석탄을 생산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막부 관리가 하는 말이, 우리는 그런 거 원치 않는다, 일본에 있는 석탄은 우리 세대만 쓸 게 아니라 자손만대로 써야 할 것이니 아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전통사회에서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공통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아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왜냐하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니까, 그것을 함부로 일시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거의 체질화된 상식이었던 거죠.

  그런데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확산되면서 그런 사고습관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마치 자원이 무한한 것처럼 전제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새로 형성되고, 마침내 고질로 굳어져버린 거죠. 그러다가 지금까지 왔고, 이제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무한히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하잖아요. 하나는 미친 놈, 다른 하나는 경제학자.(웃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경제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케임브리지대학의 장하준 교수가 몇 년 전에 어느 교사들의 모임에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 후 질문시간에 누군가 장 교수에게 환경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고 해요. 장하준 교수의 대답은,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장 교수는, 저희들이 어렸을 때부터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를 들어왔지만 지금 지구가 망했습니까, 그렇게 답변했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하준 교수도 결국은 경제학자니까요.(웃음)

  지금 이 나라의 경제 사회 정책에 대해서 발언권을 갖고 개입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 성장론자이고, 경제성장이 명백한 벽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든 앞으로도 정책만 잘 만들면 얼마든지 경제가 회복되고 성장도 지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본 자료에 의하면, 지금 미국의 경제학자 중에는 금년(2014년) 안에 미국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 미국 경제, 일본 경제가 이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헛소리들만 계속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주식시장도 곧 활기를 띨 것이라는 둥, 온갖 장밋빛 예측들을 하고, 투자에 대한 전망을 쏟아내고 있죠. 물론 일시적인 경기 부침 정도는 되풀이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경제가 회복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석유문제 때문에 경제성장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2008년의 월스트리트 금융 파산 사태도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은 석유문제입니다. 석유가 백 달러를 넘어가는 상황에서는 세계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은행에서 돈을 대부 받으면 어떻게 하든 이익을 남겨 이자를 붙여서 은행에 되갚아야 하는 게 근대적 금융시스템인데,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시스템에 고장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여파로 경제에 돈이 잘 돌지 않기 때문에 상황은 더 나빠지고, 그 결과로 또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석유의 원활한 공급에 문제가 생겨 실물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로 자본가들이 고안해낸 것이 소위 경제의 금융화, 즉 돈이 돈을 버는 카지노 경제, 즉 도박 경제지요. 땀을 흘려서 정당한 노동을 한 대가도 아니고, 자본을 투입해서 생활물자를 만들어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경제도 아닌 순전히 돈으로 돈을 버는 불로소득의 부도덕한 경제 말입니다. 증권이니 채권이니 금융파생품이니 하는 것들을 사고팔고 하는 가운데 막대한 차익을 챙기는 메커니즘이 지난 20∼30년 동안에 엄청나게 발달해왔고, 그 허구적인 구조가 드러나자 거품이 터져버린 게 2008년의 금융 파산 사태였습니다.  

  혹시 조반니 아리기라는 학자의 이름 들어보셨어요?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한 역사사회학자인데, 그가 쓴 책에 《장기 20세기》라는 게 있어요. 말 그대로 거시적인 안목에서 자본주의 역사를 조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어떤 사이클로 전개돼왔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자본주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사이클은 간단히 말하면 헤게모니 국가가 번갈아 교체된다는 것입니다. 즉, 세계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국가가 경제력이 약해짐에 따라 그 패권적 지위가 다른 국가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즉, 중세 말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처음 발흥했던 자본주의 경제가 그 다음에 스페인으로 갔다가, 스페인 경제가 쇠퇴하자 네덜란드로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갔고, 2차대전 이후에 미국으로 주도권이 이동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 헤게모니 경제가 잘나가다가 쇠퇴할 무렵에는 반드시 그것이 금융화된다고 아리기는 지적합니다. 카지노 경제, 즉 화폐의 상품화가 극성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법칙처럼 자본주의 쇠퇴기에 반드시 등장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난 20∼30년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제가 카지노 경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아리기의 논리로 말하면, 미국이라는 헤게모니 국가가 쇠퇴기에 있었다는 뜻이 되는 거죠. 사실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지금 빠르게 소멸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왔습니다. 아리기는 다음 단계의 헤게모니 국가는 중국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죽기 직전에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그런 생각이 개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책은 읽어보지 않고 리뷰는 몇 개 읽어봤는데, 그러나 그가 예견한 것처럼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다음 차례 세계경제의 주도권은 중국이 쥘 것 같아 보이지만, 실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요.

  하기는 지금은 미국도 중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중국을 봉쇄한다면서도 실제로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하는 것, 늘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중국의 싼 노동력 없이는 미국의 산업이 돌아갈 수도 없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싼 상품이 없으면 미국의 저소득 계층 소비자들이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중국도 마냥 저임 노동력만 가지고는 계속 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대로 갔다가는 폭동이 일어나고 정권이 무너집니다. 더욱이 중국의 환경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이대로 방치해서는 세계가 망하기 전에 중국 자신이 망하게 돼 있습니다. 아리기 같은 사람은 중국이 다음 차례 헤게모니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중국도 인도도 이제는 더이상 세계경제가 착취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본주의는 이제 종말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야 합니다.

  원래 자본주의는 외부가 있어야 계속 성장하고 확대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내포한 모순과 부작용을 흡수하고 처리해 줄 수 있는 외부 말입니다. 자본주의 역사라는 것은 그러한 외부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침략하고, 수탈하는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죠. 유럽에서 막히니까 신대륙을 찾았고, 신대륙에서 막히니까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쳐들어갔습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나라도 식민지가 돼버렸죠. 물론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때 일본이라는 것은 서구를 대신한 제국주의였던 것입니다. 하여튼 지난 몇십 년 동안은 중국과 인도가 그나마 자본주의의 마지막 외부 노릇을 해왔는데, 이제 그것도 효력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중국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보면 굉장히 골치 아파하는 게 엿보입니다. 그동안 엄청난 경제성장을 실현할 수 있게 해주었던 조건들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대안적인 발전 방식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죠.

  영국에서 19세기 동안에 폭력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식민지를 대거 확보하지 못했더라면 당연히 국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겠죠.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시장도 노동력도 원료도 확보하고, 거기서 오는 이익을 가지고 노동자들에게 나눠줬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경제성장이 계속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어느 정도 나눠주면서 노동자와 빈민들을 달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식민지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화석연료 에너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석연료가 이제 바닥이 보이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중국이 바통을 이어받아 자본주의의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중국이 야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지난 몇십 년간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일정하게 원조를 하고 그걸 미끼로 해서 해외의 토지와 자원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일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속가능한 방법이냐 하는 게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미국도,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군사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결국 자원 확보 때문이죠. 그러나 모든 국가가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 귀결은 전쟁입니다. 2차대전 후에는 석유가 풍부했기 때문에 경제부흥이라는 게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그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저 지구에는 불모의 잿더미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에 개인도 그렇지만 사회시스템도 타성의 힘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먼저 각성한 인간들이 열심히 얘기를 해도 워낙 수십, 수백 년 동안 굳어져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익숙한 관행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식으로 가면 전면적 전쟁이 터질 게 확실하고, 그 결과는 세계의 멸망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종말이죠. 다음 기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인류사회, 특히 OECD에 속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대대적인 각성을 해야 됩니다. 실제로 전쟁이 먼저 터질지 기후변화가 먼저 들이닥칠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것이 먼저 오든 끔찍한 일이죠.

  각성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경제성장이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냉정히 인정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경제성장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를 열심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물자를 늘리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마구 소비하는 경제가 아니라 순환적인 생활 패턴이 가능한 경제 시스템을 재창조하려고 해야 하는 거죠. 그러자면 먼저 경제라는 개념을 근원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경제, 즉 일상적인 살림살이를 유지해주는 기술로서의 경제 말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어 이윤을 얻는 활동이 경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팔기 위해서 쓸데없는 물건을 너무나 많이 만들어냅니다. 지금 여러분이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 가서 과연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이 몇 가지나 되는지 한번 조사해 보세요. 정말 몇 가지 안 될 겁니다. 저도 어쩌다가 슈퍼마켓에 갈 일이 있으면 쭉 한번 훑어보는데, 꼭 필요하다 싶은 거 거의 없어요. 소비욕망을 부추겨 팔아먹기 위한 물건들이지 인간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은 극히 드물어요. 경제성장이라는 것도 결국은 상품교환을 통해 경제규모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과정에서 당연히 자연이 파괴되고 인생도 파괴되는 거예요. 이제는 그렇게 가서도 안 되고 또 실제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됐으니까 이걸 명확히 하자는 겁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도 말고요.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즉, 경제성장이 안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도 결국은 전 국가적인 규제완화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참사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이처럼 날이면 날마다 규제완화라는 주문을 외는 것은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돕겠다는 것이지만, 그 명분은 고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그러나 벌써 오래전부터 우리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기계화, 자동화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컴퓨터 이거 이제는 없앨 수 없습니다. 저는 딱 없앴으면 좋겠는데.(웃음) 지나간 역사지만, 생각해 보면 근대사에서 가장 생각이 옳았던 존재는 러다이트였습니다.(웃음) 교과서에서는 비웃고 있지만, 러다이트들의 논리가 가장 정당했던 것 같아요. 시대를 앞질러서 봤던 사람들이죠. 만약에 러다이트 운동이 성공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런 걱정 할 필요가 없었겠죠. 아마 인구도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안정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인구가 화석연료 없이 어떻게 살까 사실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자력발전소도 석유 없이는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것이니까 기본적으로 화석연료 에너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화석연료에 의존하다 보니 인구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은 거예요. 지구 생태계의 수용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인구로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할 게 확실하죠. 지금 평균수명이 갈수록 높아지고, 팔십 구십이 넘은 노인들도 허다해지는데 이거 옳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칠십을 고희라 했습니다. 공자님도 칠십까지만 이야기했지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잖아요.

  여하튼 인구의 고령화 현상도 그렇고, 무엇보다 기계화,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는 갈수록 생기기 어렵게 됩니다. 석유를 포함한 자원들이 고갈되어 가는 문제를 제외하고서도 앞으로 일자리 문제는 굉장히 심각해질 것입니다. 지난호 《녹색평론》에도 나온 얘기지만, 미국 뉴욕 시내 법률사무소에서는 서류작성을 로봇이 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간다면 앞으로 법정에서 변호사 노릇도 로봇이 할지 모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유통서비스 기업이라는 월마트도 곧 무인시스템을 도입한다고 합니다. 계산원도 필요 없다는 애기죠. 일본에서는 요양원의 보모 역할을 하는 로봇도 실용화 단계에 왔다고 합니다. 미국의 극우파 방송인 폭스네트워크에서는 스포츠 기사를 지금 컴퓨터가 쓰고 있다고 하고요. 

  이런 상황은 점점 더 심화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지금 철학적으로 우리가 왜 기본소득을 해야 되는가 하는 것도 활발히 논해야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지니까 기본소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죠. 기본소득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습관적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해서 거기에 대한 대가로 소득을 얻어 생계를 꾸려간다는 공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런 고용-임금-생활이라는 구조가 더 이상 성립이 안 되게 된 거죠.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말이죠. 지금 우리는 실제로 잠재적으로 모두 실업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정규직 노동, 정규 소득을 전제로 하는 연금제도 같은 것도 죄다 붕괴될 게 분명합니다. 지금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인구 감소 현상을 크게 걱정한 나머지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고 보조금이라도 줘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생각해 보세요. 인구를 자꾸 늘려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세계인구는 지구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벌써 넘어섰다고 하는데, 연금제도니 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생산-소비 인구를 유지하겠다고 자꾸 인구를 증가시키는 쪽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뭔가 근본적인 전환을 생각해야지 고식적인 방법을 계속하겠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지요. 더욱이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하는 형편에 아이들을 많이 낳아 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죠.

  그런데 방향전환을 하는 데 큰 걸림돌이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 왔던 생각, 즉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소득은 노동의 대가라는 생각에 너무나 깊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이제 낡은 것이라고 냉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신성(勞動神聖)이라는 관념은 생산성이 낮았던 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때는 그 생각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오히려 지나치게 높은 생산력이 큰 문제이고, 실제로 소득의 불평등, 빈부격차, 그로 인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상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나친 노동, 지나친 근면은 도리어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 마르크스라는 복잡한 사람 잘 알죠?(웃음) 그 마르크스의 사위가 폴 라파르그라는 사람인데, 라파르그가 쓴 책으로 《게으를 권리》라는 게 있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을 썼죠. 이제는 사람들이 다 같이 좀 게으르게 살아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의 생산 기술력은 엄청난데, 사람들이 부지런히 그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매진한다면, 과잉생산과 넘쳐나는 물자로 세상은 오히려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산과 소비, 노동과 소득에 관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종래의 고정관념들을 뿌리에서부터 다시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사람은 일을 해야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롭게 생을 영위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사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본소득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 일정한 기초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지급하자는 아이디어입니다. 이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데 또하나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왜 부자에게도 줘야 하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만, 예를 들어 재벌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것은 종래의 인습적 사고에 젖은 사람들에게 설득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실제로 빈부 가리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무조건 밥을 주자는 무상급식 논리도 아직까지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할 의사도 없는 사람한테까지 왜 기본소득을 주며, 부자들에게도 왜 기본소득을 줘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설령 기본소득제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계속될 질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이 없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어, 선별을 한다면 수급자의 자격 여부 심사에 과다한 행정비용이 듭니다. 또한 자격심사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른바 낙인효과라는 것이죠. 그리고 소득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초 생계비를 지급하는 현행의 국가복지 프로그램에서는 소위 ‘복지의 덫’이라는 현상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즉,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을지라도 급료가 적으면 사람들은 그 일자리를 포기하고 국가가 주는 기초 생계비에 의존해서 살려고 합니다. 그건 비난할 수 없는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제가 실시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죠. 일이 마음에 들기만 하면 비록 급료가 적더라도 누구나 기꺼이 취직을 하거나 자신의 일을 만들려고 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런 ‘합리적인’ 설명들로써도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을 겁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고정관념이 집요하게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걸림돌, 의구심을 한꺼번에 넘어설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소득을 단지 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배당금’으로 정의하자는 거죠. ‘배당금’이라고 하면, 수급자를 선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줄 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배제한다는 식의 분배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배당금은 모든 주주의 권리이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기본소득도 한 사회, 한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주주’로 간주하는 토대 위에서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 영구기금’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금을 이용해서 매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영구기금은 대부분 알래스카에 있는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 생산 및 판매에 의한 수입금입니다. 그때그때의 수입에 따라 연간 3천 달러 혹은 어떤 때는 1천 달러 내외의 현금을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래스카는 미국에서도 변경지대이고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대략 5인 가족이 주류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족 전체로 보면 꽤 상당한 액수가 됩니다.

  그런데 알래스카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석유라는 자원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의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구성원 전원에게 배당금으로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래스카가 30년이 넘게 꾸준히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석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물론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자원이 있는 지역, 국가라고 해서 다 알래스카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대개는 유전을 개발하고 석유를 생산할 자본과 기술이 있는 거대 석유회사에게 맡겨서, 그 결과 상층부 지배층과 자본가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체제를 만들어 온 게 현대사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관행입니다. 그러나 알래스카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공유자산이라는 인식을 철저히 한 바탕 위에서 고르게 나누는 길을 택한 것이죠. 이것은 알래스카의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주지사, 주의회, 주민들 전체가 이것에 합의를 봤다는 사실 자체가 알래스카의 가장 자랑스러운 점이고,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죠.

  이 알래스카식 기본소득 모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경제학자로 칼 위더퀴스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학자의 논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알래스카 영구기금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석유자원 유무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라고 봅니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 어떤 가난한 나라라 할지라도 기본소득제를 시행하지 못할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적 의지라는 거죠. 사실 어떤 나라든지 부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생산에 종사하면서 일정한 부를 창조해냅니다. 그런데 그 부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형성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공동으로 상속받은 토지, 자연자원, 문화, 전통, 역사 등등, 그러한 것이 근본적인 토대가 되어 그 위에서 부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부를 생산하는 데 끼친 특정 개인이나 그룹의 공로는 일정하게 인정하되 전체 부의 상당부분은 공동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갖는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으면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로서의 ‘배당금’이라고 간주할 때, 그 배당금이란 결국 공동체의 공유자산이 만들어낸 이익에 대한 배당이라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공유자산이라는 것에 좀더 생각해봅시다. 아까 제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외부를 찾아서 그것을 통해서 착취와 수탈을 계속하는 체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외부라는 게 무엇인가요? 국내든 국외든 결국은 미개발의 자연과 환경, 사회적 약자들의 노동력, 그리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하던 초기에 상당한 자본축적 과정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그것을 ‘원시적 축적’ 단계라고 불렀습니다. 웬만큼 자본이 쌓여야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큰 장사를 하든지 공장을 지어 물건을 생산·판매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런데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이 ‘원시적 축적’의 전형적인 형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소위 ‘인클로저’라는 것이죠.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이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생계를 도모하던 공유지(commons), 즉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동체의 공유자산을 권력자들이나 대지주들이 자기들의 사유재산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민중을 쫓아내며 구획을 짓는 행동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에는 ‘초기’ 단계의 일이라는 뜻도 들어있지만, 매우 난폭하고 야만적인 방법이었다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클로저’는 어느 날 갑자기 힘센 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와서 가난한 농민들을 쫓아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이라는 이름 밑에서 집행했죠.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법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전횡을 감추기 위한 그럴듯한 포장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력을 배경으로 한 국가권력으로 민중의 삶을 짓밟으면서 그것을 법 집행이라고 한 거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개방된 들이나 숲이나 목초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먹이며 살아온 농민들을 하루아침에 법을 내세워 몰아내고 거기에 울타리를 친 다음에 양들을 키워서 당시에 발흥하고 있던 양모 산업과 연계하여 떼돈을 버는 게 그 무렵 영국의 귀족과 권력자들의 치부 방식이었습니다. 16세기 초에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쓴 기본 동기도 이 상황을 비판하기위해서였습니다. 물론 모어 자신도 지배층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마음속으로는 자기 시대의 엄청난 불의에 대해서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가 법관이면서도 모어는 작품 속에서 법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즉 유토피아에서는 법관이라는 존재는 설 자리가 없도록 설정합니다. 그건 이유가 있죠. 즉, ‘인클로저’에 의해서 삶터를 뺏긴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런던으로 몰려와서 빈민굴을 형성하고, 달리 연명해 나갈 방도가 없으니까 도둑질, 소매치기, 매춘 등등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당시 법관들은 이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심지어는 좀도둑질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모어는 범죄의 배경과 뿌리는 묻지 않고 사람들을 이토록 가혹하게 다루는 국가의 법질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법관들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근대 유토피아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모어의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인클로저’에 대한 비판으로 씌어졌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즉, 근대세계의 출현과 함께 민중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공유지’의 상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얘기가 되니까요. 자본주의 근대문명은 한마디로 민중의 삶의 터전인 공유지를 해체·파괴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발생했던 현상으로서 ‘원시적 축적’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그 ‘원시적 축적’은 바로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돼온 현상입니다.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그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활동가였습니다. 룩셈부르그는 “자본은 그 창세기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유일하고도 항상적인 방법, 즉 폭력 이외에는 어떠한 문제 해결 방법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자본주의란 ‘폭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체제라는 뜻입니다. 지금 밀양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세요.  비록 가난한 삶일망정 오랫동안 이웃과 더불어 오순도순 조용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시골 사람들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송전탑 공사라는 ‘폭력’이 가해졌잖아요. 물론 전기는 국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지만, 잘 따져보면 이것도 ‘인클로저’의 일종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전력 체계는 대기업에 일방적 이익을 안겨 주도록 교묘히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산업체계는 수출 중심, 대기업 중심이죠. 그런데 그 대기업들이 정당한 경영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번다기보다는 국가로부터 음성적인 수출 보조금을 엄청나게 받고 있잖아요. 법인세 감세도 그렇지만,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굉장히 싸게 전력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전기요금체계를 보면, 산업용은 국제 평균보다도 훨씬 싸고, 가정용보다도 훨씬 저렴합니다. 그러면서 만날 한전은 적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대기업들한테 싼 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과연 그런 혜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대기업들의 주주 상황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거의 다 외국인 주주들입니다. 국내 주주들이라고 해도 다 투기꾼 세력들입니다. 국민경제와 별 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들에게 싼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시골 사람들의 삶터를 짓밟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버젓이 공권력의 힘으로 시골 사람들의 삶터와 생활을 박살을 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경제학에서는 자본은 잉여노동을 착취해서 확대재생산을 계속한다고 하는 ‘착취’론을 주로 말하고 있지만, 근본은 역시 ‘공유지’의 사유화, 민중 공동체의 해체라고 할 수 있어요. 몇 세기에 걸친 이 사유화 및 해체로 인해 민중은 스스로 자립하고 자치할 수 있는 공간과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어떻든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을 계속하는 동안은 알량한 임금이나마 받아서 많은 사람들은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올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늘 뒤로 미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경제성장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무엇을 잃고 뺏겨왔는지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된 거죠.

  최근 들어서 유럽, 미국을 포함하여 세계 각처에서 ‘공유지’ 혹은 공유재(자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공유지’라고 하면 쉽게 토지나 목초지를 떠올리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宇?弘文)가 말하는 ‘사회적 공통자본’도 결국은 ‘공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동체의 경제, 사회적 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한 인프라들도 알고 보면 전부 공유지 혹은 공유재에 속하는 것이죠. 철도, 도로, 항만, 공항, 가스, 전기, 통신, 의료 및 교육시설 등등이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 혹은 공공기관이 공적 자금을 들여서 도로를 만들어 놓으면 가장 큰 재미를 보는 자는 자동차기업의 경영자와 주주들입니다. 자동차기업이 자기 돈으로 도로를 만들어서 자동차를 팔아먹으라고 하면 다 망하겠죠. 그러니까 제 얘기는 자동차기업에 대하여 도로라는 공공 인프라를 통해서 자기들이 획득하는 이익의 일부라도 공공기금을 위해서 내놓도록 설득하거나 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래스카 영구기금’ 같은 것을 만들어 기본소득 재원으로 하자는 겁니다. 도로뿐만 아니라 그 외의 공공 인프라, 공적 기관이 내는 이익을 모두 이런 식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중이 잃어버린 ‘공유지’를 조금이라도 되찾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공공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화폐금융제도입니다. 화폐라는 것은 본래 공동체의 경제생활을 원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환수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대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한마디로 사적 이익을 취득하는 수단이 돼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자, 그것도 복리이자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평생 연구해오다가 최근에 작고한 마가레트 케네디라는 독일의 여성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의 책을 보면, 독일의 경우 보통 물가의 30∼40퍼센트가 이자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생산업자는 은행에서 대부를 받아 설비도 마련하고 원료도 확보하고 노동자들을 구해서 물건을 생산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물건은 유통업자를 통해서 도매점이나 소매점으로 옮겨집니다. 이 과정에 관계하는 모든 사업가는 자신이 직접 대부를 받았건 안 받았건 기본적으로 은행 대출금으로 돌아가는 이 경제활동의 연쇄 속에서 당연히 은행에 상환해야 할 이자에 해당하는 돈을 각 단계에서 가격에 추가합니다. 그렇게 하여 최종적으로 소비자가 사는 물건의 가격에는 이 누적된 이자들의 합계가 반영되어 있게 마련인데, 그 총 이자분이 평균적으로 물가의 3분의 1 이상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독일의 경우지만, 산업국가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그런 이자로 인해서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 대다수 시민, 소비자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끊임없이 부를 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자제도를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어차피 부유층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부를 끊임없이 쌓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설계된 금융제도 때문입니다. 마가레트 케네디의 계산에 의하면, 이 금융 메커니즘을 통해서 독일에서 하위 80퍼센트에 속한 소득자들이 10퍼센트의 상위 소득자한테 지불하는 ‘이자’가 하루에 10억 유로라고 합니다. 1년이면 3,650억 유로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막대한 돈이 이렇게 저소득층의 주머니로부터 부유층에게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개인 대 개인의 부채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죠.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돈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와 동전이 화폐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대부분의 통화는 실은 은행이 대출해 준 돈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통화의 대부분은 ‘부채’라는 얘기죠. 그것도 때가 되면 이자를 붙여서 상환해야 하는 부채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부분준비제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부분준비제도란 은행이 대부를 해줄 때 금고에 그만한 돈이 있을 필요가 없이, 아주 일부분만 준비해 두면 된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100만원이 있으면 1,000만원 혹은 그 이상 대출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게 ‘신용창조’라는 겁니다. 즉 실물의 현금을 미리 갖고 있어서 그중 일부를 대부해 주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것은 현대 금융시스템이 돈을 만들어내는 통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용창조 행위, 즉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돈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국가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사립 민간은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민간은행은 근본 관심이 사회의 공익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기업이 그렇듯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화폐를 대출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냄으로써 거기서 생기는 모든 이익을 사적 영리기관이 다 차지한다는 것, 이게 여러분은 이해되시는지요? 저는 여러 해 동안 화폐문제에 관한 자료를 들여다봐왔지만, 이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국채라는 겁니다. 국가가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몇 가지 있죠. 세금, 국유재산 매각, 각종 수수료 수입 등등인데, 그중에서 현대 국가들이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좀 생각해 봅시다. 국가가 돈이 필요하면 그냥 화폐를 발행하면 될 텐데, 왜 국채를 발행하는가? 실제로 예전에는 어디서든 국가가 화폐를 주조하거나 찍어서 보급했습니다. 상평통보 같은 것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지폐 발행은 중국 송나라 황제가 처음 시작했다고 합니다. 황제의 권능으로 이게 돈이라고 증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어 돌리면 그게 화폐로서 효력을 갖고 중화권에서 통용되었습니다. 화폐란 게 별것 아니거든요. 공동체가 공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 동전은 일본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일본 국가가 만들어 냅니다. 동전에 일본국이라고 발행 주체가 명기돼 있어요. 홍콩에서는 여러 종류의 지폐가 통용되고 있는데, 민간은행이 발행한 지폐도 있지만, 홍콩 정부가 직접 찍어낸 지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실제로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깁니다. 아니, 그게 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죠. 그런데도 왜 굳이 국채를 만들어서 이자를 물고, 그 부담을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안기면서 소수의 부유층만 갈수록 더 부자가 되도록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이 그런 방식으로 국왕으로부터 국채를 인수하면서 설립 인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관행이 지금까지 쭉 계속돼왔다는 것 말고는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가 없어요.

  만약에 지금처럼 돈을 민간사립은행이 영리 목적으로 찍어내지 않고 정부나 공공기관이 직접 발행하는 관행이 확립된다면, 어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선 이자를 비롯해서 화폐발행으로 얻는 이득(그것을 ‘시뇨리지’라고 합니다만)은 전부 공익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국채라는 것도 없어지고 국가는 복지, 교육, 의료 등등에 필요한 경비를 무상으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부채에 짓눌려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현대 금융제도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제도가 강박적으로 경제성장을 사회 전체에 강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의 금융화폐 시스템에서는 이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대출을 해야 하고, 대출금에 대해서 이자를 붙여서 상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반복되고 확대돼야 합니다. 이 과정이 순조롭지 않으면 시스템이 정지되고, 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면 사회에 필요한 돈이 말라버립니다. 그러면 경제는 파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과 같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은행이 화폐 발행 주체가 돼 있는 상황에서는 공동체의 삶이니 환경이니 하는 것은 전혀 고려사항이 될 수 없고, 오로지 경제성장이 지고의 목표가 됩니다. 그러니까 현행의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두고는 세상의 평화와 생태계 회복은 요원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까 셰일석유 이야기도 했지만, 그런 막대한 환경파괴를 초래하는 광태의 배경에는 이러한 금융시스템이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똑똑히 봐야 합니다. 

  결국 해법은 금융시스템의 공공화, 혹은 은행의 공유화입니다. 원래 금융제도와 화폐는 공공재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죠. 그러나 그동안 이 부조리한 금융시스템으로 부당하게 이익을 챙겨온 기득권 세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돌파구를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2008년에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의 사기 행각이 드러난 뒤에 미국에서는 공립은행 설립운동이 시민운동 차원에서 지금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예전에는 공공은행이 많았고, 지금도 노스다코타 주립은행은 공공은행입니다. 그 결과로 노스다코타주는 현재 미국에서 재정이 가장 견실하고 실업률도 가장 낮다고 합니다. 원래 농민들의 신용협동조합으로 출발한 이 주립은행이 그 운영으로 인한 모든 수입을 노스다코다주의 공공프로젝트와 복지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제도와 화폐라는 공공재를 다시 민중의 것, 주민의 것으로 돌리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계산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사회가 치열한 정치적 논쟁을 거쳐 현재의 민간사립은행을 다시 국민 전체의 공유재산으로 만들어 공립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기본소득에 필요한 재원은 아무 걱정할 게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무튼 기본소득이라는 것을 도입하기로 합의만 한다면, 재원 마련은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게 저나 기본소득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기본소득은 현실적으로 조만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본소득제가 실시되어야 우리사회의 어리석은 물질숭배와 경쟁과 효율 본위의 가치관도 좀 바뀌고, 사회적 관계도 많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제일 좋은 게 뭐냐면 노예노동이 종식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노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말 좋아서 일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이러고서야 인간의 자유롭고 존엄한 삶이란 건 공염불일 뿐이죠. 기본소득제가 시행된다면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일생을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싶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게 정상적인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들의 자유롭고 여유 있는 생활이 보장돼야 민주주의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정말로 품위 있는 인간다운 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당장에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레벨:2]피콜로

2016.02.03 (21:58:35)

먼저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음.


유럽은 지중해라는 내해와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지척에  두고 있음.  지중해라는 내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들이 처음부터 크루즈급 선박을 만들 수는 없었고, 사람이 몇사람 탈 수 밖에 없는 배를 만드는데, 이 배로 지중해라는 작은 바다를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  게다가 해협을 통하면 흑해까지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연안에 줄지어 서 있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다가 보면 통상무역이 저절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소위 해상무역을 일으키게 된다. 


로마제국이 성립되면서 맨 처음에 한 것이 각종 항만의 확충과 도로망 건설이었다. 이런 군사적 인프라를 따라서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은 생산수단이 수공업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는 소비시장이 큰 나라가 그나마 발전할 수 있다. 통상과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소비시장이 있음으로 해서 부의 자연스러운 역내분배가 이뤄지고, 결과적으로 제국의 부흥으로 이뤄진다.


산업화 시대는 생산수단이 기계화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양 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인구가 적당히 작아도 높아진 생산력으로 상쇄가 가능하다. 해서 로마제국에서 해안가를 가진 나라들 순서로 각기 국가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제는 빨리 소비시장을 선점해서 생산품을 팔아야 하는 무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와중에 민족주의가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한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경우는 산업화와는 관계가 별로 크지 않지만 산업화 시대의 후발주자들인 독일과 이태리 같은 경우는 크다. 


제품의 대량생산이 이뤄지니, 에너지원이나 노동력이나 자원 등이 필요하게 됐는데, 딱 지척에 아프리카 대륙이 있다. 자원개발도 해안가 부터 시작해서 내륙의 순으로 단계적으로 개발된다. 그리고 공업국가도 해안가부터 시작해서 내륙으로 개발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라가 너무 크면 개발이 늦어져서 순발력이 있게 대응을 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민지 개발도 반드시 단계적으로 개발이 되고, 자원개발도 단계적으로 개발된다. 


첨부된 식민지 시대의 지도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노른자위 땅은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했다. 독일과 이태리는 후발주자로서 변변치 않은 변두리 땅을 차지했을 뿐이다. 이런 것에 대한 불만이 나중에 세계대전이 터지는 주요 이유가 된다.


동아시아는 지중해 같은 내해가 없고, 아프리카 같은 대륙이 없다. 산업화 시대에 맞는 인프라가 생겨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산업화시대에 진도가 뒤질 수 밖에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약간의 기술력과 저임노동력으로 밀 수 밖에 없다. 이익을 보자는 자본이 갑자기 천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지대는 개발이 진행되면서 오를 수 밖에 없다. 후발주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기술력을 대폭 향상 시키던가, 양질의 저임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이 소득원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기본소득 제도는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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