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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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319 vote 0 2008.12.29 (12: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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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첫 한 점


바둑을 둔다면 어떨까? 첫 한 점을 둘 때는 누구나 진지하다. 그 바둑판 전체를 바라보고 두기 때문이다.


첫 한 점에는 속임수가 없다. 거기에는 묘수도 없고 신수도 없고 암수도 없다. 첫 한 점을 속임수로 두는 경우는 결단코 없다.



소년의 그대는 순수했다. 꾸밈이 없었고 속임수도 없었다. 첫 출근 날의 그대는 누구도 속이지 않았다. 결코 거짓 미소 짓지 않았다.


그 시점에 그대는 청정한 진짜였다.


지금이 그 때이다. 신 앞에서의 삶으로 말하면 그대의 지금은 소년기다. 언제든지 그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는 연습을 지금 해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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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철사를 펴는 방법


철사는 탄성을 가지고 있다. 굽은 철사를 펴려고 해서는 펴지지 않는다. 자체의 복원력이 있으므로 철사는 도로 휘어져 버리고 만다.


자전거 연습과도 같다. 왼쪽으로 쓰러지려 하는 자전거의 핸들은 더 왼쪽으로 꺾어 주어야지만 바로 세워진다.


굽은 철사를 펴기 위해서는 그 굽은 방향으로 더 휘어버려야 한다. 그 방법으로 철사가 가진 탄성을 죽여야 한다. 그렇게 철사의 탄성을 제거한 다음에야 굽은 철사를 바로 펼 수 있다.


왼쪽으로 쓰러지려는 자전거는 더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주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먼저 자전거를 바로 세운 다음에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한사코 엄마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있다. 그러나 아기는 순수하다. 아기는 굽은 철사가 아니므로 굽히거나 펴주는 방법으로는 결코 그 아이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성공할 수 없다. 다만 그 엄마 자신의 비뚤어진 정도를 판단하는 잣대로 이용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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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을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삶은 반복된다. 하루는 반복된다. 한 달도 반복된다. 한 해도 반복된다. 인생은 부단히 반복된다. 그러므로 안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데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복된다는 사실에서 죽음을 느낀다.


첫 키스는 반복되지 않는다. 신인왕 후보의 도전 자격은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생일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출생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삶은 전혀 반복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반복되지 않는 데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빛나는 길을 발견한다.



인생은 부단한 반복의 연속이지만 ‘처음’은 반복되지 않는다. 첫 만남, 첫 키스, 첫 소풍, 첫 출근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모든 불완전한 것은 반복되므로 하여 불완전한 것이며 모든 완전한 것은 반복되지 않으므로 하여 완전한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를 탈출하여 반복되지 않는 처음으로 돌아가기다. 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처음들의 맞은 편에서 동그라미의 끝을 발견할 때 빛나는 완성의 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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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7시에 떠난다는데


“요즘 애들이 힙합이다 뭐다 하고 춤이나 추어대며 손가락으로 카메라나 쿡쿡 찔러대는 게 음악이라고 할 수 있나요? 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하지 노래도 못 부르면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어느 40대 주부의 항변이다.


생각하자! 20년 전 변두리 음악다방에서 멋진 DJ를 사모하여 창틈으로 꽃편지 밀어 넣던 그녀가 이제는 아줌마가 된 것이다.


세월은 사정없이 흘렀다. 시골 처녀 가슴 설레게 하던 음악다방도, 콧소리 내며 음반을 틀어주던 DJ 총각도 세월 따라 사라져 버렸다. 오디오 시대는 가고 비디오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상실이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지금 뭔가를 잃어버리고 매우 화가 나 있는 것이다. 함께 대담을 나누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빙긋이 웃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신경숙의 소설입니다. 40대 아줌마의 과거회상 소설이 한때 문단에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지요. 아류작이 쏟아져 나왔는데 대개 신변잡기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평단의 비판을 받은 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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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아기사슴


가여운 아기사슴이 사나운 늑대에 쫓기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늑대를 제지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교란할 것인가 아니면 방관함으로써 자연의 섭리를 존중할 것인가?


타인의 일에 개입할 때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이 주인이고 내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자연이 내게 친절하듯이 나 또한 매너 있는 방문자인지 생각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동정심을 위조해가며 냉담한 지식인인 척 연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대는 먼저 그곳이 자연의 영토이며 나는 타인의 영토를 방문한 손님의 자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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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이런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보기.

싫어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보기.


싫어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먼저 인사 해보기.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간 아무 계획 없이 즉흥적인 삶을 살아보기.


아무 방향으로나 대략 일직선으로 끝없이 걸어가보기.

깊은 밤중에 공동묘지에 가보기.


실내에서 발가벗고 생활해보기. 

통증이 아니라 쾌감이라고 생각하며 매를 맞아보기.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갑자기 상대를 포옹하며 ‘미안해. 내가 사과할께’ 하고 말해보기.


이상은 내가 경험해 본 것이다.


선생님의 교탁 위에 올라앉아 끝까지 버티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기.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조회 시간에 가만히 줄 밖으로 나가 있어 보기.


이것은 내가 해보지 않은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서는 결코 그 책을 이해할 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아서는 결코 그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부하의 입장에서 일해서는 결코 그 상사를 이해할 수 없다.


역할을 바꾸어 보아야 한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작가라면 어떻게 쓸 것인가? 내가 감독이라면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내가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신이라면 어떻게 인간을 창조했을 것인가? 또 어떤 방법으로 이 우주를 운영할 것인가?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해 보는 아이러니를 연습할 때 신과 인간 사이에 나 있는 벽을 넘어 비로소 인간이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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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이어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다.


불행이라는 표지를 든 한쪽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은 상실, 소외, 고독, 상심, 그리고 죽음이다.


행복이라는 표지를 든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은 창조, 참여, 만남, 기쁨, 그리고 탄생이다.


당신은 어느 그룹에 참여하고 있는가?



인간이 열심히 달리는 것은 외부에서의 어떤 유혹 혹은 욕망 때문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의 어떤 갈증 또는 넘치는 열정 때문이다.


물맛이 달콤하기 때문에 그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목이 마르기 그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이다.


쾌락의 유혹 때문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네르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달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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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살기


살기 위해 밥을 먹는 사람은 없다. 진실을 말하면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진실을 말하면 거듭하여 먹다보니 이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위하여’ 라고 말하지 말라. 먹기 위해서도, 살기 위해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도, 출세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의하여’ 라고 말하라. 나 내부에서의 분출하는 열정에 의하여, 또 나 내부에서의 불타오르는 갈증에 의하여.



논리학에 따르면 후건이 전건을 결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위하여’가 아니라 모든 ‘의하여’이다.


연료탱크에 가솔린이 충전되었다면 자동차는 달릴 수 있다. 신이 준비해둔 사랑이라는 에네르기의 충전된 자원에 의하여 이 에너지가 마저 소진될 때까지 우리는 또 달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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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의 이방인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이다. 어떤 욕망도 희망도 야심도 상심한 한 인간을 설득할 수는 없다. 미래에 대한 찬란한 약속 따위는 무시된다. 본질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 살아봐.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힘내라구”


하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허할 뿐이다. 기어이 맛보게 되는 것은 환멸 뿐이다. 삶이 죽음보다 낫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단코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작용이 없는 마약이 발명된다면 그대는 그 약을 먹을 것인가?”


버려야 할 것이다. 그대가 권하는 희망 혹은 욕망이란 것이 설사 가치를 지닌다 해도 그것은 부작용 없는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


신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권태와 환멸을 넘어 있어야 하는 그것은 의식의 표백이다. 늘 그렇듯이 오늘은 어제의 표절이다. 내일은 오늘의 복제판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 너는 나. 그렇게 너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방법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면. 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반항이겠다. 희망과 야심을 온전히 버렸을 때 내 밑바닥에서의 에너지가 노출된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네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뿐이다. 그 밑바닥에 고인 에너지의 자연스런 분출을 굳이 방해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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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못하는 아이

아빠와 함께 수영장에 온 꼬마가 있다.


“아빠 난 헤엄을 못 쳐요. 난 무서워요”


아빠가 대답한다.


“아들아! 나도 너만할 때는 헤엄을 칠 줄 몰랐단다. 옛다! 이 동전은 할아버지께서 물려준 것이야. 마법이 깃들어 있는 동전이지. 수영복 뒷주머니에 넣고 연습하면 금방 수영을 배울 수 있게 된단다. 나도 그렇게 배웠어.”


꼬마는 아빠의 방법을 사용했다. 금방 수영을 배울 수 있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즘 애들이 어른들을 우습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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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맥주 한잔 사주세요


여중생들이 친구를 꼬드겨 보도방 영업을 한다는 기사가 지면에 실려 있다. 그렇데서 ‘에이, 말세야, 말세’하며 혀나 끌끌 차고 있다면?


40년 전에도 무교동 뒷거리에 ‘아저씨, 맥주 한잔 사주세요’하며 접근하는 소녀 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이 타락할 핑계를 거기서 찾으려 든다면 좋지 않다. 



‘말세야, 말세’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탓할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신문을 뒤적거리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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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사랑


농부는 흙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흙아 사랑해` 하고 흙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농부는 어쩌면 흙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농부는 다만 부지런히 밭을 일구고 있을 뿐이다.


농부는 흙이 된다. 흙은 농부가 된다. 서로는 조금씩 배어들고 서로에게 침투하더니 서로 닮아버린다. 



꽃을 정성 들여 가꾸는 사람이 있다면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꽃향기 가운데 서는 사람이 진짜다. 부부가 서로 닮아가듯이 서로는 향기로 하여 배어든다.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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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빈과 레옹


명절이면 텔레비전에 나오곤 하는 코미디언 미스터 빈(르왓 애킨슨)은 강아지 인형 하나를 애지중지 품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깊다.


영화 ‘레옹’의 ‘장 르노’는 화분 하나를 목숨처럼 아낀다. 그들에게는 뭔가 하나를 애지중지 하며 갖고 다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일까?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눈의 초점을 잡아줄 포인트가 필요하다. 넥타이는 시선을 얼굴 쪽으로 모아주는 기능을 한다. 스카프나 목걸이라도 좋고 머리핀도 그렇다.


그것은 집의 대문과도 같다. 어떤 출입구 혹은 테두리 혹은 손잡이들은 특별히 강조하여 사람의 시선을 끌도록 디자인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사물에 접근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그대 마음의 통로는 어디인가? 신이 그대에게 준 미소를 그러한 용도에 쓰지 않는다면 도무지 어디에 쓸 작정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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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분위기에 감응하기


점잖은 사람이라도 노래방이나 디스코텍에 가게되면 곧 분위기에 휩쓸려 노래하고 춤추게 된다. 거기엔 조금의 어색함도 없다.


자연에는 자연의 분위기가 있다. 오솔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의 분위기에 감응된다.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고목나무에 기대어 보거나 하늘의 뭉게구름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당황한다.


“난 바쁜 사람이야.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놀기 위해서지. 그러므로 나는 지금 부지런히 놀아야만 해. 거기 소주병 좀 꺼내오게. 고스톱이라도 쳐보자구.”


그들은 자연의 분위기를 어색해 한다. 그들은 문득 불안해하며 허겁지겁 ‘놀기’라는 일에 착수하곤 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자연에서도 무언가를 부지런히 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이유 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일까?


노래방에서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리듯이 자연에서도 아무런 이유 없이 자연의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이 주인공이고 그대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자연이 춤추자고 유혹하면 춤추고 노래하자고 유혹하면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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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


벙어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수화로 말하더라도 그러하다. 장님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에게 끓는 물을 찬물이라고 속여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장애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의사를 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체험하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된 명상가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실을 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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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허무하다


그렇다면 그 허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니야, 삶은 멋진 거야.’ 하고 자신을 위조할 수 있지만 그 약효는 그리 길지 않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대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사랑하는 고흐가 그러했고, 이중섭이 그러했고, 이상이 그러했고, 전태일이 그러했고, 천상병이 그러했고, 경허가 또한 그러하였듯이.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절절한 허무를 두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처이다. 그 상처를 핥는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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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일생동안 제 손으로는 한 점의 그림도 팔아보지 못하였다. 평단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가난과 병고와 씨름하며 불행한 삶을 살다 자살로 마감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진정으로 행복하였음을 안다. 그의 대개 삶은 불행하였지만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은 진정 행복했다. 그는 쉬지 않고 그렸다. 그는 쉬지 않고 행복하였다.


무려 9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만치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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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하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대 안에 잠든 사랑을 일깨우라고 말하겠다. 그대 안에 사랑이 충만해지는 과정에서 그대 자신이 조금씩 변하여 가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말하겠다.


그대 안의 세포 하나 하나가 눈 뜨고 마구 소리치며 뛰놀며 궁그르는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라고 말하고 싶다.



내 말을 믿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 안에 믿음을 가득 채우라고 말한다. 믿어야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 언어가 끝끝내 담아내지 못하는 한 가닥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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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감수성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찾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도 행복을 찾지 않는다. 작은 행복 혹은 작은 불행에도 민감한 사람이 행복을 찾는다.


싸우고 파괴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행복의 감수성이 둔감한 사람이다.


웅장한 건축물보다 작은 풀꽃 한 송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듯이 작은 행복이라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의 미약을 팔지 않는다. 행복에 겨운 공주님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대 안에 감추어진 `행복의 감수성`을 계발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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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감탄하지 말라.

혼자 보기 아까워 친구 부르는 소리 있어서 안 된다.


골동품 수집가가 감탄을 아끼지 않는 것은

비싼 값에 팔아먹기 위함이다.


심마니가 ‘심봤다’를 외치는 것은

그 산삼을 좋은 값에 팔아치우기 위함이다.


그대 안의 감동을 누구와도 교환하려 들지 말라.

다만 속으로 삭이거라.


그대가 사랑하는 연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였듯이


황홀했던 첫 데이트를 

그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듯이.


그대 어떤 경우에도 관광객이 되어서 안 된다.



알겠는가?


그대는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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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아무도 죽어보지 않았다. 아무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찌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삶은 있다. 그렇게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 삶이 없다. 죽음은 순수한 무(無)다. 없다. 없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거나 싫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라!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죽음을 정면으로 인식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 그것은 네가 내로, 또 내가 네로 자리바꿈 하기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즐거이 신과 인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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