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언어감각이다 언어는 대칭을 쓴다. 문제는 대칭 속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버스 안에서는 버스가 가는지 전봇대가 오는지 모른다.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도약해야 한다. 버스 밖으로 나와야 한다. 대칭 밖으로 나와야 한다. 대화는 두 사람이 마주본 상태에서 일어난다. 대화어는 두 사람의 대칭 속에 갇혀 버렸다. 지식어는 대칭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사건과의 또다른 대칭이 만들어진다. 역시 더 큰 단위의 대칭 속에 갇혀 있다. 대칭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못했다. 시합 중인 선수는 상대팀과의 대칭 속에 갇혀 있다. 심판 역시 시합과의 대칭 속에 갇혀 있다. 선수는 시합에 이기려고 하므로 판단이 왜곡된다.
◎ 대화어.. 상대와 대칭된다. 심판은 공정하려고 하므로 역시 판단이 왜곡된다. 선수도 곤란하고 심판도 곤란하다. 주최측이어야 한다. 주최측은 대칭을 이루는 상대가 없다. 그리고 게임을 발전시키려는 분명한 의도와 방향성이 있다. 심판은 기계적 공정성을 주장하지만 주최측은 약자를 배려한다. 그래야 흥행하기 때문이다. 여당은 야당과 대칭된다. 대통령은 대칭되지 않는다. 홀로 우뚝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국민과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를 꺾으려는 정치인의 방법은 실패한다. 지지율에 신경쓰는 대통령의 방법도 실패한다. 내부를 바라보므로 실패한다. 시선이 내부에 갇혀 있으므로 판단이 왜곡된다.
◎ 대화어.. 기준에 맞춘다. 그러나 기준의 존재를 모른다. 대화는 두 사람이 하는 것이며 숨은 전제가 있다. 판단기준을 공유해야 대화가 된다. 대화를 하고 있다면 암묵적으로 판단기준에 동의해버린 것이다. 이미 끌려가고 있다. 대화어는 자기도 모르게 기준에 맞추면서 거기에 판단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왜곡된 룰에 낚이는 것이다. 지식인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판단기준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기준을 강조할 뿐 기준을 바꾸지는 않는다. 시합은 이미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이미 가담되어 있다. 깨달음은 기준을 바꾼다. 기준을 바꾸려면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자신이 룰을 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판을 다시 짜야 한다. 두 사건을 하나의 궤도에 올려 연속시키는 방법으로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 그러려면 사건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 사건이 다음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봐야 한다. 하나의 사건이 더 큰 사건을 촉발하므로 에너지가 조달된다. 봄의 파종이라는 작은 사건이 가을의 수확이라는 큰 사건으로 결과한다. 뿌린 씨앗과 수확한 곡식의 차이만큼 에너지가 있다. 그러므로 그 씨앗이 없어지든 말든 상관없다. 첫 게임을 져주든 말든 상관없다. 가을의 수확이 따따블이라면 져줘도 좋다. 그러므로 룰을 바꾼다. 첫 시합의 패배를 다음 시합의 승리와 바꾼다면 진 것이 이긴 것이다. 최후에 이기는 자가 챔피언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객관을 도구로 쓰고 깨달음은 복제를 도구로 쓴다. 복제는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에너지의 낙차가 있으므로 방향성이 있어서 비대칭이다. 완전한 비대칭에 도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언어감각으로 알 수 있다. 말 안해도 그냥 안다. 얼핏 감으로 아는데 써먹지는 못한다. 깨달음은 훈련해야 한다. 필자는 ‘라고한다의 법칙’을 썼다. 초딩 때의 일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납득이 안 되면 ‘~라고한다.’를 붙였다. 이거 재미있다. 이건 지식인의 어법이다. ‘도둑질은 나쁘다.≫ 도둑질은 나쁜걸로 한다. 바로 이해되었다. 도둑질이 나쁜 이유는 사회가 합의하여 도둑질은 나쁜 것으로 하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감상적인 설교를 늘어놓는다. ‘네가 도둑질을 하면 피해자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니?’ ‘근데요. 내가 수박서리 한 것을 밭주인이 모르는데요? 밭주인 가슴이 아플 리가 없는데요?’ 이렇게 반박하면 피곤해진다. 도둑질을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도둑놈이 되기 때문이다. 그거 버릇되어 못 끊는다. 이건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어릴 때는 그런거 모른다.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 이 말은 이해되지 않는다. ‘나쁜 짓 하면 지옥가는 걸로 한다.’ 이 말은 이해된다. 모든 말에는 의도가 있고 메커니즘이 있고 상부구조가 있다. ‘~라고한다’를 붙이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한 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라고한다’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자칫 거기에 재미들리면 냉소적으로 된다. 허무주의자가 된다. 이걸 중이병이라고 한다.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 ‘~라고한다’는 모든 것이 원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의 산물이라는 거다. 윤리나 도덕은 신의 지상명령이 아니고 사람들이 합의한 게임의 룰이다. 축구시합에서 골인을 1점으로 치는 것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없는가?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촉발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해야 하는 필연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에너지다. 에너지가 다음 사건을 일으킨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도둑질로 끝나지 않고 다음 도둑질로 이어간다. 딱 한 번만 훔치고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지? 천만에. 그거 중독된다. 그거 못 끊어서 계속 저지른 전과자가 교도소에 5만 명 있다. 사건은 계속 커진다. 깨달음은 다음 단계를 보게 하는 힘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지식인의 객관적 시선이 맞다. 그러나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세상 모든 것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고딩이 되어서도 ‘~라고한다’에 빠져 있으면 곤란하다. 지식인은 사건에서 발을 빼고 객관적으로 보지만 누구도 지구에서 발을 뺄 수 없다.
깨달음은 언어감각이므로 제가 그러하듯이 한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단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의식하고 말해도 안 되고, 사건을 의식하고 말해도 안 됩니다. 연출자의 자세로 말해야 합니다. 연출자는 다음 단계를 봅니다. 배우의 연기는 지금 단계, 관객의 반응은 다음 단계입니다. 둘을 하나의 궤도에 태워 보는 감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
한때 축구 리그전에서 1승을 하면 2점 비기면 1점 지면 0점처리하던 것을
어느날 갑자기 이기면 3점 비기면 1점 지면 0점처리 했다.
기준을 바꾼거다.
깨달음은 그런거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꾸는 거다.
아니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진짜처럼 인식되던 가짜의 속내를 드러내고,
진짜를 제대로 보여주는 거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로 안다.
어항 속의 물고기에게 그 물이 어떠냐고 묻지 말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밖에 나와서 봐야 한다.
서서이 온도가 올라가는 탕 속의 개구리는 맛있는 개구리가 되고 만다.
깨달음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