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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236 vote 0 2015.08.27 (00:24:13)

     

    복제를 깨닫다


    깨달음이 중요하다. 지식을 복제할 수 있는 구조로 뇌를 세팅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논리학 용어로는 연역이다. 연역은 확실한 하나의 원형을 반복적으로 복제하여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이다. 연역적 사유의 원형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12.jpg


    원형은 자연에서 조달된다. 자연은 패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졌다. 패턴은 자연이 하나의 원형을 반복하여 복제한 자취다. 주변에서 쉽게 동형반복의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자연이 사물을 복제하여 생성하듯이 인간의 지식도 복제해야 한다.


    복제는 소통을 통해 접근된다. 우리는 눈과 귀와 코로 자연과 소통한다. 자연은 정보를 대량으로 복제하여 사방에 뿌린다. 그러므로 내가 귀로 들은 소리는 다른 사람도 들을 것이며, 내가 눈으로 본 것은 남도 본다. 인간은 언어로 복제한다.


    말 한 마디로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연역할 수 있다. 누구나 무의식 중에 이미 연역하고 있다. 문제는 문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연역해내야 깨달음이다.


    인간은 연역하면서도 연역하는 방법을 모른다. 인간의 언어능력은 뇌 안에서 작동하는 복제능력이다. 처음에는 손짓발짓으로 자연의 움직임을 복제했다. 다음 혀와 입술과 턱짓으로 손짓발짓을 대체했다. 보디랭귀지가 언어로 발전한 것이다.


    연역은 원형을 복제한다. 원형은 언어에 있다. 깨달음은 무의식적인 언어감각을 의식적으로 쓰는 것이다. 문제는 복제의 수준이다. 일단은 말이 통해야 한다. 언어를 구사하여 내가 의도하는대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다면 연역은 성공이다.


    대개 낮은 수준의 연역이다. 많은 경우 언어만으로는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 전쟁이 있고 불화가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이다. 언어의 레벨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왜 말이 통하지 않는가? 배후에 한 층이 더 있다.


    언어는 동사로 출발한다. 동작은 손짓으로도 전달할 수 있다. 동물도 약간은 가능하다. 개는 이를 드러내어 화가 났다는 표시를 할 수 있다. 동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동사의 배후에 명사가 있다. 여기서 동물과 인간의 가는 길이 갈라진다.


    동사 앞에 명사가 목적어 역할을 하고, 명사 앞에 주어로 하나의 짧은 문장이 만들어진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진술에 앞서 전제가 있으니 명제를 이룬다. 명제는 전제에 진술을 붙여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구조를 갖춘다.


    명제 이전에 담론이 있다. 담론은 이야기의 완전성이다. 명제에 ‘왜냐하면 뭐뭐하기 때문이다.’ 하는 설명을 붙여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이룬다. 복제가 가능한 구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원래 두 사람의 문답이기 때문이다.


    ‘간다.’ ‘어디?‘ ’서울.‘ ’누가?’ ‘내가.’ 이런 식이다. 합치면 ‘나는 서울에 간다.’로 하나의 문장이 된다. 이것만으로는 복제가 되지 않는다. 맞는 말인지 판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A면 B다.’의 조건문이어야 한다.


    13.jpg


    여기에 사용례를 덧붙이면 완전하다. 이 구조를 다른 곳에 써먹을 수 있다. 의사소통은 대개 분절된 단어나 문장을 조립하여 각자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성이론과 같은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어렵다. 독자가 잘못 해석한다.


    깨달음은 간단하다. 배후에 한 층이 더 있다. 동사 앞에는 명사가 있다. 동사만 말해도 명사가 있음을 알아채야 한다. ‘먹었다’고만 말해도 ‘아하! 밥을 먹었구나’ 하고 찰떡같이 알아먹어야 한다. 두 층만 있는게 아니다. 명사 앞에 주어있다.


    ◎ 담론≫전제≫주어≫명사≫동사


    주어 앞에 전제가 있으니 진술과 합쳐 명제를 이룬다. 담론까지 가야 완전하다. 부분을 말해도 전체를 알아먹어야 깨달음이다. 그것은 관계 속에 있다. 문법은 언어의 관계다. 깨달음은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관측자의 숨은 관계를 깨닫기다.


    관계는 복제의 플랫폼이다. 자연에 패턴이 있는 것은 에너지가 플랫폼을 쓰기 때문이다. 플랫폼에 에너지를 입력하면 동일한 패턴이 반복적으로 출력된다. 자연은 대량으로 찍어낸다. 구조를 찍어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찍어낸다.


    거기에 살을 입히면 세상은 이루어진다. 언어는 문법에 따른 포지션을 찍어내는 것이며 거기에 단어를 입히면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아는 것은 량이다. 량은 침투한다. 소리나 색깔과 냄새와 촉감은 인간의 뇌 속에 침투한 량이다.


    량은 운동에 의해 조직된다. 운동은 힘에 의해 조직된다. 힘은 입자에 의해 조직된다. 입자는 질에 의해 조직된다. 그것이 관계다. 누가 누구를 찍어내는지를 알아야 한다. 부자관계도 있고 부부관계도 있다. 자연에도 부부와 부자가 있다.


    원인과 결과는 부자관계다. 언제나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따른다.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은 절대로 없다. 결과가 원인을 낳는 일은 절대로 없다. 만약 결과가 원인을 낳았다면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된 것이며 이는 전혀 다른 사건이다.


    여당과 야당처럼 대칭을 이루는 관계도 있다. 부부관계다. 의사결정할 때는 평등한 부부를 이루었다가 에너지를 투입하여 일할 때는 부자로 바뀐다. 컴퓨터 프로그램 순서도는 평등한 수평적 부부관계와 불평등한 수직적 부자관계를 나타낸다.


    자연에는 그러한 촌수가 있다. 자연은 복제하며 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등한 부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칭이다. 자연은 평등한 대칭을 세팅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투입하여 이를 비대칭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일을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배후에 연출자가 숨어 있다. 물고기가 미끼를 보았다면 물 밖에 낚시꾼이 숨어 있다. 안 봐도 비디오다. 관계라는 플랫폼이 배후에 숨어 있다. 우리는 양을 본다. 양의 배후에는 운동이 있다. 운동의 배후에는 힘이 있다.


    운동과 양은 눈으로 보면 보인다. 정확하게는 양만 관측이 된다. 운동은 보일 뿐 계측되지 않는다. 우리는 운동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양을 계측하여 운동을 추론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운동을 보는게 아니라 뇌가 운동으로 해석한다.


    힘은 뇌도 해석하지 못한다. 오승환의 직구가 돌직구인지 물직구인지는 던져봐야 안다. 최홍만 근육이 돌근육인지 물근육인지는 시합에서 드러난다. 힘은 운동으로 변환된 이후에 실체가 드러난다. 공포탄인지 실탄인지는 총을 쏴봐야 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는 양의 판단이다. 양은 의심할 수 없다. 양은 정확하게 계측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럴수록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 눈으로 관측한 양은 정확한데 배후의 메커니즘에 속는다. 관계를 속인다. 데이터는 맞는데 해석오류다.


    반면 질은 눈으로 관측이 안 되지만 메커니즘은 진실이다. 질은 속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질 뒤에 입자와 힘과 운동과 양이 졸졸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흥부가 자신이 부자라고 속여봤자 뒤에 따라오는 24명의 자식들 때문에 들킨다.


    그러나 흥부아들은 속일 수 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전면에 나서면 자식들 때문에 신분을 들키지만 자식이 전면에 나서면 뒤의 부모는 보이지 않으므로 들키지 않는다. 양이 정확하지만 그 양으로 속인다.


    ◎ 양은 정확히 관측되나 질이 은폐되므로 해석에 오류가 있다.
    ◎ 질은 직접 관측할 수 없으나 양이 노출되므로 해석이 진실하다.


    해석이 틀렸다. 태양은 지구를 돌지 않는다. 사실은 지구가 태양을 돈다. 관측된 데이터는 오류가 없다. 눈으로는 제대로 봤는데 해석이 잘못되었다. 해석은 관계를 본다. 내가 바깥에 있으면 해석이 옳고, 내가 안쪽에 있으면 해석이 틀린다.


    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공간이 휘어졌다고 한다. 양과 운동을 지나 힘에 이르러 해석의 수준을 높였다. 더 정확하게 보면 해가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해를 도는 것도 아니고, 공간이 휘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지구는 태양 주변의 원형궤도에 붙잡혀 정지해 있다. 지구는 그냥 가만이 있다. 사실은 지구가 궤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잡혀있는 것이다. 존재와 인식 사이에는 5층에 걸쳐 연출이 있다. 5층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지식이 복제되지 않는다.


    복제되어야 진실하다. 5층 꼭대기에 무엇이 있나? 암흑에너지가 은하계 바깥에서 공간을 팽창시키고 있다. 과연 그러한지는 물리학자들의 영역이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현상이 관측된다면 반드시 배후에 4개의 층이 더 있다는 점이다.


    5층까지 올라가야 구조가 복제된다. 열역학 0법칙과 같다. 3단논법이다. 어떤 둘이 같으면 세 번째도 같다. 5층에서 3단논법에 필요한 세 개의 이퀄=을 성립시킨다. 1+1=2다. 2가 집합이면 1은 원소다. 인과관계는 집합과 원소의 관계다.


    2가 운동이면 1은 양이다. 1+1=2 만으로는 알 수 없다. 정말 그런지 드러나지 않는다. 운동과 양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2+2=4다. 그렇다면 3+3이 얼마인지는 말 안해도 안다. 이퀄= 두 개가 나오면 세 번째 이퀄은 복제된다.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패턴이다. 질과 입자와 힘이 하나의 이퀄=을 만든다. 힘과 운동과 량이 또 하나의 이퀄=을 만든다. 두 이퀄=을 연결시키면 세 번째 이퀄은 자동으로 얻는다. 질≫입자≫힘≫운동≫량까지 가야 완전하다.


    ◎ =1 – (입자+힘=질)
    ◎ =2 - (운동+량=힘)
    ◎ =3 - (입자+힘=질) + (운동+량=힘) = 독립적인 사건


    삼단논법을 충족하고 열역학 0법칙을 완성할 세 개의 이퀄이 얻어진다. A와 B, 그리고 B와 C의 거리를 알면 C와 D의 거리는 정해져 있다. =는 사이에 있다. 동일한 두 개의 사이를 얻으면 세 번째 사이가 자동으로 확보된다. 이것이 복제다.


    지구와 태양과의 관계는 하나의 사이다. =다. 암흑물질에 지배되는 태양과 은하계 사이도 확보해야 한다. 그렇다면 암흑에너지에 지배되는 은하와 우주공간 사이도 확보된다. 복제된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알 수 없다.


    모든 해석된 것은 오류가 있다. 원형의 복제만이 완전하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하나 단어 수준의 소통에 불과하다. 동물은 동작을 지시할 수 있을 뿐 목적지를 지목할 수 없다. 인간은 여기나 저기로 가라고 구체적인 목적지를 지시할 수 있다.


    그런데 명령의 주체를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주어가 필요하다. 그런데 조건은 제공할 수 없다. 언제 가라는 건지 어떤 경우에 가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 조건이 전제다. 조건부로 지령할 수 있다면 언어는 입자의 레벨에 도달한 것이다.


    ◎ 담론 - 어떤 이유로
    ◎ 전제 – 어떤 조건일 때
    ◎ 주어 – 누구에 의하여
    ◎ 명사 – 어디로
    ◎ 동사 – 가라.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다. 이유까지 알아야 질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명사나 동사 수준에서 의사소통을 한다. 나머지는 추론해야 하며 해석은 오류투성이다. 경험한 사실을 알 수 있으나 경험하지 못한 것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의사소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제할 수 밖에 없다. 자연에는 갖추어져 있다. 그것이 구조다. 복제의 플랫폼이다. 에너지를 투입하면 동형반복의 패턴이 무한히 쏟아진다. 언어에도 이와 같은 복제구조가 갖추어져 있다. 깨달을 일이다.


   


[레벨:11]큰바위

2015.08.27 (07:36:15)

늘 통이 큰 글을 쓰십니다.

늘 통이 하나인 글을 쓰십니다. 


역시 구조는 하나로 통하게 합니다. 


[레벨:7]새벽이슬2

2015.08.27 (09:28: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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