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에서 행복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불평을 던진다. 왜 공주님으로 변신하지 않느냐는 거다. 해피엔딩인데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화를 내니 할말이 엄따.
한기는 유리조각에 찔려 죽었다. 또는 사형당해 죽었다. 그 이전에 이미 목에 칼을 맞아 죽었다.(한기가 말을 못하는 것은 목에 칼침을 맞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한기는 죽었다.
선화는 빨간옷을 입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 찢어진 사진에서 확인 되듯이 죽은 사람은 선화다. 선화가 거리를 방황할 때 빨간옷을 입혀주는 여자가 그 죽은 여자다. 즉 선화는 이미 죽었음을 의미한다.
바다는 자궁을 의미하고 자궁은 재생을 의미한다. 부활이다. 한기와 선화는 죽고 난 다음 부활한다. 아기다.
바닷가 마을은 창녀에 대한 편견이 없는 순수한 곳을 뜻한다. 그곳은 성의 독점도 없고 결혼제도도 없는 원시의 마을이다. 즉 매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이를테면 한기와 선화는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외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한 한기와 선화는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가 없다.
김기덕감독의 의도는 한기와 선화의 해피엔딩은 이 영화의 관객들이 매매춘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버리므로서 달성된다는 의미다. 즉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매매춘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만 선화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당신이 매매춘을 악으로 규정할 때 어떤 경우에도 선화는 구원될 수 없다. 한번 걸레는 영원한 걸레다. 한 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다. 선화와 한기가 결혼해서 잘먹고 잘살았다 해도 과거에 창녀였다는 굴레는 영원히 그녀를 괴롭힌다.
고로 진정한 구원은 선화가 매매춘을 버리므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매매춘에 편견을 가진 바로 당신의 생각이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 미아리나 588이나 창녀를 찾아갔을 때 그 창녀가 "나 과거에 대학생이었는데"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녀를 대학생으로 대접할 것인가이다. 당신이 선화를 대학생으로 대접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선화에게 행복은 없다.
물론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렇게 해석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한기와 선화는 죽었고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 태어났다. 또는 한기와 선화는 매매춘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상상의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쁜 남자를 보고 퍼뜩 연상되는 것은 소설 이상의 날개(창녀와 기둥서방 이야기다), 퍼니게임(엽기적으로 관객을 고문한다), 파리 텍사스(이중거울이 등장한다) 들이다.
이 영화나 소설은 보는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분을 허물어버린다. 우리는 이런 훈련에 익숙해져야 한다. 훈련되지 않는 관객이 영화를 이해못하는건 당연하다. 나는 독일영화들에서 김기덕의 나쁜 남자를 연상시키는 몇 편을 본 적이 있다. 베를린영화제의 관계자들은 김기덕의 의도를 금방 알아챌 것이 틀림없다. 비슷한 영화가 이미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한기는 유리조각에 찔려 죽었다. 또는 사형당해 죽었다. 그 이전에 이미 목에 칼을 맞아 죽었다.(한기가 말을 못하는 것은 목에 칼침을 맞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한기는 죽었다.
선화는 빨간옷을 입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 찢어진 사진에서 확인 되듯이 죽은 사람은 선화다. 선화가 거리를 방황할 때 빨간옷을 입혀주는 여자가 그 죽은 여자다. 즉 선화는 이미 죽었음을 의미한다.
바다는 자궁을 의미하고 자궁은 재생을 의미한다. 부활이다. 한기와 선화는 죽고 난 다음 부활한다. 아기다.
바닷가 마을은 창녀에 대한 편견이 없는 순수한 곳을 뜻한다. 그곳은 성의 독점도 없고 결혼제도도 없는 원시의 마을이다. 즉 매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이를테면 한기와 선화는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외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한 한기와 선화는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가 없다.
김기덕감독의 의도는 한기와 선화의 해피엔딩은 이 영화의 관객들이 매매춘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버리므로서 달성된다는 의미다. 즉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매매춘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만 선화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당신이 매매춘을 악으로 규정할 때 어떤 경우에도 선화는 구원될 수 없다. 한번 걸레는 영원한 걸레다. 한 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다. 선화와 한기가 결혼해서 잘먹고 잘살았다 해도 과거에 창녀였다는 굴레는 영원히 그녀를 괴롭힌다.
고로 진정한 구원은 선화가 매매춘을 버리므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매매춘에 편견을 가진 바로 당신의 생각이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 미아리나 588이나 창녀를 찾아갔을 때 그 창녀가 "나 과거에 대학생이었는데"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녀를 대학생으로 대접할 것인가이다. 당신이 선화를 대학생으로 대접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선화에게 행복은 없다.
물론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렇게 해석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한기와 선화는 죽었고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 태어났다. 또는 한기와 선화는 매매춘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상상의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쁜 남자를 보고 퍼뜩 연상되는 것은 소설 이상의 날개(창녀와 기둥서방 이야기다), 퍼니게임(엽기적으로 관객을 고문한다), 파리 텍사스(이중거울이 등장한다) 들이다.
이 영화나 소설은 보는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분을 허물어버린다. 우리는 이런 훈련에 익숙해져야 한다. 훈련되지 않는 관객이 영화를 이해못하는건 당연하다. 나는 독일영화들에서 김기덕의 나쁜 남자를 연상시키는 몇 편을 본 적이 있다. 베를린영화제의 관계자들은 김기덕의 의도를 금방 알아챌 것이 틀림없다. 비슷한 영화가 이미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