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영화는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고 주인공은 그 문제를 해결해보인다. 이것이 영화의 공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주인공이 악당을 죽인다. 악당을 죽이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공공의 적'을 죽여버리면 범죄가 사라지는가? 소매치기의 손은 잘라버리고, 강간범을 거세해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런 짓 잘하는 집단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들이다.

가난한 사람을 다 죽여버리면 가난문제도 해결되겠네? 거짓말이다. 대부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는데 영화감독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며 얼렁뚱땅 극을 끝낸다.

김기덕은 사창굴이라는 답이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를 해결해보인다. 선화는 사창굴의 존재를 무시하고 사는(마치 이나라에 사창굴이 없는 듯이 잊고 생활하는 보통사람들) 당신이다. 한기가 선화에게 사창굴의 존재를 보여준다. 선화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천만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창굴이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는데, 선화가 다시 대학생이 된데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이 문제는 누구도 풀수 없다. 답이 없다. 어쩔 것인가?

우리는 그 사창가가 이나라에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모른척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나 한기와 선화는 트럭을 타고 쫓아와서 "사창굴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데모를 한다. 누구도 도망가지 못한다. 진실 앞에서는.

※ ※ ※ ※ ※

영화의 절반은 감독의 재능으로 만들어지고 나머지 절반은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자신이 감독이라 생각하고 보면 두배로 즐겁다.

람보는 과연 그 많은 베트콩들의 총알세례 속에서 살아남았을까? 천만에! 람보는 죽었다. 람보가 살았다는 설정은 그 감독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우리가 감독의 구라에 십분 동의해줄 필요는 없다.

그렇다. 그건 걍~ 구라일 뿐이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맥머피는 죽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맥머피는 죽었지만 죽은 맥머피가 붉은 인디언추장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추장은 정신병동을 탈출한다.

모든 영화는 구라다. 우리는 감독의 구라에 순순히 속아줄 필요가 없다.

"그래 감독 네까짓게, 또 어떤 새롭고 기발한 방법으로 나를 함 속여넘겨 보겠다는 거야?"

이런 삐딱한 자세로 나는 불량관객이다. 감독은 일단 사고를 쳐보여야 한다. 내 흥미를 끌만큼 대단하게 구라를 치고 나서야 한다. 약소하게 은행이나 한번 털어보세! 이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당차게 나가야 한다.

문제는 오사마리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은 잘하는데 오사마리가 안되니 문제다. 일 벌이기는 쉬운데 수습을 못한다. '2009로스트 메모리즈' 안봐도 뻔한게, 영화평 나오는 것이.. 초반 시작은 잘 넘어가는데, 중반부터 길을 잃고 헤매더니 막판에 타임머신 등장하고.. 놀고있네~ 애들장난이 되어버렸다나 어쨌다나. 오사마리를 몬하고 있는거다.

물랭루즈는 공들여 잘만든 영화인데 어떤 평론이 이렇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니?"

그렇다. 이 영화 또한 오사마리가 안된거다. 결말이 없다. 흐지부지다. 보통은 파이란처럼 주인공을 죽여버린다. 아니면 적을 죽여버린다.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이야기가 끝날 수 밖에. 그러나 허전하다. 왜 죽어야만 하는지?

영화는 길에서 시작해서 길에서 끝난다. 이게 정석이다. 길은 순환을 의미한다. 1사이클의 기승전결이 끝나고 다시 시작으로 돌아와야 완결이 되는거다.(다시 원점으로 돌아와버렸기 때문에 끝이 날 수 뿐이다)

말하자면 허접한 결말이란 것은, 꼭 감독이 설정하는 그런 식으로 끝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거다.

나쁜남자는 원래 오사마리가 안되는 거다. 한기는 나쁜넘인데 벌받아야 하고, 죽어야 한다. 선화가 설사 제자리에 돌려보내졌다 해도 본전이다. 뭐 얻은게 없잖는가 말이다. 10원 생긴 것이 없다. 이거 밑진 장사다.

영화의 규칙은 그렇다. 어떤 인간이 다가와서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야 내 이바구 한자리 하까?" "좋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지? 내가 그 인간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는 나와 상관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귀를 기울이는 거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는 죄를 짓고 감방에 잡혀왔다. 꾀를 낸 것이 정신이상자 행세를 해서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미친 사람들만 있는 곳에 홀로 미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여기서부터 권력에 대한 은유다. 정신병자들로 이루어진 질서에 안티가 걸어진다. 말하자면 안티조선 같은 이상한 넘이 하나 나타나서, 남의 영업에 훼방을 놓고 있는 거다. 주류 질서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리력 행사이다.

맥머피는 사실상 살해당한다. 아니 약을 먹여 정신이상자로 만들어진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이상자여야 한다. 이것이 정신병동의 규칙이다. 정신이상자였던, 아니 정신이상자인척 했던 붉은 추장이 돌연 깨닫는다.

추장은 맥머피를 살해한다. 아니 이미 정신이 살해된 맥머피의 치욕을 가려준다. 그리고 떠난다. 정신병원을 부숴놓고 간다. 여기서 맥머피는 죽었지만, 추장을 통해서 부활하고 있다. 즉 주인공은 죽었지만, 관객을 통해서 부활하는 거다.

그 즈음에서 맥머피의 이야기가 추장의 이야기로 되고, 관객의 이야기로 되고, 나의 이야기로 된다. 영화는 전염된다. 감독에게서 관객으로, 주인공에서 엑스트라에게로. 전염이다.

맥머피는 '반역'을 전염시켜놓고 죽었다. 맥머피는 죽었지만 반역은 남았다. 나에게 전염으로 남았다.

의미..!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의미다. 미학적 완결이란 결국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하는가이다. 말하자면 감독이 손에 쥔 바통을, 주인공에게 넘기고, 주인공의 연기에 의해 다시 관객에게로 넘겨주는데 성공하는가이다.

우리는 인간 맥머피 사망사건에 관심이 없다. 그건 맥머피의 문제일 따름이다. 나하고 상관이 없다.

아니라고 말한다. 상관있다고 말한다. 그 정신병원은 사실은 대한민국이라고 말한다. 맥머피가 저항의 정신을 붉은 추장에게 넘겨주었듯이, 그 맥머피의 정신병원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그 붉은 추장의 탈출에서 나의 탈출로 바통을 넘겨준다고 말한다.

의미.. 그것은 바통을 물려받기다.

나쁜남자의 그 벤치가, 실은 내가 앉아있는 이 벤치라고 김기덕은 말한다. 나쁜남자는 그 바통을 내게 넘겨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거절한다.

"한기야! 그건 너의 문제야. 난 아냐. 난 착한 남자라구"

김기덕이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이미 같은 굴뚝 속의 청소부신세라고 김기덕은 말한다. 이 검은 굴뚝 안에서 누구도 흰 얼굴로는 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사창굴 안에서는 누구도 한기와 선화일 수밖에 없다고 김기덕은 말한다.

한기는 한기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사창굴 안에서 한기로 만들어졌을 뿐이라고 김기덕은 말한다. 그 말이 맞다. 그렇다. 내가 한기이고 선화이다.

내가 그 바통을 넘겨받을 때까지, 한기와 선화는 트럭을 타고 쫓아다니며 이동매춘이라는 데몬스트레이션을 멈추지 않을 태세이다. 별수없다. 받아야쥐!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구원은 무엇인가? '허무'로부터의 구원이다. 인생은 의미가 없다. 삶이 죽음보다 낫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행복이 불행보다 낫다는 근거는 없다. 공주님이 창녀보다 낫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원이란 의미의 바통을 전달하고 전달받음이다. 내가 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신이라는 연출자에게서 넘겨받은 대사와, 연기라는 바통을 잘 넘겨주고 전달하므로서, 내 역할을 다하는가이다. 그러므로 구원된다. 거기서 모두는 평등하다.

비참한 존재..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신이 내게 넘겨준 의미의 바통을 물려받아, 또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비록 창녀의 삶이라도 제왕의 삶보다 찬란하다. 고로 인간은 평등하다.

그 바통을 넘겨받을 사람이 필요하다. 내게도 관객이 필요하다.

맥머피는 어떤 정신병동에 수감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정신병동에 수감된거다. 미국은 통째로 정신병동이다. 한국 또한 정신병동이다. 가장 지독하게 미친 놈이 대통령이 된다.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몽땅 다 미쳤다. 간호사도 미쳤고, 병원장도 미쳤고 대통령도 미쳤다.

만약 미치지 않은 순박한 인간이, 실수로 틈입해 들어왔다면 일단은 그놈을 미치게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하나의 거대한 사창굴이다.

"아니라고 말할 자 누구인가?"

나는 김기덕의 이런 단호한 도발이 통쾌하다. 대한민국을 통째로 사창굴이라고 말해버리는 김기덕의 똥배짱이 참말이지 통쾌하다. 누구도 그 사창굴에서 빠져나갈수 없다는, 트럭을 타고 지옥 끝까지 쫓아다니겠다는 단호한 차단이 또한 통쾌하다.

그대는 그 사창굴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대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그대의 따뜻한 가정으로, 그대의 은밀한 침실로 달아나려 하지만, 한기는 트럭을 타고 뒤쫓아온다. 그대 숨을 수 없다.

한기는 사창굴을 떠난다. 그리고 변방에서 또다른 사창굴을 건설한다. 나는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떠난다. 변방에서 나만의 대한민국을 건설한다. 그래봤자 그곳은 또다른 사창굴에 불과하다지만.

조선일보는 하나의 거대한 포주다. 안티조선은 조선일보라는 포주의 손아귀를 탈출하여 그들만의 사창굴을 만든다. 그래봤자 새끼포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가? 아니다. 있다.

탈출! 그것이 희망이다. 그렇다. 인간의 삶은 그러하다. 우리는 무언가 바꾸어놓으려고 하지만, 바꾸어놓고 보면 또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 우리는 전두환을 물리쳤고, 김영삼을 퇴출시켰지만, 김대중이라는 또다른 포주로 문패만 바꾸어달았을 뿐이다.

희망은 없는가?

아니다. 희망은 있다. 부단한 판갈이 그 자체가 희망이다.

혁명.. 우리가 원하는 것은 혁명이다. 그 혁명 다음에는? 그 혁명을 또 혁명하는 것이다. 혁명은 계속된다. 인간은 가고, 주인공은 바뀌고, 엑스트라도 떠나지만, 의미라는 이름의 바통은 남는다. 그 바통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고 또 떠나고 또 돌아오고 삶은 반복된다.

구원은 거기에 있다. 그대 자신이 그 탈출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 주인공이 될 기회 앞에서 평등한 것 말이다.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바통을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대의 삶이 유의미하여진다면 그것이 곧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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