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이렇게 구상하고 있는데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명쾌하게 답해주는 철학의 질문 백 가지 구조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모태가 있다. 소스가 있고 출전이 있다. 절대경로와 상대경로가 있다. 이는 하나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두 조건이다. 절대경로는 ‘나온 곳’이고 상대경로는 ‘사는 곳’이다. 볼펜은 어디에서 나왔나? 공장에서 나왔다. 절대경로다. 볼펜은 어디에서 사는가? 종이 위에 서식한다. 이건 상대경로다. 어떤 것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나온 곳과 사는 곳’ 이 둘을 해명해야 한다. 부모로부터 내려온 바 탄생과정은 절대경로다. 선천적 조건이다. 반면 나의 파트너, 직업, 신분 따위 후천적 조건은 상대경로다. 출생지와 서식지. 반드시 그것이 있으며 없는 경우는 없다. 이 글을 읽는 방법 예수 형님 말씀이 다 맞는건 아니지만 우리가 님의 구사한 무수한 언어들 중에서 한 두 가지를 붙잡고 반박하는 짓 따위는 의미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많은 언어들 전체를 총괄하는 그 무엇이다. 예수의 인생을 관통하는 그 무엇을 포착하기다. 예수의 모든 말들을 한 줄에 꿰어내게 하는 일관성을 찾아내기다. 예수의 말들 안에서 ‘내적 정합성’이 성립하느냐가 중요하다. 무모순성 말이다. 예수 본인의 말과 말이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철학의 백문백답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이 답변들 중 한 둘을 반박할 수 있다. 의미없다. 백가지 답변을 관통하는 하나를 발견하기 바란다. 전부 한 줄에 꿰는 그 무엇을 획득하기 바란다. 물고기를 챙겨가지 말고 낚시대를 얻어가기 바란다. 단어에 속지 말고 그 이면의 의미를 찾기 바란다. 의미에 휘둘리지 말고 배후의 가치를 보라. 가치에 빠져들지 말고 그 뒤의 개념, 그 개념 뒤의 원리를 포착하기 바란다. 그 원리를 자기 안에 세팅하면 곧 천하는 내것이 된다. 셈이 어려워도 일단 계산기를 손에 넣으면 마음이 든든해지듯이. 철학의 그림 10가지 철학의 100어를 하나의 커다란 생각나무로 그린다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따라 뿌리 줄기 가지 꽃 열매로 표현한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펼쳐짐이다. ● 그림 1, 자유의 나무 뿌리는 존엄 기둥은 자유 가지는 사랑 꽃은 성취 열매는 행복 ● 그림 2, 사상의 나무(사상은 문명의 디자인, 기획안, 설계도다) 법가의 집단중심 기획 유가의 사회관계 기획 도가의 개인중심 기획 소크라테스의 체계 시스템 석가의 맞은편에서 집단, 사회, 개인을 통일하는 시선. ● 그림 3. 세계관의 나무 세계관-법가.. 세계관에 눈 떴지만 제대로 된 세계관은 없다. 가치관-공자..가치관에 눈 떴지만 제대로 정립된 가치관은 없다. 인생관-노자.. 인생관에 눈 떴지만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이기주의다. 미학-보수우파.. 그들은 역사에 눈 떠야 한다. 역사-진보좌파.. 그들은 미학(깨달음)에 눈떠야 한다. ● 그림 4. 개념의 나무 사실 의미 가치 개념 원리(현대성은 스탠더드 곧 원리에서 모더니티 곧 사실로 전개한다.) ● 그림 5. 과학의나무 가설(패턴확인) 실험(소스확보-한약의 잡다한 부산물은 제외) 검증(재현) 논문(전파) 리뷰(피드백) ● 그림 6. 이념의 나무 자본주의 말과 사회주의 기수 진보는 그 말과 기수가 가는 방향 ● 그림 7. 심(心)의 나무(마음- 심 - 네거리-센터, 중앙과 변방-소통의 의미) 모든 방해자는 네거리로 모여들어 발목을 잡고 모든 대안의 가능성은 또다른 네거리로 뻗어나가면서 활로를 연다. 모든 진보는 네거리 길목, 반도, 섬, 거점, 항구에서 일어나며 그 항구는 끝없이 새로운 배후지를 찾아 교체된다. 정신이란 무엇인가?(내부통제와 외부연결) 심은 주류(센터)와 비주류(외연)를 구성한다. 진보는 외연을 얻은 자가 센터를 치는 즉 변방에서 부는 바람이 주류를 치는 형태로 일어난다. 항상 그렇다. ● 그림 8. 실존의 나무 존재-소속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 존재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안에서 외력의 개입으로부터 자기를 보존하고 외계를 향하여 연출하고 전개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 그림 8. 아우라의 나무 레이다, 루트, 마차바퀴살, 후광,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과정. 서권기 문자향. ● 그림 9. 정언명령의 나무(의하여와 위하여, 합리주의, 보편성, 이성) 존재와 인식, 근거와 주장,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언어란 무엇인가?) 정언명령.. 보는 사람이 없으니 살인해도 된다? 모든 사람이 모든 장소에서 그렇게 해도 되는가? 그건 아니다. 모든 경우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면 정답이 아니다. 이는 부분을 얽어 전체로 보는 즉 합리주의 태도이다. 그것이 윤리다. 모든 경우에 맞으면 의하여, 특수한 경우에 맞으면 위하여다. 모든 경우를 찾아가는 것이 동사가 명사를, 술어가 주어를, 진술이 전제를, 주장이 근거를, 인식이 존재를 찾는 것이다. ● 10. 일원론의 나무-실존주의, 현상학은 일원론이다. 칸트철학, 헤겔철학, 교부철학은 이원론이다. 예수는 일원론이다. 본질의 추구는 이원론이다. 일원론은 실천의 가르침이다. 교종은 이원적이며 선종은 일원적이다. 이원론은 본질에서 계급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신분차별이다. 믿으면 신분이 올라간다는 거다. 귀족과 결혼하면 신분이 올라가므로 믿음을 일종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원론은 운명론이다. 중세 암흑시대에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므로 필연 이원론적이 된다. 일원론은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과학의 믿음에서 얻어졌다. 실천이 중요시될 때 실천의 앞단계가 뒷단계를, 전건이 후건을 결정하므로 일원론이 요청된다. 실천하지 않고 입으로 떠드는 자들은 전부 이원론 경향을 보인다. 모든 가르침은 일원론으로 시작해서 이원론으로 갔다가 다시 일원론으로 돌아온다. 백문백답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사회적 의사결정 단위 중 하나다. 관계는 다섯이 있다. 혈연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남남관계다. 이 외에 다른 관계는 없다. 다섯 관계가 얽혀 하나의 사회적 존재의 단위를 이룬 것이 가족이다. 관계는 확장된다. 회사에도, 사회에도, 친구사이에도 국가들 사이에도 그것이 있다. 이 가족이 토대가 되어 관계는 확장된다. 인간은 그러한 관계의 확장에 의해 더 큰 존재로 성장한다.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는 짝짓기에 따라 기대되는 선한 효과다. 가치는 짝을 짓는다. 짝을 잘 만나면 가치가 상승하고 짝을 잘못 만나면 가치가 하락한다. 짝짓기에 따라 가치는 보존되기도 하고 상승하기도 하고 하락하기도 하며 순환되기도 한다.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가치관이란 누구와 어떻게 짝을 지을 것인가다? 인생은 무수한 짝짓기의 연속이다. 어려서는 친구가 짝이 되고 커서는 급우가 짝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는 이성이 짝이 되고 직업이 짝이 되고 정당이 짝이 되고 돈과 집과 자식이 짝이 된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그 여럿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든 일관되게 선택해야 한다. 이랬다 저랬다 해서는 비효율적으로 되어간다. 앞에 오는 것이 뒤에 오는 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첫 단추를 보고 두번째 단추를 결정해야 한다. 가치관은 인생관, 세계관과 연동되어 판단해야 한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컨셉은 여러 생각들을 한 줄에 꿰어낸 것이다.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한다면 어떤 것을 구성하는 부분을 하나의 토대 위에서 꿰어내어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사태를 장악하고 상황에 대응하고 부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사회적 행동단위를 정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을 만든다. 법률, 소유권, 제도 앞에서 개인의 입장을 확정하기 위하여 여럿으로 구성된 그룹을 1로 보는 것이다. 삼성주식회사 종사자가 10만명이라도 법 앞에서는 1인으로 취급되는 것이 법인이. 마찬가지로 가족 구성원이 열이든 백이든 대외적으로는 1로 대표된다. 이에 따라 얻어지는 이익과 손해가 있다. 이익이 더 크다고 믿는 자들은 일제히 결혼하여 연말정산때 감세혜택을 받는다. 학생들은 자취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계급이란 무엇인가? 의사결정의 편의를 추구하면 계급이 발생한다. 의사결정 구조 안에 들어가는 인원은 언제나 소수다. 귀족은 외국과 연계되어 있다. 계급은 철폐되어도 어떤 정치적 의사결정은 소수에 의해 독점된다. 배제는 결정을 신속하게 한다. 이러한 편의가 극단으로 가면 계급이 만들어진다. 계급을 해체하는 것은 진보다. 계급은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사회를 안정시키지만 사회의 광범위한 혁신은 계급을 무너뜨리게 한다. 모든 진보하지 않는 곳에 계급이 만들어진다. 어떤 조직이든 오래묵으면 의사결정의 필요성이 감소한다. 창업단계에서는 많은 의사결정이 있고 되도록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하지만 안정되면 같은 업무가 반복되고 많은 사람들이 의사결정에서 배제된다. 군대조직처럼 같은 업무가 반복되면 극단적인 계급사회가 생겨난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고통 그 자체는 그다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호흡을 교란한다. 숨쉬지 못하므로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고통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이다.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고통을 즐기는 것이다. 고통이 다른 일을 방해하므로, 그 다른 일을 포기하고 고통 자체와 친해지는 것이다.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는 고통과 맞서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고통인채로 내버려두고 계속 가는 것이다. 발바닥이 아픈 마라토너가 계속 달리듯이.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더 큰 단위, 제 3자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더 큰 단위로 나아갈 때 고통은 해소된다. 작은 손가락의 아픔은 큰 엉덩이의 아픔이 상쇄하고 작은 내 안의 슬픔은 큰 나라의 슬픔에 의해 희석된다. 더 큰 문제와 맞설 때 고통은 눈녹듯이 사라진다. 공(空)이란 무엇인가?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정보로 변환될 수 있다. 물질에 대하여는 에너지가 공이고, 에너지에 대하여는 정보가 공이다. 공자는 누구인가? 엄격한 법률은 전통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북방 유목민의 것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개인주의가 강조된다. 사회의 의미를 집단과 집단의 법률, 제도에서 두는 북방 유목민에 대하여 가족과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에서 찾는 유교의 태도그리고 철저히 개인과 내면의 욕망에서 찾는 도교의 태도가 있다.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국가는 소집에 의해 탄생한다. 사회계약론은 허상에 불과하다. 국가는 제도나 약속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소집에 의해 탄생한다. 고원의 쿠릴타이와 같다. 긴장이 조성되면 젊은이들을 불러모은다. 소집에 응하면 시민이 되고 응하지 않으면 반역자가 된다. 국가는 그 현장에서 힘의 충돌, 시민의 권리확인에 의해 발생한다. 시민의 무장봉기에 의해 국가가 탄생한 것이 공화국이다. 군주국은 정복에 의해 탄생한 것이며 이는 소집에 의해 탄생한 초기의 국가가 확대된 것이다. 공화국은 정복에 의해 변질된 군주국이 산업화에 의해 국가정체의 변환이 일어나서 소집상태로 되돌려진 것이다. 원시 부족국가와 고대국가, 봉건국가, 근대국가는 국가개념이 다르다. 생산력이 변하면 생산관계가 변하고 생산관계가 변하면 국가정체가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국가의 국가정체는 공화국 뿐이다. 영국 등 일부 전제국가의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산업화 이전시대의 관습을 보존한 외양의 전제국가일 뿐 현대사회에서 산업화라는 생산관계의 본질을 반영하는 국가정체는 공화국이 유일하다. 민주주의는 소집이라는 국가정체를 정치에 반영한 제도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인간이 자연과 대결하여 얻은 지식을 축적하는 학문의 시스템이다. 과학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논문과 리뷰, 가설과 실험과 검증으로 성과를 축적하며 가지를 쳐서 전체가 하나의 중심에 모이고 사방으로 망라하게 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철학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관점이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에 소실점이 있다. 모든 상황에 인물의 움직이는 동선이 있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계 전체를 통일하는 어떤 통일성이 있다. 그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바라봐야 한다. 그 소실점은 여러개가 있다. 관점은 어느 소실점을 바라보는가이다. 대칭이 있고 포지션이 있고 주도권이 있다. 높은 관점이 있고 낮은 관점이 있다. 도자기가 하나 있으면 도자기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둘 있으면 도자기의 용도를 생각하고 셋 있으면 형태를 생각한다. 어느 부분을 보는가이다. 사람이 하나 있으면 개가 아니라 사람이군 둘 있으면 남자가 아니라 여자군 셋 있으면 못생긴게 아니라 잘생겼군 한다. 대상의 구조에 따라 관객의 개입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관조란 무엇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본다. 움직임을 본다. 자신이 개입해 있다고 믿으면 상황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에 올라타고 있으면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광기란 무엇인가? 이성의 훈련을 거치지 않아 스트레스 관리가 안되므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해서 사건을 단순화 하려는 원시의 본능을 발동시킨다. 아기는 소리쳐 우는 방법으로 개인의 문제에 집단을 끌어들인다. 어른은 미쳐 날뛰는 방법으로 일어난 사건이 자기선에서 대책을 세울 수 없음을 알린다. 미친짓을 하면 집단이 개입하여 사건을 해결해준다. 정신적 미성숙자들은 광기를 발동시켜서 지성인집단이 사건에 개입하도록 알리는 역할을 한다. 지성인이 없으면 모두 죽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나치의 광기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야만인에 지나지 않는 자신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난폭한 방법으로 자구의 문명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까무러치거나 울부짖는 방법으로 개인의 문제에 집단을 개입시키는 것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획득한 원시의 본능이다. 쥐는 족제비에게 쫓기면 기절한다. 기절한 척 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기절한다. 광기는 기절의 전단계다. 연관어 파시즘. 구조란 무엇인가? 패턴 포지션 밸런스 조직 시스템의 상호관계다. 패턴은 닮음이다. 패턴이 둘 집적하면 공격과 수비로 역할을 나누니 포지션이다. 포지션이 둘 집적하면 좌우의 균형을 맞추니 밸런스다. 밸런스가 둘 집적하면 어미와 자식으로 세력이 나눠지니 조직이다. 조직이 둘 집적하면 자신을 복제하니 시스템이다. 이로서 구조는 우주의 만유를 짓는 벽돌 역할을 한다. 이 다섯으로 우주의 만유를 모두 만들어낸다. 국가란 무엇인가? 전쟁을 결정할 수 있는 의사결정 단위가 국가다. 국가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1단위다. 언어의 차이와 지리적 격리 관습과 종교, 이념, 전쟁 등의 이유로 다양한 집단의 정치적 의사결정단위가 생겨난다. 이는 개인에서 가족, 부족으로 발전하다가 현대에 와서는 주로 전쟁과 외교의 단위가 국가의 단위로 되었다. 국가의 의사결정에서 가장 비중이 큰 문제는 전쟁이므로. 근대국가는 산업화를 반영하는 구조이므로 공화정체를 획득하게 되었고 공화정체는 소집원리에 기반하고 있으며 소집원리를 반영하는 정치시스템은 민주주의가 유일하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는 저울이 가지는 힘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다고 했다. 어떤 일의 전개에서 시간적 앞부분의 결정에 뒷부분이 연동되는 형태로 사건이 점차 커진다면 사건의 초기단계 곧 앞부분에 개입하여 호미 1로 막을 일을 뒷부분에 개입하여 가래 100으로 막아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이때 호미 1이 가래 100에 대하여 백배의 권력이 있다. 어떤 회사의 의사결정이 사장≫임원≫간부≫말단 순서로 진행된다면 이 순서대로 권력이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바보들의 스트레스 회피심리가 근본주의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회피하는 본능이 있다. 공부해서 서울대 들어가라면 하지 않지만 그 열배로 힘드는 하루 3천배씩 3년간 하라면 할 사람 많다. 단순한 규칙을 선호한다. 그들은 몸에 상처를 내거나 사막에서 40일간 물을 먹지 않거나 등 극단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정신의 긴장을 겪느니 육체적 고통을 선택한다. 그들은 즐겨 바보가 된다. 본능에 충실하다가 역할극에 중동된 그들은 극단에 있어야 좋은 보직을 얻는다고 믿는다. 기(氣)란 무엇인가? 기(氣)는 일단 없다. 성리학에서 이는 수학적 원리고 기는 과학적 기능이다. 이는 에너지의 원리고 기는 에너지의 작용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주로 논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나 전기현상을 보고 기의 존재를 확신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라는 소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의 언어로 소통하여 파악할 수 있지만 인간 수준을 넘어서 더 높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다. 존재자체의 작동과정에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방법으로만이 깊은 수준의 소통은 가능하다. 꿈이란 무엇인가? dream은 데리고 가는 것, 꿈은 엮는 것. 실을 꼬듯이 드라마를 꼬는 것이 꿈이다. 나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주도권을 의미한다. 그것은 관계 속에 있다. 이의 전제는 나의 몸 뿐만 아니라 나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 전체가 나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내의 존재가 실제보다 크고 남과 겹쳐 있으므로 나의 통제권 범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나르시시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3류 지식인의 자기연민이다. 한국문학은 대부분 뮤능한 지식인의 자기연민을 주제로 삼는다. 홍상수 영화는 어벙한 대학생이 선후배 앞에서 치사한 짓을 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산업화시대에 소외받은 지식인들은 그래도 내가 우월하다는 식의 위안을 받고 싶어한다. 현실도피의 일종이다. 한국 특유의 부모의 과보호에 의한 응석받이 현상의 일종이다. 그들은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도 그 시나리오를 쓴 작가도 그 영화를 보는 관객도.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은 자연의 본성이라 할 위대한 낳음이다. 노동은 단순반복을 뜻하는 경우가 많지만 진실로 말하면 노동은 창의적인 과정이다. 기계가 노동을 대체할 수록 인간의 결정횟수는 증가한다. 자전거는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야하므로 많은 노동을 하지만 대신 뇌는 휴식한다. 자동차는 노동량을 줄이지만 대신 더 많은 판단과 조작, 결정을 내려야 한다. 노동은 총체적으로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다. 육체노동은 기계에 맡기고 인간은 점점 더 많은 판단과 결정들을 내리게 된다. 일이 진행되는 순서에서 뒷단계에 개입하면 더 많은 노동과 힘이 들지만 앞단계에 개입하면 더 적게 개입하는 대신 더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노자는 누구인가? 노자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사회의 의미를 뭉쳐진 집단의 힘이 아니라 자연의 완전성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노자의 입장이다. 공자의 유가는 사회관계를 통하여 그것을 얻는다. 법가는 통제된 집단의 완력에서 그것을 얻는다. 노자의 도교는 공자의 사회관계 강조, 법가의 집단의 완력 강조와 달리 개인의 입장을 강조한다. 그런데 개인은 힘이 없으므로 노자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그것을 얻고자 했다. 진정한 것은 노자에서 시작되었다. 공자의 유가는 2차적인 힘이고 법가의 제도는 3차적인 힘이다. 2차, 3차로 갈수록 인간은 막다른 곳에 몰린다. 인간이 파괴되어 위기에 공자의 방법을 궁여지책으로 쓰고 더욱 막장으로 몰렸을 때 법가의 방법을 쓴다. 오늘날 사회에서 예가 강조되고 법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파괴가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단(丹)이란 무엇인가? 단은 황화수은으로 부적을 만드는데 쓰는 주사다. 건물에 주칠을 하면 수은의 독성때문에 벌레가 꾀지 않는다. 또 색깔이 피빛이므로 고대의 방사들은 이를 생명의 원소라 여겼으니 여기서 연단술이 나왔다. 수은을 정제하면 묘기를 부릴 수 있는데 금속이면서 액체상태라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고대인들은 여기서 생명의 영감을 받았다. 불로장수를 꾀하여 연단술을 시행한결과 황제들은 모두 죽었다. 5대10국의 혼란기가 계속되었다. 단전호흡이란 무엇인가? 질식상태에서 환각을 체험한다. 호흡을 멈추면 긴장이 이완되고 환각을 보게 된다. 단전호흡은 인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건강을 꾀하는 방편이다. 부탄가스는 환각작용이 없는데도 불량10대가 부탄가스를 부는 이유는 질식상태에서 환각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환각체험을 깨달음이라고 우기는 자도 있다. 도(道)란 무엇인가? 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한 줄에 꿰어낸다. 길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잡한 이치를 전체를 한 줄에 꿰어서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도다. 예컨대 백개의 구슬을 운반해야 한다면 실로 구슬을 꿰어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다. 이때 꿰어진 실이 도다. 법(法)은 수(水)+거(去)로 물이 가는 길이니 필연법칙이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가기 때문이다. 도는 인간이 가는 길이니 인간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도는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판단이며 따라서 세계의 기획, 21세기의 디자인, 신문명의 인테리어. 도는 세상을 바꾸는 기획이며 세상을 바꾸려면 개인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 기획은 자본의 발달과 함께 해야 하므로 인위로 안 되고 무위로 가능하다.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의사결정의 중심이다. 마음은 머금는다는 뜻이다. 뜻을 머금어 예비하는 것이다. 마음은 심이고 심은 중심이고 센터다. 이심 전심은 센터에서 센터로, 서버에서 서버로, 핵에서 핵으로, 네거리에서 네거리로 통하는 것이다. 마음의 의미는 통제가능성에 있다. 참된 마음은 본능을 극복하고 우주와 교감한다. 자연의 본래와 소통한다. 마음이 네거리라면 온갖 사람들이 네거리로 모여드는 것이 본능이다. 그 네거리에서 교착되고 만다. 본능에 지배될 때 마음은 교착된다. 인간은 우울해지고 슬픔에 빠지며 희노애락의 감정에 지배된다. 그 네거리에서 교통정리에 성공하여 사방으로 뻗어가는 것이 우주와의 교감이다. 지평을 열어젖힘이다.
마음은 네거리며 소통가능성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반전은 마음이라는 네거리에서 일어난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은 자기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 고도의 잔머리다. 무의식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의식이다. 인간은 익숙한 일은 언어로 판단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은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 부분은 자각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뇌 안에서 복잡하게 계산된다. 무의식적인 행동도 알고보면 고도의 전략 가운데 있다. 갑자기 화를 내거나 집단의 광기를 부추기는 행동도, 위기를 심화시켜 집단을 긴장시키고 개인의 일에 집단을 개입시키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이 감추어져 있다. 타인을 개입시킬 때 판단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이 전략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나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이 전략을 획득해왔다. 궁지에 몰린 생쥐의 기절하기 전략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제로 쥐는 그 전략으로 죽은체하여 여우를 속여넘기고 살아남은 것이다. 무의식은 일종의 심리적인 기절상태와 같다. 진화과정에서 획득한 잔머리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물질은 에너지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은 외부에서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것, 외부의 작용에 반작용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공간에서 자기를 보존하고 시간에서 자기를 전개하여 낸다. 외력의 개입으로부터 자기의 영역과 정체성을 지킨다. 미(美)란 무엇인가? 미는 인간의 주의가 끌리도록 세팅된 자연의 질서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특정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자극에 반응하도록 세팅되었다. 이 원리를 활용하여 사회적으로 인간을 반응하게 할 수 있는 여러 테크닉들이 개발되었다. 얕은 수준에서 폭넓게 반응하는 미와 깊은 수준에서 협소하게 반응하는 미가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생산력의 전개에 따른 지배권 행사다. 공화정체는 사회계약이 아니라 소집원리에 의해 탄생한다. 고대사회에서 그것은 무장한 시민 사이의 조직된 힘의 충돌이다. 산업화 이후 현대사회에서 시민의 무장된 힘은 생산력에 대한 지배권으로 대체되어 있다. 인간은 인명의 출산과 노동에 의한 재화의 생산 및 지식의 생산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생산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다. 이를 사회적으로 연장하면 인권이 된다. 그 개인의 인권이 널리 소집된 것이 민주주의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지정학적 구도에 따른 전략의 차이가 민족성을 형성한다. 진화과정에서 획등한 형질이 있다. 덩치가 큰 포유류의 경우 대륙에서는 몸집을 크게 하는 전략이 먹히고, 섬에서는 작게 하는 전략이 먹힌다. 반면 덩치가 작은 동물은 섬에서 오히려 커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 아일랜드 룰이라 한다. 이는 진화과정에서 얻은 환경적응의 결과다. 야구라면 빅볼전략과 스몰볼 전략이 있고 바둑이라면 세력전략과 실리전략이 있고 권투라면 아웃복싱 전략과 인파이팅 전략이 있다. 미학적인 양식에서 집단은 어느 기준에 맞추어 전략적으로 행동하려는 특성을 나타낸다. 그 때문에 민족성이 있다. 민족은 언와 관습, 역사전통에 의해서도 성립하지만 그 기질은 주로 지정학적 특성이 낳는다. 북쪽의 어두운 지역은 우울하고 남쪽의 밝은 지역은 쾌할하다. 추운지역은 민첩하고 더운 지역은 느리다. 대륙지역은 몸집을 키우려 하고 섬지역은 몸집을 줄이려 한다. 고립된 지역과 개방된 지역의 특성도 다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전략을 사용하며 그 기준에 일제히 맞추기 때문에 민족성이 드러난다. 민중이란 무엇인가? 위기에는 집단이 단일체로 행동한다. people은 익명의 군중이지만 특정 환경에서 단일체로 행동할 때가 있다. 위기 때는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포지션에 따라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안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합리성이 규칙을 정한다. 위험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해결사 역할을 맡는다. 그룹의 가장 외곽에 있는 사람이 파수꾼의 역할을 맡는다. 포지션 원리에 의해 저절로 머리와 가슴과 몸통과 팔다리와 손발로 역할이 나눠진다. 역사의 변혁기에 민중의 위대성이 드러난다. 100만마리의 개미가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고 한마리의 동물처럼 행동한다. 5천만 국민이 하나의 목적을 파악하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하는 때가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전체과정에 대응한다. 일당보다 주급이 낫고 주급보다 월급이 낫고 월급보다 연봉계약이 낫고 연봉계약보다 결혼으로 파트너를 통째로 얻는 것이 낫다. 주고받는 거래의 횟수는 줄어들지만 대신 안정성은 더 커진다. 각종 사회보험이나 사회안정만이 그러하다. 덜 개입하되 오히려 근원까지 깊게 개입하는 것이다. 딱 한번 개입하되 인생전체를 걸어 베팅한다. 믿음이란 그렇게 일괄타결전략으로 오판의 확률을 낮추는 방법이다. 믿음은 인생을 통째로 걸고 딱 한번만 베팅하므로 최소 50프로의 승산이 있지만 불신은 경마장 도박과 같아서 딸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지만 길게 가면 결국 백프로 손실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거래횟수의 증가에 따른 거래비용의 증가, 그에 따른 불확실성의 증가, 리스크의 증가로 결국 완전 손실을 보게 된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자연의 합리성을 반영한다. 법(法)은 수(水)와 거(去)를 합친 글자이니 곧 물이 가는 길이다. 물은 항상 아래로 간다. 그러므로 법은 궁극적으로 자연법칙에 기초한다. 규(規)는 콤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린 것이다. 금을 그어놓고 금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 규다. 이는 자연에서 얻은 한 부분의 원리를 전체에 반영하는 것이다. 한번 작도한 크기를 반복사용하므로 효율성이 얻어진다. 법은 자연법칙을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데서 따른 효율성을 반영한다. 곧 합리성이 법의 궁극적인 근거다. 성문법은 사회가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말, 사회주의는 기수 진보는 그 말과 기수가 가는 방향, 보수는 그 말과 기수의 폭주를 감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보수를 말함이고 한국과 미국의 보수는 다르다. 미국의 보수는 갓 이민온 자의 정체성 찾기다. 한국보수 역시 625때 월남한 평양교회와 그 정서를 공유한 자들의 정체성 상실을 반영하고 있다. 먼저 정착한 자들은 확고한 정체성이 있으므로 리스크를 줄이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려고 한다. 뒤늦게 온 자들은 자리를 잡아서 정체성을 획득해야 하므로 무모한 모험을 하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보수가 제대로 된 보수이고 한국과 미국의 보수는 공격적 반보수적 보수다. 안정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보수심리가 아니라 전쟁을 책동하는 모험적인 꼴통보수다. 주류 비주류 관점에서 볼때 역사의 주류는 지식인 집단이며 거기서 소외된 졸부들의 참여욕구가 권력의지를 발휘한 것이 한국과 미국의 보수다. 즉 돈에 있어서는 주류이나 문화에서는 소외된 시골부자의 공격적인 행동이 보수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진보와 보수는 본래의 상궤를 벗어나 있다.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성 보편성과 일반성은 진리의 두 속성이다. 보편성은 어떤 하나의 검증된 이치를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고 일반성은 반대로 전체를 하나 안에 귀결하는 것이다. 아파트를 건축한다면 먼저 한 가구를 설계하고 이를 아파트 한 동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 보편성이다. 이때 전체가구가 하나의 복도, 하나의 출입구, 하나의 배관시설, 하나의 전기시설, 하나의 주차장, 하나의 비상구를 공유하는 것이 일반성이다.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고 일반성의 반대는 다양성이다. 보편성은 검증된 진리가 어느 지역(로컬 스탠더드)서도 통하는 성질이고 일반성은 어느 지역의 기준이 전체(글로벌 스탠더드)와 호환되는 것이다. 개별 컴퓨터가 인터넷망 하나에 접속되는 것이 일반성이고 하나의 윈도우를 모든 컴퓨터가 함께 쓰는 것이 보편성이다. 보편성은 1에서 다(多)로 가고 일반성은 다(多)에서 1로 간다. 진리는 이 두 방법으로 합리성을 창조한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내 안에는 내 존재가 없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내 앞에 펼쳐진 삶이고 본질은 내 이전에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종교에서 조달된다. 20세기에 와서 종교를 버리고 인간은 고아가 되었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단지 살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숭이였던 시절 부조리를 고민한 원숭이는 좌절한 나머지 모두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유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은 유전자는 고민할줄 모른다. 인간은 역할극에 빠져드는 방법으로 부조리로부터 도피한다. 역할극의 논리는 대개 종교에서 조달한다. 아내, 남편, 아빠, 선배, 후배 역할을 연기한다.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 유전자는 모두 자살해 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내 안에는 내가 없다. 그러므로 근원의 나, 더 큰 나를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나의 삶을 조직하여 타인의 삶과 연계함으로써 내 존재를 극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분별이란 무엇인가? (불교용어-Vikalpa) 내 삶의 동기를 타자로부터 조달하는 방법이다. 차별과 편견은 공동체의 동기부여를 위해 조달된다. 그것은 지어낸 거짓이다. 안으로 뭉치기 위하여 밖으로 적을 만든다. 가족을 단결시키기 위해 호랑이나 이방인의 위협을 강조한다. 거짓의 축적은 재앙이 된다. 피부색, 성별, 인종, 나이, 선후배, 직업, 신분으로 차별하는 것이 분별이다. 문제는 그러한 차별이 본능의 지배에 따른 무의식적인 행동이라는 점이다. 어린 아이 셋이 모여서 놀다가 심심해지면 무언가를 공격하거나 적대하게 된다. 동물을 괴롭히거나 심지어는 친구를 배제한다. “쟤는 우리랑 달라.” 불안을 조성해서 공동체가 결집하는 동기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불확정성이란 무엇인가? 우주는 독립적인 동그라미들의 집합이다. 시계는 태엽부터 바늘까지 전부 한 줄에 꿰어져 맞물려 돌아간다. 약간의 빈틈도 없다. 그러나 자연의 존재는 기계처럼 맞물려 있지 않다. 톱니바퀴와 달리 그 접점의 간격이 띄어져 있다. 정보의 전달은 확률적으로 일어난다. 각자의 계가 존재하며 우주는 무수한 계의 집적이다. 계와 다른 계 사이에서 정보전달은 사사오입 된다. 인체에서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전략은 사전에 확정되어 있지 않다. 바이러스의 신호를 읽어서 항체를 생산하는데 성공할 것인가는 확률에 달려 있다. 무수한 테스트 끝에 우연히 바이러스의 정보를 읽는데 성공하며 한번 정보를 획득하면 같은 것을 무수히 복제하여 물량공세로 제압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터무니없이 많은 예비자원을 가지고 있다. 태양도 넉넉하고 빛도 넉넉하고 물도 넉넉하고 숲도 넓고 꽃도 많다. 그 많은 것을 모두 성공하는게 아니라 그 중 하나가 성공하면 대량복제하여 증식한다. 자연은 기계의 원리가 아닌 정보의 원리에 지배되며 그것은 계 안에서 우연과 확률 그리고 정보의 획득과 대량복제 물량공세로 해결된다. 이 과정에서 정보를 읽는데 많은 시간이 지체되지만 일단 정보를 읽으면 순식간에 해결한다. 그러므로 자연에서는 시계처럼 정확한 것이 아니라 급격한 반전이 일어난다. 자연이 엄격한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급격한 반전이 무수히 많으면 계가 형성되어 균일해지기 때문에 외관상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예컨대 자연이 영화평을 한다면 10점 만점에 0점을 주거나 10점을 준다. 중간은 없다. 판단이 극에서 극으로 갈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평가에 참여하므로 평균을 내면 적당한 점수가 된다. 자연은 오류를 발생시키는 장치와 동시에 그 오류를 시정하는 피드백 장치를 갖추고 시간차 대응을 한다. 그러므로 파장이 우연히 일치할 때는 급격한 증폭을 일으키고 반대로 갈릴 때는 급격한 퇴조를 일으킨다. 자연은 극에서 극으로 평가가 갈리는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여러개의 롤러코스터가 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고르게 보인다. 우연히 롤러코스터들의 파장이 일치할 때 태풍과 쓰나미가 일어난다. 비참이란 무엇인가? 인간 안에는 인간이 없다. 개인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되지 않는다. 천국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구를 배제하고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은 없다. 인류 전체가 모두 구원되거나 아니면 인류 전체가 모두 버려지거나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는 물질을 통제하는 지성의 입장이다. 인간의 가능성을 집단의 법률 제도, 사회관계의 예의, 배려, 개인의 완전성 깨달음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법가, 다음은 유가, 다음은 도교의 관점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적 입장이다. 반면 자연의 본능, 자연의 질서, 물질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통제대상이다. 그러나 일면 그 자연의 필연법칙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통제자인 인간은 통제대상인 물질을 이해하고 이겨야 한다. 통제대상인 물질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통제자인 인간의 입장을 강조한 것이 사회주의다. 그러나 원리가 그러할 뿐 오늘날 사회주의자 집단은 변질되어 종교집단화 되어 있으므로 지성의 입장을 견지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완전해지고자 하는 몸짓이다. 사회관계 측면에서 개인은 불완전한 존재다. 개인이 혼자서는 사회적인 의사결정의 1 단위가 될 수 없는 때가 많다. 혼자서는 사회적인 진출의 동기를 얻을 수 없다. 혼자서는 사회적인 대응에서 여러가지로 부자연스럽다. 커플을 이룸으로써 적절한 밸런스와 포지션을 획득하고 임무를 획득한다. 이러한 성질은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뿐 아니라 친구, 동료, 인류전체, 자연전체, 우주를 대상으로 폭넓게 나타난다. 여행을 갈때 혼자서는 어디로 갈지를 결정할 수 없다. 커플을 이루면 리더와 추종자, 보호자와 피보호자, 공주님과 하인 등으로 포지션이 획득되어 앞설사람과 뒤따를 사람이 나누어지므로 더 쉽고 자연스럽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삶은 무엇인가? 삶은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찾기다. 삶은 매일의 집합이 아니라 매일이 집합되어 이루어진 커다란 한 그루의 나무 혹은 한 채의 집이다. 오늘 하루는 그 큰 건물의 방 하나 혹은 큰 나무의 가지 하나와 같다.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를 얻을 때 그 집은 한옥이든 양옥이든 양식이 분명해지며 그 나무는 사과나무든 소나무든 명백해진다.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얻을 때 당장 무엇을 해야할지 내일 무엇을 계획할지 알 수 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은 속으로 찔러 들어간다. 어원으로 보면 생각은 속을 꿰뚫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물질이고 속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이다. 생각이란 존재의 일을 추적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쇠붙이로 보면 물체고 운반체로 보면 생각이다. 물체는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지만 기능은 패턴을 분석하여 알 수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패턴을 분석하고 또 그것을 종합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거대한 네트워크다. 생명은 개체가 번식하여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룬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므로 하나의 생명이 곧 우주의 무게를 가진다. 생명을 소중히 여김은 그 부분의 대표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지구상에 아담과 이브 둘 밖에 없을 때 그 가치는 그 이후에 올 수 백억 자손들을 대표한다. 아담과 이브 이래 지금까지 태어난 인간이 5백억이고 앞으로 태어날 인간이 5천억이라면 아담과 이브는 그 전체를 대표한다. 생명은 그렇게 시공간을 넘어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선악의 관점과 진선미주성의 관점이 있다.) 선은 있고 악은 없다. 물고기가 꼬리를 어느 방향으로 치든 몸통은 앞으로 간다. 그것이 자연의 밸런스 원리다. 그러므로 선은 있고 악은 없다. 선은 성공이요 악은 그 성공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역설이다. 노를 저어 나아가기 위해서는 받침대가 필요하다. 시키지 않아도 그 받침대가 되는 자가 있다. 악역은 구태여 나서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진다. 그러므로 악역이 필요하대서 내가 그 악역을 맡을 이유는 없다. 악역은 선역이 등장하면 저절로 나타나며 당사자는 자신이 악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놀부의 악은 흥부의 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어떤 악도 선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저 자연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공동체에 목표를 부여하고 방향성을 지정하자 저절로 악이 생겨났다. 선은 그 공동체의 방향성이요 악은 그 방향성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받침돌이다. 악은 그 방법으로 선을 단련시키고 완성한다. 석가는 누구인가? 석가는 개인 안에서 완전성을 찾았다. 법가는 집단의 시스템에서 가능성을 찾았고, 공자는 적은 숫자로 이루어진 사회관계에서 기획을 내놓았고, 노자는 개인 위주의 문명 설계도를 내놓았다. 석가 역시 개인의 입장을 강조하는 소승의 관점에 서므로 노자의 포지션에 있지만 대승불교는 발달하여 사회로 확장되었다. 성(性)이란 무엇인가? (섹스) 모든 성은 본래 여성이다. 자연에서 모든 성은 여성으로 존재하며 남성은 필요에 의해 그 여성 중 일부를 변환시켜 조달한다. 자연의 본성은 완전성이며 그 완전성은 낳음에 이르러 도달된다. 그 낳음을 위한 자극은 반드시 외부에서 와야 하므로 나의 일부를 전개하여 외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 그것이 남성이다. 인간은 모두 여성으로 태어나며 발생초기에 일부가 남성으로 전환된다. 어떤 종류의 물고기는 수컷이 없지만 대장 암컷이 변태하여 수컷 역할을 맡는다. 자연의 자연스런 성은 암컷이며 자연에서 종은 생존이 아니라 세력을 원하므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수컷을 생산한다. 암컷이 좁은 영토를 나눠가지는 경쟁자가 되는데 비해 수컷은 영토를 취하지 않으므로 수컷을 생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반면 수컷만 생산하면 대가 끊어져서 종이 멸절된다. 환경이 나빠지면 암컷을 생산하여 대를 이어가고 환경이 좋아지면 수컷을 생산하여 세력을 확장한다. 모계사회에서 여성이 아들 열명을 낳으면 족장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즉 남성은 여성이 파출시켜 파견보낸 여성의 일부인 것이다. 세계란 무엇인가. 나 밖에도 내가 존재한다. 내 안의 나는 작다. 더 큰 내가 존재한다. 존재는 관계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범위가 나에 속한다. 나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가 나에 속한다. 공간으로도 그러하고 시간으로도 그러하다. 영어의 world는 좁은 의미에서의 지구촌이다. 순수란 무엇인가? 순수는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의 갖춤이다. 우리는 언제나 후발주자다. 항상 먼저온 사람이 금 그어놓고 룰을 강요하는 상황과 맞닥뜰인다. 백지상태라면 먼저온 사람이 강요하는 교묘한 룰을 따를 필요가 없다. 어떤 함정도, 속임수도, 미끼도 없는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언제나 백지상태에서 새로 출발하는 사람이 순수하다. 소명이란 무엇인가? 소명은 첫번째 온 사람의 역할이다. 자연은 전개되며 전개에서 우선순위가 있고 그 우선순위의 앞부분에 설수록 더 많은 효율을 얻는다. 첫번째 온 자가 절반을 먹고 두 번째 온자가 그 나머지 절반을 먹고 세번째 온 자가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을 먹는 식으로 점점 몫은 작아지고 효율성은 저하된다. 처음 생산된 차는 전시용으로 과시용으로 교육용으로 선물용으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지반 백만번째 생산된 차는 단지 승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갈수록 가치는 감가상각된다. 소명은 어떤 분야에 처음 온 사람의 역할이다. 처음 온 사람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첫 걸음은 가치있기 때문이다. 처음온 사람의 오류를 뒷사람이 답습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당신이 만약 처음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순간 당신은 소명을 받은 것이다. 밤새 온 눈 위에 당신이 첫 발자국을 남긴다면 뒷사람을 의식해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남겨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관광지에서 처음으로 낙서를 남긴 이후 모두가 낙서를 남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그 순간이 긴장해야 할 당신의 소명인 것이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계의 밀도가 균일할 때 자극하면 빅뱅이 일어난다. 높고 낮은 열명이 임금이며 신하며 서열을 가리고 있을 때 강도가 나타나 총을 들이대면 그 순간 죽음앞에서 모두는 평등해진다. 그 순간 진정한 소통은 일어난다. 임금이니 신하니 하는 가식을 벗어던지고 각자 해야할 일을 깨닫게 된다. 닫힌계 안에서의 그러한 외부압박이 밀도를 균일하게 한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여야가 힘을 합치고 가족의 위기앞에서 부부싸움을 그치고 마을의 재난에서 모두가 협력하듯이 서해안 기름유출때 국민이 팔을 걷어붙이고 돕듯이 소통은 일어난다. 소통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이심전심 작동하여 각자의 포지션을 찾아서 행하는 것이다. 긴급한 상황에서 스위치를 켤 사람은 누구인가? 임금도 아니고 신하도 아니다.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저절로 알아서 행하는 것이 소통이다. 그러므로 소통을 위해서는 밀도가 균일해져야 한다. 코드가 일치해야 한다. 수준이 맞고 전략이 일치해야 한다. 스스로 그 소통의 접점을 찾아내지 못하면 외부에서 위기가 찾아와 강제로 그 코드를 찾게 한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조직은 붕괴되고 공동체는 파괴된다. 그 집단은 자연도태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에너지를 전개한다. 존재의 두 성질은 보존과 전개다. 보존은 공간의 특성이요 전개는 시간의 특성이다. 모든 존재는 홀로 성립하지 않으며 반드시 어떤 둘의 만남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그러므로 존재의 속성은 감추어진다. 둘이 징검다리를 건널때는 한 사람씩 차례로 건너야 한다. 순서가 정해진다. 그것이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는 셈이다. 에너지의 보존이 공간 전개가 시간이다. 지구가 자전을 하므로 시간이 드러난다. 즉 운동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냥있는 것이 아니라 외력에 대항하여 자기를 보존하며 또 외부에서 전달되어온 정보를 이웃에 부단히 패스하고 있다.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개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 존재는 소멸된다.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시스템은 자기 자신을 복제한다. 구조가 고도화 되면 시스템에 이른다. 패턴이 집적되면 포지션을 낳고, 포지션이 집적되면 밸런스를 낳고, 밸런스가 집적되면 조직을 낳고, 조직이 집적되면 시스템에 이룬다. 시스템이 외부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복제한다. 자식을 낳는다. 낳음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고도화 되지 못한 시스템은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컴퓨터나 생명체에서 시스템의 작동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는 일한다. 시스템에 도달하기 이전의 패턴, 포지션, 밸런스, 조직은 외부에서 조작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동작하지 않는다. 조직은 약간의 조작으로 작동하고 밸런스로, 포지션으로 패턴으로 갈수록 더 많은 조작이 필요하다. 신은 누구인가? 신은 자연의 완전성을 표상한다. 구조원리에 따라 만유는 완전≫불완전으로 이행한다. 최초 단계에 닫힌계 바깥에서 에너지를 투입하고 스위치를 켜주어야 한다. 그것이 갖추어진 것이 완전이다. 우리 우주는 불완전하므로 우리 우주의 존재는 그 이전의 완전한 단계가 사전에 주어졌음을 전제로 한다. 신은 개인으로 나타나는 인격신이 아니며 네트워크다. 모든 완전한 것은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개인이면 그 개인의 바깥이 있으므로 역시 불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네트워크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신뢰란 무엇인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을 쓸수록 신뢰는 약화된다. 아내가 남편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남편이 그 자리에 있으면 자기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지 남편이 뭔가 도움을 주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타인에게 도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간섭받지 않고 자기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신뢰다. 공격수는 수비수를 믿으므로 수비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공격할 수 있고 투수는 수비를 신뢰하므로 마음껏 공을 던질 수 있다. 수비가 실점한다면 그 부분은 자기책임이 아니지만 두배로 골을 넣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다.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신비체험은 진화과정에서 얻은 인체의 방어기제다. 심신쇠약 상태에서 신과의 직접소통을 체험하는 사람이 있다. 단전호흡은 호흡을 끊거나 최소화하여 질식상태에서 환각을 보게 한다. 여러 이유로 심신쇠약 상태가 되면 환각을 보는 등의 신비체험을 한다. 까무러치거나 격렬한 춤, 신체의 고통 등에서 신비체험을 얻으며 이들은 보통사람이 일상적인 활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보이며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고 알수없는 말을 늘어놓기도 한다. 심(心)이란 무엇인가? 심은 변덕스런 감정을 나타내는 마음이 아니라 중심, 핵심이다. 센터다. 소통은 센터에서 센터로 전파된다. 심과 날, 주류와 비주류 모든 진보는 네거리 길목, 반도, 섬, 거점, 항구에서 일어나며 그 항구는 끝없이 새로운 배후지를 찾아 교체된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삶은 능동적으로 연출되어야 한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연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존재의 목적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축하고 연출해야 한다. 소속과 영역과 파트너와 포지션과 임무를 획득하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본질은 감추어져 있는(혹은 신에 의해 부여된, 선천적인) 삶의 목적이며 실존은 눈앞에 펼쳐진 삶이다. 원래 실존개념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종교적 입장에 맞서는 개념이다. 원죄나 구원 내세 개념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칸트는 그것을 이성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실존은 그 선천적인 인간규정(계급제도를 연상시키는)을 부정하고 자유의지를 긍정한다. 만약 귀족과 노예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양과 염소가 다르듯이 귀족과 노예가 원래 구분이 다른 존재라면 그것이 본질이다. 실존은 그것을 부정한다. 내세라든가 운명이라든가 따위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가 아니라 보이는 맞닥들인 삶 그 자체에서 삶의 동기를 발견해야 한다는 미학적 요구가 실존이다. 살아있으니 살아야 한다. 실존은 미학을 출구로 삼는다. 숙제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 앞에 펼쳐진 현실 그 안에 삶의 과제가 있다. 나의 소속,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를 구축해 가는 것에서 나를 찾는다. 이 물음은 근본 ‘왜 사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 존재한다. 귀족과 노예 혹은 원죄와 내세가 있다면 그 답은 간명하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 답은 이제부터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실존이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에는 전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다. 그 나가 불명하므로 그것을 차근차근 구축해야 한다. 그러한 나의 구축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된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진리는 큰 나무처럼 자라난다. 아우라는 불상의 머리 뒤에 있는 후광이다. 기독교에도 전해져 예수나 성모를 그릴 때 후광을 그린다. 빛은 수레의 바퀴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진리를 수레바퀴에 비교하곤 했으니 곧 법륜이다. 소크라테스는 작은 지혜의 씨앗을 뿌렸을 뿐이지만 플라톤에 의해 계승되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컨셉에 이론을 더한 것이 그의 이데아 개념이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확장하여 박물학 개념을 제창했다. 이렇듯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되어 내려가며 제자들의 활약이 커질수록 오히려 그 스승이 더 빛나는 것이 아우라다. 미학이론에서 아우라 개념은 모방작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원전의 느낌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추사가 강조한 서권기 문자향이 아우라다. 모든 창작은 클래식에서 팝으로 전개한다. 스탠더드에서 모더니티로 발전한다. 이때 모더니티로 전개할수록 스탠더드의 가치가 강조된다. 그것이 아우라다. 추사가 말한 서권기 문자향의 가치는 그 스탠더드의 가치다. 대중음악이 발달할수록 클래식의 가치를 새롭게 돌아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 미술이 다양하게 가지를 칠수록 고전적 회화전통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다.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기대했던 효과와 반대로 되는 것. 야만(교양)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집단지능 집단지성에 참여하는 것이 교양이다. 완전함이란 무엇인가? 완전하면 외부와 소통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뿐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살아있다. 지정학적 환경과 체험은 역사의 뿌리가 되고 공동체는 역사의 기둥이 되며 정치는 역사의 가지가 되고 자본은 역사의 꽃이 되고 문화는 사방으로 퍼져가는 역사의 열매가 된다. 전체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진보라는 물과 혁신이라는 햇볕을 먹고 자란다. 역설이란 무엇인가? 부정함으로써 긍정하게 되는 것. 열정이란 무엇인가? 동기부여 긴장을 끌어올리기다. 영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아담에서부터 계속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조개가 껍질을 화석으로 축적하여 나이테로 기록하여 100년이 된 조개라도 1년짜리 어린 조개의 모습을 껍질에 새겨두고 있듯이 전체가 하나의 모습으로 있다. 영적체험은 무엇인가? 타산적인 요소보다 외부에서의 플러스 알파를 상정하고 계산할 때 더 잘 맞는다.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예상이 빗나간다. 자신이 아는 부분 안에서 답을 찾기 때문이다. 미래는 항상 새로운 게임의 룰이 일어나고 역사는 반복되지만 다른 방식으로 반복된다. 당신이 어떤 운명의 갈림길에서 판단해야 할 때 당신이 아는 변수만 가지고 판단하면 언제나 틀린다. 최면술이나 정신착란, 심신쇠약, 심신상실을 영적체험이라고 말하는 바보들도 있지만 헛소리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타산적인 이성의 판단으로는 그것을 해야한다고 믿는데 몸이 아파서 못할 때가 있다. 그릇된 행동은 몸에 탈을 낸다. 뇌가 머리에만 작동한다고 믿으면 착각이다. 뇌는 몸에도 작동한다. 옳지 않은 행동은 몸이 거부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죄악으로 보는 관점은 서구 기독교 하고도 노예사상이다. 유태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는데 그 원인이 자신의 욕망에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죄없는데도 노예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원죄개념이 탄생했다. 그들은 이집트 노예주들에게 세뇌된 것이다. 에너지란 무엇인가? 물질은 순수한 정보다. 그 정보는 정확도를 가진다. 일정한 조건에서 이 부분이 수학적으로 계량되는데 이 값을 에너지라 한다. 우주란 무엇인가? 세계는 시공간을 떠나서 추상적 인식의 한계이고 우주는 공간의 파악가능한 한계이다. 우연이란 무엇인가? 필연 현존재는 그 전존재의 전개과정이다. 나는 나 이전의 존재의 전개과정이다.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각자의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그것이 각자의 정체성이다. 도달가능한 최선을 봐야 판단이 가능하다.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명백히 드러내야 오히려 정확해진다. 영화평에서 전문가들은 보통 별 셋을 주지만 이것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 무개념 관객들은 별 다섯 아니면 한개를 주는데 이는 선호가 극단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단으로 갈려야 오히려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다. 모으면 아주 제대로된 값이 나온다. 반면 전문가들의 별점은 아무리 많아 모아도 도움이 안 된다. 이상주의. 윤리란 무엇인가? 참된 도는 자연에 있다. 윤리는 자연법칙에 근거를 둔다. 만약 어머니(아버지)가 딸(아들)을 사랑하여 딸(아들)을 이성으로 보고 구애를 한다면 딸(아들)의 인생은 여러 측면에서 제약된다. 비합리적으로 된다. 합리성을 따르는 것이 윤리다. 합리주의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본다. 어떤 특수한 경우 예외를 적용한다 해도 그게 더 큰 문제로 파급되므로 윤리는 예외없이 지켜야 한다. 윤리는 합리주의이므로 전체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즉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할 때 개별적인 사정을 감안하지 말고 모든 인류가 그렇게 해도 옳으냐로 판단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여도 된다는 예외를 인정하기로 할때 모든 인류가 자식이 부모를 죽여도 되느냐다. 조난 등의 특수상황에서 식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해서 이를 허용한다면 예외는 점점 늘어나서 윤리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이 점은 논쟁될 수 있다. 물론 윤리는 하나의 원칙일 뿐 절대적인 근거는 아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삶의 긴 과정에서 전반부가 후반부의 보폭을 제한함에 따라 성립되는 필연성이다. 노무현처럼 어릴 때 남의집 밥을 먹지않으면 그 일관성을 지킬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은 세파의 변덕에 당할 확률이 높다. 이념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가 말이면 사회주의는 기수다. 자본주의 생산력과 사회주의 생산관계는 함께 간다. 자본주의는 앞에서 끌고 가고 사회주의는 위에서 타고 간다. 사회주의 기수가 자본주의 말을 억압하면 죽는다. 죽되 함께 죽는다. 반대로 자본주의 말을 시장에 맡겨서 방임하면 그 말은 길을 잃는다. 자본주의 말과 사회주의 기수는 호흡이 잘 맞는 환상의 복식조가 되어야 한다. 자본은 살아있다.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와 같아서 칡덩굴처럼 자라나서 나무를 말려죽이다가 겨울이 닥치면 불경기라는 이름으로 쪼그라 든다. 그 먹성좋은 자본의 횡포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다. 물길을 내는 방법으로 통제하는 자가 자유주의 세력이며 둑을 쌓아서 통제하자는 자가 전통좌파이며 가만 내버려두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는 바보들이 보수꼴통이다. 사회가 진보하였으므로 안전망이 갖추어진 복지지향의 진보사회가 자본의 횡포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자본주의 강조점과 사회주의 강조점이 수렴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어른끼리의 대화 룰이 있다. 이상이 있는자라야 어른끼리의 대화가 가능하다. 남자끼리 모여서 하는 이야기라곤 주식이야기, 골프이야기, 자동차이야기, 여자이야기, 정치이야기 정도다. 성인의 95프로는 대화꺼리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자라면 가족 흉보는 이야기나 자식자랑 이야기나 TV드라마 이야기 정도가 추가될 것이다. 이는 어른들의 대화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의 대화다. 이것들은 모두 나에서 벗어나 있다.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낳는 참된 대화는 자기를 드러내는 대화이며 그것은 이상주의에 관한 대화다. 즉 인간은 소통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한 계획을 공유하기 위함이며 그것은 각자의 꿈을 말하는 것이다. 주식, 자동차, 골프, 여자, 정치는 낯선 사람과도 할 수 있는 대화소재다. 대화는 겉돌고 만다. 우정은 매가리가 없다. 사랑은 빛이 바래고 만다. 참된 대화는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며 각자의 꿈을 드러냄으로써 가능하다. 법가들은 집단의 이상을 강조하고 유가들은 사회관계의 이상을 강조하고 도가들은 개인의 이상을 강조다. 이상주의가 없는 자와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 대화할 거리도 없다.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성이란 무엇인가? 인간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과학이 발달하자 인간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천재지변 앞에 겁먹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은 재앙, 재난, 지진, 공포, 벼락, 천둥, 우레, 쓰나미, 산사태, 죽음, 전염병 등의 모습이 아니라 꽃과 사슴과 들판과 숲과 호수의 멋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자연의 긍정적인 모습에서 단 하나도 더 추가할 필요가 없는 극적인 완전성을 발견하고 그 완전성과 소통하면서 인간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게 되었으며 신의 모습이 인간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신과 인간은 대등하게 소통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원론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획득한 존재의 대표성이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아담과 이브 때부터 인류문명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역사 전부, 공간적으로 인간의 통제권이 미치는 범위 전부를 대표한다. 집단의 위기 시에는 집단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되지 않은 자라도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능동적으로 판단하여 긴급구난 등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라도 문명 전체의 대표성을 가진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각자의 전략이 있다. 몸집키우기 전략과 줄이기 전략 아웃복서와 인파이터 소인배는 몸으로 대화하고 선비는 이상주의로 대화한다. 대화한다는 것은 서로 협력하고 보완한다는 것이다. 레벨이 있다. 어느 레벨에 맞출 것인가이다. 높은 레벨에 맞추어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신과의 대화가 있는 짧은 여행. 인생관이란 무엇인가?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가 있느냐다. 일생동안 경험할 무수한 사건들을 한 줄에 꿰어내기 위해서는 적절하개 연동시켜야 한다. 앞의 결정이 뒤의 결정을 방해하지 않게 해야 한다. 가치관 세계관과 연동시켜야 한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파트너가 있다. 하나의 존재는 반드시 모태와 짝을 가진다. 모태는 낳는 자궁이다. 모든 존재는 낳아진 존재이다. 그 낳고 낳는 족보를 따라 절대경로가 성립한다. 동시에 모든 존재는 짝을 가진다. 그 탄생을 촉발하는 방아쇠가 반드시 있다. 방아쇠 역할을 하는 짝이 있다. 존재는 우두커니 서 있는 망부석이 아니라 달리는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도로가 짝이다. 마차는 마부가 짝이다. 그것을 제어하는 무엇이 반드시 있다. 그것이 인연이다. 당신이라는 존재와 만나서 동기를 부여하고 동반하는 그 무엇이 반드시 있다. 자판은 마우스가 짝이고 연필은 필통이 짝이고 젓가락은 숟가락이 짝이고 칼은 도마가 짝이고 볼펜은 종이가 짝이고 산은 강이 짝이고 하늘은 땅이 짝이고 책상은 의자가 짝이다. 짝이 없이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인연이 있다. 짝짓기가 있고 그 짝짓기를 찾아가는 끌림이 있고 알지 못하더라도 이미 예비되어 있다. 일탈이란 무엇인가? 상궤에서 벗어나면 상궤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상궤에서 벗어난다. 상궤의 존재를 포착하기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이 타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은 상궤에서 벗어나야 알 수 있다. 연관어 일상 일반성이란 무엇인가? (보편성, 진리) 외부대응을 위해서는 하나가 되고 내부소통을 위해서는 보편이 된다. 일상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조종되고 있다. 인생은 역할극이다. 보통 남자다워야 한다. 여자다워야 한다는 주문에 세뇌되어 그 나답기에 골몰하느날 자신의 희망이 아닌 타인의 희망에 자신을 맞추어 간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선배역할 형님역할에 중독된다. 포지셔닝게임에 말려든다. 누군가 말하면 본능적으로 반사를 걸고 누가 찬성하면 본능적으로 반대하고 누가 하는지를 지켜보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진화과정에서 얻은 본능에 지배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성은 상당부분 유전인자에 새겨져 있고 그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맡는다. 파수꾼 펭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차례다 싶으면 파수를 보며 누떼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열대로 일어서서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을 발표한다. 일원론이란 무엇인가? 앎과 실천, 본질과 현상, 지배와 피지배.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는 서로 다른 둘을 연결시킨다. 의미는 뜻이며 뜻은 덧붙여진 것, 수레에 실려가는 것, 어떤 움직이는 것에 올라타고 가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소리요 그 움직이는 소리에 태워져 운반되는 것은 뜻이다. 의미는 운반하여 연결한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연결되지 않고 고립된다. 이러한 관점의 중심에는 세상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는다. 사회가 고도화 될수록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인간은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때 전율하며 쾌감을 느낀다. 이로부터 예술이 탄생한다.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으려면 계를 형성해야 하고 계 안에서의 밀도가 균일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약간만 건드려도 큰 소리가 나며 전체가 모두 일제히 반응하게 된다. 살짝만 건드려도 인류전체가 반응하게 하는 것을 이룬다면 그것이 예술이다. 그것은 그림으로도 음악으로도 문학으로도 건축으로도 패션으로도 영화로도 가능하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란 타자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 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무의식중에 사회적인 포지셔닝 게임에 빠져든다.무의식중에 타자에 조종되고 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면서 남자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노예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노예의 포지션을 차지한다. 그게 굳어져서 자신이 원래 노예였다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상대가 오른쪽으로 가면 무의식중에 왼쪽으로 가게 된다. 이런 이유없는 행동은 인간을 위험과 곤란에 빠뜨린다. 자신이 속한 포지션을 지키려다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리어 해꼬지 하는게 그 예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의 인식이 필요하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죽음에는 다섯가지 형태가 있다. 자연사, 병사, 사고사, 자살, 타살이다. 정언명령이란 무엇인가? 의하여가 옳고 위하여는 그르다. 언어는 명사와 동사로 조직되지만 그 이전에 주어와 술어가 있고 그 이전에 전제와 진술이 있고 그 이전에 근거와 주장이 있고 그 이전에 존재와 인식이 있다. 정언명령 ‘의하여’는 단지 술어만 말했다 할지라도 그 앞에 함축된 혹은 숨은 존재, 근거, 전제, 주어가 있음을 드러낸다. 가언명령 위하여는 그 존재와 근거와 전제를 숨긴다. 그러므로 모든 속임수가 일어난다. 어떤 논리전개든 의하여로 풀어야지 위하여로 풀어가면 안 된다. 반드시 전제를 속인다. 절대성이란 무엇인가? 모태를 거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 상대성 모든 존재는 짝짓기에 의해 존재하며 짝짓는 과정에서 절대경로와 상대경로가 탄생한다. 모든 존재는 낳음에 의해성립하며 낳음은 짝짓기로 이루어진다. 부모에서 자식으로 가는 탄생과정의 추적은 절대경로이고 자식에서 다시 짝을 찾으면 상대경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가진다. 절대성은 자신의 계획대로 행동하는 것이며 상대성은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부모와 짝을 동시에 가진다. 부모를 추적하여 존재를 밝히면 절대성이고 짝을 추적하여 밝히면 상대성이다. 누구 아들이라고 말하면 절대성이고 누구 남편이라고 말하면 상대성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센터다. 센터는 주변을 장악하고 통제하며 또다른 센터를 향하여 길을 연다. 정신은 의식 의지 의사 감정을 통제한다. 내부를 통제하고 외부와 연결한다. 내부를 통제함은 활에 살을 매겨 팽팽하게 당기는 것이며 외부와 연결함은 과녁을 찾는 것이다. 내부통제와 외부연결 둘은 동시에 달성되어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집단의 의사결정 구조다. 의사소통, 의사결집, 의사결정, 의사집행의 1사이클이 있다. 제국이란 무엇인가? 산업화로 인하여 국경을 넘어갈 필요가 생겨났다. 고대 노예제는 철을 기반으로 한다. 중세 봉건제는 토지와 광대한 토지를 관리할 수 있게 하는 말을 기반으로 한다. 근대 자본제는 지식과 지식인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그것으로 성벽을 쌓고 관문을 열어 통제를 용이하게 한다. 21세기 인터넷 시대에는 지식의 통제가능성이 사라진다. 사회는 생산력의 혁신에 의해 기존의 통제수단을 잃을 때 마다 새로운 통제장치를 만들어내곤 한다. 산업화 이후 도시가 발전하면서 토지를 통제수단으로 삼는 귀족은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토지귀족 특유의 외국과의 혈연관계가 파괴되고 따라서 국가전쟁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민족국가 개념이 제시되었다. 귀족은 외국 왕가와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서 유사시 외국군대의 개입을 용이하게 한다. 그것으로 전쟁을 방지하고 힘의 균형을 끌어내는 데 귀족의 역할이 있다. 혁명으로 인해 그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산업화의 진전으로 화석원료 자원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는 무역으로 풀어야 하지만 그 원료자원은 대부분 아프리카 등 후진국에 있다. 무역으로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이에 2개 국가 이상을 지배하는 독재자의 출현이 요구되어 역사는 급속히 제국주의로 진행되었다. 양차세계대전 이후 무역에 의해 이 부분은 해소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등은 2개 국가 이상을 통제하려 하는 점에서 제국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EU의 경제통합과 새로운 경제블록의 출현 역시 제국주의 본질을 얼마간 반영하고 있다. 죄란 무엇인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짓이 죄다. 어원으로 보면 죄는 단순히 재판관의 판결을 뜻한다. 고대인은 그것을 일종의 채무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논리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죄는 공연히 전봇대에 머리박은 사람을 의미한다. 죄는 사회에 의해 처벌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대가리가 깨지는 것이다. 제 손으로 제 팔을 꺾는다면 그것이 죄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은 제 손으로 자신을 가둔 사람들이다. 그것은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한다. 왜냐하면 죄를 지을 때 자신이 처벌받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미성년자나 정신병자는 처벌되지 않는다. 죄를 짓는 즉시 교도소에 수감되어 버리며 현실에서 그것이 집행되거나 혹은 집행되지 못하거나 집행이 유보되거나 간에 논리적으로는 그러하다. 말하자면 죄를 짓고도 속임수 등의 방법으로 사회의 안전 시스템으로부터 추적당하지 않아 교도소 밖에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실로 가석방된 상태와 유사하다. 몸은 밖에 있어도 형의 집행이 잠정적으로 유보되었을 뿐 윤리의 어떤 본질로 보면 이미 교도소 안에 있다. 바로 그것이 죄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역은 변화다. 변화는 밸런스에서 나온다. 주역의 본질은 ‘변화에 의한 밸런스’다. 달리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듯이, 정지해 있으면 오히려 위태롭고 역동적인 변화 가운데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 변화가능성 곧 내부에 에너지를 품고 아직 변화하지 않은 상태를 양(陽)이라 하고 그 에너지를 소비하며 변화를 진행시키는 것을 음(音)이라 한다. 음과 양의 조화야말로 ‘변화함으로써 안정되는’ 밸런스다. 자연의 힘이 여기서 비롯되고 진보의 힘이 또한 여기서 비롯된다. 이는 하늘의 원리이며 지상에 반영되어 원형이정, 곧 사계절로 나타난다. 이 원리가 계속 전개되어 세상의 천변만화를 이끌어낸다. 문제는 그 변화를 어떻게 추적하는가이다. 주역은 점(店)을 쳐서 그 변화를 추적한다. 이 지점에서 확 깬다. 점술은 물론 비과학이나 그 주역의 바탕에 깔린 논리는 지극히 과학적이다. 오른팔과 왼팔이 50 대 50으로 팽팽하게 교착되어 있으므로 뇌는 아주 작은 힘으로도 두 팔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 만약 한쪽이 백 퍼센트를 차지한다면? 다리가 하나 뿐인 것과 같아서 통제할 수 없다. 남북한이 팽팽하게 교착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한반도를 아주 갖고 놀려고 한다. 어떤 둘이 저울의 두 팔처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외부에서 아주 작은 힘으로도 통제할 수 있다. 주역은 단순히 점 치는 기술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점괘의 해석에 있어서는 이러한 과학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정치가의 통제술, 처세술로 활용되었다. 본질은 어부지리의 법칙이다. 조개와 도요새를 싸움붙여 놓고 갖고 노는 것이다. 중국의 처세술이 그러하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우세를 차단한다. 장군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면 오히려 밸런스를 깨친 죄로 낙향을 청한다. 공을 세웠다고 우쭐대다가 목이 달아난 장군이 한 둘이 아니다. 개혁을 주장하여 부패를 일소하는 등 큰 공을 세운 정승들은 밸런스를 깨뜨린 죄가 있으므로 스스로 낙향을 청하는게 관례다. 임금은 아끼는 신하가 권세를 잡으면 위태로워지므로 오히려 트집을 잡아 귀양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이기를 반복한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주역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끝없는 물러남이나 우암의 아리송한 행보 뒤에는 주역의 처세술이 반영되어 있다. 이 원리에 통달한 사람은 어떤 대상이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다. 그러나 중국적인 처세술이다. 민주주의는 여야간에 그리고 정부와 국민간에 이러한 통제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시장의 밸런스 또한 이 원리에 통제되고 있다. 주역에 통달한 사람은 집금에 성공할 수 있는 조건 한 가지를 얻은 셈이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집단지능 네트워크 중심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다.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진성성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행동을 한다면 가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진정성이다. 좌파들의 진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진정성이 있지만 종교적으로 광신도화 되어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원하기는 하지만 테크닉이 없다. 진정성의 토대 + 상대방에게 먹히는 테크닉이 겸비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은 스스로 자라는 물질의 나무다. 자본은 생명력이 있어 식물처럼 크게 자란다. 겨울이 오면 잎을 버리고 몸집을 줄이며 축소시키기도 한다. 인간은 물질이라는 말을 타고 가는 기수다. 지성은 그 기수의 역할이며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는 그 말의 역할이다. 요는 인간의 지성이 그 말을 어느선까지 통제할 수 있느냐다. 지나치게 말을 통제하면 말은 죽는다. 인간의 지성이 지나치게 물질을 통제하면 자본은 죽는다. 지나치게 방임해도 역시 자본은 죽는다. 농부가 밭을 관리하듯이 자본은 적절한 관리와 방임이 필요하다. 좌파들이 지나치게 개입하여 비료를 주고 농약을 쓰면 자본은 자생력을 잃고 병들어 죽는다. 우파들이 방임하여 내버려두면 논에 피만 잔뜩 자란다. 자연.. 자연에는 완전성이 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사랑을 낳는 자궁이다. 존엄은 자유를 낳고 자유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성취를 낳고 성취는 행복을 낳는다. 존엄은 인간의 사회적인 대표성이다. 모든 인간이 사회적인 대표성을 가지므로 개인에게 자유가 있다. 자유를 제한하면 사회적인 대표성을 잃어서 그 사회는 외부로부터의 위기에 취약해진다. 외부에서 돌연한 공격이 있을 때 그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임시지휘관이 되어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데 자유가 없으면 개인에게 대표성이 없으므로 위험을 집단에 떠넘겨서 호미로 막을 일을 트랙터로도 못막는 일이 벌어져서 위험이 몇백배로 증폭되고 결국 사회는 파괴되고 만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은 일관되게 자기의 속성을 드러낸다. 정체성은 자기 일관성 동일성 연속성이다. 삶의 전체과정, 자기가 속한 집단의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이 정체성이다. 자신의 직업이 변호사라면 변호사이기 전이나 후나 변호사와 관련없는 일을 하거나 변호사의 정체성을 가진다. 떵을 누거나 여행을 할 때는 변호사라는 직무와 관련이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변호사답게 행동한다. 변호사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것이 정체성이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전체인류의 대표성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은 사회와 소통을 유지하는 한 사회전체의 대표성을 가진다. 공격에 있어서는 집단의 가장 강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고 수비에 있어서는 가장 약한 고리에 의해 무너진다. 어떤 개인도 그 사슬구조의 한 마디를 담당하게 되며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원리에 따라 외부에서의 자극이 주어졌을 때 한 개인의 무게가 우주 전체의 무게와 같아진다. 그 개인의 가치는 그 사람의 미래가치, 그 사람의 자손과 그 자손의 후손이 일구어낼 가치 전체를 대표한다. 그물의 한 코가 찢어져도 물고기는 전부 빠져나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엄하다. 그 존엄은 자유와 사랑과 성취와 행복을 품는다. 즉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이라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존엄한 것이다. 그것은 자라지 않은 씨앗도 심어진 이상 수확할 미래를 앞당겨서 그 가치를 인정함과 같다. 아직 벼는 들판에 자라고 있어도 그 입도선매의 거래는 6개월 후 수확했을 때를 기준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란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삶의 양식문제 곧 문화의 문제 일관성의 문제를 종교가 답하고 있다. 주도권이란 무엇인가? 여럿으로 되어 있더라도 외부의 개입을 받을 때는 1로 행세한다. 1이 되는 것이 주도권이다. 상대방에게 물어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나는 이렇게 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대의 행동을 지켜보고 상대의 행동여하에 따라 내 대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노예는 정체성이 없다. 정체성을 주인의 관점에서 말하면 주체성이다. 주류(비주류)란 무엇인가? 역사는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부단한 과정이다. 역사는 계단식으로 진보한다. 구조론적으로 변화의 원인은 밖에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세력이 커질수록 주변부와 중심부간의 거리가 멀어져서 죽게 된다. 마음 네거리 센터 심.. 존재는 심과 날로 이루어지며 심을 차지한 것이 주류, 날을 차지한 것이 비주류다. 진보는 비주류가 주류를 치는 형태로 일어난다. 게가 허물을 벗듯이 속으로 살이 찌므로 주류가 계속 진보하는 경우는 역사에 없다. 모든 진보는 네거리 길목, 반도, 섬, 거점, 항구에서 일어나며 그 항구는 끝없이 새로운 배후지를 찾아 교체된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중도, 주역) 밸런스가 수평을 이룰 때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용이나 중도가 중간은 아니다. 주역의 중용은 돌아가는 팽이가 넘어지지 않음과 가타이 변화함으로써 오히려 안정됨이다. 사회는 진보함으로써 오히려 안정된다. 냉전이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열전을 막는다. 중용은 좌로 1보 후 우로 1보이지 50 대 50의 교착이 아니다. 시소의 가운데 있으면 오히려 위태롭다. 양쪽 끝에 있으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탐으로써 오히려 태연할 수 있다. 지평이란 무엇인가? 자기 존재의 범위는 자기의 인식 범위가 결정한다. 소인배는 자기의 육체적 완력이나 돈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를 나의 바운더리로 삼고 군자는 자신의 지식이 기여하는 범위를 나의 바운더리로 삼는다. 작은 바운더리에서 큰 바운더리로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새로 시작된다.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임이 있다. 직관이란 무엇인가? 패턴읽기, 경험칙. 전체과정을 아는 사람. 베테랑.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하나로써 망라한다.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논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진다. 사실은 특수성과 상대성을 가진다. 사실이 발달하여 의미 가치 개념 원리에 이르면 곧 진리다.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는 역사의 방향성에 보조를 맞춘다. 살아있는 역사의 기본적인 방향성이다. 물고기가 꼬리를 좌로 쳐도 우로 쳐도 역사는 전진한다. 인간의 역사는 지성의 네트워크가 물질세계를 통제하는 수준을 높여가는 역사이다. 그 역사의 방향성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진보다. 자본주의(생산력)가 말이면 사회주의는 그 말을 타는 기수(생산관계) 진보주의는 그 말과 기수가 가는 방향이다. 보수주의는 그 말과 기수의 폭주를 감시하는 사람이다. 차원이란 무엇인가? 창조란 무엇인가? 추상이란 무엇인가? 보이는 표면의 사실을 토대로 추론하여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질서를 쫓아가는 것이 추상이다. 구상은 다 보여주고 추상은 조금만 보여준다. 미인의 모습을 보여주되 얼굴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실루엣으로 처리한다면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겨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을 단서로 보이지 않는 이면을 추론할 수 있도록 질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질서는 그림 안에도 있고 그림 밖의 사회적 트렌드에도 있다. 무지개를 그리되 빨강 하나만 그려도 사회에서 나머지 일곱색깔을 찾아낼 수 있다.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긴장과 이완, 클라이막스와 오르가즘. 범죄자는 더 큰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범죄의 불안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를 가진다. 맞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기어이 맞을 짓을 해서 매를 버는 이치와 같다. 도둑이 결국 잡히는 것은 잡힐때까지 경찰과 대결하려는 이상 심리 때문이다. ‘이래도 못잡나’는 식이다.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초조해져서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므로 허둥대다가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고 끝내 잡히는 것이다. 잡힐 때 차라리 편안해지는 느낌이 카타르스시다. 그러므로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비극을 보고 눈물을 터뜨리면 해소된다. 겁이 많은 사람은 공포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 뱀이나 쥐를 무서워 하는 사람은 뱀이나 쥐가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한번 잘못을 저지르면 더 큰 잘못을 저질러야만 그 잘못의 심리상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계속 잘못하게 된다. 칼같이 끊어내야 한다. 쾌락주의란 무엇인가? 자기 몸과 직접 접촉하는 부분에서 단서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신을 핑계하여 인간을 공격하는 행태에 대한 반격이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파시즘은 무지에 의한 군중의 집단적 응석이다. 진화과정에서 위기에 이르면 비명을 지르거나 사고를 쳐서 위기를 공동체에 알리려는 본능이 있다. 이것이 집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파시즘이다. 마녀사냥 등이 있다. 자기 선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개인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환원시키려고 한다. 파시즘은 고대 로마에서 집정권이 행차할 때 따라다니는 졸개들의 도끼자루 다발 12개짜리 묶음인데 집단의 결속을 의미하게 되었다. 현대에서는 집단의 광기 의미로 쓰인다. 집단의 광기는 개인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만들어서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려는 본능이다. 집에 난 불을 못 끄면 오히려 더 큰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 큰 불을 내면 연기를 보고 동네사람들이 달려와서 불을 꺼준다. 다행히 동네 전체가 전소되는 재앙은 피한다. 이토록 문제를 악화시켜서 문제를 해결하는 본능은 진화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조갑제 등이 날로 도발을 꾀하는 이유는 그 유전자 때문이다. 도발해서 전쟁이 나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전체의 문제로 되어 전 세계의 군대가 다 몰려들면 오히려 전쟁이 그쳐지고 영구적인 안전시스템이 마련되어 인류가 안전해진다는 발상이다. 실제로 양차세계대전에서 전 지구가 전쟁에 올인한 결과 이후 인류의 큰 각성으로 전쟁방지 시스템이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큰 전쟁없이 굴러가고 있다. 그것이 파시즘이다. 이 유전자 조심해야 한다.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시스템은 내부의 심을 중심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지만 패러다임은 흩어져 있으면서 결속된 시스템과 같은 현상을 드러낸다. 개미의 군집이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한 고도의 결속된 시스템이라면 인간의 국가는 그 결속력이 약한 점에서 패러다임에 가깝다. 국가가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제, 현대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국가체제의 핵심적 통제수단이 되는 철, 토지, 지식과 인맥을 기준으로 한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다. 생태계는 유기적인 패러다임에 의해 작동된다.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부분을 얽어 전체를 아우르는 도를 얻었다면 가장 작은 단서 곧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것이다. 윙크 하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거창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 교종이 이원론이라면 선종은 일원론이다. 2를 1로 통일하는 힘은 실천에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선종은 실천의 철학이며 실천은 2를 1로 통일하는데 있으므로 통일의 철학이며 삶의 전 과정을 통일하는 것은 미학이다. 그러므로 선종은 미학의 철학이며 그것을 생활에 반영하는 것이 평상심이다. 평상심은 평상시그대로 놀맨놀맨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 도는 자연스러움이다. 평소에 자연스러움이 도다. 죽음앞에서, 상실 앞에서, 탄생 앞에서도 평상시처럼 느긋하게 꾸물대는게 평상심은 아니다. 죽음앞에서도 평상시와 같을 수 있도록 도량을 키우는 것이 평상심이다. 24시간 죽음에 대비되어 있어야 평상심이다. 평화란 무엇인가? 존재는 그 내부에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펼쳐낸다. 평화란 그 에너지를 펼쳐낼 넓은 배후지를 갖춘 것이다. 혈기왕성한 꼬마가 전력으로 달리고 싶다면 적어도 100미터의 넓은 운동장이 필요하다. 각자에게 그 정도의 넓은 여유가 주어질 때 인간은 내 안의 모든 가능성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다. 그것이 평화다. 새는 날 수 있고 물고기는 헤엄칠 수 있고 꼬마는 뛰어낼 수 있고 학생은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필연이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또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 존재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있는 것이 아니라 마차처럼 달리는 것이다. 즉 존재는 전개하는 것이며 진행하는 것이며 역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가 있으면 그것을 있게 하는 하나가 더 있다. 사실의 배후에 의미가 있고 의미의 배후에 가치가 있고 가치의 배후에 개념이 있고 개념의 배후에 원리가 있다. 나의 가는 길은 우연이 아니라 내 이전에 왔던 길에 의하여 규정된다. 물려받은 추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있고 조만간 열매를 남길 것이며 그 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여름의 성장에 의해 마침내 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며 그 이전에 무려 씨앗이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존재를 고착된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 상에서 현재진행의 존재, 살아있는 존재, 펼쳐지는 존재, 망라하는 존재, 계승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필연의 이해다. 곧 인연의 이해다. 한(恨)은 존재하는가? 복수하기보다는 이해받기를 원한다. 한은 일종의 보상심리다. 그것은 복수심리와 다르다. 스톡홀름증후군을 예로 들 수 있다. 폭력남편에게 매맞은 아내가 이혼하면 되지만 이혼만으로는 그동안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없다. 이혼결심을 망설이게 된다. 그것이 한이다. 만약 동료가 그 피해사실을 인정하고 동정한다면 그 고통도 견디게 된다. 스톡홀름의 인질들은 그 인질범에게 복수할 수 있지만 그래서 얻는 것은 없다. 그들은 복수하는 대신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받기를 원한다. 심지어 인질범들을 변호하려들기도 한다. 인질범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자신의 피해를 보상할 수단을 만들어서 사회와 협상하기 위해서다. 인질범의 편에 서서라도 사회와 대립각을 세워 마이크를 획득하고 발언권을 얻고 자신의 주도권을 행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한을 푸는 방법은 이해하고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부분을 얽어서 전체를 만들어서 파악하는 관점이다. 갑이 을을 때렸다는 사실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그 을이 도둑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숨은 의미 가치 개념 원리를 추적하여 사건의 전체과정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물량공급 작전을 쓴다. 봄꽃은 대책없이 왕창 피어나고 가을 결실은 터무니없이 왕창 열매맺고 겨울 낙엽은 왕창 떨어지고 터무니없이 많은 비를 주고 쓰고 넘칠만큼 넉넉하게 햇볕을 준다. 인간은 쪼들려서 언제나 아등바등하는 극한상태에 와 있지만 자연의 본성은 넉넉하므로 인간이 자연을 본받으면 행복해진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자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한 개인 단위로 볼 때 삶의 목적 따위는 없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모든 예술은 창작은, 조직은 스탠더드에서 모더니티로 전개한다. 스탠더드와 연결하고 모더니티로 전개하여 가는 것이 역사의 진행방향이다. 원리(스탠더드)에서 개념으로 가치로 의미로 사실(모더니티)로 전개하여 가는 것이다. 현상이란 무엇인가?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펼쳐져 있다. 동사는 명사를 펼친 것이며 술어는 주어를 펼친 것이며 진술은 전제를 펼친 것이며 주장은 근거를 펼친 것이며 인식은 존재를 펼쳐낸 것이다. 고전적 형이상학은 이원론을 적용한다. 인간을 참된 실재 혹은 본질과 표면의 모습으로 이원화하고 이면에 감추어진 참된 본성을 추구하는 것이 칸트철학이다. 현상학은 이를 부정한다. 근대철학은 일원론이다. 그러므로 본질(에센스)과 실존을 구분하지 않는다. 본질은 펼쳐지고 전개한다. 둘은 하나다. 육체를 멀리하고 정신을 추구한다든가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추구한다든가는 이원론의 태도다. 현대철학은 본질을 부정하고 실존을 긍정한다. 신의 계시나, 신비한 어떤 엑기스나 알송달송한 참모습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구축하여야 할 삶의 소속, 삶의 영역, 삶의 파트너, 삶의 포지션, 삶의 임무가 바로 나의 정체를 구성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사선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는 비스듬히 사선을 그리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밟고 성큼 올라간다. 왜냐하면 양식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기준에 맞추어야 하는 표준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회를 통제하려면 어떤 길목을 장악해야 한다. 성벽을 쌓고 드나드는 관문을 장악하면 통제할 수 있다. 고대 노예제는 철기의 관리 중심의 사회관계다. 철기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사회를 통제한다. 철기를 소유한 자는 시민이며 철기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노예가 되었다. 어느 시점에 대장간이 널리 보급되어 철기가 일반화 되자 더 이상 철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청동기냐 철기냐 혼선이 있을 수 있는데 청동시대에도 철은 농업용으로 존재했다. 제련기술의 낙후로 철이 군사무기로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청동과 철을 구분하지 않는다. 고대노예제는 철기의 통제가 사회구성체의 핵심이었다. 철제무기의 등장과 함께 철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고대노예제는 급격하게 해체되었다. 제련기술의 발달로 농업용으로만 쓰던 철을 군사용으로 사용하게 되자 병력의 무장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농민도 무장할 수 있게 되어 전쟁의 규모가 백만단위로 커지고 이들은 병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무장상태를 유지했으므로 자유민이 되었다. 고대 노예제는 자동으로 소멸했다. 중세 봉건제는 토지관리 중심의 사회관계다. 등자가 보급되자 승마술이 발전하여 말을 타고 넓은 토지를 관리할 수 있게 되자 지배집단은 철기의 통제를 그만두고 토지만 관리하게 된 것이다. 도시는 해체되고 귀족들은 농촌으로 이주했다. 근데 자본제는 지식을 통제한다. 사회는 교육받은 자와 교육받지 못한 자로 2원화 되었으며 교육받은 자는 인맥과 연고로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교육받지 못한 자는 그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착취당하기 일수였다. 한국의 양반은 법적 근거가 없다. 양천제였으므로 천민 아니면 모두 양인이었다. 그러므로 양반들은 서구의 귀족과 다른 집단이었다. 그들은 지식을 위주로 뭉쳐진 세력이다. 양반의 무리 중에서 누군가는 관료가 되어 있으므로 관리는 양반을 수탈할 수 없다. 양반세력은 관료인 일족 중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체도 역시 지식과 네트워크에 의한 통제로 볼 수 있다. 산업화가 진전되자 질적으로 우수한 노동력이 필요해졌으며 이에 교육받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지식기반 인적 네트워크에 의한 하층민 통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떻든 사회는 반드시 성벽을 쌓고 관문을 열어 통제하는 새로운 수법을 개발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산력의 진보가 일어났을 때는 반드시 기존의 사회관계를 해체해야 한다. 그 과정은 혁명적으로 진행된다. 혜능은 누구인가? 혜능은 깨달음이 미학임을 알아보았다. 이론이 발달할수록 대중과 멀어진다. 그러나 양식을 완성하면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종교의 역할은 대중들에게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이나 권력에 의존하는 방법이 아니다. 혜능은 미학의 방법으로 대중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였다. 미학은 직관되므로 점오가 아닌 돈오이며 점수가 아닌 돈수이다. 석가와 그 석가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은 교종이 금강경이라는 자동차를 만들었다면 혜능은 그 자동차의 운전법을 가르쳤다.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는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는다. 화두란 깨달음의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기대할 때 그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유전인자와 같다. 정자에서 난자로 운반되는 분량은 매우 작다. 그것은 단단한 핵과 같다. 그 핵에 살이 붙어서 점점 크게 자라난다. 조주의 끽다거, 추사의 서권기 문자향, 임제의 할, 덕산의 방, 구지의 엄지, 마조의 벽돌, 성철의 산은 산 물은 물은 모두 최소개입이다. 환원주의란 무엇인가?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남는 것은 없다. 요소환원주의는 근대과학의 방법론으로 제창된 관념으로 이건희 아들 이재용이 일본 전자제품 분해해보고 그대로 베끼듯이 뭐든 잘게 분해해보면 답을 알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선형적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의 존재는 부품과 그 부품을 결합하는데 들인 에너지 그리고 부품의 결합정보라는 세가지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존재는 물질+에너지+정보로 되어 있다. 자동차를 분해하면 부품을 얻을 뿐 그 자동차를 조립하는데 투입된 에너지와 그 부품들의 결합각도를 나타내는 정보는 배제된다. 그 분해된 부품을 다시 조립하지 못한다.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는 비가역성을 가진다. 물질은 계속 분해하면 에너지로 해체되고 에너지는 계속 분해하면 정보로 해체된다. 완전히 사라진다. 어떤 하나가 탄생할 때 저절로 하나가 더 추가된다. 빛이 탄생할 때 그림자도 동시에 탄생한다. 즉 우주의 탄생은 거대한 인플레를 유발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장난 차를 완벽하게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은 신차 한대를 새로 뽑는 비용보다 더 많다. 효란 무엇인가? 가는 커다란 한 그루의 생명나무다. 역사의 진보는 아담과 이브로부터 뿌려진 씨앗이 커다란 하나의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다. 효는 단순히 부모를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전개의 흐름 안에서 나의 나아갈 방향의 좌표를 확인하는 것이다. 등대를 보고 항구를 찾아가듯이 바다를 보고 꿈을 키워가듯이, 만리장성에 올라 호연지기를 얻듯이 그 면면히 이어온 큰 생명나무를 보고 나의 삶을 그 미래를 기획하고 디자인한다.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신에게 있는 것은 인간에게도 있다. 신의 성질을 인간의 성질로 대체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신의 성질은 무자비, 가혹, 절대, 엄격이며 이는 인간이 중요한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서 기인한다. 고대인은 천둥, 벼락, 홍수, 전염병 등의 재난에서 속수무책이었으므로 사회적인 행동도 속수무책의 관점에서 싹죽이기, 노아의 홍수 싹쓸이, 일벌백계, 정상참작없음, 무조건 사형뿐 등의 방법을 썼다. 점차 인지가 발달하고 과학의 성과로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자 휴머니즘이 대두되었다. 싹쓸이의 관점은 밀려나고 융통성, 유드리, 여유분, 인정을 강조하게 된 것이 진보적 태도이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희생은 완전하므로 신과 소통한다. 제사에 바쳐진 제물이다. 몸에 상처가 없는 동물을 제물로 선택했다. 그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소리가 난다. 완전한 자를 완전히 희생시키면 전체에 파급되는 울림이 있다는 경험칙이 있다. 완전한 것을 구해서 완전히 소진시킬 때 큰 반향이 일어난 경험이 완전한 소녀 심청을 완전히 희생시켜 큰 장사를 성공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것을 완전히 소진시켜 큰 효과를 내는 것은 예술 밖에 없다. 예술 밖에서 무리하게 이런 짓을 시도한다면 노무현의 죽음과 같은 재난이다.
### 9살 때다. 사전찾기 숙제였는데 문제는 국어사전을 신뢰할 수 없다는 점. 대략 엉터리였다. 유방을 찾아보니 젖, 젖을 찾아보니 유방. 꺼추는 자지, 자지는 꺼추. 이런 식이면 이상한 거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반드시 내부에 방정식이 숨어 있다. 그 숨은 메커니즘을 들추어내야 한다. 국어사전을 새로 쓰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필자의 일생의 계획이 되었다. 존재의 절대경로와 상대경로를 추적하기다. 구조론은 그 고민 끝에서 만들어졌다. 실제로 이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는 지난한 일로 되었다. 언어는 다의성을 가져서 족보책 쓰듯이 할 수는 없다. 언어를 진화경로에 맞추어 ‘종속과목강문계’로 분류하겠다 애초의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사마천의 기전체를 본받아 한글자모 순으로 펼쳐놓고 다시 유의어를 모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언젠가 국어사전을 통째로 다시 만들고 싶지만 벅찬 작업이고 일단 이 정도로 발동을 걸어본다. 중요한건 패턴이다. 이 작업의 패턴을 읽어서 직접 적용해 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필자는 시범을 보일 뿐 꼭 이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필자가 어떻게 풀이했건 상관없이 필자의 방법을 적용하여 독자여러분이 직접 분석해보면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 |
인생이란 참 나와 현실에 발목잡혀있는 나와의 부단한 대화.
이러한 대화가 있는 작은여행.
진짜는 어떤 '외부'의 조건과 상태에 대하여, 자기 구조로 '소화'하여 '배출'해낸다.
단순히, 배설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여 '생산'한다.
진짜와 가짜는, 그 리턴양식의 차이에서 판가름난다.
자기안에 구조를 채울것. 주절주절 거리지 말고, 냉정하고, 견고하게 건설할것.
초극이란 무엇인가?
초인이란 무엇인가?
역심이란 무엇인가?
1 상대편의 말이나 행동에 반발하여 일어나는, 비위에 거슬리는 마음.
* 역심이 생기다
*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너무 심한 데에 역심이 나는지 한층 더 뛰는 소리를 한다. 출처 : 염상섭, 삼대
2 반역을 꾀하는 마음.
비슷한 말 : 이도8(異圖)·적심5(賊心)
* 역심을 품다.
인간은 왜 이런 맘이 생기는게요?
극을 넘어섬의 극은 무엇이오?
친구란 무엇이오?
애인이란 무엇이오?
스승과 제자란 무엇이오.
돈이란 무엇이오?
모든 존재 하는 것은 절대경로와 상대경로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절대경로와 상대경로는 그 찾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고 정확히 이해되지 못하면 혼란만 가져다 줍니다.
하여, 절대경로와 상대경로의 대한 설명과 그 두가지가 하나의 존재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경로를 가지며
추적하여 들어가는 방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부연설명도 들어가 주면 좋을듯 합니다.
그동안은 대체로 절대경로,상대경로는 자연에서 인간까지로 많이 설명되었지만
동렬님은 인간의 인식과 사고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문명,양식,문화,역사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여, 인간(존재)의 절대경로와 상대경로에 대한 설명과
인간의 인식활동의 결과물들에 대한 절대 경로와 상대경로가 어떻게 같은 패턴으로 나타나고
존재를 추적하는 경로가 인식을 추적하는 경로에서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들어가주면 좋을듯합니다.
물론 구조론에 설명이 되어 있지만 백문백답에서 어느정도 더 간결하게 정리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절대성의 의미와 뜻하는 바는 추상명사로 나타납니다. 딱 감이 올 수도 있으나 감이 쉽게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사랑,자유,신,평화,행복,모성, 의미,가치 등등
그리고 상대성은 관계,만남,소통,문명,양식,문화,역사 등등
위의 단어들이 정확한 단어들의 나열인지에 대해서도 검토해 주시면 좋구요.
하여 절대성과 상대성을 뜻하는 단어들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모두 절대성을 가지고 나타나지만 인간의 인식활동에 의해 그 절대성을 가지고 나타난 것들은 서로 상대적으로 관찰됩니다.
절대성은 고유성이라면 상대성은 차별성(높고낮은 계급적 차별이 아님.서로 다르다=다양성)을 띕니다.
그래서 절대성은 인식을 통해 상대성을 봄으로 인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대체로 존재와 인식에 대한 정립이 안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를 추적하면 절대성이 보이나 인식만을 쫒다보면 끝없는 상대성이 나타납니다.
솔직히 끝없이 상대성만을 쫒다보면 한도 끝도 없어서 피곤해집니다.
끝단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하여 상대성은 보면서도 절대성을 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서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동안의 종교철학은 인간의 삶의 활동을 풀어내는 데에는 인색했다고 봅니다. 결과론적인 것이 많았다고 보여집니다.
동렬님은 만유의 경로를 풀어내어 그 의미와 가치를 삶에 반영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여 사람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_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직면한 문제들의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인간의 영역에서 현재를 살면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삶을 풀어내고 살아가는 그것이 언제나 배제된체 그저 잘 살면되고, 좋은일 많이 하면되고, 자기를 닦아야 하고 등등에서 원인과 결과는 많이 나와있는데 왜 그러한지 과정은 많이 생략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철학도 마찬가지구요.조금은 모호한 상태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도들은 존재들의 삶을 위한 지침서라고도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