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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아란도
read 5372 vote 0 2014.03.27 (01: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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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의세계 4월호에 실릴 선차와 선차아회에 관한 글을 쓰다보니... 전에 써놓은 이글의 요약 정도 되는 것 같다. 선차에 대해서 글을 다시 써도 기본적으로 이 글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작년 세계선차대회때 써놓은 글을 지금 올린다.

 

 

 

 

 

선차란 무엇인가.


세계선차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올해로 7회째를 맞았다. 그동안 국내에서 많은 차행사들이 있었지만, 이번 차행사는 ‘선차(禪茶)’ 라는 익숙하지 않은 문구를 달고 행하여 졌다. 우리 차문화에 선차가 등장하여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 선차가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선차란 무엇인가? 선과 차가 만나서 선차가 되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차는 선불교가 태동하던 이전에도 중국에서 음용되고 있었으나 음료보다는 약이나 치료제로서 그 용도가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주로 다른 것들과 섞어서 탕처럼 마셨다. 차를 마시는 다법이 정립이 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선차라는 용어는 당나라로 구법을 떠난 신라의 무상선사에 의해서 당나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 졌다. 무상선사는 ‘선차지법(禪茶之法)’ 이라는 불가에서 차를 마시는 다법(茶法)을 창안하였다. 무상선사가 차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다법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나와 있는 연대상으로 본다면 육우의 [다경]은 760년에 발표되었고, 무상선사는 762년에 열반에 들었다. 이리 보자면 ‘선차지법’은 [다경]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또한 육우는 도교의 사원에서 성장을 했으므로 도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또 모를 일이다. 그 시대에도 서로 차의 지식이 교류가 되었는지는. 그러나 무상선사의 선차지법과 육우의 다경에 공통점은 차를 다른 것과 섞어서 탕처럼 마시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차를 마시는 고유의 다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다만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선차지법과 다경이 등장했지만 무상선사와 육우는 차가 기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중에 그 흐름을 제대로 짚고 방향제시를 했다는 것이다. 차가 차로서 독립적 기반을 가지고 독자적 문화를 일구어 갈 기반이 제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차지법의 창안은 중국 선불교와 한국 선불교 그리고 일본의 선불교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무상선사로부터 내려온 선차지법은 선차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면서 선불교의 공안에도 영향을 미쳤다. 선(禪)과 차(茶)가 만나서 낳은 것이 선차(禪茶)다. 선불교의 선은 깨달음의 정신을 제공하고 차는 차라는 실체를 제공했다. 즉 선불교에서 선차가 나왔다. 선차의 시작은 선불교이다. 그래서 선차의 맨 처음 시작은 다른 군더더기 붙일 필요 없이 선불교적인 것이다. 소속이 분명하다. 왜 선다일미(禪茶一味)인가? 선에서 선차가 나왔기에 선(禪)이 앞서고 다(茶)가 뒤따르는 구조다. 소속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다가 앞에 올 수 없는 이유는 차는 누군가 명명해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즉 선(禪)이 차(茶)에게 정신성을 부여함으로서 비로소 차는 단순한 차가 아니라 깨달음으로서의 차(茶)이자 수행으로서의 차(茶)이자 동시에 정신이 부여되어 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다선일미(茶禪一味)라 반전이 가능해지는 이유도 이미 차가 선으로 부터 정신성을 부여 받음으로 인해서 차(茶)의 정신성이 이미 생겨났기에 가능한 일이 된다. 처음부터 다선일미는 될 수 없고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의 쌓임에서 정신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차에도 정신성의 스토리텔링이 생기게 되었고 선(禪)이 정신성을 부여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차는 이미 음용되는 차를 선불교의 깨달음을 접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과 차가 만난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리 만난 이후로 차의 정신성은 다선일미로 생명성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차를 마신 선사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차로 표현해 내기도 하였고 차를 매개로 관계를 들어내어 법을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중생교화 방편으로도 사용하였다. 선불교가 차(茶)에 선(禪)의 정신성을 부여한 이유는 필요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할 도구가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고 전달할 방식도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 할 ’ 이나 ‘ 방 ’ 처럼 차(茶)도 그러한 표현의 일종으로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차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관계를 더 지속시키고 서로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이 뛰어남을 간파했기에 다회들이 생겨난 원인이기도 하고, 다법이 만들어진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회도 그저 유희의 다회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선차의 정신성이 받아들여지면서 단순한 오락의 다회를 벗어나 그 이상의 가치를 느끼게 했던 것이라고 보인다. 차의 미학이 이때부터 급속도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떠남으로 인해서 거추장스럽고 느끼한 것들을 다 빼 버리고 남은 것이 담백한 ‘선차의 미학’ 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러므로 선차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선차 시작 이래 늘어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과 그 늘어난 모든 요소들을 다 빼 버린 것과 - 이 두 모습이 서로 공존하며 역설을 이루며 흘러가는 것이 선차의 본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차와 다도

사람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발명하면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른 곳에서 성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발견과 발명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지금에 다시 재조명된 선차는 지금이 다시 새로운 시작점이기에 재발견이고, 일본의 다도는 요소들을 통하여 영감을 받고 그 요소들을 다시 재결합하여 창작된 발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다도회들은 발명된 다도위주로 다도회들이 결성되어 있다. 그럼 이제 선차가 다시 재발견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발견된 선차는 선불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선차는 역사를 흐르고 흘러서 오다 그 이름이 희미해지고 우리의 정서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발명된 다도는 그 다도형식과 함께 실체를 가지고 우리 주변에서 살아 있다. 역사 안에만 있고 정서 안에 있는 ‘선차’와 ‘다도’라는 구체적 다법을 가지고 있는 다도가 있다. 그리고 이 다도는 현재에는 이름만 남아있는 선차의 다법으로 그 형식을 만들어서 발명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선차(禪茶)’는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일까?


선(禪)은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라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인과를 알게 된다. 서로의 관계를 보게 된다. 모든 공안들은 그러한 원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공안도 그러한 원리를 담아내면 무한정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니 공안도 발명에 가깝다. 선차도 시작은 그러한 원리를 담아서 다법을 만들어 낸 것이니 발명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에 우리에게는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이니 발견에 가깝다.


선차는 선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법과 같고, 선불교 안에서 행해지는 다법을 만든 것과 같으니, 깨달음 이후에 실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을 실천하려 함일까? 대화를 하기 위함이다. 즉 말이 통하기 위해서다. 차를 놓고 같은 공간에 있다. 차를 놓고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뭘 해야 할까? 할 일이 뭘까? 서로 통할 일 밖에는 없다. 마음을 통하기 위해서 차를 매개로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불통이면 차를 앞에 놓고 만날 일이 없다. 이것이 선에 차가 접목된 주된 역할이다. 그러다보니 역사 속에서도 다회는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가 생겨나니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뒤따라 생겨나게 된 것이다. 차는 언제나 어느 시대나 좀 더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차도 말이 통하기 위한 용도이자 마음이 통하기 위한 용도이자 관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용도이자 같은 토대를 공유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용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쓰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선차가 재발견 되었으나 이름만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다일미 다선일미 끽다거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쉽사리 선차와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현재에 우리는 그동안 선차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선차라는 이름을 찾았지만, 역사는 흘러서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이 그 사이에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 간격을 좁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금 선차는 재발견 되었지만, 고려를 거치고 조선을 거치고 근대를 거치고 현대인 지금에 우리가 접하는 차문화에는 선차라는 이름이 낯설다. 우리의 정서에는 선이 흐르지만, 그 흘러온 시간에서 선차의 느낌이 어땠는지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선차, 조선시대의 선차의 느낌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차의 역사적 흐름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다지 현실감이 없기 때문이다. 선차의 시작은 가루차였다. 시대상으로 보더라도. 하지만 선불교는 그대로나 차는 그 시대의 여러 다법들을 거치다가 말차에서 잎차로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념의 변화도 있었다. 선차도 그대로 선차이나 다법의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법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유교적 이념도 같이 묻혀 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이 우리문화의 정서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을 것이다.


선차의 시대정신

이리 살펴보면 지금 선차가 재발견이 되었지만, 선차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느낌은 역사속에서의(전통속에서의) 선차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선차는 잎차다법이다. 말차다법이 아니다. 우리의 정서가 반응하고 이 시대의 흐름을 보아도 잎차가 시대정신이다. 즉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고 역사도 시대를 흐르며 아우르다 지금 나(당신과 우리)와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선차가 시작된 시대는 가루차시대이나 지금에서 다시 만나는 선차는 잎차시대이다. 즉 이 시대에는 잎차에 현대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잎차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진행되어 가는 방향에 맞춰서 역사성과 다시 만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는 다양한 차들을 구분 없이 마시지만 그럼에도 잎차가 대세다. 많은 이들의 차생활에도 잎차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시대에서 선차는 역사적 선차이기도 하지만 지금 시대속에서 속에서 현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변화에 대응하여야 선차는 쭉 흘러갈 수 있다. 선차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선차는 한국 차문화를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한국 차문화 = 선차로 세계와 통해야 한다. ‘우리 차문화가 뭐냐’ 라고 물으면 선차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차는 선차다’ 라고 말이다.  한국차도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일본의 차문화가 뭐냐? 하면 ‘다도다’ 라고 말하듯이. 그러자면 선차의 개념과 소속이 분명해야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선차는 선불교에서 나왔고 한국의 보편적인 차문화가 되었다’ 라고 말이다.


선차가 시작된 시대에서도 선차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차를 마시는 법을 창안한 것도 그 시대가 원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가장 먼저 무상선사가 본 것이고 실천한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사찰에서 다회를 한 것도 시대정신이고, 그 차로 사부대중을 모이게 한 것도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정신적인 차문화를 확산 시키는 것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었다. 선과 차는 그 시대를 관통하게 하는 키워드 이었다. 그것을 벗어나고는 그 시대 사람들 역시 그 시대를 제대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선과 차로서 미학을 추구하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가려 한 것도 그 시대 철학을 깊게 담고자 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선과 차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나야 할 요소들을 선과 차는 서로 충족했기 때문이다. 보완했기 때문이다. 그 둘이 만나서 지금 현재의 차문화를 만들어 낸 것과 같다. 그때 이미 천년 하고도 더 큰 시간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과 같다.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 또한 선(禪)이다. 깨달음이다. 만나야 하는 둘이 만나서 아주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누가 만나게 했는가? 사람이다. 차는 사람과 사람을 통하고 이어지게 하지만, 사람은 정신과 물질을 만나게 했다. 그리고 그 둘의 결합으로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이 선을 만나고 차를 만났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미 선(禪)은 사람 안에 있고 차(茶)도 자연안에 있었다. 선도 차도 모두 먼저 발견한 자들이 있었고 그것을 또 후대 사람들이 다시 재발견해 준 것이다. 그 시간대에서 극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선(禪)과 차(茶)가 갖는 시간의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사람들도 선과 차에 반응 했고, 이 시대 사람들도 선과 차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선과 차의 쓰임을 발견해 준 것이다. 그래서 또 후세 사람들은 그냥 쓰면 되었다. 그 혜택을 지금의 우리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그것을 재발견하고 있다.


한국의 차문화인 선차는 선불교를 통해서 확산되었으나 유교적 이념과 융합되고 다시 현대적 방식들과 융합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잎차 팽다법이 선차의 현재적 변화다. ‘생활속에서 삶 속에서 피어난 선차가 진정한 한국 차문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다반사’ 가 이 시대의 선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차 행다법이나 공연을 위한 선차 행다법은 한국적 정서를 담아낸 창작 행다법이 될 것이다. 그 부분은 이제 창작의 영역이 되어 복원과 동시에 발명이 될 확률이 높다. 이 부분은 그 방향대로 또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일본다도는 일본 문화 안에서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유산들은 인류모두에게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다만 우리에게도 차문화가 있으니 우리의 정서가 묻어 나오는 차문화가 되어야 한다. 일본다법은 선차를 가져가서 일본에 맞게 만든 것이지만, 아무리 일본다법을 열심히 배우고 훈련하고 형식을 변형한다 해도 우리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훗날 우리 것으로 정착이 된다해도 그 원류는 일본이 된다. 일본다도를 배우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배우는 것에 국경이 있을리도 없고, 개인이 뭔가를 하는데 딴지를 걸 이유도 없다. 다만 ‘ 우리 차문화는 이런 것이다 ’  라는 것은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느낌이 나는 차문화 정도는 가지고 나서 변형을 하던 남의 차문화를 배운다 하던 해야 한다. 그 열정을 우리 차문화 정립하기와 ‘ 한국 차문화란 무엇인가 ’ 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차만의 정서가 묻어 나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리가 차를 마시며 차문화의 공통의 토대위에 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같은 토대위에 있다는 것을 알면 그 토대를 보호하게 된다. 함부로 훼손하지 않게 된다. 그 토대에 소속된 자신을 파악하게 되는 것 또한 선(禪)이라고도 할 수 있다. 토대안에 있는 모든 관계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차문화가 가야할 방향

선차는 시작된 시점에서 달라진 시대를 거쳐 내려오며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가 어느 정도 결합하게 되었다. 그 결합된 것이 우리문화의 정서다. 그래서 지금 선차가 왕성하던 시대만을 복원하여 선차다. 라고 하면 그 의미가 너무 협소해진다. 그래서 현재 한.중.일 삼국은 선차문화를 서로 공유하고 있으며 또 현재 차문화를 서로 교류하고 있기에 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새로운 형태의 차문화 방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보이기도 한다.


차문화도 융합과 통섭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 그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볼 수도 있고, 중국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현상이 진행되고 있기에 선차는 선불교에서 나왔으나 현대에서 다양한 사상을 경험한 현대 문화속에서 새롭게 다시 피어나고 있으므로 선차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고도 생각된다. 그래야만 역사성을(전통적인) 지니면서도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시대정신을 잇는 선차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이며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현시대는 한.중.일 차들이 합류하여 모두 한자리에서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인 차들로 인하여 다시 한국적 차문화에 그러한 부분들이 이식되고 있으며 한국화 되고 있다. 물론 일본적인 것에 더 가깝거나 중국적인 것에 더 가깝거나 하는 부분들이 보이지만,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누리는 차생활인 만큼 한국적 정서가 묻어 나오게 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계속 국적 불명이 차문화로 방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의의 선차’ 는 선불교에서 나온 선차를 이어온 것만이 선차이기도 하나 현재 그 실체는(형식) 명확하지도 않고 역사 속에서, 문헌상에서, 정서 속에서만 남아 있으나, 한국에는 선불교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선차는 한국 선불교의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광의의 선차’ 는 현재까지 흘러온 차문화를 모두 포함한 것이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우리 차문화의 뿌리가 선차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차문화도 선차적 요소가 남아 있다고 보이기에 그렇다. 현재에서 선차의 방향성을 잘 잡아서 흐르게 하는 것이 미래까지도 포괄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차는 오늘 나만 마시는 것도 아니고, 차문화를 오늘 나만 누릴 것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도 과거 사람들도 현재사람들도 미래 사람들도 차를 마시고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에서 방향성을 어떻게 잘 잡아 나아가느냐가 중요해진다. 이것 역시 우리 삶속에 녹아들어 후대로 전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으로서 차문화도 중요하다. 그 흔적을 남겨 놓아야 한다. 문화로서 예술로서 전수 되는 것도 중요하고, 학문으로 전수되는 것도 중요하다. 삶으로서 철학을 갖고 전수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이 정서 속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차문화 그 자체로서 전수되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문화가 통섭되는 형태로도 중요하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차산업으로 전수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철학과 문화와 예술은 모두 삶속으로 압축되어 스며들어야 하고 그것이 삶속에서 다시 우러나와야 한다. 그것이 차생활이다. 그리고 차가 없으면 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차산업을 보호해야 하고 차밭을 보호해야 하고 제다법을 보존하고 개발하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것이 가장 기초적인 차문화의 토대다. 이 토대위에 차문화는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 이후의 사람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방향을 또 잘 잡아갈 수 있는 토대는 지금 여기서 제공된다.


이번 세계선차대회 공연도 이와 같은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술대회 및 들차회 그리고 선차공연과 차생산지 견학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보아도 이 모두가 한데 모여야 차문화가 탄탄하게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차생산지(차산업), 차의 예술성, 차의 학문성, 차의 관계성을 통해서 차문화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현재의 차문화의 방향성을 잡아갈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나고 얘기하고 발표하고 차를 마시고 서로 계속 교류하며 흐름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이 시대의 키워드는 소통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선차도 소통으로 가야 한다. 이 시대의 선차는 소통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본래의 선차도 소통이 목적이었다.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시대의 차의 시대정신은 잎차이다. 하지만 일본이 말차문화를 유지해 온 것은 인류 차문화에서도 값진 것이다. 그만큼 차문화가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말차를 마시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과 연관된 것에서 보자면 우리의 아픈 역사가 관통하고 있지만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말차문화를 보자면 단절없이 흘러오고 리큐스타일 탄생 이후로도 리큐 스타일을 원형으로 유지해 왔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로서 대단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그 일본문화가 온전하게 지켜지기에는 동아시아가 그만큼 시대에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말차문화는 우리나라에 다시 역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도자기 문화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지금은 선차에 대한 고민을 우리 차문화의 핵심에 놓고 고민해야 한다. 세계선차대회의 명칭으로서의 선차도 선차이고, 삼국을 이어주는 차문화의 키워드도 선차이고, 우리 차문화의 본류도 선차이고, 선불교에서 깨달음의 실현으로 행해지던 차법을 가리키는 것도 협의의 의미로서 선차이고, 그 선차가 흘러오면서 다양한 것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결합한 현시대의 차문화도 광의의 의미로서 선차이다. 어디에 붙는지에 따라 조금은 성격 규정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선차는 우리의 차문화다’ 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보인다. 그래서 이 선차에 대해서 다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선차는 어느 한 곳에만 매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재발견 되었지만 선차 그 자체는 ‘차문화 그 자체의 것’ 이다. 어느 누구의 개인의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공유하고 가꾸어 가야할 문화로서의 선차이다.


현재에도 아직 눈에 띄게 차인구가 크게 늘지는 않지만, 우리 차문화는 이제 공유하는 토대를 돌아 볼 정도로는 성장했다고 보인다. 이제 우리 차문화의 문제들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고 이는 우리차문화의 철학적 과제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차문화에 철학이 현재 있는가?’ , ‘있다’  라고 답한다면 그 철학이 우리 차문화에서 나타나야 하고 그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하며, 그 철학을 표현해 내어야 하며 삶속에서 그 철학이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철학은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그 선차가 갖는 소통과 정신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이. 선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않듯이. 변화해 가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낼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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