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번 칭찬 숙제를 마친 뒤 아이들의 감상
두려워 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칭찬한 나에게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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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은 상대방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은 관찰자에 머무는 것입니다.
비난은 상대방의 상태가 우선순위이므로 그에 따른 의사결정이 유보되고
=>결국 나와 상대방의 1:1의 상황 즉 대칭의 상황이 조성됩니다.
칭찬은 상대방과 관계함으로써 관찰자인 자신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즉 관찰자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때문에 칭찬을 위해서는 관찰자는 먼저 의사결정을 해야므로 필연적으로
의사결정의 최소숫자인 2를 갖게되고 상대방의 상태는 그에 종속된
1로 확정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상대방의 상황은 2:1의 상황 즉 비대칭의 상황이 조성됩니다.
이를 토대로 위의 영상처럼 관찰자가 관찰자 효과를 깨닫기 위한 전제란
의사결정의 유보가 아닌 의사결정의 선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자 효과를 잠시 빌어 생각해본다면
모든 물질은 양자상태에 놓여 있고 이 상태는 파동성을 갖습니다.
이때 위의 동영상처럼 닫힌 구조를 갖추어 놓고 그 결과를 예측해
실험을 한다고 했을 때 뜻밖에 우리는 닫힌 구조인데도 불구하고
열린 결말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양자상태란 어떠한 확정된 상태가 아닌 파동함수에 의해
결정되는 임의의 상태이므로 관계되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중첩된 파동함수 중 하나가 선택되고 하나가 붕괴되는 식으로
그 상태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관찰자 효과란 소립자가 갖는 중첩된 파동함수가
스크린이 아닌 관찰자에 의해 먼저 선택, 붕괴되어 그 상태가 결정된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즉 스크린의 상호작용보다 앞서 관찰자의 상호
작용이 소립자의 파동함수를 붕괴시킨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저 같은 경우 위 실험에 한가지를 더 추가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관찰자를 하나가 아닌 둘을 두고 이를 A와 B로 지칭해본다면
A를 먼저 관측하게 위치시키고 B를 A보다 나중에 위치시켜 관측시킨다면
과연 결과는 A와 B중 어느 관찰자에게 영향을 더 받을까? 라는
화두의 실험을 말입니다.
* (B)
| |
=> | | A (><) B ??
| | =
*(A)
즉 소립자의 파동함수를 결정짓는 상호작용이 의사결정과 일맥상통한다고 볼때
제가 생각해본 가정이란
-의사결정의 선점은 관찰자 효과를 낳고 관찰자 효과는 높은 확률로
양자의 상태를 결정한다
입니다.
때문에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무념무상으로 사는 것보단 머릿속으로 어떠한 생각을 하는 것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 것 보다는 그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것이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것 보다는 글로 옮긴 생각을 직접 실천해보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파동함수로의 붕괴를 촉진시켜 삶의 방향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게끔 확률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부족한 제가 이곳에 굳이 글을 적는 이유도 그런 이유이기도 하구요.
단 여기서 유의해야할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관찰의 대상이 양자의 상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관객들이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를 볼 때 그 영화의 결말이
관객들이 원한다고 해서 바뀔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화는 양자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그 상태가
필름 속에 결정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파동함수가 붕괴된 상태 즉
양자 상태가 깨어진 상태라는 점입니다. 즉 위에서 이야기한 논리
대로라면 현실에서 생각대로 삶이 꾸려지지 않는 이유란
흔히 푸념하는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
불확정성 원리가 붕괴된 이미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됩니다.
이러한 현실의 확정성은 영화 설국열차를 통해 충분히 은유될 수 있는
전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바로 이 확정성이 설국열차를 박살내야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의사결정을 선점하려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일은 의사결정의 대상을
양자상태와 같은 불확정적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동될 수도 있는 것은 불확정적인 상태라는 것은 답이 없는
즉 무작위의 상태가 아니라 수많은 경계에 중첩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위의 ebs 동영상을 예로 들어보건데
칭찬이 의사결정을 선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칭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야한다는 어느 확정적인 상태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비난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혹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하고 애정어린 비난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
선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물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비난할 수 있지만 이는 하극상으로써
사회시스템에서 제제대상이 됩니다. 이에 반해 칭찬은 관계에 있어
비난보다 상당히 유연합니다.
즉 중학생인 관찰자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칭찬을 함으로써
자식이라는 포지션의 관찰자가 어머니와 아버지로서의 포지션을
넘나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관찰자=아들=어머니=아버지 의 상태가 중첩되는 것이죠.
이는 과거 제가 올린 초등학교 교실 왕따보고서라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링크: http://gujoron.com/xe/359011
여기서는 관찰자(가해학생들) = 키 큰 아이 = 키 작은 아이 = 왕따의
상태가 중첩됩니다.
이런 중첩된 상태에서 관찰자 효과를 경험한 관찰자는 스스로를
대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사결정의 주체로써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타인을 칭찬해야 했던 아이들이
과제가 끝난 후
# 30번 칭찬 숙제를 마친 뒤 아이들의 감상
두려워 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칭찬한 나에게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칭찬이 비난보다 올바른 방향이란 것은
단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칭찬이 비난보다 의사결정을 선점하고 관찰자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중첩된, 즉 양자상태를 조성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때문에 누구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확정되고 고착화된 현실 혹은 관찰자의 사고를
불확정적인 양자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설국열차로 예를
든다면 죽든 살든 열차를 폭파시켜야 하는 것이죠.
즉 실존입니다.
고착된 현실과 확정된 편견은 그대로 둔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앞으로 돌진하는 것은 결국 기차의 맨 앞칸을 점거한 또다른
윌포드를 낳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죠.
즉 생존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같은 딜레마가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칭찬은 결론을 도출한다,,,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