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는 작고 대상은 크다 의사결정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일어난다. 의사결정의 대상은 국가와 인류로 커져야 하고, 의사결정의 주체는 가족과 개인으로 작아야 한다. 그런데 집단의 의사결정은 개인이 하는게 아니라 원래 집단이 해야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작은게 아니라 일정한 절차를 거쳐 결정의 권權을 획득함으로써 작아져야 한다. 대표성의 획득이다. 문제는 집단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부족이나 가족은 지리적인 조건이나 전통문화와 같은 여러가지 이유로 생겨난 모호한 존재이다. 정체불명의 관념이다. 집단의 의사결정이란 다분히 허구다. 그 모호한 부분을 구체화 하면 주체는 개인으로 작아지고 대상은 인류로 커진다. 가장 작은 개인에서 가장 큰 인류를 바라볼 때 바른 판단은 가능하다. 주체는 사회화된 정도에 따라 부족주의≫가족주의≫개인주의로 발전한다. 부족주의는 우연히 군집한 무질서한 군중이다.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무리와 같다. 부족은 원시의 본능에 따라 2분법적인 차별로 내부에 적을 만드는 방법으로 집단 내부에 50 대 50의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선과 악, 강자와 약자,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우리편과 나쁜편으로 끝없이 나누고 차별하고 왕따시키고 이지메하는 방법으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가족주의는 욕망에 의지하며 일정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신뢰를 생산한다. 개인주의는 더 나아가 매너, 에티켓, 교양으로, 대의로 자신을 무장한다. 부족주의≫가족주의≫개인주의로 갈수록 의사결정단위의 시간적 길이가 길어진다. 보다 장기전이 되는 것이다. 부족은 우연히 만난 군중이므로 장기전을 할 수 없다. 그 현장에서 끝내야 한다. 여기서 부족이 반드시 아프리카의 원시부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시부족에서 그러한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도 애매한 부족상황이 있다. 진학 후의 첫 등교날처럼 서로 인사를 트지 않은 어색한 상황이 있다. 인생에서 무수히 그러한 부족상황과 맞닥들이게 된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숙자가 집에 갈 차비를 빌려달라고 말을 거는 수가 있다. 노숙자의 말은 보나마나 거짓말이다. 차비만 빌리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 말이 진실임을 입증할 수 있소?’ 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그 상황은 눈만 마주쳐도 무조건 노숙자가 이기는 게임이다.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상황, 정당하게 논쟁을 펼칠 수 없는 상황, 노방전도사가 계속 말을 걸어오는 상황, 변희재가 시비를 거는 상황, 일베충이 비아냥대는 상황, 논리로 반격할수록 오히려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 부족상황이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공유되는 지점을 찾아 합의할 수 있는 룰을 만들면 점차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로 된다. 포지션을 나눠갖는 형태로 점차 말이 통하게 된다. 그것이 가족상황이다. 보통은 ‘고향이 어디죠?’ 하고 묻는다. ‘고향이 남원인데요.’ ‘아 나는 임실 사는데 이거 동향사람을 만났구만.’ 하고 분위기를 맞춰본다. 뭔가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지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면 가족상황이다. 그러다가 야구경기의 투수와 포수처럼 죽이 맞게 되면 상대방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마침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 상황은 개인상황이다. 부족상황은 서로 공유되는 지점을 찾고, 가족상황은 공유되는 지점이 있고, 개인상황은 한 팀 안에 들어와 있다. 야구경기의 1루수와 2루수, 3루수처럼 자기 베이스만 책임지면 되는 상황이다. 이 순서로 사회는 발전해 간다. 거기에 맞추어서 의사결정 대상은 국가와 인류로 커진다. ◎ 부족주의 - 원시의 본능, 차별과 이분법, 집단 내부에 긴장을 준다.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밀접하게 한다. 허영심, 영웅심, 경쟁심, 군중심리, 집단무의식, 광기, 분노, 원한에 지배된다. ◎ 가족주의 – 오랫동안의 공동생활을 통해 서로간에 신뢰를 축적하고 집단의 장기적인 계획과 목표에 따라 움직인다. 우월감, 열등감, 탐욕, 지배욕, 권력욕, 성취욕, 우정, 애정에 지배된다. ◎ 개인주의 – 소속된 팀 안에서 고유한 자기 역할을 가진다. 일생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며 지성에 의해 훈련된다. 교양, 지성, 매너, 이성, 인격, 스타일, 철학, 미학에 지배된다. 이러한 구분은 집단 안에서 자신이 확실한 하나의 의사결정단위로 기능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무질서한 군중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고 하며, 그 방법은 차별과 대립, 경쟁을 통한 긴장의 유지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갈 뿐 의사결정을 해내지는 못한다. 가족주의는 서로 협의하여 실제로 의사결정을 해낸다. 개인주의는 의사결정권이 확실히 내게 있다. 내가 주식을 거래한다면 내 맘대로 하는 것이다. 승용차를 운전한다 해도 내 맘에 달렸다. 그러한 권을 획득하는데는 부족≫가족≫개인이라는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 학습되지 않은 원시의 본능에는 인간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아니다. 대개 종교의 형태로 의사결정을 집단에 위임한다. 이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오판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임을 이해해야 한다. 개미는 페로몬을 생산하여 이 문제를 해소한다. 개미집단은 같은 여왕개미의 페로몬을 공유하며 다른 페로몬을 만나면 곧바로 전쟁을 벌인다. 같은 페로몬이 뿌려진 지역 안에서 개미는 그 영역 전체를 자기 자신으로 여긴다. 그런데 인간은 뿌려먹을 페로몬이 없기 때문에 일을 벌여서 어거지로 페로몬을 생산해야 한다. 그 방법 중의 하나는 집단의 광기다. 증오와 분노, 원한을 통해서 집단이 페로몬에 취한 개미처럼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다. 종교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개미의 페로몬이 없이, 집단의 광기가 없이, 마녀사냥이 없이, 분노와 증오 없이,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개미처럼 의연하게 행동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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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없다면
종교는 구조적 필연이란 말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