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뭔가 언어에 문제가 발생할때는 막연하게 스트레스만 받았는데, 요즘은 그 차이가 발견된다.
언어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얼만큼 이해하고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언어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상호작용 내에서 언어의 메커니즘은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자기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자기 입장이 있지만,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그 '사이'에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할수 있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계산을 하려고 카드를 주었는데, 계산받는 이가 조작 실수로 카드가 아닌 현찰을 눌러 버렸지만, 익숙하지 못해서 정정하지 못하니, 현찰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치자. 물론 이런 상황이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 대해 언어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들이 있다. 손님A는 카드 결제를 원하는데, 종업원B는 잘 몰라서 그러니 현금으로 계산해라. 하는 것이다. 물론 현금으로 결제해도 된다. 하지만 손님A는 이미 마음이 상해 버렸다. 이는 손님A가 무작정 배려해야 되는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업원B는 자신이 해야 될 매너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친절하지만, 적재적소에 맞는 매너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상황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 사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찰로 해주면 어떻겠냐고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 대한 것을 자기가 판단해서 생략해 버리고, 바로 무마 하려고만 한다. 그리고 다른 종업원 역시 웃으며 잘 몰라서 그러니, 현찰로 계산 하라고 한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기분이 상해 버린 손님A는 자신이 그 상황을 다 보고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뭔가 부당한 것이다. 다 그러려니 좋은게 좋다고 넘어 가지만, 구겨진 기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종업원들은 자신들이 잘 하려고 했음에도 뭔가가 잘 안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할만큼 했다. 그런 생각으로 미리 자신들 입장을 세워놓고, 그 나머지만 손님이 부담 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손님은 이미 선택권이 없어진 것이다. 손님은 자신이 선택하기를 바라는데, 그 선택권이 없어져 버려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종업원에게도 자신의 입장이 있지만, 그 입장을 배제하고 손님과 상호작용하는 언어를 취했다면, 손님에게는 여전히 선택권이 있게 된다. 현찰로 계산 하더라도 손님이 종업원을 배려 해주는 선택을 취할 수 있다.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는 방식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자기 입장을 배제 시켜야 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손님A가 기계 조작의 문제를 종업원B가 해결하도록, 개입하지 않고 어느쪽으로든 아직 판단을 하지 않고 있는데, 종업원 B와 종업원C가 그 상황에 대한 해명을 자신들 입장에서만 하고, 현찰 계산 쪽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손님A가 먼저 현찰로 계산 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손님A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종업원B와C가 그 상황을 무마 하려는 쪽으로만 분위기를 잡아 가기에, 손님A는 자신은 카드 결제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찰 계산을 해야 하는 상황에 스트레스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현찰이 없었다면, 끝까지 카드 결제를 해야 하고, 기계 조작이 능숙한 사람을 데려 와야 한다. 규묘가 적다면 몰라도 규묘가 크다면 그 음식점 이미지는 추락한다. 규묘가 있는 곳에서 카드 결제가 안되어 종업원들이 몰려와 현찰 계산쪽으로 바람을 잡거나, 한 마디씩 다 거든다면, 이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다. 상황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보다는, 종업원 자신들 일을 해결하기 좋은 방향으로만, 손님에게 뭔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손님은 종업원이 취해줄 언어적 태도의 절차가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종업원 자신들 난처하지 않도록 손님이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웃으면서 친절하게 현찰계산 해달라고 한다. 해야 할 말은 생략해 버리고, 자신들 입장에서만 친절초식을 구사하게 된다. 늘 그렇게 친절초식이 먹혔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음식점으로 잡았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 흔하다. 그 쉬운 미안합니다. 말 한마디 제때 하는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기 입장 배제 시키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이다.
곧 죽어도 갑의 위치에 있고자 하는 생각들이 언어의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보통 GDP가 오르고 잘 살면 뭔가 다 해결 될 것처럼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언어의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진짜 수준이다.
'표준의 문제'가 있다. 언어도 표준이 있다. 서비스에도 표준이 있다. 우리는 이 표준에 미치지 못한 손님을 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표준에 맞지 않는 종업원의 태도 역시 능력 미달이다. 좋은게 좋다고, 살다보면 이런일 저런일 다 있는데, 언제 자신도 그럴지 모르니, 보험든셈 치고 넘어가자. 이런 심리들이 깔려 있다. 그런데 아니다. 모두가 이심전심 공모해서 자꾸 표준을 무시해 버리면, 더 나빠질 뿐이다. 작은 규묘는 덜 티가 나므로 상관 없지만, 커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작은 것을 크게 키우면 마인드 역시 매너 역시 마찬가지로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표준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저 웃는다고 해결 되는게 아니다. 아는 사람은 그렇다고 친다 해도,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경우가 더 많다. 표준에 미치지 못하면 시끄러워진다. 표준에서 서로 만나면, 매끄러워 진다. 불필요한 마찰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종업원만 손님을 배려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손님도 종업원이나 사업주를 배려해야 한다. 서로 상호작용 속에서 주고 받는 관계가 성립되기 떼문이다. 손님은 공간과 음식과 서비스를 재화로 교환한다. 종업원은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댓가를 재화로 교환한다. 사장은 이 모든 것이 모이도록 공간과 시간과 재화를 투여해 다시 재화로 이익을 교환한다. 이 셋의 입장들이 만나서 그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언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공간은 순간적으로 닫힌계를 형성하여, 그 공간안에서의 메커니즘을 작동 시킨다.
부드럽게 가려면 언어가 가장 중요하다. 표준에 부합하는 언어와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것이 서로의 삶의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다. 늘상 공간에서 형성되고 공간을 벗어나면 다시 사라지는 이런 관계들의 역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음식점으로 예를 들었지만,음식점만이 아니고, 다방면에서 이러한 일들과 관계는 서로 얽히고 얽힘이 다시 해제되는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된 패턴이 일상을 이루고 있다. 이 패턴의 반복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이 삶이다. 삶은 얽힘과 얽힘의 해제가 이루어지는 반복된 패턴의 쌓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무마가 먼저인 것이 아니다. 사건은 결대로 흘러간다. 결대로 가지 못하면 막히기 때문에, 누군가 그 상황을 참지 않으면 사단이 생긴다. 무마는 나중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할때도 있지만, 단 시간 혹은 순간일지라도 상대의 판단을 자기판단화 시키지 말아야 한다. 결정권은 그 상황의 매커니즘 안에서 주도권을 가진 자가 결정한다. 그런데 미리 자기입장 결정해놓고, 상대에게 맞추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언어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기 배제가 안되어 있을때 흔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등떠밀리듯이 밀려 다닌다. 아직 무마 단계가 아닌데 무마부터 하려고 한다. 누구나 겪는 감정혹사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참고 넘어가면 된다라 한다. 과연 그럴까? 언어의 문제가 바로 잡히면, 언어를 적재적소에 맞게, 상황에 맞게 사용하면, 감정혹사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표준에 대한 것을 묻고 있는데, 자기를 개입 시킨다. 표준에 대한 이해가 있는가를 묻고 있는데, 동문서답한다. 표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선진국 아니다. 세계시민도 아니다. 자기의 기준이 세계의 기준이라는 그런 마인드 없이는 표준에 대한 개념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는 미학적 기준과 맥이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고 자기화 시킬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표준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표준화가 되어야 무엇인가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나열이 아닌 쌓임이 일어나게 하려면 말이다.
삶에서도 이런 마인드가 있다면, 그 삶!!!!은 그 무엇일지라도 참으로 괜찮은 삶일것 같다.
*사진: 터키 시위 사진....중동의 표준을 만드는 사진....내 생각.
상황에 따른 정의의 언어, 표준의 언어, 객관화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러시아에 오래 산 사람으로서 여기 장사(가계에서)표준은 판매자가 킹이다 였다고 봅니다.
그 사회에서 그대로 적응하고 살았지요. 지금은 개방후 20년지나 외부와 상호작용이 많으니
혼재의 시대라 보여지고 내년초 동계올림픽, 18년 월드컵축구등을 거쳐 표준언어가 정립되어가리라 생각됩니다.
구쏘련, 구 동독, 구 동구 맛을 본 사람으로서 표준화 과정이 한세대를 넘어야 가능하다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도(지도부가) 잘해야...
우리도 한세대(?) 만에 정의의 언어의 표준화 문턱을 넘을려다가 다시 사이비 통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보고요^
재밌는 현상은 표준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표준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재들 뭔얘기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자기 수준을 드러내면서도 진짜 자기가 뭔얘기 하는지 모릅니다.
소로우가 시골 농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농부의 인생은 채 한시간 짜리밖에 안된다는 식으로 표현한게 그런거 아닌가 싶습니다.
100년을 살아도 하루살이 인생이 있고,
하루를 살아도 100년 더 나아가 영원으로 연결되는 인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인류 족적에 진짜 영웅으로 사는 사람들
루터 킹, 소로우, 데스몬드 투투, 만델라, 김구, 류관순, 간디, 본훼퍼 이런 사람들에게 숫자적인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요.
이 사람들은 표준어를 발견하고 새로운 단어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준 분들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아, 동렬님도 여기에 이름을 올리시려나?
氣가 起하면 수백 수천년을 뻗어가나요?
모두 '공동의 적'을 호랑이라고 보는 사람들 같아요.
그것을
토끼라고 보거나 아예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나타난 범선을 )
인식하지 못하는 종족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온 선구자들.
표준 글입니다.
표준 말입니다.
그런 표준이 소통의 방식으로 자리하면 좋겠네요.
"표준에 미치지 못하면 시끄러워진다. 표준에서 서로 만나면, 매끄러워 진다."
이 말씀은 아포리즘으로 가져가도 좋을 것 같다는........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