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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042 vote 0 2013.05.14 (13:32:57)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참고할 수 있다. 길을 가다가 바위틈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요는 의미다. 소유지향적인 서구인은 그 꽃을 꺾어 서재의 꽃병에 꽂아놓는데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존재지향적인 동양인은 가만이 머무르며 그 꽃을 감상하는데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자연을 떠올려도 좋다. 무위는 불개입이다. 대상에 개입하는데 의미를 둘 것인가 아니면 불개입하며 지켜보는데 의미를 둘 것인가?


    그런데 소유와 존재로 대비시킨다면 어눌하다. 두 개념이 대칭된다고 볼 수 없다. 추상과 구상의 대비로 봄이 적당하다. 추상은 사건이고 구상은 사물이다. 에리히 프롬의 보고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동양의 추상적-사건지향적 사고와 서구의 구체적-사물지향적 사고로 대비시켜야 한다. 사건은 자연에 그저 존재하는 것이고 사물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어디까지 사건에 개입해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관측자의 포지션 문제다. 바로 깨달음이다.


    ◎ 동양의 추상.. 사건지향적 사고.. 연역의 깨달음
    ◎ 서구의 구상.. 사물지향적 사고.. 귀납의 분석력


    에리히 프롬은 그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것이며 그것은 얼핏 스쳐간 깨달음이다. 그런데 깨달음은 서구에 없는 개념이다. 반면 동양은 유교, 불교, 도교 할 것없이 깨달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깨달음은 사건 안에서 관측자의 포지션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를 사건이 아닌 사물로 본다면 관측자의 포지션은 없다. 관측자의 포지션이 없으면 엮임이 없다. 엮임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면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으면 시를 쓸 수 없다. 그 감동을 전할 수도 없고 남길 수도 없다. 그러므로 꽃을 꺾어서 화병에 꽃든지 어쩌든지 해서 사건을 유발시킴으로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당신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호랑이를 발견했다고 치자.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가는 사람을 멈춰 세우고 ‘있잖아요. 내가요. 호랑이를 봤걸랑요.’하고 말을 걸 것인가? 어색하다. 상대방이 ‘안 물어 봤걸랑요.’ 하고 면박을 주면 망신이다. 그러므로 꽃을 꺾든지 어떻게든 해서 타인에게 말을 붙일 빌미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의미의 추구다. 그 장면은 어색한 포즈가 된다. 점차 억지스런 연극으로 된다. 자연스럽지가 않다. 소외와 부조리다. 이것이 서구의 실패다.


    소유는 사물에 대한 태도이고 존재는 사건에 대한 관점이다. 그런데 존재가 윗길이다. 사건이 사물에 앞선다. 사건 안에 사물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부터 교정할 일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확 바꾸는 데서 인문학적 사유는 출범한다. 깨달음의 관점을 획득하기다. 말을 붙일 수 있다.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 세상을 향한 나의 발언권을 획득할 수 있다. 부조리의 극복을 통한 의미의 획득이다.


    사건은 서로 엮여 맥락을 이루고 있고 사물은 낱낱이 흩어져 있다. 사건의 엮임을 통한 맥락의 연결에 의해 의미가 얻어지고 발언권이 획득된다. 흩어진 사물들에서 보이지 않는 엮임을 찾아 사건의 관점에서 보는 시야를 획득해야 한다. 그것이 서구에 없는 동양의 깨달음이다.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기(起)에 포지셔닝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모르는 사람에게 호랑이를 봤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창피당하지 않고 말이다.


    ◎ 사건 – 엮여있다. 통짜덩어리를 보는 시선
    ◎ 사물 – 흩어졌다. 파편화된 부스러기를 보는 시선


    뉴턴의 만유인력이 그러하다. 사물을 보는 관점으로는 결코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 사이에서 숨은 매듭인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없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엮임을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할 때 만유인력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론물리학의 개가라 할 표준모형이라도 그러하다. 표준모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대칭성과 상호작용 개념이다. 소립자들 사이에 엮임을 유발하는 보이지 않는 매듭의 존재를 규명하고 있다. 물질은 강력과 약력, 중력과 전자기력이라는 네 개의 투명한 매듭에 의해 서로 엮여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를 열어젖힌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도 그러하다. 사물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절대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관측자의 포지션을 바꾸면 쉽게 납득된다.


    너는 너, 나는 나다. 그러나 의미의 만유인력에 의해 서로 엮여있다. 그러므로 내가 호랑이를 보았을 때 당신도 호랑이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내가 오늘 본 것은 당신이 어제 본 그것이었다고. 그러므로 나는 바위틈에 핀 한 송이 꽃을 꺾을 수 없다고. 당신이 어제 맡은 그 꽃 향기를 내가 오늘 맡았듯이, 내일 누군가 맡을 것이므로. 나는 그 꽃 앞에서 내일 올 누구를 기다릴 뿐이라고. 그렇게 사건의 기승전결 안에 선다고.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보는 관점도 그러하다. 사물을 보는 관점으로는 고흐의 그림이 왜 그렇게 비싼지 납득할 수 없다. 사물로 보는 관점으로는 워렌 버핏과의 점심 한끼가 왜 40억원의 가치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낸시랭의 퍼포먼스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접수할 수 없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되어가며 무언가를 낳는다. 낳아서 자손을 퍼뜨린다. 그러므로 가치가 있다. 사랑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존재를 사건으로 보느냐 사물로 보느냐에 따라 지와 무지가 갈린다.


    사건은 엮여있는 실의 매듭을 보고 연역한다. 사물은 풀어헤쳐진 실의 끝단을 보고 귀납한다. 사건은 추상하므로 이름이 없고, 사물은 구상이므로 이름이 있다. 만약 명명되어 있다면 알려진 지식이므로 사유하거나 창의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지식의 전달은 명명된 사물을 따라가는 귀납의 방법을 쓰며 이 때문에 세상의 온갖 오류가 일어난다. 역설과 아이러니가 난무한다. 모순과 딜레마와 부조리가 판을 친다. 이때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관측자의 위치를 바꾸고 이름없는 그 사건에 명명함으로써 정상에서 전모를 바라보게 하는 시선을 제공하면 곧 그 분야의 대가가 된다.


    19세기의 추사가 그러했다. 그 시대를 규정한 것이다. 불가의 스님과 유가의 선비가 대립할 때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시선을 제공했다. 인상주의를 완결시킨 세잔이 그러했다. 역시 한 시대를 규정했다. 원근법을 완성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러했다. 르네상스의 화룡점정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이 그러하고 앤디 워홀의 팝 아트가 그러하다. 소승불교의 난삽함을 극복한 대승불교의 대두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위대한 명명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손을 찾아내고 숨은 매듭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흩어진 부스러기 사물을 주워모아 하나의 사건을 구축함으로써 세상을 통짜덩어리로 바라보게 하는 시선을 제공했다.


    사물은 공간에 놓여있고 사건은 시간따라 흘러간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는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없다. 공간+시간의 통짜덩어리를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깨달음이다. 관측자의 포지션을 지정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사물은 관측자가 개입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노자는 무위자연이라 했다. 아직 개입해 있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아직 그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을 걸 수 없다. 발언권이 없다. 의미가 없다. 만들어야 한다. 눈이 마주쳐야 한다. 내가 웃을 때 당신도 웃어야 한다. 소통해야 한다. 만유인력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만유인력에 의해 우주는 통섭되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대에게 말을 걸 수 있다.


    ◎ 사건 – 무위의 불개입 전제 – 개입과정에서 의미가 탄생한다.
    ◎ 사물 – 개입해 있다는 전제 – 의미가 없으므로 어색해진다.


    전제는 상부구조, 진술은 하부구조다. 사건은 상부구조이므로 관측자가 내부에 있고 사물은 하부구조이므로 관측자가 바깥에 있다. 사건은 관측자가 사건에 포함되므로 관측자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야 전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포메이션이 성립하고 포지션이 나눠진다. 주관과 객관이 성립하고 역설과 모순과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세상의 모든 다양함과 풍성함과 화려함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인사하고 말을 걸지 규정하는 것이다.


    존재를 사물로 보면 관측자가 사건에 개입할 수 없다. 이미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매듭을 풀 수 없다. 관측자의 포지션이 없다.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그래서 꽃을 꺾든지 어떻게든 일을 벌이고 만다. 왜냐하면 창피하니까.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같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나 여기 왔걸랑요. 알아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알아줄때까지 어필해야 한다. 오줌을 싸서 보모의 주의를 끌려는 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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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설이 작동하여 헷갈리는 지점입니다. 사건은 상부구조에서 관측자가 안에 있으므로 개입하는 절차가 관측되어 맥락이 연결되니 의미가 있으므로 구태여 대상에 개입할 이유가 없고, 사물은 하부구조에서 이미 개입되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므로 개입하는 절차가 없어서 어색해지고 소외가 일어나며, 따라서 없는 의미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대상에 개입하여 말썽을 일으킵니다.

 




[레벨:11]큰바위

2013.05.14 (20:17:52)

사물과 사건을 이해하는 

이거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여전히 사건을 사물로 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금 어떤 갈등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데, 

모든 일이 사건-사물의 시각으로 보이니 어쩌죠?

전제가 잘못되었는데, 그걸 보지 못할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도 상황의 매듭을 풀지 못하게 하거니와

그러다보니 누가 물어보지도 않는다는 거, 


그러면 이런 사건은 그냥 사물에 머물어 있기에 손 떼야 하는거죠?

무위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그저 속만태우고 있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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