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이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 안 다니고 성당 다니는 사람입니다.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데 견성을 해 버렸습니다.
체험 자체는 오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체험 이후에 오감에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 알 뿐입니다.
그래서 견성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기억과 감각에 남은 흔적만 되새길 뿐이지요.
그러나 아는 스님도 없어서 이를 검증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스님보다는 동렬님께 묻는 것이 더 제대로 검증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체험이 무엇인가 해서 절의 법회를 참석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지 스님과 참석자 사이에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스님은 분명 무언가를 아는 분이지만 어느 제자도 스님의 말을 알아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자꾸 견성이라는 단어를 쓸 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지만, 제 부족한 표현력을 탓하며 당분간은 계속 이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체험이 낳은 결과를 구조론으로 철저히 검증받아 보고 싶습니다.
제가 입자의 사고에서 질로 넘어갔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제 혼잣말을 몇 번 하겠습니다. 망상이 섞여 있으면 철저히 부숴주시길 청합니다.
1. 누가 저한테 깨달았냐고 물으면 저는 깨달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누가 저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깨달음 같은 것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거친 비유지만 견성은 불덩이를 손으로 만진 후에 손에 남은 화상입니다. 손에 화상을 입은 것을 보고 "아 내가
무언가 뜨거운 것을 만졌구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불덩이를 만졌다는 표현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화상은 입었는데 내가 무엇을 만졌는지도 모릅니다.
3. 수행을 많이 하면 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저는 "수행의 양과 견성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수행을 하면 견성할 수도 있고, 수행을 해도 견성하지 못할 수도 있고, 수행을 안 하고 견성할 수도
있습니다.
4. 견성을 어떤 척도로 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가 만약 "나는 3일 동안 삼매에 들 수 있으므로 견성했다" 라고 말한다면 이번에는 4일 동안 삼매에 드는 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또 5일 동안 삼매에 드는 이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6일... 그러니 평생 가도 답이
안 나오게 됩니다.
"나는 오감을 극복했으니 견성했다"라는 이가 있으면 이번에는 누가 칼로 너를 찔러도 괜찮냐고 묻는 이가 나옵니다.
여기에 한 번 찌르는 건 참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두 번 찌르면 어쩔래? 하는 질문이 또 이어집니다.
견성을 말하는 순간 이런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5. 체험 후에 사고에 약간의 전환은 있었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흐름에 맡기는 것은 쉬워집니다. 어떤 행위를 하되, 그 행위가 불러올 결과의 좋고 나쁨에 대해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나쁜 결과를 불러올 것을 알면서 일부러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필요한 일은 할 뿐입니다. 동렬님의 표현을 빌자면 기승전결에서 '기'의 주인이 되고 '결'에서는 손님이 됩니다.
'기'에서는 주고 '결'에서는 받습니다. 결을 미리 생각해서 기를 외면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6. 생각이 일어나나 그 생각이 일어나는 뿌리가 사라졌습니다.
체험 전에는 생각이 머릿속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일어나는 지점을 틀어막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틀어막는 노력을 하는 만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각이 더 일어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일어나는 지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틀어막을 노력을 해 보려고 해도 틀어막을 지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친 비유지만, 예전에는 생각이 발 달린 도깨비여서 최소한 발목은 잡아챌 수 있었으나 지금은 발 없이 날아다니는
귀신불 같은 것이라 잡을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그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이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소승의 태도다면 저 또한 소승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얻으려 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그저 주어졌습니다. 누가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저 이제 출발선 상에 섰을 뿐입니다.
나의 삶에서 세상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대승의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동렬님의 말씀을 미루어 볼 때 비워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소승인 것 같습니다.
저는 채우고 싶은 갈증을 느낍니다. 갑자기 커다란 그릇이 하나 놓여졌는데, 무엇을 채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대승의 지혜를 채울 수 있을까요?
어느날 갑자기 아 난 깨달았다 이렇게 느껴졌다는 건가요?
체험이라고 하셨는데, 뭘 체험했다는 이야긴지 잘 못알아듣겠습니다.
네. 그냥 저절로 알게 됩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제가 앞의 허공을 보는 것과, 앞의 허공이 저를 보는 것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제 손이 여기에 있는데 제 손의 느낌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아일체 또는 불이일원론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감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되고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첫 번째 겪는 체험일 뿐입니다.
그 뒤로 세 번이 더 있었는데, 첫 번째 체험은 말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나
그 이후의 체험은 아직 설명할 만한 방법을 못 찾았습니다.
다만 깨달음이라 생각했던 것이나 일상 생활의 경험이나 결국은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다르게 느낀 것은 보는 입장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동렬님께 검증받는다고 말한 것도 망상에 불과합니다. 누구에게 검증받을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다만 알면서도 미처 닦아내지 못한 망상과 습성이 남아 있기에 몸부림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앞의 허공을 보는 것과, 앞의 허공이 저를 보는 것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제 손이 여기에 있는데 제 손의 느낌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아일체 또는 불이일원론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감합니다.
--- 이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셨다는 건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에 느끼는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때의 제 느낌이었을 뿐이지요.
누구나 느끼는 것도 아니고 꼭 느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전까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느끼게 되었을 뿐이지요.
그런 느낌을 평상시에도 항상 가지고 계시다면 이미 깨달으신 겁니다.
느낌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어떤 느낌이든 느낄 수는 있습니다.
느끼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느낀다면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강은 강이 아니다고 하다가
다시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로 바뀌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사는 연주를 해야 깨달음이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깨달음이오.
개인이 무언가를 느낀 것은 그저 개인의 사정일 뿐이고
세상이라는 무대 안에서 제대로 된 자기를 그려내야 합니다.
그 그림 안에서 그 사람이 어떤 포지션에 자리잡고 서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백번 공감합니다.
저도 이제 하나의 느낌을 받았을 뿐입니다.
앞으로 세상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큰 숙제로 던져졌습니다.
아직 저는 빈 그릇이고 백지입니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자리에서 채움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구조론에 끌림을 느낍니다. 동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구조론을 몇 사람이 공부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조론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이미 세상은 구조론의 시대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렬님도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 후의 전파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시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인간이 완전성을 손에 넣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완전성을 탐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통이 있기에 인간은 완전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성을 내 손 안에 움켜쥘 수는 없으나
완전성과 소통할 수는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도심에 뛰어들어 세상과 소통을 하였고, 성철 스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였습니다.
소통의 방식은 시대와 발을 맞추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의 시대에는 사람 사이에
뛰어드는 소통이 필요한 시대였고, 성철 스님의 시대는 기승전결의 기에서 세상에 큰 종을 울림으로서
소통을 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저 또한 과거의 소통이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따라하는 우는 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숭산 스님이 성철 스님을 두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은, 진정으로 소통의 본질을
보지 못한 데서 온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검증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견성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면,
그래서 인정을 받고 검증을 받으려 한다면,
그건 깨달음이 아니지요.
자연히 그 견성이 삶으로 우러나와 다른 사람이 그 깨달음을 알아주는 일이 일어나아겠지요.
본인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겁니다.
기독교에서도 이런 저런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나대곤 하는데, 거기에 홀리는 사람들이 바보지요.
진정한 깨달음은 그냥 묵묵히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왜죽어? 하면 곤란하지요.
자기가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깨달은 후에도 삶으로 이야기하다보면 세력이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따르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따를 것이고,
따르지 말라 해도 따를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선택 받은 사람들은 운수대통...... (운수대통이 당장 보기에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다 망하는 길이겠지만........)
저도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 대승으로 나가지 못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ㅎㅎㅎ (이 말은 믿거나 말거나)
맞습니다. 알릴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같은 경험이 있으시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었습니다. 더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
망상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소승적인 태도인데
대승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견성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사건입니다.
내가 어쨌다는 식은 보고할 이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