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새벽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잠결에 뉴스를 들었지만, 그저 무덤덤했습니다.
일어나서 씻고, 서너시간이 지나서야 슬슬 화가나기 시작했습니다.
덕수궁 앞으로 뛰쳐나가고, 시민 분향소를 못만들게 방해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했고,
경찰들에 둘러 쌓이고, 그 경찰의 인의 장막을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손에 손을 잡고 길을 열어보려 했지만, 결국 길은 굳게 닫혔습니다.
홍대에서 르페님과 박현천님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후에 곰다방 님이 합류해서 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곰다방님은 떠나고, 셋이 남아서 새벽 4시가 될때까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얘기하고, 돌아보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하셨는데도, 여느때와 다를바 없는 홍대 젊은이들이 얄미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우연인지...
그 다음날인 24일 5시 34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손목시계는 24일 5시 34분에서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원래 23일 시계를 차고 나갈때, 날짜가 22일로 되어있어서 23일로 고쳤는데,
만약 고치지 않았더라면, 시계는 23일 5시 34분을 가르켰겠구나 싶으니까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님께들은 얘기지만, 제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날에도 집안 벽시계가 멈췄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건전지를 갈아끼우셨는데도, 하루를 못가고 시계는 멈췄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영결식 전날 시청광장을 개방하지 않아서 덕수궁 돌담길에서 거행된 시민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정말 방심하고 있을 적에 나도 모르게 그간 그렇게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밤새 한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영결식날 아침에 씻고, 옷입고, 반팔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메려는데, 또 울컥해서 손이 떨려서 넥타이가 메지질 않았습니다.
몇번을 실패한 끝에 겨우 넥타이를 메고, 어머니께 영결실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시청광장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옆에는 젊은 여자와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고 앞에는 외국인 두명이 앉았습니다.
정말 울고, 또 울어서 더이상 눈물이 메말랐겠구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래도 또 터져나왔습니다.
우는 모습이 처량했는지, 앞자리에 외국인이 티슈를 건내주었고, 또 우니까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물을 주었고, 또 저 쪽 멀리에서는 노란 풍선을 주었습니다. 울기만 하면 주변에서 뭔가를 주나봅니다.
4~5시간 꼼짝 안하고, 모자도 안쓰고 한자리에 앉아있었더니, 양 팔과 얼굴이 타버렸습니다.
반나절 그을린 얼굴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있었고, 눈물을 닦고 또 닦았던 티슈는 완전히 걸레처럼 부숴져버렸습니다.
영결식이 끝나고 겨우 추스리고, 근처에서 르페님과 곰다방님을 만났습니다.
곰다방님의 지인 몇분과 함께 술자리를 하였습니다. 게중에는 목사님도 계셨고, 봉하마을 분도 계셨습니다. 헤어질 때까지 한시도 쉬지않고 눈물을 쏟아내는 분도 계셨고, 중간에 돈을 받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주는 어느 노인에게 부탁해서 다함께 <아침이슬>을 목이 터져라고 불렀습니다.
난 정말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분노가 슬픔이 되기 까지 그리 시간이 걸릴줄 몰랐습니다.
슬픔이 다시 사랑으로 되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잠결에 뉴스를 들었지만, 그저 무덤덤했습니다.
일어나서 씻고, 서너시간이 지나서야 슬슬 화가나기 시작했습니다.
덕수궁 앞으로 뛰쳐나가고, 시민 분향소를 못만들게 방해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했고,
경찰들에 둘러 쌓이고, 그 경찰의 인의 장막을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손에 손을 잡고 길을 열어보려 했지만, 결국 길은 굳게 닫혔습니다.
홍대에서 르페님과 박현천님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후에 곰다방 님이 합류해서 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곰다방님은 떠나고, 셋이 남아서 새벽 4시가 될때까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얘기하고, 돌아보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하셨는데도, 여느때와 다를바 없는 홍대 젊은이들이 얄미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우연인지...
그 다음날인 24일 5시 34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손목시계는 24일 5시 34분에서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원래 23일 시계를 차고 나갈때, 날짜가 22일로 되어있어서 23일로 고쳤는데,
만약 고치지 않았더라면, 시계는 23일 5시 34분을 가르켰겠구나 싶으니까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님께들은 얘기지만, 제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날에도 집안 벽시계가 멈췄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건전지를 갈아끼우셨는데도, 하루를 못가고 시계는 멈췄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영결식 전날 시청광장을 개방하지 않아서 덕수궁 돌담길에서 거행된 시민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정말 방심하고 있을 적에 나도 모르게 그간 그렇게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밤새 한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영결식날 아침에 씻고, 옷입고, 반팔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메려는데, 또 울컥해서 손이 떨려서 넥타이가 메지질 않았습니다.
몇번을 실패한 끝에 겨우 넥타이를 메고, 어머니께 영결실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시청광장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옆에는 젊은 여자와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고 앞에는 외국인 두명이 앉았습니다.
정말 울고, 또 울어서 더이상 눈물이 메말랐겠구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래도 또 터져나왔습니다.
우는 모습이 처량했는지, 앞자리에 외국인이 티슈를 건내주었고, 또 우니까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물을 주었고, 또 저 쪽 멀리에서는 노란 풍선을 주었습니다. 울기만 하면 주변에서 뭔가를 주나봅니다.
4~5시간 꼼짝 안하고, 모자도 안쓰고 한자리에 앉아있었더니, 양 팔과 얼굴이 타버렸습니다.
반나절 그을린 얼굴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있었고, 눈물을 닦고 또 닦았던 티슈는 완전히 걸레처럼 부숴져버렸습니다.
영결식이 끝나고 겨우 추스리고, 근처에서 르페님과 곰다방님을 만났습니다.
곰다방님의 지인 몇분과 함께 술자리를 하였습니다. 게중에는 목사님도 계셨고, 봉하마을 분도 계셨습니다. 헤어질 때까지 한시도 쉬지않고 눈물을 쏟아내는 분도 계셨고, 중간에 돈을 받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주는 어느 노인에게 부탁해서 다함께 <아침이슬>을 목이 터져라고 불렀습니다.
난 정말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분노가 슬픔이 되기 까지 그리 시간이 걸릴줄 몰랐습니다.
슬픔이 다시 사랑으로 되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노짱민의 바른생각, 철학과 시스템을 배우고 전개해 나가야 하겠지요...
드늦게 2002년 대선 후보연설 동영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