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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614 vote 0 2022.01.21 (11:20:26)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이므로 하나부터 열까지는 숫자를 금방 알게 되었을 것으로 믿지만 착각이다. 원시 부족민은 숫자를 모른다. 하나, 둘은 아는데 셋을 모른다. 셋을 모르므로 셈을 모른다. 셋부터 셈이 시작되는 셈이다. 둘과 셋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


    그 벽을 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그 벽을 넘었을까? 넘지 못했다. 부족민이 3을 모르는 이유와 현대인이 구조를 모르는 이유는 같다. 서울대 나온 사람이 점쟁이를 추종하는가 하면 대학교수가 환빠 짓을 하고 창조과학회에 출입한다. 3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링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점프한다. 잘 나가다가 중간에 갑자기 끊어진다. 엉뚱한 곳에 가서 붙어버린다. 괴력난신에 허무맹랑에 견강부회다. 유감이게도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학습된 것을 반복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다.


    2와 3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2는 대칭이다. 나와 대칭시킨다.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이는 손에 떡을 쥐고 있다. 엄마는 눈으로 아이를 주시하고 있다. 귀로는 음악을 듣고 있다. 대상과 연결된 상태, on air 상태, 라이브 상태다. 연결되면 변화에 즉각 반응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자극에 반응하는 동물이다. 상대가 반응할 때 인간은 현명하다. 지식인들이 좀 아는 이유는 자기 전문분야에서는 반응하는 구조로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구를 사용하여 반응을 끌어낸다. 도구가 없는 사람은 감탄하게 된다. 


    도구를 이용한 자극과 반응으로 충분하므로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점프한다. 대상을 우상화 하는 것이다. 사랑이든 자유든 도덕이든 반응을 끌어내는 도구다. 반응이 끊어지면 우상으로 섬기며 절한다.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절을 한다.


    셋을 아는데 넷은 모르겠다는 부족민은 없다. 한셋, 둘셋, 셋셋이 넷, 다섯, 여섯이다. 일곱부터는 열에서 뺀다. 열에서 셋을 빼면 일고배, 둘을 빼면 여덜배, 하나를 빼면 아호배다. 옛말이다. 단박에 열까지 간다. 많은 경우 나눗셈이 잘 되는 12까지는 단번에 가버린다.


    2와 3 사이의 장벽에 주목해야 한다. 원시 부족민이 생각이라는 것을 안 하고 편히 잘 사는데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압박이 떨어진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눗셈의 출현이다. 골때리는 나누기가 먼저 등장하고 셈이 나중 등장한 것이다. 나누기는 초딩들도 어렵다.


    너와 나, 원인과 결과, 진보와 보수, O와 X 정도를 인간은 감당할 수 있다. 대칭에 의해 직결되니까 셈이 필요 없다. 너와 나 사이에 도구를 놓으면 3이다. 그런데 도구와 나의 일부로 여기므로 2로 돌아간다. 나와 자동차와 도로가 3이다. 그런데 나와 자동차를 합친다.


    구조는 3이다. 3은 균형이다. 밸런스는 강하게 저항한다. 상태의 변화에 항거하며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3은 안정된 구조를 이루고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반응한다. 3은 안정이며 변화를 해결하며 5로 나아간다. 3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미 5를 알고 있다. 


    반대로 5를 모른다면 3을 모르는 것이다. 인류가 3을 발견한 즉시 나눗셈 때문에 12까지 갔다. 12진법은 광범위하게 쓰였다. 곱하기는 몰라도 된다. 덧셈을 반복하면 곱셈이다. 부족민은 쌓기법을 쓴다. 한 겹을 쌓고 한 겹 더 쌓으면 곱셈이다. 열심히 쌓다 보면 해결된다. 


    나눗셈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잘못하면 칼부림 난다. 공정성 문제는 부족민 사회라도 예민한 문제였다. 평등한 부족민이 사냥한 고기를 똑같이 나눠 가지기는 힘들었다. 그것은 정말 골때리는 문제였으므로 인간들이 살아보려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족장 형님한테 칼 맞지 않으려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인류는 홀짝밖에 모른다. 3을 아는 척하지만 모른다. 3을 알면 5를 알고 5를 알면 세상을 다 아는 것이다. 우리는 3을 2로 바꾸는 실수를 저지른다. 3은 너와 나 사이에서 중간자다.


    그런데 3을 중립으로 두지 않고 기어이 내 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 반응을 끌어내려고. 내 눈으로 봐야겠다.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 내 손에서 떨어지면 불안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2로 퇴행해 버린다. 아기를 보모에게 맡겨놓으면 3이다. 보모를 믿고 외출할 수 있나?


    3이 무엇일까? 3은 비례다. 내가 1인데 저쪽이 2면 둘 사이에 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비례 1/2이 있다. 하나는 홀, 둘은 짝, 셋은 비례다. 1/3이다. 부족민들은 삼각형을 보고 3을 이해했다. 돌을 떼어서 뾰족한 창날을 만들려면 모서리를 떼야 하는데 모서리는 3이다. 

 

    아마 떼다에서 셋이라는 발음이 나왔을 것이다. 각자의 몫을 떼는 나눗셈 시작이다. 비례는 균형이고 거기에 하나를 더하면 하나가 나간다. 하나를 입력하면 하나가 출력된다. 인간은 비로소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3이라는 트리거에 의해 지식은 미친 듯이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는 2에 갇혀 있다. 하나도 알고 둘도 아는데 셋을 모르고 세려고 하지 않는다. 1은 자극이고 2는 반응이며 오로지 자극과 반응만으로 거대한 세상을 상대하려고 한다. 셋은 둘의 맞물림이다. 비례는 둘이 맞물려 있다. A가 변하면 B도 변하는 거다. 


    맞물리면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게임은 시작된다. 일취월장이다. 맞물린 긴장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맞물린게 떨어지면 자극과 반응으로 바뀌고 2로 퇴행해 버린다. 맞물리면 방향이 있다. 자극과 반응은 방향이 없다. 다음 단계가 없는 거다. 


    그걸로 게임이 끝나버린다. 낚시꾼은 계속 낚아 올린다. 나와 낚싯대와 물고기로 3을 이룬다. 3은 세트다. 구조가 세팅되는 것이다.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면 집으로 돌아간다. 사냥꾼과 사슴의 대결구도는 2다. 게임은 끝난다. 3이 세팅되면 한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된다. 


    네 집과 내 집은 2다. 그사이의 길은 3이다. 길은 공유된다. 낚시대는 낚시꾼과 물고기에 의해 공유된다. 낚시꾼은 계속 낚고 물고기는 계속 낚인다. 길은 다른 길과 연결되어 계속 간다. 인간은 구조 세팅에 익숙지 않다. 인간이 중립을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유다. 


    인간이 관념과 이념과 프레임과 정신승리로 가는 이유는 서로 맞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조건 자극하고 반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낚시꾼이 한 마리만 낚고 빨리 집에 가서 자랑하려고 한다. 낚시대는 버려두고 물고기만 챙겨간다.


    3은 견고하다. 다시 한번 미끼를 끼우고 한 마리를 더 낚아서 5로 도약해야 한다. 5의 일방향성을 이해해야 3을 이해한 것이다. 3은 포드시스템이다.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계속 굴러간다. 2는 수작업이다.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3은 맞물림이고 맞물리면 긴장된다. 팽팽한 대치상태다. 자극과 반응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이웃 부족이 뭘 하는지 집적거려 본다. 반응이 온다. 아 저넘들 저러고 있네. 안심한다. 잊어도 된다. 인간은 3을 싫어한다. 긴장하기를 싫어한다. 생각하지 않는 거다.


    3은 신경이 곤두서게 하고 뇌를 피로하게 하고 포도당을 과소비한다. 원래 예민한 사람이 너와 나 사이에 도구를 끼워 넣고 중립기어를 유지하며 3을 활용했다. 그 사람들은 신호등만 보면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연비를 절약한다. 보통은 오토미션으로 해결하지만 말이다. 


    언어는 도구다. 관념과 이념과 사상은 도구다. 자유와 민주와 자본과 산업은 도구다. 종교는 도구다. 신은 기능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도구로 보지 못하고 주관화 하고 우상화 하는 이유는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서다. 기어를 중립 위치에 놓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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