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의 것 창세기가 필요하다. 만인이 공유하는 사유의 모형이 제시되어야 한다. 세상이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원자론의 아이디어와 맞아떨어지는 어떤 것으로도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입자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막연한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소개다. 바둑알이 있어야 바둑을 두고, 장기판이 있어야 장기를 둔다는 것은 하수들의 자기소개다. 고수들은 바둑알이 없어도 둔다. 궁극의 경지는 인간에 의해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콕 찍어서 지목할 수 없다. 원자의 쪼갠다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입자라는 말을 쓸 수 없다. 그것은 장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존재와 무의 경계에 걸쳐 있다. 물리량을 가지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적 존재는 위치가 특정되어야 하며 위치는 관측자와의 관계다. 관측자가 개입하면 왜곡된다. 근원의 것은 공간의 크기를 가지지 않는다. 공간의 방향과 시간의 순서가 없으며 대신 그것을 만들어낸다.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존재는 반드시 어떤 쌍으로 존재하며 주체와 객체를 이루고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연결된다. 근원의 것은 입자의 자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입자로부터 사고를 시작하는 이유는 관측자인 나 자신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입자인 나와 대칭시킨다. 내가 입자이므로 원자도 입자라야 한다. 일단 관측자인 인간과 연결되어야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붙잡혀 있는 인간의 사정일 뿐이다. 그러한 연결은 객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게 구조론이다. 근원의 상태에서 어떤 둘의 연결이 일어나야 입자다. 객체 내부에 구조가 있어야 한다. 하나로는 구조를 이룰 수 없으므로 그것은 상호작용하는 둘의 쌍이라야 한다. 근원의 것은 크기가 없다. 대신 크기를 만들어낸다. 위치가 없는 대신 위치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타격하면 입자가 생성되거나 소멸한다. 그것은 어떤 균형으로 존재하며 그 균형이 깨질 때 입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공간과 시간은 그 입자들의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아는 3차원의 세계다. 컴퓨터 게임의 가상현실처럼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극장에 걸린 스크린에 없다. 우리가 아는 시공간과 물질은 스크린 속의 이미지다. 그것은 허상이다. 영화든 현실이든 원리는 본질에서 정확히 같다. 중요한 것은 사유의 출발점을 찍는 문제다. 영감의 원천이 되는 창세기가 필요하다. 어떤 눈에 보이는 것이 지목되면 거짓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이게 다 이낙연 때문이다. 이게 다 빨갱이들 때문이다. 이러면 곤란하다. 무형의 스트레스가 진짜 원인이다. 보이는 것은 전부 가짜다. 지목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20대가 마초와 페미로 갈라져 결렬하게 전투하는 이유는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고, 동료도 없어서 고립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원시의 영역본능, 서열본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 따른 공허감과 불안감 탓이다. 재테크에 몰두하고 혼자 살려고 발버둥을 치며 서로를 적대한다. 닭장 속의 닭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를 쪼아대는 것과 같다. 무엇이든 원인으로 지목되면 거짓이다. 장에 걸려 있는 무형의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그것이 모든 사건이 공유하는 하나의 원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