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 구조의 일의성
*글 제목을 이리 붙여 보았어요.
질문 예시 1)
전기가 흐르는 것(시간)은 조명의 밝기로 보이는데 전압의 강도(공간)는 보이지 않는다.
((책 <구조> p.103 밀도의 판단 3번째문단 첫번째 줄))
=> 본문 <밀도의 판단>에서 인용한 질문 예시이니, 이 단락 전체를 요약하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보이니까 알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전달되는 방식은 체감되거나 긴장도로 느껴지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느끼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도구)을 갖지 못하므로 말로 표현을 못하거나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감’이라들 한다. 구조론은 막연하게 ‘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구조론적 해명을 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조는 일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뭔가의 성패는 결정된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구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 예시에서 시간과 공간을 괄호 안에 써 놓는 것은 사족이라고 생각된다. <밀도의 판단>은 강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 강도는 ‘ 계 ’에 걸린 긴장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계를 현실적 ‘공간’이라고만 생각 하면 장소적 느낌이 있어서 막연하다. 계는 바운더리를 규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를 한정하는 것이 ‘ 계 ’이다.
예컨대, 구조론 게시판에서 어떤 긴장도를 측정하려면, 그 계를 먼저 설정하여야 한다. 그 범주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정하고 그 자신은 어디에 포지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계에 걸린 밀도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계에 밀도의 강도가 높아지려면 강하게 접촉되어야 한다.
즉 금방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다. 서로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따로 떨어져 있지 않는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 힘 ’이다. 이 힘이 그 자신을 사건 속에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 힘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사건 속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긴장도다. 그러므로 밀도는 말하자면 공기의 분위기와 같은 것이다. 이는 직관적이기도 하다.
또 한 예로 히터를 틀어 놓으면 그 열기의 온도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다. 그 열기가 전달되는 피부 감촉으로 히터의 온도를 적당하거나 덥거나를 측정하게 된다. 그 측정하는 상태가 긴장도를 감지하는 것과 같으며, 그 감지는 몸에 스트레스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 스트레스는 뭔가 행위를 취하게 만든다.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계에 걸린 긴장도는 스트레스로 전달 받는다. 스트레스가 긴장도이다. 긴장하면 주변을 다시 둘러보게 된다. 정신을 차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포지션과 그 포지션을 둘러 싼 상부구조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처신은 바로 그 긴장도의 강도가 전해지는 만큼이다.
* (그렇다면 여기에서 인간이 그 긴장도를 이기는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것에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 긴장이 있으면 당연히 긴장을 이기는 반대급부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균형이고 대칭이다. 이 대칭을 판정하는 것이 심(무게중심)이다. 이때 계에 걸린 밀도가 중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향성이 생겨난다. 이 구조는 ‘심 1 날 2’의 구조 모형이다. 천칭 저울 형태다.
이 구조는 판정을 하여 일을 진행시킨다. 밀도라는 중력을 따라서 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긴장도가 느껴지면 본능대로 스트레스로 발산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스트레스를 에너지로 변환할 것인가? 이다. 구조는 일하는 방향성을 판정하는 것이므로, 곧 에너지가 흐르는 길이기도 하고 스위치이기도 하다. 그 스위치를 자신이 가져야 한다. 스위치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이다.
에너지의 흐름을 유통시키거나 차단하는 것은 모두 스위치 하나로 조작이 가능하다. 즉 구조의 방식에서 스위치는 무게중심의 이동이고 움직임이다. 게에 밀도가 걸린 상태에서 움직임으로 판정을 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흘러갈 방향을 터주는 것이다. 머릿속에 이 도식이 그림으로 그려지는가? 그것이 모형적 사유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스트레스로 발산해서 날려버릴 것인가? 아니면 구조의 판정을 통해서 일하는 방향, 즉 에너지의 통로를 만들어 줄 것인가? 이다. 인간의 문명은 이 방식을 통해서 집적되었다. 모든 문명의 형태는 이 방식을 통해서 축적된 것이다.)
호랑이가 앞에 있다면 긴장도는 천 퍼센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 차라도록 하는 것이 긴장도다. 그런데 그 밀도를 체감하지 못하면 정신 차리지 못한 것이어서 호랑이에게 먹힌다. 긴장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스트레스의 강도를 높게 전달 받는다. 이 강도를 견디거나 못 견디거나 이지만, 반면에 긴장도는 그 자신이 끌어 올릴 수도 있다. 그 자신이 스스로 스트레스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임무를 주는 것이다.
그 스트레스 상황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가 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방식은 일상에서도 흔하게 적용되는 방식이다. 환경을 바꾼다거나 어떤 목표를 설정하여 실행한다거나 또는 누군가에게 시비를 건다거나 하는 낮은 단계의 발산 방식까지, 적용은 무궁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역시 구조 판정을 통하면 된다.
잉여 에너지를 끌어 오는 방법은, 낙차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디에 남아도는 잉여 에너지가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봐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없다. 다 남아 도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건 착시다. 이 착시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남아도는 에너지는 오직 태양에너지(자연에너지)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끌어다 쓰기에는 변환이 필요하다. 인간의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자연에너지를 바로 끌어다 쓰기는 더 어렵다. 환경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바로 그 자신뿐이다. 그 자신의 창의성만이 잉여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떻게? 창의성은 보이지 않는 힘을 끌어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곳은 ‘상부구조’이다.
“ 밀도차에 따라 에너지가 흐르는 방향이 결정된다.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극성이 결정된다. 대세판단이다. 상부구조의 존재를 판단하여 보이지 않는 손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밀도차를 판단해야 한다. 조직의 긴장도를 판단해야 한다. 가강 많은 외부변수와 밀접하게 물려있는 쪽이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다.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외교관계가 많은 나라가 밀도가 높다. 많은 이해관계가 걸린 쪽이 더 밀도가 높다. ” p103
책 <구조>에서 인용한 문장에 따라 ‘일(사건)’ 의 한 사이클을 유추해 보자. 동북아시아에서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이다. 주변국들 및 세계와의 이해관계가 더 많이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낙차에너지를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낙차에너지는 밀도차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에너지이다.
이 밀도의 강도가 세면, 그만큼 압축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이 밀도에서 압축을 시도하면 입체가 된다. 즉 독립된 형태의 어떤 구조 모형이 형성되는 것이다. 입체적인 형태가 되면 ‘각’의 구조 판정을 할 수가 있다. ‘각’에서 구조 판정이 일어나면 ‘선’이 만들어진다. 즉 어떤 진행이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면 ’은 적용된 것이다. 이로써 한 사이클이 끝나고 새로운 사건으로 진행된다.
* -> 결국 우리가 헛갈리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식의 방향이 존재론으로 바뀌는 지점이 있다. 이 바꾸어서 생각해야 하는 지점을 놓치기 때문에 헛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의 도식 방향을 ‘》’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구조는 시공간의 질서를 가진다. ‘시간의 질서’는 일의 진행순서를 나타낸다. 우선순위다. 입력》출력의 일방향성이다. 이것은 원인》결과의 방향성과도 같다. 시간의 질서는 비가역성에 따라 순서는 바뀔 수 없다. ‘공간의 질서’는 일의 진행방향을 나타낸다. 심》날로 가고, 높은 질서》낮은 질서로 간다. 이것은 질》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간의 방향성 역시 비가역성을 갖는다. 순서는 바뀔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편성이 유도된다. 진리가 보편성을 띠는 것 역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p220 ”
“ 세상에 크기는 없다. 원자론의 원자를 연상케 하는 절대크기가 없다. 모눈종이의 한 칸이 없다. 우리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실상 비교가 만들어낸 관념이다. 비교하여 상대적인 포지션을 확립한 것이다. 우리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날’의 포지션에서 ‘심’의 포지션을 바라보았다는 의미다.
바라보는 방향, 곧 포지션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비례다. 그러므로 크기를 유도하려면 비교해야 하고 따라서 비례가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
비례를 유도하기 위한 전제가 밀도다. 하나의 구조는 밀도의 차원에 도달함으로써 완성된다. 점》선》각》입체》밀도로 완성된다. 이 방향은 우리가 바라보는 인식의 방향이다. 그런데 실제로 자연에서는 밀도》입체》각》선》점으로 쪼개질 뿐이다. 이 방향성은 존재론이다. 무엇인가? 인식론과 존재론이다.
실제 자연에서는 밀도》입체》각》선》점으로 쪼개지지만, 이는 원본이 되는 하드웨어이고 복제본인 소프트웨어는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집적된다. 원본이 빛이면 복제본은 그림자다. 빛은 밀도》점으로 해체되지만 그림자는 점》밀도로 축적된다. 건물을 짓는 과정은 밀도》점으로 중력을 해체하지만 그 건축에 의해 생겨나는 골목길은 점》밀도로 축적된다.
저절로 생겨나는 그림자인 인식론은 스스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 복제본이 작동할 때는 다시 존재론으로 전환된다. 도식적 표현으로 존재론이 ‘⍽’ 이면, 인식론은 ‘⎍’ 이고, 그 ‘⎍’ 가 작동할 때는 다시 ‘⍽’ 로 포지션이 바뀐다.
인식론은 귀납된다. 거울처럼 뒤집어 반영한다. 인간의 인식에서는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집적되어 고도화된다. 자연의 존재론은 그 반대로 작동하므로 세상의 모든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구조가 밀도 차원으로 고도화되기 전의 점》선》각》입체는 비례가 없다. 그러므로 크기가 없다. 모눈종이 눈금의 칸 속은 비어 있다.
닫힌계 외부에서 작용이 가해지면 계에 밀도가 걸리고 심과 날이 탄생한다. 포지션이 정해진다. 포지션에 따라 ‘크다’ 혹은 ‘작다’로 판정된다. 크기의 탄생이다. 구조는 밀도를 성립시킬 때 완전해진다. p221~222 "
질문 예시 2)
하부구조의 자유도를 증가시키면 ~ 상부구조의 밸런스가 성립한다.
((책 <구조> p.102 마지막 문단 4번째 줄))
=> 구조 책 <역설과 예측> 이 의미하는 바는 어떠한 것을 행할 때 항상 보이지 않는 한 단계 위에서 현재의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거나 미처 자각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상부구조이고 하부구조는 여기에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부구조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모든 존재는 동력원과 연결되는 하나의 지점을 가진다. 무게중심, 운동의 중심, 물체의 핵(core), 연필심 따위의 심(心) 형태로 존재한다. 외력의 작용이 심을 치지 못하면 역설이 일어난다. 주먹으로 물체를 쳤는데 물체가 떠밀리지 않으면 가격한 제 주먹만 아프다. 외력의 작용이 심을 치지 못하면 하부구조의 자유도를 증가시켜 상부구조의 밸런스를 강화하므로 반대가 된다.
작용측의 의도와 반대로 결과가 얻어지는 역설현상은 일정한 시간의 진행을 요구하므로 단기적으로는 잘 관측되지 않는다. 볼펜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치면 한바퀴 돌아와 제 뒷통수를 친다. 이때 일정한 시간이 걸리며 그 시간에 도달하기 전에는 상부구조의 개입에 따른 역설이 관측되지 않으므로 인간은 착각한다.
역설은 단순히 단기전과 장기전의 차이다. 단기전에는 역설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단 의도대로 된다. 사기꾼은 속일 수 있고 다단계는 돈을 벌 수 있고 장사꾼은 폭리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가면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다. 사기꾼은 징벌되고 다단계는 붕괴하고 장사꾼은 파산한다.
외부개입이 차단된 고립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차단할 수 있다. 죽의 장막이나 철의 장막으로 고립된 시장, 산골 오지에서는 단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 전체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
상부구조의 보이지 않는 손의 역설은 장기전에서 나타나고 열린시장, 열린사회에서 나타나므로 전쟁에서는 장기적 수행능력 중요하고 경제에서는 시장의 개방이 중요하다. 고립된 사회에 진보는 없다. 개방하고 혁신하여 하부구조의 자유도를 증가시키면 저절로 세력화되어 일원화 된 방향성이 나타나고 상부구조의 밸런스가 성립한다.“ p101~102
=> “외력의 작용이 ‘심’을 치지 못하면 역설이 일어난다. 외력의 작용이 심을 치지 못하면 하부구조의 자유도를 증가시켜 상부구조의 밸런스를 강화하므로 반대가 된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진행했을 때, 역설의 역설을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그 힘이 되돌아와 다시 그것을 친다는 의미이다. 반대급부로 반동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외력이 반작용으로 되돌아와 작용의 외력을 다시 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자기 힘에 자기가 고꾸라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막연히 뭔가를 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그 이면은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어떤 것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도 한다. 그만큼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계에 밀도가 걸리면 사람은 들뜨거나 흥분을 하게 되므로 반드시 어떤 행동을 취하는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 호르몬 작용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호르몬을 따르지 않으면 뭔가 몸이든 마음이든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 알 수 없는 ‘힘’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하도록 강제 짓는 그 힘은 역설현상을 염두에 두고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즉흥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염두에 두려면 미리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밀도의 낙차 에너지를 사용하려면 말이다.
역설은 장기전에서 나타나고 열린 시장, 열린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역설이 단기전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장기전에서 역설 현상을 대비하거나 사용하려면, 하부구조의 자유도를 증가시켜 선택지를 넓혀주는 것이다. 즉 배후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로써 외부 에너지 유입의 통로를 넓혀주는 것이다, 그러면 방향성이 생겨나 세력화 된다. 그러자면 부단한 혁신과 시장개방이 중요하다. 혁신과 개방성은 자유도를 증가시키고 그 자유도는 또 다른 밀도로 집적된다. 이 밀도가 세력화되게 만든다. 열린사회에서 혁신과 개방은 진보의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이 일방향성이 만들어지면 상부구조가 생성된다. 그때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균형(밸런스)이 맞게 된다.
그러므로 <역설과 예측>에서 말하고 있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구조는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얽혀서 압축되며 각각 데이터》포지션》밸런스》플랫폼》시스템을 형성한다. 그림에서 입체는 안으로 내적 밸런스를 이루고 밀도는 밖으로 외적 밸런스를 이룬다는 점이 각별하다. *그림설명: 밀도는 외적 평형을 이루고 외부작용에 대해 부분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p212”
그러나 ‘점》선》각》입체》밀도’는 인식론적인 방향의 전개이고, 실제로 자연에서는 그 역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역설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론의 방향을 볼 수 없고 인식론의 방향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적되어 고도화 되는 방향은 인식론적인 방향이고, 고도화된 상태가 풀리는 것은 존재론의 방향이다. 즉 붕괴다. 붕괴의 방향성이 존재론이다. 붕괴한다는 의미는 시스템에서 플랫폼으로 풀려간다는 의미이다. 그 풀어지는 과정에서 낙차가 발생하는 데 그것이 잉여에너지이다.
수력발전소 형태를 연상하면 된다. 인간은 그 에너지를 사용하려고 상부구조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시스템이 일하게 만든다. 거기서 잉여에너지가 발생한다. 그것을 인간은 취하는 것이다. 기계적인 자동화라고 여기진다면 일정부분 맞고 일정부분 틀리다. 그것은 어디에 응용하고 적용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실제로 인간이 취하는 에너지는 포지션의 위치를 취할 수 있다.
"구조론은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시킨다.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공간을 압축하고,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의 순으로 정보를 압축하고, 량》운동》힘》입자》질의 순서로 물질을 압축한다. p202 "
위의 글에서 각 도식적 정의들은 - 점》선》각》입체》밀도,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 양》운동》힘》입자》질 - 공간일 때, 정보를 다룰 때, 물질을 다룰 때에 따라서 언어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를 알면 대입하여 사용할 수 있다.
적절하게 선택하면 다루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집적되는 것도 빨라진다. 그리고 손안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방향전환 하여야 한다. 압축의 풀림은 존재론의 방향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연역해야 이 에너지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질문 예시 3)
자전거는 달려야 넘어지지 않는다. (달리는 것은 보이는데, 균형은 보이지 않음)
((책 <구조> p.100 3)문장))
=>
“구조론은 조직의 발달이 일어나는 센터와 생장점을 파악하고 둘 사이의 방향성을 포착하여 상부구조의 보이지 않는 개입을 드러내며 상부구조로부터 에너지 유도경로를 확보하여 미래를 예측한다. 예측이 빗나가는 이유는 역설 때문이다. 역설을 궤변가의 말장난으로 여긴다면 오류다. 역설은 엄정한 물리법칙이다. 상부구조의 개입으로 작용측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면 역설이다. p100”
책 <구조> <역설과 예측>에서 의미하는 ‘둘 사이의 방향성’은 ‘존재의 일의성’ 개념과도 상통한다. 둘 사이란 무엇인가? 바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사이’이다. 그러므로 이 두 방향을 맞추는 것이 방향성이다. 그것을 하나의 방향성으로 수렴되는 ‘일방향성’이라고 한다. 이 일방향성을 맞추지 않으면 ‘역설’이 일어난다.
즉 작용측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역풍이 부는 것을 말한다. 그 역풍에 휘말리면 넘어지거나 망하거나 죽는다. 하여 미래예측은 상부구조와 방향성을 맞추는 것 자체가 미래예측이 된다. 일방향성이면 이미 세팅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손인 상부구조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이다.
“자전거 운전은 핸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지구와의 싸움이다. 우리는 핸들을 중심으로 좌우의 균형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전거의 운동에너지와 지구중력 사이의 균형이 자전거의 균형을 결정한다. 자전거를 달리면 바퀴의 회전에 따른 하부구조의 자유도가 증가한 만큼 일원화 되어 자전거와 지구 사이의 밸런스가 뚜렷하게 생겨난다. 그 밸런스가 자전거의 균형을 지켜준다. p101”
위의 책 <구조> 본문의 문장에서 ‘밸런스’ 개념에서 접근하여 본다면, 지구의 중력은 상부구조이고 자전거 바퀴의 회전운동은 하부구조이다. 이 두 사이에 무게중심이 성립하는 것이 밸런스이다. 그렇다면 무게중심은 어떻게 잡히는가? 자전거는 왜 달려야 넘어지지 않는가? 상부구조인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 붙잡아 두는 힘이므로 ‘인력’이다.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는 그냥 중력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하부구조인 자전거 바퀴의 회전운동은 중력을 밀어내는 힘이다. 중력을 벗어나고자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므로 ‘척력’이다. 이 두 힘이 만나는 곳이 무게중심이 성립하는 곳이다.
바퀴의 회전에 의해 자전거는 중력을 밀어낸다. 회전한다는 것은 속도다.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자유도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전거가 1미터 나갔을 때와 10미터를 갔을 때의 자유도는 다르다. 그만큼 자유도는 증가했다. 가속도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바퀴 회전에 의한 자유도 증가는 척력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의미이고, 생겨난 척력은 중력과 맞선다.
바퀴의 회전의 속도가 빠를수록 중력을 밀어내는 힘은 가속화된다. 자전거가 달려야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분산된 바퀴의 힘이 한 곳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중력에 붙잡혀 있는 자전거를 중력에서 벗어나도록 사람이 페달을 힘차게 밟아줄 때, 중력이 자전거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센 중력으로 붙잡는다. 그 힘으로 자전거가 바로서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표면에서 중력에 자전거를 붙잡아서 세우려면 가만히 있는 자전거에 사람이 페달을 밟아서 에너지를 투여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즉 달릴 때만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부수적인 지지대가 따로 있어야 한다. 자전거가 달려야 넘어지지 않는 현상은 ‘역설의 역설’이다.
잡아당기는 인력에 대항하여 밀어내는 척력을 만들어서 오히려 자전거가 바로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척력이 만들어질 때 무게중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무게중심으로 균형(밸런스)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달리면서도 핸들(스위치)을 조금만 움직여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자전거가 달리는 것은 상부구조인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주어진 문장에서 전제 》 진술 표현으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살펴보자.
만약, “자전거를 달리면 바퀴의 회전에 따른 하부구조의 자유도가 증가한 만큼 일원화 되어 자전거와 지구 사이의 밸런스가 뚜렷하게 생겨난다.” 이 문장에서 전제와 진술을 찾는다면 어떠할까? 먼저 문장을 잘게 쪼개 보았다.
자전거가 달린다.》바퀴가 회전한다.》(바퀴의 회전에 따른) 하부구조의 자유도가 증가한다.》그만큼 일원화 된다.》자전거와 지구 사이의 밸런스가 뚜렷하게 생겨난다. 여기서 진술에 대한 전제는 바로 그 뒤의 문장이다. 그러므로 ‘하부구조의 자유도가 증가한다.’라는 진술 문장이 성립하려면, 전제는 ‘자전거를 달리면 바퀴의 회전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무엇인가? 전제와 진술이다. 전제와 진술은 문장 만들기의 핵심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전제를 생략하고 진술로만 구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구조론에서는 언제나 숨은 전제를 먼저 찾아야 문장의 맥락이 성립한다. 이 ‘ 숨은 전제 찾기 ’가 바로 상부구조를 찾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건을 충족해야만 그 다음 진행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조건 충족은 항상 한 단계 위를 추적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관계가 유추되면 그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구조를 찾는 것이 구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 1 날 2’로 구조화된 바로 그것이다. 이 구조를 통하여 구조론에서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대칭과 비대칭을 논하게 된다. 그리고 구조 판정의 방향성은 언제나 비가역적인 방향성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방향성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의성’이라고 한다. ‘존재의 일의성’은 생명은 단 하나의 생명체가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처럼, 구조론의 ‘구조 일의성’은 단 하나의 구조가 무한 복제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物 자체는 그 단 하나의 구조 형태가 복제되어 구조의 중첩으로 이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첩은 평면적인 형태가 아니라 3차원의 입체적인 것이며 동영상적인 형태이다.
우리가 구조를 보려는 시도를 할 때는 그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여 건조하게 뼈대만 보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 해체작업에는 도식의 전개가 필요하다. 먼저 양》운동》힘》입자》질로 집적되며 고도화되는 방향성은 우리 눈에 보이는 과정에서의 현상이다. 이 방향의 구조 형태는 하부구조를 담당하게 된다.
실제 우리가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해서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로 집적되는 이 과정은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진행방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열되어 있어서 고도로 압축되는 되어 있는 형태는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모아 놓았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한가? 무엇인가를 사용하려면 즉 어떤 에너지(힘)를 사용하려면 모아 놓은 것을 허물어야 사용할 수가 있다. 이 현상을 ‘붕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붕괴는 ‘풀어낸다’는 의미로 쓰인다. 풀어 낼 때는 방향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무엇인가? 현실에서 진행되던 인식론적인 방향을 존재론의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은 붕괴하면서 만물을 운용하고 있다.
태양은 그 자신의 붕괴로서 빛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태양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완전한 허물어짐이 지금 당장은 아니고 앞으로도 50억년은 더 존재한다고 하니 지금 거기에 천착하지는 말자. 그렇다면 지구는 어떠한가? 태양에너지로부터 지구는 지구 자체 생명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생명시스템은 알아서 생멸의 순환구조를 가진다. 그 안의 인간 역시 문명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문명시스템은 자연의 존재론적인 시스템과는 반대방향에서 보여 진다. 즉 우리의 인식 구조가 자연의 존재론과는 반대방향인 것이다.
문명은 집적되었다. 그리고 고도화되었다. 그리고 점차로 정치·경제·문화 등의 상위의 시스템을 개발하여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과 달리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문명의 시스템은 언제나 반완제품이다. 반드시 거기에는 운용하는 ‘ 사람 ’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공부하는 것이다.
‘붕괴’되는 에너지를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양》운동》힘》입자》질로 진행되어 있는 것에서, 질》입자》힘》운동》양으로 방향 전환은 해야 한다. 인식론에서 그 역인 존재론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먼저 바라보는 포지션이 바뀐다.
예컨대 이런 거다. 산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제는 산 정상에서 또 다른 정상을 보고 또는 정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포지션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포지션에 대한 위치 확인 되었다면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 즉 포지션 변경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포지션에서 다른 포지션으로 옮겨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포지션 변동이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질》입자》힘》운동》양의 존재론의 방향은, 풀어내는 방향이다. 그러므로 질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시작》끝, 원인》결과에서 시작과 원인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시작과 원인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새로운 사건의 시작과 원인이기도 하다.
질》입자》힘》운동》양으로 풀어가려면, 질의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그 질의 상태에 맞는 것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 상태가 균일해야 한다. 이 질의 결합 상태에 따라 입자로 독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에서 바로 입자로 독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압축’ 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질의 결합은 압축이기도 하다. 질의 상태는 아직 무엇인가로 변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결합할 것인가? 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만남’이기도 하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서 결합할 것인가? 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만유의 모든 과정에 대입할 수 있다. 존재는 그 자체로 ‘압축’된 존재이다. 만약 우리 자신이 몸이라는 신체로 압축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들도 그렇다. 압축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형태를 갖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압축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파일만 압축된 것이 아니고, 단지 그 압축은 자연의 압축을 모방한 것, 그러니 그 원리가 복제된 것이다.
질에서 입자로 독립하려면 결합을 통한 압축과정을 거쳐야 입자로 독립된다. 입자로 독립되면 하나의 형태를 드러내게 되므로, 그 물(物) 자체의 포지션을 갖는다. 포지션이 생기면 그 자체적인 에너지(힘)이 있다. 이 힘의 사용은 ‘힘’의 판정을 통하여서이다. 이 단계가 실질적으로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를 구조라고 하지만, 구조 모형 - 최초의 구조 형태는 바로 이 ‘힘’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이지 않는다.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이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 손을 보는 것이고, 상부구조를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구조 공부는 바로 이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질》양의 도식에서는 크게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형태로만 되어 있다. 여기서의 상부구조는 그 한 단계 위를 의미하고 하부구조는 그 아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여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용어의 쓰임은 그 상황과 관계 맺어짐에 따라 그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인식론의 진행 방향에서의 양》운동》힘》입자》질로 집적되고 있다면, 질로 방향전환을 하여야 한다. 질》입자》힘》운동》양으로 ‘풀어가는’ 형태로 전환된다. 집적하여 축적된 것을 풀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이너스’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있는 것을 풀어서 쓰는 것이지 없는 것에서 마이너스를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축적’이 되었느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축적이 ‘질’의 상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질에 도달하면 상부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마이너스를 시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질의 ‘붕괴’이다. 질을 붕괴시키면 입자로 나아간다. 질에서 입자로 마이너스 하는 것이다. 마이너스 하는 과정에서 질과 입자 사이에 낙차가 생긴다. 그 간극의 낙차가 잉여에너지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것이다. 하부구조에서 양》운동》힘》입자》질로 집적되고 있을 때에,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몸이나 생각을 움직여 일하여 얻어지는 실제적인 방향이므로, 이 실제적인 방향이 효과를 얻으려면, 이미 질》입자》힘》운동》양의 진행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단계 위로 올라가서 사태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 집적되는 과정과 일의 연역되는 것은 정반대다. 존재론의 연역을 써야만 일이 집적되는 것에서 보자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러니까 일의 진행 구조는 언제나 마이너스 형태로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국가에서 보자면, 국가는 이미 상부구조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국가는 역사에서도 현재에도 계속 변모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이다. 국가라는 커다랗게 보이는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다. 국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상부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동안도 무수히 많은 상부구조를 건설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다양한 이념적 형태가 그러하다. 현재는 민주주의다.
모든 이념은 현재에서 적용되기를 희망하고 갈망한다. 그것이 철학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사용되기를 꿈꾸는 이상이다. 상부구조를 건설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마이너스 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축적된 것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먼저 집적되어야 하고, 집적된 것을 압축할 수 있어야 하고, 다시 입자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선순환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 시스템 형태이다. 그러나 자연의 시스템과는 달리 인간이 이룩한 시스템은 반제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다시 구조 도식으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이 말은 원인과 결과, 입력과 출력 부분만 언급하게 된다. 여기서 그 사이를 발견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질》양’의 사이에는 구조 ‘┻’<심1 날 2>의 구조 도식이 은폐되어 있다. ‘질》<입자》힘》운동>》량’의 사이에 ‘<입자》힘》운동>’이 숨겨져 있다.
<입자》힘》운동>은 자체적으로 ‘┻’ <심1 날 2>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더 파고 들어가면 ‘질》<입자》힘┻》운동>》량’ 은 이러한 형태가 된다. ‘힘’ 안에 ‘┻’ <심1 날 2> 구조가 있다. 힘은 교섭하여 구조 판정을 하는 것이다. 판정하면 방향성이 결정된다. 무게중심을 판정한다. 무게중심에 의하여 대칭의 균형을 깨고 비대칭으로 나아간다. 비대칭이 형성되면, 방향성이 생겨난다. 일방향성이다.
일방향성은 존재가 나아가는 방향성을 결정하게 된다. 모든 구조는 ‘┻’ <심1 날 2>로 수렴된다. 존재가 나아가는 방향은 언제나 비가역적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생명체 역시 언제나 비가역적인 방향성을 취한다. 해서 그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다. ‘존재의 일의성’처럼, 구조론의 구조 역시 ‘┻’ <심1 날 2> 이 도식 구조가 구조의 근본이며, 복제되어 중첩되는 것 역시 비가역적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자연의 경로인 절대경로(수직적)를 따른다.
아란도님 답변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