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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120 vote 0 2009.01.15 (01:22:22)

 

끝까지 가보기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만 대략 수준들이 낮다. 깨달음은 완전성과의 승부다. 지극한 완전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친다면 실패다.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관심사일지언정 신의 관심사는 아니니까. 신의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실패다.

보통은 인생의 허무를 아는 것, 삿된 욕망을 버리고 집착을 끊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면 문제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왜 거기서 주저앉느냐는 거다.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기를 두려워 말라.

나의 깨달음은 다르다. 어느 면에서는 정반대에 가깝다. 라즈니쉬류 장사치들을 꾸짖는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사상이 나와 반대이니까. 인생이 허무하다고? 누가 허무하지 않댔나? 이 정도는 초등학교 1학년도 아는거 아닌가? 허무한건 당연. 그래서 어쩌라고? 그 다음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곱살 때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었다. 이건 실제로 꿈이다. 그 꿈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나타나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시점에 이미 인생의 허무 따위는 졸업하고 그 이상의 세계를 찾아나선 거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개인의 인생 이야기다. 그러므로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냥 누가 집적거려도 화내지 말고,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고, 조용하게 살라고? 그래서 뭐하려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누가 집착이 있댔나? 누가 괴롭댔나? 누가 힘들댔나? 그런 말 누가 못해? 인생의 허무를 알았거든 소아병적인 개인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곧 세상 전부와 승부해야 하는 거다.

초등학교 때의 나는 과학숭배자였고 무신론자에 유물론자였다. 그 관점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재미있게 되었다. 행복? 그거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지. 슬픔? 그거 뇌 안에서 일어나는 전기현상이야. 실제로 고통을 호소는 친구에게 그거 전기신호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득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다? 그거 이상하지 않나? 왜 슬픔이 시키는대로 울어줘야 하고 기쁨의 지령에 복종하여 웃어줘야 하지? 기괴한 연극처럼 느껴지지 않아? 반대로 해보는 게임은 어때? 슬프면 웃고 기쁘면 울고 그렇게 자신을 배반해 보기. 이것을 연습하면 세상에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없다.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저 사과가 빨간 것과 당신의 마음이 행복을 느끼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지? 사과가 빨간 이유는 칼라가 빨갛게 칠해져 있기 때문이고 당신이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는 시냅스에서 뉴런으로 전기신호가 전해지며 소포체를 터뜨려 아드레날린인지 뭔지를 분비했기 때문이야.

본질에서 보면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어. 희노애락의 감정을 칼라로 느끼는 연습을 했다. 아픔을 느끼면 지금 눈으로 빨간색을 보고 있다고 암시를 한다. 피부가 느끼는 통증과 눈에 보이는 빨강은 본질에서 같다. 둘다 뇌에 전달되는 전기신호다. 물론 차이점도 확실히 있다.

빨강색도 계속 보고 있으면 피곤하듯이, 육체의 고통은 호흡리듬을 교란하여 숨쉬기를 방해한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을 방해한다. 어떤 고통도 웃으며 견딜수 있지만 대신 고통이 극심하면 하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아파도 태연히 웃을 수 있지만 아플 때 책읽으면 기억에 남는게 없다. 그 차이다.

아픔이 느껴질 때는 차라리 아픔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육체의 고통이 극심할 때는 눈 앞으로 빨간 터널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며, 나는 지금 여행하며 그 칼라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고통을 참는 것과 다르다. 고통도 기쁨도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스쳐가는 풍경에 불과하다.

우습다고 웃고 슬프다고 우는 것은 바보짓이다. 주인이 원반을 던지면 개는 쫓아간다. 무엇이 다른가? 생각있는 개라면 쫓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스울 때 울어보이고 슬플 때 웃어보일 것이다. 그렇게 세상 전부와 맞서보기다. 오히려 통쾌하지 않나? 이거 훈련하면 재미있다.

고통의 반대가 행복이면 좌절의 반대는 성공이다. 기쁨과 고통이 육체의 전기신호라면 마음의 좌절이나 성취는 자신과의 게임이다. 선과 악, 죄와 벌, 윤리와 도덕 따위 인간이 지어낸 유희적 관념들은 그 게임을 사회로 확장시킨 바다. 도덕도, 윤리도 사회라는 게임 안에서 통용되는 수학공식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야구장 외야석 전광판에 씌어진 스코어를 나타내는 숫자같은 것이다. 윤리? 오 안타하나 쳤군. 도덕? 그래 번트 하나 댔네. 충성? 어쭈구리! 그거 홈런 인정해주랴? 무엇이 다른가? 사회는 그 자체로 게임. 그래!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응수하겠어 하는 상대적인 게임의 논리.

네가 도덕이면 나도 질세라 윤리를 응수. 네가 의미면 나도 질세라 가치로 제압.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연기일 뿐. 사회라는 것은 거대한 연극무대. 각자 아버지나 어머니 선생님이나 학생의 연기에 충실하곤 하지. 주인이 던진 원반을 물어오는 개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지.

연말 방송국 시상식에서 상패와 꽃다발을 받고 연단에 어색하게 서 있는 그 모습들이 왜 내게는 원반을 물고 와서 ‘나 잘했지’ 하는 자세로 걸음걸이가 갑자기 달라지는 골든 리트리버종의 개처럼 여겨질까? 사실 좀 개같지 않나? 개털 빗어주고 리본 매주고 연단에 세워놓으니 모양은 좀 나네.  

진실한 것은 과학 뿐. 믿을만한 것은 수학과 논리학 뿐.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초등 4학년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명상가들이 말하는 무니 공이니 하는 관념들은 초등 4학년 때 이야기고 나는 곧 그것이 잘못임을 알았다. 그런데 이 사회의 소위 명상가들은 아직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딱한 일이다.

중학교 때는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한때 관심을 가졌던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것은 14살 이전의 일이다. 초등때는 과학숭배자였기 때문에 사회를 과학화 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미신타파에 앞장서며 종교와 편견와 관습에 물든 인간들을 깨우쳐 주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뭘 발명해야 할텐데.

그때는 과학자=발명가로 생각했기 때문에 온갖 발명 아이디어를 수집하곤 했다. 남들이 기계나 로보트 따위를 발명하고 있으니 나는 그 반대쪽에서 사회시스템을 발명하겠다고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냈다. 그런데 이미 마르크스가 그 분야를 찜해놓았던 거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에 호감을 느꼈다.

그때가 11살이었고 14살에는 마르크스를 극복했다. 이후 프로이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멋진 아이디어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나다움이다. 나의 일관성 말이다.

나를 극복하는 것은 인격을 닦거나 군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따위는 개가 원반을 물어오는 것과 다를바 없는 바보짓이다.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고에서 벗어나기 위함도 아니다. 내 인생을 통일하는 테마를 얻어서 그것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나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는 장자나 노자류의 깨달음은 한참 수준이 낮은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건들면 응수하는 수단 같은 것이다. 초딩들의 반사놀이다. 상대를 이기려 하는 그 자체로 진 것이다. 어쭈! 그래 너는 인의냐? 나는 무위다. 너는 예냐? 나는 공이다. 너는 쓸모냐? 나는 쓸모없음으로 더 쓸모다.

너는 출세냐? 나는 무위로 너보다 더 오래 살겠다. 너는 권력이냐? 나는 진흙탕에 뒹굴어도 너보다는 낫다. 이런 따위는 사실이지 유치하다. 도무지 낫다도 없고 나쁘다는 없는 경지를 졸업한지가 언제인데. 원반을 물어와서 주인에게 뼈다귀를 얻는 공자나 길들여지지 않아서 개집에 갇혀있는 노자나 같다.

‘낫다/나쁘다’는 비교판단의 관념이 도무지 사회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규칙에 불과할진대, 게임이 없는데 무슨 편가르기가 있을 것이며 편가름이 없는데 어찌 비교가 있을 것이며, 비교가 없는데 노자나 장자가 무위로 공자의 인위를 꺾어서 안타 하나 치고, 번트 하나 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든 비교판단은 허무할 뿐. 이쪽이나 저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그 자체로 수준이 낮은 거. 땅개는 길을 간다. 갈림길 앞에서 서성대며 ‘인위가 좋아 주인에게 뼈다귀를 얻지.’ ‘무위가 좋아 늘어지게 낮잠을 자지’ 하며 궁시렁댄다. 그러나 높이 나는 새는 길도 없고 그 길을 가는 일도 없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자기 일관성, 동일성, 연속성, 곧 자기 정체성 뿐. 그리하여 존엄에 이른다. 이건 내 열여섯살 때 생각. 공자의 입신출세도 노자의 현실도피도 부질없다. 오직 가치있는 것은 자기 완성뿐. 내 성격에 맞추어 일관되게 끝까지 가는 것. 타이틀을 부여하는 것. 나라는 작품을 조각하는 것.

이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정상을 초극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치있다. 내가 깨달음을 선언한 것은 이 모든 자질구레한 과정을 넘어 그 다음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고통을 극복함이 아니며, 마음의 평정을 얻음이 아니며, 사회로 나아가거나 물러남이 아니다.

● 사실의 깨달음 - 육체와 마음의 고통은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이를 깨달으면 어떤 고통도, 쾌감도, 슬픔도, 기쁨도 한 폭의 풍경화로 보인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만나는 장면에 불과하다. 때로는 고통을 즐길 수도 있다.

● 의미의 깨달음 - 성공과 실패, 좌절과 극복, 우월감과 열등감, 질투와 시기, 욕망의 극복, 마음의 평정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게임이다. 나를 객관화하여 내가 내 밖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을 얻을 때 극복된다.  

● 가치의 깨달음 - 선과 악, 죄와 벌, 윤리와 도덕, 가족과 국가 따위는 사회적인 게임의 규칙에 불과하다. 그들은 우스꽝스럽게도 맡은 배역을 연기한다. 인생은 통째로 역할극. 노자와 장자는 이 단계다. 그 비교판단을 버려야 한다.

● 개념을 깨달음 - 자기다움을 찾기, 자기일관성을 찾기,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여 존엄에 이르기. 내 인생 전체에 타이틀을 부여하여 한 편의 멋진 드라마로 완성하기. 이 단계에 도달하면 삶의 미학을 얻는다. 육조 혜능의 경지다.

육조 혜능이 큰 산이 되는 이유는 그 이전의 여러 견해들이 사변적인 논의에 머물렀는데 비해 혜능은 실천으로 바로 갔으며 그 삶의 완성의 경지를 실천하여 미학을 낳았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를 혁명한 것이다.

나는 사실의 세계에 산다. 그 이면에 의미의 세계가 있고, 그 너머에 가치의 세계가 있고, 그 너머에 개념의 세계가 있고, 그 너머에 최후로 원리의 세계가 있다. 원리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통째로 있고, 몸통으로 있고, 덩어리로 있다는 것을 17살때 확실히했다.

이전부터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스스로 하나의 논리체계로 엮어서 뇌구조에 세팅한 것은 그 때다. 게송 비슷한 것을 만들어 기념했다. 한시 지을 능력이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짧은 말을 짓는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또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 이 말이 액면 그대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밀한 논리가 있다. 이 말은 이후로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자연의 완전성을 이야기한다. 신과 나의 관계에서 그 필연을 이야기한다. 전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이야기한다. 우주가 통째로 하나의 덩어리였다. 집단지능이었다. 그 덩어리 안에서 내 포지션을 찾은 것이다.

내가 얻고자 했던 진짜는 신과 나의 관계였다. 어떻게 연결되나? 구단주와 단장과 감독과 선수는 어떤 방법으로 소통하는가? 나는 과학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은 개인의 완성에 불과하다. 소승적이다. 합리주의는 인류의 집단지능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개별자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얻거나 잃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내일 죽어도 여한은 없다. 아니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나의 기억의 자투리에 불과하다. 낡은 필름을 되감아 보듯이. 시간은 총알같고 살짝 건너띄어 보면 나는 이미 천년 후로 가 있다.

천년 전의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 본다. 그 사진에 새겨진 희미한 흔적이 지금의 나다. 그렇지 않을 거 같나?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는 35일간 할 계획들이 빡빡하지만, 어느새 방학은 끝나있고 모든 것은 과거의 기억으로 되어 있다. 돌이켜보라. 나는 오래 전에 사라진 나의 화석에 불과하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 뿐. 그것은 과학과 합리주의 길이다. 과학으로 나의 본래의 완전성을 찾고 합리주의 바다로 나아가 신의 완전성과 소통한다.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지만 신의 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드라마는 충실히 중계한다. 잡음넣지 않고 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의미, 가치, 개념, 원리의 전개에서 석가왈 고에서 벗어남은 사실의 허를 지적함이며, 일체의 욕망과 집착을 버림은 의미의 허를 지적함이며, 노자 장자가 말하는 무위의 도는 가치의 허를 지적함이다. 나 자신의 일관성을 깨닫고, 나다움을 깨닫고, 삶의 미학을 완성하면 개념의 허를 넘어섬이다.

모두 넘어서야 한다. 조금 아는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 최후의 깨달음은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통째로 있고, 덩어리로 있더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너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합치고, 자연과 인간을 합치고, 신과 우주를 합친 통짜 몸이 있는 것이다.

너와 내가 없으니, 삶도 죽음도 없고, 성공도 실패도 없다. 신이 죽지 않으니 나는 죽지 않는다. 신이 태어나지 않으니 나는 태어나지 않는다. 인생이 없으니 인생의 허무도 없다. 허무를 강조하여 말할 필요도 없다. 인위가 없으니 무위도 없다. 색이 없으니 공도 없다. 새벽바람같은 선선함이 있을 뿐이다.

신의 존재를 알고, 그 신의 완전성을 알고, 그 완전성으로부터 복제된 나 자신의 완전성을 깨닫고, 그 완전성으로부터 비롯된 필연의 전개를 알고, 그 연장선에서 나 자신의 포지션을 알아야 진정한 깨달음이다. 신이라는 커다란 몸통 안에서 나의 현재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아는 것이다.

그 깨달음으로 ‘어차피 인생은 허무한데 왜 사는가?’ 하는 그 질문에 대답해야 진짜다. 스님들은 그 근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 포기하고 산중에 머무르는 거다. 심우도의 마지막 장면은 입전수수다. 다시 사회로 돌아와 시장에 손을 담근다. 그래야 완성된다.

인생을 부정하고 산으로 들어간 선사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삶을 긍정하는 뜻은? 임무를 얻어야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귀하에게는 무슨 임무가 주어져 있는가? 귀하를 통한 신의 계획은? 그걸 알아야 신의 몸뚱이 안에서 그대의 포지션을, 현재위치를, 나아갈 방향을 아는 것이다.

고에서 벗어난다 함은 본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다 함은 이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본능에서 벗어나 이성으로 가야겠지만 그 이성을 버리고 나다움의 자연스러움으로 와야 한다. 나를 버린다 함은 그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다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사회를 버리고 다시 나의 완성으로 돌아와야 하며 마침내 신의 완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 본능을 버리고 이성으로 나아가라.
● 이성의 분별을 버리고 내 안의 완전성으로 나아가라.
● 내 마음에 매달리는 소승적 태도를 버리고 너른 사회로 나아가라.
● 사회에서의 역할극을 버리고 나 자신의 독립적인 미학의 완성에 이르라.
● 모든 것이 하나의 통짜임을 깨달아 완성된 나로서 완전성의 신과 소통하라.

그럴 때 비로소 울림과 떨림은 전파된다. 신의 가락에 몸을 맡기고 그대 춤출 수 있다. 신이 그대를 마음대로 연주하게 내버려둘 수 있다. 신이 내게 부여한 미션을 찾을 수 있다. 신 안에서 내 현위치와 가는 방향을 알 수 있다. 발길 닫는대로 바람따라 물결따라 마음대로 갔는데도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발길 닿는대로 가다가 길을 잃고 깊은 산중에 갇혀버리면 실패다. 신과 소통하는 완전성의 안테나를 잃어버리고 허무의 바다에 빠져 익사해버리면 곤란하다. 세상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바람따라 구름따라 갔는데도 신이 먼저 와서 그대를 마중하고 있음을 보게 되어야 진짜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의 구분이 별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일층 위에 이층 있는 것은 아니다. 한계단씩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케일의 차이가 있다. 더 큰 개념이다. 고통을 극복함은 그 고통이 찾아올 때만 피하면 된다. 이별했을 때, 상실했을 때, 좌절했을 때 그 한 순간을 피하면 된다.

반면 욕망은 계속 이어진다. 고통은 진통제 맞고 괴로운 순간을 피하면 되지만, 욕망은 내일도 모레도 계속 자극된다. 내일도 보고싶고 모레도 보고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더 큰 영역이다. 가치를 극복함은 사회 안에서의 포지셔닝이라서 미치는 범위가 더 넓다. 개인의 미학적 완성은 더욱 넓다.

다섯은 깨달음을 단계적으로 더 큰 범위에 적용한 것이며 최후에는 신과 우주에 보편되는 큰 틀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신과 나의 관계가 최후의 답이다. 그 사이에 양자간의 소통수단으로 사랑 하나가 있고 그 사랑 하나를 온전히 하기 위하여 이토록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너무 쉽게 만족한다는 데 있다. 당신은 왜 깨달음을 구하는가?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1단계에 만족한다. 그들은 결코 2단계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욕망이 부대껴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2단계에 만족한다. 그들은 결코 3단계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상처받은 사람은 3단계에 주저앉아 길가에 점방을 연다. 거기서 장사를 시작한다. 인생의 의미에서 좌절한 사람은 4단계에 주저앉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왜? 그 단계에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진짜가 아니다.

당신이 깨달음을 구하게 된 동기가 문제다. 그 동기가 당신의 진정한 깨달음을 방해한다. 당신은 고통을 겪었으며 그에 상당한 보상을 원하고 깨달음에 의해 보상받게 될 것이며 그 보상받는 기쁨이 너무 커서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부단히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디 이르노니 중도에 주저앉아 점방 열고 좌판깔고 틈새시장 벌리지 말라. 마지막 한 걸음을 포기하지 말라. 세상이 통짜로 하나이고, 그 몸뚱이가 있고, 그 몸이 가는 방향이 있고, 그 안에서 내 포지션이 있고, 내게 주어진 미션이 있고, 진행되어 가는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곧 죽어도 완전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완전하면 통하고 통하면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날 때 까지, 춤이 나올 때 까지, 바다가 보일때까지 계속가야 한다. 깨달음에 계단은 없다. 다섯 가지 문제는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그 중 하나를 해결하고 만족해서 안 된다. 신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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