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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156 vote 0 2009.01.20 (11:54:40)

우리는 주로 눈에 보이는 고체 형태의 사물을 위주로 판단하지만, 그런데 인생은? 사랑은? 국가는? 마음은? 행복은? 예술은? 진리는? 도(道)는? 이(理)는? 기(氣)는? 이렇게 들어가면 어려워진다.

빛이나 사과는 눈에 보이지만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구조는 관계를 추적한다. 빛이나 사과가 보이는 이유는 주변의 시공간이 간섭해서, 빛이나 사과가 그 외력의 작용에 맞서 방어하느라 입자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뭐든 주변에서 갈구면 자기방어를 위하여 입자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입자 형태가 나타나는 물체만 보고 판단하면 위험하다. 더 많은 부분이 형태가 모호한 채로 존재한다.

예컨대 돈은 무엇일까? 한국은행에서 종이에 잉크를 처바르면 돈이 되는 걸까? 통화증발은 왜 일어날까? 인플레는 또 무엇인가? 도무지 경제라는 것, 자본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지금 경제위기가 온 것도 돈의 질이 나빠져서다. 서브 프라임이라는 것이 은행이 돈을 너무 많이 찍어서 뿌린 결과다. 은행이 재할인율 범위 안에서 마구잡이로 여신을 하기 때문에 돈을 찍어낸 셈으로 된다.

중앙은행이 아닌 개별은행도 재할인율 범위 안에서, 금리가 제어하는 한도 안에서 마음대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돈이 대부분 현찰이 아니라 통장 안의 숫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은행원이 자판을 두들겨 작대기와 동그라미를 찍으면 바로 돈이 발생한다. 그래서 돈이 넘쳐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포착이 안 된 것은 부동산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떤 한계를 넘어가니 빵 터져서, 부동산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넘어 사회의 전 영역에 퍼져버린 것이다. 그 너무 많이 찍어낸 돈이. 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여 돈의 품질을 떨어뜨렸듯이.

허생이 변부자에게 만금을 빌리면 만금이라는 돈이 발생한다. 개인이 수표나 어음을 발행하는 것도 국가가 돈을 발행하는 원리와 정확히 같다. 한국은행이 돈 찍어내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국가에서 은행을 상대로 국채를 팔아 돈을 쓸만큼 가져오는데 그것은 실현가능한 약속이다. 국가가 보증을 서서 실현가능한 약속이 생기면 즉 돈이 탄생하는 것이며 그 약속이 지켜지면 돈의 품질이 올라간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면 돈의 품질이 걸레가 된다. 통화증발로 되어 돈이 저절로 무(無)로 변해버린다. 돈은 안개처럼 시장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러면 다급해진 정부는 돈을 마구 찍어서 시장에 뿌린다.

그만큼 환율변동이 일어나 돈이 휴지가 된다. 그 돈으로 외국여행을 가면 망신을 당하는 거다. 중요한 것은 이런 메커니즘이 기계의 작동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 기계다.

질이란 무엇인가? 어떤 그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과정이 질이다. 그 존재를 규정하는 조건. 그렇다면 그 존재의 조건은 무엇인가? 외부작용에의 대응과 자기보존이다.

외부에서 건드리면 반응해야 한다. 반응이 없으면 무(無)가 된다. 반응하려면 반응할 수 있는 포지션을 즉각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는 물체 위주로 사고하므로 ‘항상 반응한다’는 생각을 가지는데 그렇지 않다.

식민지인은 저항이라는 형태로 반응해야 국가라는 존재를 발생시킨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와도 전혀 저항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재는 무가 된다. 질은 요소들을 결합시켜 반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가동한다.

사과나 빛은 칼라나 맛과 향기로 반응하지만, 이는 이미 입체체제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외부에서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맛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건드림이다.

사과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작용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 저항이 실패하면 사과는 변질되어 버린다. 질이 질인 이유는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썩어버리는 거다. 없어져 버린다.

질은 자기보존과 외부대응이며 그것은 요소간 단단한 결합으로 가능하다. 썩지 않아야 한다. 형태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그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가만 내버려두면 존재는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다.

항상 외부와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에 의해 자기 정체성이 유도된다. 너절하게 퍼져 있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외부에서 자극하면 바짝 긴장하여 똘똘 뭉쳐서, 내부에 강한 핵을 만들고 핵을 중심으로 사방에 포진한다.

물질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을 초속 30만 키로 이상의 힘으로 때리면 물질이 튕겨져 나온다. 물질은 무에서 그냥 튀어나온다. 외부에서 작용하여 그것을 그것이게 한 것이다.

역으로 물질은 가만이 있어도, 내부에 초속 30만 킬로 이상의 RPM이 걸려 있다. 어떤 것이 '그냥 가만이 있다'는 것은 가만 있는게 아니라, 광속 이상의 알피엠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이다.

총알을 장전한 총처럼, 바짝 긴장한채 신경이 곤두서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간과 공간의 부단한 작용에 의해, 숨은 알피엠을 잃어서 존재가 풀어져서 녹아 없어져 버린다. 질이 나쁘면 그렇다. 그래서 질이다.

빛이 칼라를 내든, 사과가 빨강을 내든 외부자극에 그렇게 적극 대응한 것이다. 그 대응할 수 있는 단단한 체제를, 정밀한 내부 메커니즘을 구축함이 질이며, 그것은 원소들의 결합에 의해 가능한다.

결합이 잘 되어 있으면 진짜 사과이고, 결합이 안되어 있으면 그림 속의 사과다. 혹은 썩은 사과다. 질이 나쁜 사과다. 그것이 그것이게 하는 원소간 결합정도를 보고 우리는 질을 판단한다.

질이 좋거나 나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가만 있는 것도 초속 30만 키로 이상의 알피엠을 내부에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탄알을 장전한 총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부 메커니즘이 있다. 질은 결합이다. 가족은 사랑으로 결합되고, 국가는 주권으로 결합되고, 돈은 신용으로 결합된다. 만약 그것을 잃으면 외부작용에 대응하지 못하고 녹아 없어져 버린다. 그것이 그것이 아니게 된다.

질을 이해함은 그것이 없어질 수도 있고, 새로 탄생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거다. 물체는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이라는 자궁에서 새로 탄생하여 외부환경에 맞서는 자기보존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며, 그 메커니즘을 잃으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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