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말들과 글들이 있다.
그리고 언어가 있다.
새롭게 접하는 것은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풀어가는 언어가 있다. 곧 그것을 풀어가는 말과 말의 방식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그것을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곧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자면 포맷해야 한다. 비우고 새롭게 채워가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므로서 가능하다. 그러나 기존의 것이 다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선별적 파괴다. 도움되는 것은 남는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에는 많은 말들과 글들과 언어가 있지만, 같은 말이라도 글이라도 언어라도 그 쓰임새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그만큼 많은 길이 있다는 의미도 된다. 번역도 얼마나 사고가 같아졌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의 세력을 이룬다는 말은 곧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정한 누군가의 방식을 쫒는다 하여도 그 사람의 방식을 쫒아가야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유는 사람마다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길을 찾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갖고 있으며 그들만의 언어방식이 있다. 그래서 각각 찾아가는 길이 다르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그 사람의 사고의 방식과 같아져야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가는 길은 가면서 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이해되는 것도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씩 다르게 여겨진 그것들에서 많은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결국 크게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 길위에서 필요한 언어가 있다. 같은 언어라도 그 길위의 언어가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길위의 언어에 대한 문해력(문식력)을 길러야 한다.
외국어만 풀어야 언해가 아니고, 특정한 것을 해독하고 해석한다고 해서 언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때로는 낮설고 생소한 언어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석이나 설명과 해석이 필요해지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언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말 일지라도 언해 수준의 다른 언어인 것과 같다.
그 길을 가는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언어에 대한 언해가 필요하고, 스스로의 문해력이 필요하고,
차츰 스스로의 언어화가 되어가야 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가 탄생하게 된다.
그 길위의 보편적인 언어가 자신에게서 다시 특정한 언어가 된다. 이것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생각된다.
세상에 길은 많지만 크게는 몇가지 길로 압축된다. 그것으로 모두 세력을 이루어 갔다.
그 길의 방향은 작게는 직업찾아 가는 길이고 크게는 삶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길이란 사람이면 누구나 가고자 하는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것일 것이다.
삶이 완성되면 죽음은 저절로 자연스럽다.
^^; 감사....
일어나는 생각들을 붙잡아서 써 보았는데... 계속 더 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엔 글을 쓰고나면 내글이라도 다시 살펴보고 읽어보는 것이 귀찮아서 더 관심을 쏟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꾸 읽어보게 되고 자꾸 다듬어야 할 것들이 있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뭔가 표현이 제대로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것은 그만큼 아직 생각이 불확실하고 정리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괜히... 한날당 의원 발언 대박친 내용을 읽다가 속이 메슥거렸는데...감사하게도 진정제 역할을 하게 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
이곳을 읽는데 뭔가를 다듬는 듯한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는데... 그렇다면 아란도님의 글은
'나물을 다듬는 손길'(탄력)이라 명명해도 괜찮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