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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046 vote 0 2009.04.06 (23:27:20)

예술의 발전단계

구조론은 무엇을 하는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 답은 ‘철학자가 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철학자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 평론이다. 철학자는 대개 평론가가 된다. 평론가는 관객과 작품을 매개한다.

뚜쟁이와 비슷하다. 주례사평론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철학은 결혼식 주례와도 비슷하다. 뚜쟁이가 짝을 찾아주고 주례가 결혼을 완성시킨다. 철학은 인간의 삶와 문명의 진보를 짝지어 완성시킨다.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가는 누구와 짝짓는가에 달려있다. 대안목이 큰 평론을 낳아 역사의 조류를 바꾼다. 세잔 이래 인상주의 화풍이 득세하게 된 이면에 철학자의 역할이 있음은 물론이다.

‘구조론은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은 ‘철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인생의 어떤 갈림길에서 파트너를 정하고 포지션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무수히 선택과 판단의 기로에 선다.

구조론이 선택과 판단을 돕는다. 최적의 퍼트너와 포지션조합 그리고 적절한 임무를 찾아낸다. 이에 필요한 것은 ‘모드’다. 얻어야 할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 곧 현대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남의 질서가 아니라 자기 질서라는 점이 중요하다. 남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서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신의 줄을 완성하기다. 남의 요리라면 그저 먹기만 하면 되겠지만 자기 요리이므로 모드를 찾아야 한다.

무엇인가? 우리의 21세기가 지금 맞닥드리고 있는 사태의 본질이, 우리가 당장 상대해야 하는, 해치워야 하는 문제의 본질이 ‘포드의 몰드’가 아니라 ‘세잔의 모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맞닥드린 문제는 현대의 문제다. 봉건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문제는 모드의 문제다. 모드는 짝짓기다. 숫가락과 젓가락이 한 벌로 짝을 짓듯이 짝을 지으면 곧 액션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진다.

삶은 실천이며 실천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 모드다. 모드는 자기 존재의 실존적 구축과정을 따라 전개된다. 내가 도무지 세상의 어느 부분과 대립각을 세우느냐에 따라 나의 소속할 팀이 결정되는 것이다.

축구든 야구든 어느 부분과 각을 세움으로써 팀이 찾아진다. 소속할 팀 곧 자기 정체성을 결정할 동아리 -그것은 가족, 부족, 국가, 민족, 계급, 신분, 종교집단 등의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를 찾는 것이다.

다음 자신이 활약할 무대를 찾고, 맞서 싸울 혹은 함께할 파트너를 찾고, 그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고 최종적으로 이 순간의 임무를 찾아 모드는 갖추어진다. 실행준비는 완료된다. 현대성이다.

동아리≫무대≫파트너≫포지션≫임무

예전에는 이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속도, 무대도, 파트너도, 포지션도, 임무도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 혹은 주변에서 대신 결정해 주었다. 노예였기 때문이다. 노예에게는 원래 소속이고 무대고 없다.

노예는 존재가 없다. 실존이 없다. 기계의 부품이 주어진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노예는 포지션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포지션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졸병처럼 자기 자리만 지키면 되었다.

우상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제압되었기 때문이다. 모드는 불필요, 철학도 불필요 그저 주인나으리가 시킨대로만 하면 만사형통. 그저 남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서기만 하면 된다는 관념이 봉건성이다.

현대성은 봉건성을 거역한다. 반기를 든다. 뒤집어 엎는다. 거대한 전복이다. 우상의 시대가 아니라 이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노예가 아니라 시민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모드를 고민할 자격이 얻어졌다.

마르크스줄에 가서 서든, 예수줄에 가서 서든, 석가줄에 가서 서든, 공자줄에 가서 서든, 건희형 돈줄에 가서 서든, 명박군 권력줄에 서든 자신의 모드가 없이 남이 세운 줄 뒤에 설때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다. 이름을 잃고 무대를 잃고 파트너와 헤어지고 포지션을 잃고 임무에서 제외된다. 나의 존재 없이도 세상은 세상대로 잘 돌아간다. 그 빛바래어진 삶을 회복하여야 한다.

왜인가? 내가 이미 그것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회복한 이상 네가 또한 회복하지 못하면 서로의 소통은 실패, 짝짓기는 실패, 임무는 실패로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드가 필요하다.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짝지어서 존재 그 자체를 든든하게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름을 부르고, 무대에 오르고, 파트너를 정하고, 포지션을 나누고, 임무를 수행할 때 존재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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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고대 샤먼의 주술이나 신탁, 제의 따위가 발전하여 성립한 것이 아니다. 존재의 조건이라 할 소통과 공존의 원리에 따른 공동체적 삶의 요구에 의해 탄생되었다. 이러한 예술의 본질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말하는 생존경쟁 개념은 틀렸다. 종은 생존이 아니라 세력을 원한다. 전투개미는 죽으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개미집단 전체가 하나의 경쟁할 세력단위가 되고 개체 단위의 생존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개체의 생존을 위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세력의 성장 단위로 진화해 왔다. 이 점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생태계 환경에서 경쟁의 기준은 개체가 아니라 세력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그 세력의 구심점을 이루는 공동체 곧 이웃과 함께할때 기쁨을 느끼는 본능이 있다는 거다. 바로 그 공존본능이 예술의 출발점이다. 널리 소통하여 공유하고 공존할 때 인간은 기쁨을 얻는다.

그 공존은 자연과의 공존, 환경과의 공존으로부터 시작되며 공동체의 발전을 따라 전개되고 문명의 진보로 완성된다. 세력을 키워 문명을 완성시키려는 본능에서 그것을 가능케 할 소통의 수단으로 예술이 나왔다.

인간에게는 자연환경, 가족, 동료와 소통하는 본능이 있다. 소통할 때 쾌감을 얻는다. 쾌감을 추구한 결과 예술이 탄생했다. 음악을 들으면 행복감을 느낀다. 정글에서 사냥감을 만나 동료를 부르려면 그런 본능이 필요하다.

새들은 짝짓기를 위해 노래하지만 그 과정에서 쾌감을 느낀다. 인간은 사냥하기 위해 동료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이에 노래로 신호하며 쾌감을 얻는다. 소박한 단계의 예술 탄생이다.

나중에는 사냥할 일이 없어도 노래를 부르게 된다. 단지 노래부르기 위해 노래부르는 것이다. 타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또 자기만족을 위해서 노래하게 된다. 예술은 이렇게 발전해간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노래잘하는 사람이 그룹의 리더가 된다.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면서 예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노래를 잘부르는 그룹이 세력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얻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현실적 필요성도, 쾌감의 즐거움도, 권력의 지배목적도 배제하고 순수하게 노래 그 자체의 내부적인 논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노래하는 단계다. 순수하게 ‘진정한 노래란 이런거야’ 하는 점을 완성하기다.

처음에는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노래하지만 나중에는 노래 자신이 스스로 노래하게 된다. 인간의 의도를 떠나 순수하게 노래 내부의 논리, 그 내부의 조형적 질서를 극한까지 추구해 들어가게 된다.

흙을 빚는 도공이 최고의 도자기를 굽고 싶어하듯이. 차를 달이는 선사가 최고의 차를 추구하듯이. 술을 빚는 이가 최고의 술을 빚고 싶어 하듯이.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분양의 정상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치고 난 다음 마지막 단계가 현대성의 단계다. 모드를 추구하는 단계다. 이미 노래의 극한까지 완성된 다음의 단계다. 최고의 음을 완성했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물음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깨달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다. 심우도의 마지막 단계는 입전수수다. 다시 시장에 손을 담근다. 완성된 나로 완성된 너를 만나 더 높은 차원에서 제 3의 완성을 끌어내기다.

1) 소박한 단계.
2) 몰입의 단계.
3) 정치화 단계.
4) 고상한 단계.
5) 소통의 단계.

예술은 이러한 단계적 발전과정을 가진다. 처음부터 소통의 단계로 바로갈 수는 없다. 전체과정을 모두 거쳐보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21세기 인류는 네번째와 다섯째 단계의 사이에 있다.

원시인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길에 떨어진 피리를 하나 주웠다. 피리를 불어본다. 고운 소리가 난다. 그 소리로 동료를 부를 수 있다. 피리가 쓸모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술의 탄생이다.

어느덧 피리소리에 매료된다. 원래의 쓸모 외에 다른 목적이 생겨난다. 피리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리를 권한다. 피리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모여든다.

피리계의 리더가 된다. 권력자가 된 것이다. 맘껏 뽐낼 수 있다. 그러나 부질없다. 해볼 것 다 해보고 난 다음에는 흥미를 잃는다. 후세에 남기려면 더 진도나가야 한다. 피리를 연구하여 더 나은 피리를 제작한다.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 그 자체의 논리를 완성하는 피리를 만들게 된다. 그 논리를 완성할 때 피리 뿐 아니라 모든 악기가 한꺼번에 탄생한다. 피아노도 나오고 바이얼린도 나오게 된다.

이 지점에서 거대한 비약이 일어난다. 하나의 악기가 다른 악기와 화음을 이룰 때 기대하지 않았던 제 3의 효과가 일어난다. 진정한 가치는 그곳에 있다. 여기서 모드의 문제 곧 현대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다. 원시인이 길을 가다 주운 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의 피리다. 문명은 처음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지만 그 이상이다.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인간을 쾌락을 위한 문명의 봉사가 아니라 문명 그 자체의 완성이다.  

문명이 단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수준에 머무를 때 환경은 파괴되고 인간은 피폐해진다. 마약과 같다. 마약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황폐화 시킨다. 문명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 그 자체의 아름다운 완성이 우리가 헤쳐가야 할 21세기의 진보다. 하나의 작은 피리가 진보하여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루었듯이 문명은 스스로 진보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비약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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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의 소박한 단계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축제를 앞두고 몸치장을 하듯이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장식이지만 장식한다는 의도는 없다. 굳이 남보다 뛰어나려는 목적은 없다.

이 시기의 예술은 경쟁되지 않는다. 예술은 삶의 일부로 존재할 뿐 분리독립하여 따로 전시되지 않는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매너리즘 현상이 나타난다. 몸단장을 하다가 거기서 흥미를 느껴버린 것이다.

경쟁과 전시가 시작된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가 하면 경쟁적으로 타인의 이목을 끌려고 한다. 과장과 왜곡, 변형이 나타난다. 여자아이는 캔디처럼 눈을 크게 그리고 꽃이나 레이스로 장식한다.

남자어린이의 울퉁불퉁한 근육이나 로봇, 칼이나 창과 같이 뾰족한 형태를 좋아한다. 그 부분을 묘사할 때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이 단계에 너무 몰입하면 중독현상이 일어나 기진맥진하게 된다.

세번째 단계에서 정치화 된다. 예술이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명백히 인간을 제압할 목적을 가진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 석가탑의 절묘한 대칭과 균형, 정밀한 세부묘사를 추구한다.

여기에는 명백히 인간을 제압하고 기죽이려는 의도가 있다. 타인을 줄세우려는 의도가 있다. 인물화를 그리되 사람보다 옷을 크게 그린다. 아카데미즘의 경향이 대두된다. 화가라는 신분을 너무 의식한다.

아마추어와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다. 아마추어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신통한 기술을 보여주어 화가 신분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화가라면 붓자국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다.

고흐와 추사가 이를 배반하여 의도적으로 붓자국을 드러낸다. 종이와 먹의 거친 대결을 강렬하게 노출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와 관객의 단절과 분리는 극복된다. 새로운 미술의 등장이다.

네번째 단계는 주제나 메시지를 탑재하는 운반수단에서 탈피하여 자체적으로 완성하는 단계다. 초상화라면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 메시지를 가진다. 종교화라면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메시지를 탑재한다.

실패다. 진정한 회화는 그러한 메시지를 버릴 때 시작된다. 그림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그러한 의도와 메시지와 주제의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예술은 텍스트를 실어나르는 운반수단이 아니다.

그림이라는 배, 소설이라는 배, 영화라는 배, 음악이라는 배를 감동과 교훈이라는 텍스트를 실어 운반하는 교통수단으로 전락시킬 때 실패다. 영화보고 감동받았다는 애들과는 대화하지 않는 것이 좋다.

르네상스 미술이 처음 원근법을 얻었을 때 그림은 비로소 그리스 신화를 건물의 외벽에 히스토리로 올려서 서사를 전하려는 인간의 목적에서 독립하였다. 진정한 그림의 출발인 것이다.  

그림에는 그림 자신의 논리가 있다. 그리고 주제나 메시지나 교훈을 태우려 할 때 그 논리와 충돌한다. 그리스 신화의 방대한 이야기를 그림에 집어넣으려 할수록 그림 자체의 미적 통일성은 희생된다.

영화든 소설이든 그러하다. 도덕적 훈화가 하나씩 삽입되어 들어갈때마다 작품성은 한 단계씩 떨어진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완성하고 소통되면 그 뿐 인위로 개입하여 타인을 계몽하려 해서 안 된다.

세잔이 형태를 주문했을 때 그림은 비로소 사물을 종합하는 능력을 얻어 인간의 목적에서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완성되었다.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 탄생이다. 그림 안에 심과 날이 있다. 진짜 그림 시작이다.

이 단계에서 예술은 ‘서권기 문자향’을 얻어 고상하고, 우아하며, 세련되어진다. 작은 한 폭의 그림 안에 하나의 우주를 집어넣게 된다.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은 이 네번째 단계에 도달해 있다.

최종단계에 와서는 심플해진다. 피아노는 혼자서 모든 연주를 다하려고 한다. 혼자서 오케스트라 전체를 상대하려 한다. 하나의 작은 화폭에 우주를 통째로 집어넣고야 말겠다는 식이다. 틀렸다.

최후의 단계는 수평적으로 공존하며 소통한다. 심플해지지 않을 수 없다. 주변과 공존하기 위해서다. 화려하게 장식한 공주님이라면 혼자서 무대를 독점해야 하지만 현대성은 그러한 오만을 피한다.

그래서 모드다. 모드란 심플한 묘사를 통하여 자기를 절제하고 이웃을 초대하며 타인과의 공존을 꾀하는 것이다. 그림 안에 여백을 두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배경을 생략하는 것이다.

예술은 소박한 예술≫취미예술≫정치예술≫프로예술≫소통예술로 발전한다. 네번째 단계까지는 모드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타인을 종속시키려는 의도의 주제나 메시지가 부각되므로 자기줄을 찾아가면 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다시 사회로 나가 시장바닥에 손을 담그듯(입전수수) 진정한 음악, 진정한 그림을 완성한 사람은 다시 타인과의 공존과 소통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성이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각자 자기자신의 위조지폐를 완성하고 사회적인 신뢰를 형성하며 각자의 신뢰를 모아 전체의 커다란 신뢰, 인류문명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작품을 건설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현대는 21세기에 와서 처음 탄생한 것이 아니다. 모드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바로 탄생한 것이다. 르네상스가 소실점을 얻었을 때 비약했다.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은 자연을 거역하다 천벌받을까 무서워서 못하는 우상의 시대였다. 세잔이 형태를 얻었을 때 현대는 비약했다. 그림이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종합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거다.

아카데미즘이 지배하든 시대라면 사과를 그리든 호박을 그리든 그 사과나 호박은 인간에 의해 판명되었다. 인간이 ‘음 저것은 사과로군’ ‘음 저것은 호박이로군’ 하고 고개를 주역거리며 인정하는 것이다.

세잔 이후는 다르다. 그림 내부에 심과 날의 질서가 있다. 그림 내부의 질서에서 그것이 판명된다. 인간의 눈에 사과로 보이지 않아도 그림 내부의 질서에서 사과포지션에 가 있으면 그것은 사과다.

이에 그림이 추상화 된다. 현대회화가 점점 난해해지는 것은 인간의 판명에 의해 절대논리로 규정되지 않고 그림 내부의 상대논리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태양을 파랗게 그려도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숨은 내부질서를 찾을 때 작은 하나를 미세하게 움직였을 뿐인데 마치 큰 지진이라도 일어난듯 전체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전율감을 맛보게 된다.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다.

음악은 다만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의 밑바닥에 깊게 깔린 심층구조의 깊이에 도달할 때 인간은 전율한다. 생명의 근원에서 울려오는 전율감이 없는, 표면에서 노는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은 가짜다.

진정한 음은 귀를 버릴 때 완성된다. 참된 깊이에 이르러 깨달음에 닿을때 미술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고 감동과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너른 소통으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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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몰드 개념으로 오해되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연상할 수 있다. 자동기계,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정신없이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 인생이 현대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량생산-집단주의에 각을 세우게 되었다. 탈근대 개념이다. 착각이다. 진정한 현대는 르네상스가 씨를 뿌렸고 세르반테스가 발견했고 세잔이 꽃을 피웠다. 모드가 현대다.

인간을 제압할 의도를 드러내는 우상의 시대에 각을 세워야 한다. 잃어버린 인간의 혼을 찾아야 한다. 그 혼을 불어넣어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완성시켜야 한다. 이성의 시대다.

각자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얻어 그것으로 스스로를 독립적으로 완성하고 타인과의 수평적 공존을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비약하는 소통의 시대를 열어젖힘으로써 인류문명이라는 걸작을 그려내기다.

구조론의 목적은 평론가 양성에 있다. 심미안을 얻고, 안목을 얻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가치판단을 해서 짝을 찾아주는 것이다. 바른 판단과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하여 사회에 기여한다.

짝짓기를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미완성의 존재는 그 불완전성으로 하여 어쩔수 없이 의존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남이 세워놓은 줄 아무데나 그 뒤에 가서 서게 된다.

종교의 줄, 권력의 줄, 기득권의 줄, 신분의 줄, 관습의 줄, 인맥의 줄, 패거리의 줄, 편견의 줄 뒤에 가서 서 있기 십상이다. 그렇게 다들 노예가 되어 있다. 독립하지 않으니 짝을 찾을 수 없다.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야 파트너를 얻는다. 시민의 자격을 얻어 독립해야 모드의 문제를 발견한다. 좋은 학벌, 좋은 가문, 좋은 직업이 문제를 해소해버린다면 애초에 모드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이 없어도 잘 살고, 예술이 없어도 잘 살고, 유니폼 입고도 잘 살고, 기계의 부품이 되어서도 잘 살고, 배부른 돼지라서 잘 산다면, 그래서 모드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너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모드의 문제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두 독립적 존재가 접촉하는 접점에서의 유쾌한 긴장에서 얻어진다. 손이 닿을락말락할때의 간절함이다. 영화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그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다.

모드는 필연적으로 심플해진다. 왜? 장갑낀 손으로 악수하겠는가? 마스크 쓰고 키스하겠는가? 장식이라는 장갑을 벗고, 권위라는 명품을 벗고 순수해지지 않으면 그 접촉의 접점은 찾아지지 않는다.

조선백자나 분청사기는 타인을 제압하려는 권력측의 의도나 뭔가 한칼하는 솜씨를 보여주겠다는 장인의 억지가 없다. 왜?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주인공에서 조연배우까지 다해버리면 모노드라마가 되기 때문이다.

앙상블을 이루려면 분청사기처럼 겸허해야 한다. 가꾸어진 정원에 친구를 초대하려면 먼저 담장의 높이를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햇볕이라는 손님, 참새라는 손님, 나비와 벌이라는 친구도 찾아온다. 그것이 모드다.

심1과 날 2에 더하여 입력과 출력이라는 구조를 드러낸다. 화려한 장식이 빼꼭하고 주제와 감동과 교훈과 메세지가 한꼭지씩 점령해버리면 구조가 죽어버린다. 첫 만남과 같은 유쾌한 긴장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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