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v.media.daum.net/v/20170329050348616
후회가 집착이라는
말은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입니다.
'내가 잘났다' 하는 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너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거죠. 바라볼 너가 없으므로 결국 나를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므로 괴로운 거지요. 왜? 인간의 뇌는 외부환경변화에 반응하게 되어 있는데 그 외부환경변화가 없으니까. 호르몬 탓이라는 거죠. 너를 만나지 않고 나에서 탈출하지 못합니다. 그 너가 꼭 사람 누구를 말하는건 아닙니다. 여행을 해도 되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되고 세상을 바라보고 천하를 바라보고 신을 바라보고 그 안의 완전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완전성을 포착하는 예술가의 눈을 얻어야 한다는 거죠. 그럴때 오만해져서 후회도 집착도 사라집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처럼, 위플래쉬의 플레처 교수처럼 뻔뻔스럽게 변합니다. 왜? 나를 바라보는 자기소개 습관을 벗어나 완전성의 결이라는 에너지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이지요. 백만대군에 묻어가는 졸병처럼 아무 걱정없이 헤헤거리고 가는 거죠.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성공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를 잘 받습니다” “사람들이 날 싫어할까 봐 불안해요” “이성에게 인기를 끌고 싶어요” “상사의 잔소리에 화가 납니다” 등등. 대중이 던진 질문도 솔직하다." 전혀 솔직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 자기를 위조하는 거짓말이죠. 대부분 밖에서 두들겨 맞고 와서 안에서 화풀이하는 겁니다. 이명박근혜가 당선되거나 IMF가 오면 이혼이 증가하고 부부싸움도 늘어나는데 그걸 상대방 탓으로 돌리는건 솔직하지 않은 거죠.
밖으로 나가서 만날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므로 호르몬이 이상하게 나와서 강박증에 걸리는 거죠. 뭔가 자신에게 감추고 있는 겁니다. 상부구조로 올라서는 방법으로만이 개미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천하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저 감상이거나 주어진 상황을 피해가는 처세술을 알려주는 에세이·자기계발서에 그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상황이나 감정에 대중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다양한 사례와 경험으로 조언한다." 유아틱한 감상이고 졸렬한 소인배의 처세술이죠. 천박한 자기계발서 맞습니다. 맞고요. 문제 안에는 답이 없습니다. 전혀 조언이 안 된다는 거죠. 대부분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가길 두려워 하면서 즉 외부에서 조달해야할 에너지를 내부를 쥐어짜서 조달하려 하므로 자해한다는 말이지요. 모든게 에너지 조달문제라는 본질을 확인해야 합니다.
"‘즉문즉설’이란 설법 또한 흥미롭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을 객관화하며 얼핏 깨닫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맞장구를 치거나 반론하는 것 모두 독자의 몫이란다. 스님은 “깨달음은 선사의 말씀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다”며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행복은 출발한다”고 말한다. 삶이 곧 소중한 체험이자 체득인 이유다." 거짓말입니다. 얼핏 깨달을 일이 아니고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삶에 있는게 아니고 진부한 삶의 일상에서 탈출함에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죽어도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쨌든 법륜에게 권위를 부여하면 독자는 법륜을 만났으니까 그 만남으로 인해 에너지를 얻겠지만 라즈니쉬나 문선명이나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나 박빠들이 만난 박근혜와 같습니다. 박빠들도 살아있는 것을 자각하며 지금 행복감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공주님이 드디어 우리와 같은 민중 속으로 스스로 내려오셨어.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깜방에. 이러면서 말이지요.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행복해 하는 것보다 신의 마음을 복제하여 자기 안으로 가져오는게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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