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는 공간의 대칭을 쓰고 실행은 시간의 호응을 쓴다. 무엇인가? 그것은 시공간 속의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실시간 중계가 된다.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그 안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는 완전성의 세계다. 완전하면 통하고 통하면 낳는다. 낳아서 풍성해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그림이 원근법을 만나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음악이 화음을 만나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언어가 깨달음을 만나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개인전이었다. 근대 올림픽은 단체전이 인기가 있다. 개인전은 선수의 몸 속을 보지만 단체전은 선수들 사이의 팀워크를 본다. 사이에 더 많은 볼거리가 담겨 있다. 그 세계는 다른 세계이며 완전성의 세계다. 그 세계가 더 아름답다. 다이아몬드라 해도 어둠 속에서 제 홀로 빛나지는 않는다. 빛을 만나야 빛난다. 미녀와 만나야 보석이 제 가치를 발휘한다. 무대를 지배하는 프리마돈나의 가슴에서 더욱 완벽하다. 만나서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홀로된 것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완전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완전성은 사이에 있다. 그 세계를 깨닫기다. ### 다섯 개의 칸막이가 있다. 칸막이를 제거하여 다음 단계의 일을 연동시키는 마이너스 방향으로만 일은 진행된다. 플러스로 가면 서로 연동되지 않는다. 연동시키려면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호응을 새로 조직해야만 한다. 마이너스 방향은 일의 순서에 의해 이미 연동되어 있다. 플러스의 실패는 일할 수 있는 조건 맞추느라 하루종일 회의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공산주의 실패가 이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여 위아래를 연동시키는 것이 마이너스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 플러스다. 뭔가 추가하면 대칭과 호응이 깨진다. 실이 엉켜버린다. 일은 망쳐지고 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세상은 엔트로피 증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엔트로피 증가’라고 하면 헷갈린다. 열역학적 무질서가 외견상 질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있으면 살아서 움직인다. 움직이면 무질서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고 죽은 것이 무질서하다. ‘무질서도 증가’보다 ‘연동의 풀림’이 이해하기 쉽다. 에너지가 작동하면 만나고 짝짓고 실행하는 절차를 소비하한다. 연동되어 있는 것이 풀린다. 대칭과 호응이 깨지면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짝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보다 ‘연동의 풀림’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에너지는 대칭과 호응으로 연동시킨 다음에만 사용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