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생각하는 기술이다. 생각하는 기술이란 ‘의미’를 추적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이나 본능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쉽지 싶지만 실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이 아닌 본능과 감정으로 판단한다. 이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된 생각은 연역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연역은 완전의 상을 잡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다. 단지 생각하는 척 할 뿐이다. 그들은 감정과 본능이 인도한 바 사전에 지정된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뇌를 통째로 새롭게 세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감정이나 본능을 따라가도록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 슬픔, 기쁨, 배고픔, 우울함, 부끄러움, 어색함, 욕망, 이것이 당신을 지배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가짜들의 지배를 벗어나 100프로 순수하게 의미를 따라가기다. 의미를 따라간다는 것은 완전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이 불변의 가치를 낳고 그 절대의 가치가 사물에 반영되어 상대적인 의미를 이루는 까닭이다. 연역적 구조로 뇌를 세팅하기 위해서는 완전의 모습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완전에 대한 이미지를 얻어놓아야 한다. 어떻게 그 완전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가? 이는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가 우연히 그 어떤 창조적인 상황에서 지적인 희열을 느낄 때, 깨우침의 쾌감을 느낄 때 그대의 뇌가 완전에 공명하는 순간이다. 완전한 그림, 완전한 음악, 완전한 건축, 완전한 조직, 완전한 기계, 완전한 문학, 완전한 작품이 주는 특별한 감흥이 있다. 그 순간을 잡아챌 수 있어야 한다. 그 연주자는 그 상황에서 왜 미친듯이 숨도 쉬지 않고 건반을 두드렸을까? 극적인 완전에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 울림과 떨림이 전해지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