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economic/consumer/newsview?newsid=20090817113709047
“나는 수도를 하는 도승이오. 내게 있어 여인은 사마외도요. 냉큼 물러가시오.”
황진이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인식해야할 것이 있다. 삶은 축제의 장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축제에 초대된 존재들이다. 축제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왜 태어났느냐? 제발 고행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 지성의 허약함만 드러낼 뿐이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에는 인상여라는 재상과 염파라는 장군이 있었다. 인상여가 화씨지벽(和氏之璧)사건으로 벼락출세를 하자 염파가 발끈했다. 염파는 인상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도가 지나친 염파였다. 소위 군대에서 소장이 대장에게 벼른 꼴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자비가 먼저냐, 수행이 우선이냐를 따질 것인가. 꼭 집어 얘기하자면 자비는 전체이고 수행은 부분이다. 따라서 전체는 승자의 언어요, 부분은 패자의 언어일 수 밖에 없다.
머니투데이 정보철 칼럼
검색 중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괜찮구료. 아직 완전히 아는건 아니지만 꽤 높은 수준이오. 완전히 몰라도 되오. 대략 방향만 맞으면. 이 분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구조론적이오.
리플을 보니 이 분 칼럼이 잘못되었다는건 독자도 알고 있소. 읽어보시고 어디가 맞고 어디가 틀렸는지 논해보시오.
철오선사는 무엇을 잘못했소? 칼럼작가는 무엇을 잘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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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님 답변은 그럴듯하나 잼없소. 확 와주는게 없소. 이 칼럼 작가는 엉터리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나름대로 눈이 확 뜨이는 표현을 다수 쓰고 있소. 뭔가를 아는 양반이오. 그러나 참된 깨달음은 없소.
철오는 할매가 관음보살임을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난 거요. 20년 동안 매일 마주치고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니 쫓겨날 밖에. 황금이 눈앞에 있어도 관계를 맺지 못하면 쫓겨나는 것은 당연.
축제 어쩌구는 제법 그럴듯한데 에너지가 없소. 막연히 즐기자는건 답이 아니오. 관계를 맺고 존엄을 얻는데서 에너지는 작동하오.
축제를 즐기는게 아니라 걸맞는 연주를 해야 하오. 상갓집에서 춤 추면 매맞소. 잔치집에서 곡하면 매맞소. 만날 사람이 만날 장소에서 만나야 하오. 결론은 항상 그렇지만 서로 대등해야 한다는 것. 서로 필요로 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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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과 황진이의 만남은 지성과 예술의 만남.
하나의 세계와 또 하나의 세계가 부딪힌 사건.
화담은 황진이를 정상에 선 예인으로 대접하였고,
황진이는 그렇게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준 화담을 최고의 지성으로 대접하였고,
둘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조선시대판 정상회담.
둘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일대 사건.
극과 극이 만난것. 남극과 북극이 부딪힌 것만큼이나 대사건.
황진이는 아마 화담을 만나기 전,
철오 선사에게 젊은 처자를 보낸 노파처럼 끊임없이 남자들을 시험했을 것이오.
자신의 몸도, 자신의 기예도, 자신의 언변도 아닌, 황진이라는 최고의 예인을 알아볼 위대한 안목을 지닌 사람을 찾았던 것이오.
아니지.
달마가 서쪽에서 온 것처럼, 뜰 앞의 잣나무처럼, 인도라는 세계를 품고 중국이라는 세계와 만난 달마처럼, 황진이 역시 화담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가슴속에 거대한 열정을, 에너지를 품고 그렇게 서쪽으로 가다가 화담과 부딪힌 것이오. 북태평양 기단과 해양성 한대기단인 오호츠크 해 기단이 서로 거대한 수증기 덩어리를 품고 만나듯, 그렇게 만난 것이오 한 사람은 예술을 한 사람은 지성을.
북태평양 기단과 해양성 한대기단인 오호츠크 해 기단이 서로 거대한 수증기 덩어리를 품고 만나면 한달 동안 내리 비가 쏟아지듯,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만나면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나오듯,
오바마와 청소부가 만나면 멋진 장면이 연출되듯.
그렇게 만남으로 위대한 무언가를 낳으려면 서로가 대등해야 하고, 서로가 대등하려면 결국 각자가 존엄해야 하오.
그리고 우리는 존엄한 관계 속에서 진실로 서로 대등해질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맞설 수 있고 맞물릴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고, 낳을 수 있소.
서화담과 황진이의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재현되었소.
백석은 자야를 만나고,
이상은 금홍을 만나고,
그렇게 지성은 예술을 만나 역사에 남고, 작품을 낳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재현되고 있소.
완전함은 또 다른 완전함을 낳소.
정상회담은 계속 되오.
그렇게 진도를 나간게 바로 진보의 역사.
지켜본바 순간은 완성되었소 아름답소
선문답은 문제에 대해 답을 맞추는게 아니고 답에 대해 문제를 조직하는 것이오.
어디선가 소리가 났소. 그 소리는 종소리요. 그렇다면 누가 종을 쳤다는 이야기. 그 종은 완전한 종이오. 만약 완전하지 않다면 소리가 나지 않을테니까. 그러므로 답은 완전성이오.
답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맞춰 문제를 조직해 내기요.
이야기들이 지어질 당시에는 사람들이 순박해서 내가 어제 길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다 해도 믿던 때였소.
철오는 마땅히 살아있는 관음을 안으니 백룡이 청운을 만난듯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관음할매의 김성모식 싸대기 108단 콤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오.
지족은 황진이를 기생취급해서 짤린 것이오. 황진이가 원하는 것은 존엄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오.
중국이 원하는 것은 존엄이지 달마에게 뭐 한 소식을 배워보자는둥 이딴 것이 아니오. 중국은 준비된 종이고 달마가 그 종을 쳤소. 달마가 오기 전부터 중국은 고유한 깨달음의 도를 가지고 있었소. 그것을 달마가 알아봤다는 이야기.
몽룡이 춘향을 알아보듯 단숨에 알아봐야 이야기가 되오. 선문답은 일정한 공식이 있기 때문에 알고 보면 꽤 잼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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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렬님이 동쪽으로 온 이유도 알겠구려. ^^
1. 철오선사는 무엇을 잘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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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관계이오.
철오선사는 첫단추를 잘못 꿰었고, 두 번째 단추도 잘못꿰었소. 애당초 첫단추인 노파와의 관계가 잘못 맺어졌소. 노파와의 관계가 좋았다면 노파가 굳이 선사를 시험할 이유가 없소. 관계가 틀어진 것이 먼저이오. 구조론에서 말하듯 노파와 선사와의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잘못 꿰어진 첫단추라오.
그런데 20년이나 또 골방에 틀어 앉아서,
“어떻게 하면 암자에서도 쫓겨나지 않고 노파도 실망시키지 않는단 말인가”
이따구 고민이나 한다고?
내가 노파라면 철오선사를 찾아가 그 수행처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버렸을 것이오. 아직도 정신 못차렸으니까.
고목선이 고목이 된 이유는 나무가 햇볕을 못만나고 비를 맞지 못하고 비옥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즉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했기 때문이오. 노파를 끌어안고 울든, 손녀딸을 찾아가 다시 껴안든 간에, 아무튼 철오선사는 집이 불태워진 즉시 관계의 장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소. <사이>로 뛰어드는 것이 정답이오. 다시 단추를 새로 꿰어야 하오. 관계를 다시 맺어야 하오.
그리고 그 관계는 암자에서 쫒겨나지 않기 <위하여>도 아니고 노파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하여>도 아니오. 그것은 내 안에 터져나오는 에너지로, 열정으로, 사랑으로, 자비로 이어지는 관계여야 하오. 그것이 될 때, 더 이상 노파는 스님을 테스트할 필요가 없소. 고목이 아니라 생명으로 살아 숨쉬는 아름드리 나무가 노파와 스님 사이에서 무럭무럭 자라날 테니까. 스님의 가슴에 핀 꽃 한송이의 향기가 노파의 늙은 코에도 전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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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칼럼작가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는 여전히 정답에, 화살이 날아가 꽂힌 과녁에 눈이 돌아가 있소. 그는 지족과 서화담 사이에서, 인상여와 염파 사이에서, 노파와 철오 사이에서,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정답을 찍고 자랑하고 있소. 하지만 그는 놓치고 있소. 중요한 것은 유혹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거나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인상여가 염파와 싸우거나 싸우지 않거나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노파가 불을 지르고, 지르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오.
중요한 것은 바로 유혹 그 자체이오. 유혹이라는 살아 숨쉬는 펄떡거리는 에너지의 장, 그리고 그 열정과 흥분의 무대에 서화담과 지족, 그리고 황진이가 초대받았다는 것이 중요하오.
중요한 것은 바로 전국시대라는 고도의 긴장이 걸려있는 공간이오. 그 공간에 인상여와 염파는 하나의 배역을 맡아 연기한 것이오. 인상여가 잘했고, 염파가 못했고는 중요하지 않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거대한, 어마어마한 긴장의 공간에서 인간 군상들이 연출한 드라마라오.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하듯이 노파와 철오의 관계라오. 노파가 테스트를 해야 하는 관계라면 이미 오래전에 그 관계는 파탄난 것이오. 누군가 시험문제를 내고 누군가는 거기에 답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오. 더군다나 한 번 틀린 문제를 또 다시 20년 동안 고민해야 한다면 그것은 설령 정답을 찾았다 하더라도 비참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소. 관계는 북채로 한가운데를 두드리면 나는 북소리와 같아, 관계가 올바로 맺어지면 바로 소리가 나게 되어있소. 20년을 또 기다린다고? 미쳤소?
칼럼작가는 정답을 찍으려다 정답을 놓쳤소.
우리가 보아야 하는 정답은 지금 동렬님의 글에 답하는 나에게 있는 것도, 동렬님의 글에 있는 것도, 독자들의 눈에 있는것도 아니오.
정답을 맞추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질문이 나를 불렀소. 그리고 나는 그 초대에 응하였고.
원래 그러한 것이오,
황진이가 지족을 파계시키려고, 서화담을 테스트하기 위해 유혹하였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루한 것이오.
진실은, 유혹이라는 무대에 세 사람이 초대되었고, 이 셋이 길이길이 인구에 회자다는 명장면을 남겼다는 것이오.
그것으로도 충분하오.
에너지가 부르고, 거기에 답하고. 완전성은 그 안에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