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침 부처님 오신날이라서 하는 얘기긴 하지만, 불교하고는 별 관련이 없다. 연꽃, 불교를 상징하는 꽃인 연꽃은 참 누가 정했는지 몰라도 정말이지 종교나 철학을 상징하는 꽃으로 기가막히지 않은가? 기독교에서는 어째서 연꽃을 찜하지 못한건지...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도, 시궁창에서도 자라나 아름답게 피어난다. 더러움, 시궁창과는 정 반대의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이것이 구조론적이다. 수면 아래의 세상과 수면 밖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 이 안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재혼한 어머니와 알콜 중독자 계부 사이에서 성장한 빌 클린턴이나, 여러차례 재혼한 어머니와 오랜기간 떨어져 성장한 버락 오바마, 부모로부터 버려져 입양된 스티브 잡스, 그리고 멀게는 베토벤까지... 그들의 성장기는 연못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을 떠오르게 한다.
연꽃과 이들의 공통점은 암울한 환경을 예술, 정책, 아이디어 등의 희망적인 무언가로 변환시키는 스위치가 있다는 것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높이 뛰기로 치자면 최고 속력으로 달려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왼발 > 오른발 > 왼발을 크게 뛰면서 마지막 그 왼발을 디딜때, 발목을 틀면서 점프하는 것과 같다. 속력의 수평 에너지를 어느 순간에 높이의 수직 에너지로 변환하여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가 있을 것이다. 시궁창에 살면 꽃을 피울 수 있는가? 시궁창에는 시궁창의 에너지가 있는 법이다. 시궁창은 쥐새끼가 득실거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는 법. 그것은 시궁창 때문이 아니라 연꽃의 씨앗 때문이다. 시궁창이라도 연꽃의 씨앗에서 연꽃이 나고, 쥐새끼는 커서 큰 쥐새끼가 될 뿐이다. 씨앗 자체에 이미 연꽃의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 없는 사람은 문제에 약하다. 문제가 있어야 문제해결능력이 생긴다. 새로운 해법이 나온다. 샘 못하는 서양인이 수학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연꽃은 꽃을 피우는 것이 나름의 문제해결이었던 것이다. 꽃이 피어나면 악취가 사라진다.
연꽃의 역설이 피워오르기에 최적의 환경이 대한민국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