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v.daum.net/v/20220112215630259
암호화폐건 그걸 응용한 NFT건, 중요한 것은 가치의 형성이다. 우리는 그것이 좋다와 나쁘다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수동적인 것이다. 대신 '정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능동적이다. 정도를 안다는 것은 대칭의 쌍과 다시 맞물리는 비대칭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공자가 말하는 중도다. 정도를 알면 위상이 보이고 가치가 보인다. 관점이 달라진다. 올려다 보는 게 아니라 내려다 보는 게 의미가 있다. 그럼 가치는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되느냐? 사회에서 인정받아 형성된다. 사회의 구성원이 그것을 인정하면 결과적으로 가치가 성립한다. 그런데 그 사회는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인정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이게 암호화폐와 NFT의 가치를 결정한다.
가령 내가 바닷가에서 조개 껍데기를 주웠다고 치자. 보기에는 참 이쁘게 생겼다. 근데 이거 돈 받고 팔 수 있을까? 어른들한테는 못 팔겠고 사탕 빨고 있는 꼬마한테는 말로 잘 포장해서 사탕과 교환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나에게 프라다는 무가치 하지만 꽤 많은 사람이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도 마찬가지다. 암호화폐가 가지는 근본적인 가치 또한 이와 같다. 그걸 누가 인정할 것인가? 누누히 말하지만 나는 암호화폐가 무가치 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 가치는 암호화폐 주의자들의 주장 만큼 크지는 않다. 적정선이 있다.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일부에게 좋다. 이게 누구한테 먹히냐가 중요하다. 다단계도 가치가 있다. 주변에 보면 다단계 하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다단계가 그렇게 좋으면 애플도 삼성도 핸드폰을 다단계로 팔게 된다. 물론 테슬라는 다단계를 도입하므로 배신자다.
암호화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가치가 있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권력이다. 권력은 우선권이라 했다. 우선권이라 함은 타를 이길 수 있느냐로 정해진다. 이긴다는 말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긴다는 것은 대립물 사이의 질서이다. 싸워서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순서를 정할 수 있느냐로 판단되는 것이다. 소싯적에 싸워보면 안다. 실력이 애매할 때 싸움이 난다. 하지만 한 판 붙고 나면 친해진다. 당사자가 질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기건 지건 상관이 없다. 질서를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과연 암호화폐는 다른 것을 이길 수 있는가? 암호화폐는 나름 선방하였다. 10여년 동안 충분히 실력발휘를 하였다. 어느 기업이 인류에게 이런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암호화폐가 해킹에 안전하냐 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걸 이해하려면 국가 화폐의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 지를 빗대어 생각하면 된다. 한국의 원화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소위 국력으로 결정된다. 국력은? 국가의 총체적인 역량이다. 좀더 추상화 해보자. 내부로 보면 국민들의 아이큐가 외부로 보면 주변국과의 관계로 국력은 정의된다.
암호화폐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과연 훌륭한가? 그들의 도구는 다른 것을 이길 수 있는가? 다단계도 나름 가치가 있다. 암웨이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 시스템이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점성술이나 종교도 이와 같다. 문제는 그것이 계속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느냐이다. 우리는 그것이 뜨는지 지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가치는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의 의해 상대규정 되는 것이다. 진실이지, 암호화폐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은 권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길거리의 야바위도 나름의 권력을 만든다. 골목권력이지만.
중심권력이 있으면 반동으로 주변권력도 생기는 법이다. 모더니즘이 있으면 포스트모더니즘도 있더랬다. 빠와 까는 공존한다. 빠만 생긴다면 이상한 것이다. 까가 생기는 것을 보아야 안심이 된다. 주변권력을 표방하는 암호화폐는 분명히 공존의 가치가 있다. 다만 주변권력이다. 나는 암호화폐가 그 자체 보다는 코로나 이후의 투자시장 활성화에 기여를 한 것으로 그 가치를 평가한다. 코로나라고 하여 미국이 대규모 양적완화를 감행한 트리거로서 분명 암호화폐는 큰 역할을 하였다. 엘살바도르 대통령을 비난할 수는 없다. 비트코인이 아니었다면 뉴스에도 나올 수 없는 나라가 아닌가.
NFT로 돌아오자. 음원의 유통을 보면 이해가 쉽다. 음원의 권리는 국가가 보호해준다. 길거리에서 함부로 틀면 단속된다. 그러므로 아무도 음원을 암호화 하지는 않는다. 암호화를 하고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집단에 의해 보호되느냐아니냐가 중요한 것이다. 해킹을 막는 기술이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국가가 그것을 범죄로 인식하느냐가 우선이다. 길거리에 떨어진 지갑을 가져가지 않는 것은 집단이 쳐다보기 때문이지 지갑을 보도블럭에 자물쇠를 채웠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집시들이 가져가는 것은 그들이 국가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차의 표를 확인하지 않은 지도 오래다. 그럼에도 기차 표를 복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복제를 불가능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제가 불법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요 시간지연에 불과하다. 너무 쉽게 복제가 가능하면 개나소나 복제하므로 관리자가 피곤해진다. 소싯적 버스의 회수권과 같다. 쓸데없이 도장이 찍혀있다. 나는 빨간펜으로 복제했지만 말이다. 그림실력이 있는 소수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쫄아서 몇 번 안 그렸지만.
이후에 등장한 카드라는 기술의 발전은 관리자의 대처 시간을 벌어준다. 하지만 여전히 불법 카드 복제가 뉴스에 나온다. NFT가 어떤 것의 진품을 보증해주는가? 물론 해준다. 하지만 암호화 기술이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증해야 한다고 믿는 집단이 보증한다. 내가 자유롭게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범죄다. 그것은 왜 범죄가 되었는가? 맞는 인간이 안 맞는 인간을 이기기 때문이다. 유럽 경제가 기우는 걸 보고도 안 맞는다는 소리가 나오나?
코로나 사태 이후에 국가의 보건 정책을 두고 파시즘이라고 소리치는 인간이 많아졌다. 이것은 과연 독재인가? 그것이 독재이냐 아니냐는 독재를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상대국을 이기냐 아니냐로 판단된다. 일본에 쳐맞고 자존심이 상하므로 박정희가 독재자로 쌍욕을 처먹는 것이다. 독재는 진화의 과정일 뿐이다. 독재가 나쁘면 왕국도 나쁘다. 왕국도 한때는 부족에 이긴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체제를 욕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족을 이겼으니깐. 물건을 사고팔 때는 유통기한을 잘 살펴야 한다. NFT나 암호화폐도 유통기한이 있고 간격이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암호화폐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만들어 놓은 권력이 사라지는 것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다른 것의 관계에 지배된다. 노모한테 운동하라고 해봤자, 헤어진 연인에게 행복하라고 말해봤자 나의 말은 관계에 의해 재규정되어 푸념으로 개소리로 탈바꿈된다. 말은 말로 통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쓴다고 하여 이런 글을 읽는 사람이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당신과 나의 관계가 내 글의 의미를 왜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메신저의 인상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실은 인상이 아니라 메신저와 리시버의 관계가 인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