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족보 현대철학은 니체가 두서없이 지껄인 아포리즘에 각주를 다는 것에 불과하다. 동양철학은 노자의 앞뒤 안 맞는 말에 열심히 각주를 달고 있다. 니체와 노자의 언설은 다분히 직관에 의존한다. 그 직관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유의 모형이 있다. 일정한 패턴이 있다. 그런데 앞뒤가 안 맞다. 체계가 없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니 써먹기 좋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 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그것은 철학의 모색일 뿐, 철학의 결론이 아니다. 그것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걸 수는 있으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미학이 없기 때문이다. 미학이 최종적이다. ‘세상을 바꾸는 디자인’을 제출하지 못하는 철학은 반쪽짜리다. 체계를 부여해야 미학이 선다. 체계를 세우려는 입장이 합리주의다. 그 체계의 근거는? 기독교다. 엉뚱하다. 종교가 웬 말이냐? 현대철학은 여전히 기독교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를 극복해야 한다. 칸트의 이성이나,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기독교의 ‘영혼’ 개념을 슬쩍 비틀어놓은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철학은 체계를 세워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미학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일상으로 침투할 수 있다. 개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살아라’고 해야 한다. 철학의 체계는 연역적 구조로 되어야 미학이 선다. 회의주의는 귀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 경우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라’고 주문할 수 없다. 세상을 뜯어고치는 계획을 제출할 수 없다. 중국중심 동양철학은 모두 역易으로 연결되니 자연의 계절변화에서 궁극적인 삶의 근거를 가져왔다. 그것이 성리학이 되고 퇴계와 율곡의 주리설과 주기설이 된다. 하늘의 본성이라고도 한다. 중용의 성性 개념이 그러하다. 무엇인가? 간단하다. 깨달음은 ‘언어’에서 오는 것이다. 언어는 주어 다음에 술어가 와야 한다. 문장에 주어가 없이 술어만 주워섬기는 것이 노자와 니체의 부류다. 둘은 닮았다. 반대로 술어 앞에 가짜 주어를 배치하는게 헤겔이다. 사유의 모형이 있다. 직관의 모듈이 있다. 생각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도구가 있다. 이성이니 절대정신이니 이데아니 해봤자 그냥 주어를 생략하고 대타로 가주어를 쓴 것이다. ‘이성’이나 ‘절대정신’, ‘이데아’ 대신에 ‘it’나 ‘거시기’로 해도 말 된다. ◎ 합리주의 계열 – 가주어 it를 쓴다. 엉성하지만 체계가 있으므로 미학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살아라.’ 하고 주문한다. ◎ 상대주의 계열 – 술어만으로 떠든다. 매력적이지만 미학까지 진도를 나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살아라.’는 주장을 비판한다. 동서양의 철학사는 주어없이 술어만 가지고 떠드는 부류와, ‘거시기’를 쓰는 사람이 서로 말꼬리를 잡고 비난하는 진풍경에 다름 아니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영혼’이나 ‘귀신’을 쓴다는 차이점이 있다. 다 가짜다. 어쨌든 미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철학이 대중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절충점은 없는가? 희미하지만 있다.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가 매력적이다. 영혼이니 이성이니 절대정신이니 하면 사회와의 연결고리 없이 갑자기 미학으로 쳐들어가므로 대중이 칸트를 모방하여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고, 헤겔의 절대정신을 본받아 고상한 척 하며 폼 잡아야 하느냐로 고민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화두를 던졌을 뿐이다. 헤겔이 이를 전개하여 제법 떠들었으나 더 많은 화두를 던진 셈이 되었다. 그림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쇼펜하우어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미쳤고, 니체가 파시즘에 영향을 미쳤으니 현실과의 접점이 있는 것이다. 어떻든 접점이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무엇인가? 헤겔과 니체를 합쳐야 그림이 나와준다는 말이다. 헤겔과 니체를 합치면 공자가 된다. 공자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과의 접점이 있다는 거다. 헤겔이 절대주의라면 니체는 상대주의다. 현대철학은 니체의 상대주의를 떠든다. 절대주의로 가면 영혼을 탐구하다가 기독교가 되기 때문이다. 이성이니 영혼이니 이데아니 절대정신이니 하면 황당하다. 어떻게 표현하든 가주어다. 현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현실에 천착하면 주어없이 술어만 떠들게 되는 노자의 오류에 빠진다. 현실과의 접점을 찾되 궁극적인 근거는 자연에서 가져와야 한다. 자연으로 가면 물질을 넘어 에너지 세계에 이른다. 구조론은 열역학 2법칙에 근거한다. 인간 역시 에너지로 설명되어야 한다. 무엇이 인간에게 에너지를 주어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가?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와 니체의 ‘권력의지’가 알려져 있다. 거기에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의지’를 보탤 수도 있다. 도교는 불노장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쾌락의지’다. 공자의 입장은 복잡하다. 인仁이 종교적 존엄의지라면, 의義는 정치적 권력의지에 가깝고, 예禮는 정치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이 있다. 예가 궁중예법으로 가면 정치적 권력의지가 되고 공중도덕으로 가면 문화적 쾌락의지가 된다. 공자의 악樂은 문화적 쾌락의지에 가깝다. 공자는 여기에 서열을 정한다. 쾌락이 본능의 충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이 쾌락이다. 악을 거부하고 선을 지향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현대인의 행복지향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는 이 모두를 포괄한다. 쇼펜하우어가 던진 화두를 니체가 구체화 했고 공자가 완성한다. 말하자면 그렇다. 공자의 제자들이 이를 옳게 살려가지 못했지만 공자의 아이디어는 그렇다. 공자가 사용한 사유의 모듈이 그러하다. 구조론의 정답은 열역학 2법칙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의 기제는 이데아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이성이나 절대정신도 아니고, 신의 섭리도 아니고, 이理도 아니고, 성性도 아니다. 동물의 생존본능도 아니고, 프로이드의 잠재의식도 아니고, 공리주의가 말하는 이기심이나 행복추구도 아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은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에너지 효율성이다. 효율적인 것이 합리적이다. 유교의 오상으로 보면 인仁이 앞서고 知가 다음이며, 의義가 잇고, 신信이 따르고 예禮로 끝난다. 인≫지≫의≫신≫예가 된다. 기승전결로 보면 기가 앞서고, 승이 잇고, 전이 따르고, 결이 마지막이다. 에너지 낙차가 결정한다. 일의 순서개념이 중요하다. 바둑을 두어도 포석이 먼저다. 초반 포석이 없으면 중반 전투가 소용없고 막판 끝내기도 소용없다. 초반전략이 없으면 후반전술도 소용없다. 인간을 지배하는 근본은 마땅히 자연에서 찾으며, 그것은 열역학 2법칙이고, 인간사회에 반영되면 일을 하는 순서다. 개척자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맨 먼저 해야하는 일은? 교회를 짓는다. 그것이 인仁이다. 교회에는 장애인도, 노약자도, 거지도, 여성도, 이방인도 다 들어올 수 있으므로 인이다. 만약 흑인이라 해서 교회가 문을 닫아건다면 인仁이 아니다. 인이 개척민 집단의 생존확률을 높인다. 그래서 생존의지다. 그 다음은? 지도자를 뽑고 그 지도자를 따른다. 그것이 의義다. 대의명분이라고 한다. ‘대의’는 진리라는 리더를 따르는 팔로워십이다. 그러므로 인이 의에 앞서고 예가 마지막이다. 열역학으로 보면 맨 처음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꾼다. 개척민들이 처음 신대륙에 상륙하였다면 에너지의 방향은 확산방향이다. 위태롭다. 이를 수렴방향으로 바꾸어야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교회를 건설하고 지도자를 뽑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 삼국지라면 도원결의가 에너지의 확산을 수렴으로 바꾼다. 황건적으로 인한 난세를 치세로 바꾸자는 이념이 인仁을 구성한다. 유비의 인仁이 특이점을 형성하자 관우와 장비가 수렴방향으로 튼 것이다. 반면 골육상쟁으로 죽은 원소의 아들들은 인仁에 실패하였으니 그들은 확산방향으로 치달아 흩어졌다. 조조의 자식들도 끝내 흩어졌고 사마씨도 마찬가지다. 인은 어질다는 의미다. 어질다는 모질다에 반대된다. 모질다는 모가 났다. 모가 나면 밀어낸다. 확산방향으로 작용하는 척력이다. 약자라는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밀어내는 것이 모가 난 것이다. 반대로 한 자리에 모으면 인仁이다. 인仁은 인人 + 이二다. 둘의 공존이다. 모든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서 시작된다. 춘향과 몽룡이 만나도 어떻게 공존할까를 생각한다. 그것은 관계설정이다. 관계설정이 척력을 인력으로 바꾸어 나와 타자를 공존케 한다. 도원결의도 교회건설도 본질은 나와 타자의 관계설정에 목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방향성이다. 먼저 전체와 나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인류 전체, 혹은 국가 전체, 조직 전체와 나의 관계다. 그것이 존엄의지다. 권력의지나 쾌락의지는 아직 말이 나올 단계가 아니다. 그 이전의 원초적인 상황이다. 갑자기 지구에 뚝 떨어져버린 그런 상황 말이다. 먼저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설정한 다음에, 자연과 진리와 세상과 나의 관계를 정한 다음에,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한 다음에 그 관계 안에서 서열을 끌어올리려고 한다. 그것이 권력의지다. 신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회사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만약 국가가 나를 이방인으로 대접한다면? 그 국가에 충성할 이유는 없다. 만약 회사가 나를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그 회사에 충성할 이유는 없다. 재미교포나 재일교포라면 관계설정에 고민이 있다. 유태인과의 마찰도 관계설정의 차이 때문이다. 종교가 다르면 관계가 틀어진다. 관계설정이 먼저다. 존엄의지가 먼저다.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존엄의지다. 관계설정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도원결의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사랑이든 충성이든 혁명이든 전복이든 관계설정이다. 관계의 처음은 확산방향이다. 너와 나는 모르는 사이다. 타인은 친자식이라도 우주 너머에 있는 거다. 아내든 남편이든 동생이든 우주 저편의 존재다. 이 사실을 절절하게 받아들으지 않으므로 타인은 지옥이다. 특이점을 형성하여 에너지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꾼다. 모든 행위동기는 궁극적으로 여기서 조달된다. 그것이 공자의 인仁이다. 모질면 밀어내고 어질면 끌어당긴다.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너지의 작동원리에서 일의 진행원리로, 사회의 의사결정원리로 연역해 가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세상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거나 하는 삶의 미학이 얻어지는 것이다. 근거를 대야 한다. 세상을 이렇게 바꿔야 하고 삶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행복하고 좋고 예쁘기 때문은 아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법이며 나무도 뻗어나갈 빈 공간을 향해 가지를 내민다. 절벽쪽으로는 가지를 낼 수 없다. 막히기 때문이다. 물이 거꾸로 흐를 수는 없다. 옳고 그르고 간에, 예쁘고 더럽고 간에 안 되는건 안 되는 거다. 해봐라 되는가? 인간은 길이 열린 쪽으로 가는 것이다. 막힌 쪽에서 열린 쪽으로 틀 때 그 지점에 특이점이 형성된다. 방아쇠는 당겨진다. 화살은 날아간다. 인생이라는 화살 말이다. 왜 산을 오르는가?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를 수 없다면 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위대한 만남이다. 인간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방향을 튼다.
어떤 서로 다른 둘이 만나서 방향을 트는 것, 그것이 철학입니다. 거기서 에너지가 얻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역사가 될 수도 있고, 진리가 될 수도 있고,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금을 찾아나선 광부는 금을 만나면 방향을 틉니다. 행복이니 권력이니 명성이니 이런건 바보같은 소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