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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145 vote 0 2016.02.29 (11:08:26)

     

    제 19편 자장子張


    논어 제 19편 자장은 제자들의 언행으로 건질만한 것이 없다. 하나같이 말할 줄 모른다. 시詩처럼 운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운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시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시는 대칭을 통해 긴장을 일으키고 각운을 통해 풀어낸다. 모든 예술은 대칭을 쓴다. 대칭은 뇌를 긴장시킨다. 집중하게 한다. 깨달음은 그 가운데 있다.


    자공이 말하길
    “은나라 마지막 주왕의 악함은 그처럼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자는 강물의 하류에 거처함을 경계한다. 천하의 모든 악이 그리로 모여들기 때문이다.”


    18번이나 수도를 옮긴 은나라가 마지막에 황하 하류로 수도를 옮긴 후에 나빠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은의 주왕이 특별히 포악했던 것이 아니라 은나라가 노예사냥과 인신공양으로 유지되는 고대 노예제 국가였기 때문에 그동안 누적된 은나라의 모든 악이 강물의 하류로 모여들어 마지막 왕인 주왕에게 덧씌워진 것이다. 

    군자는 언제라도 사건의 원인측에 서지 결과측에 서지 않는다. 결과는 강의 하류이기 때문이다.


    ###


    숙손무숙이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고 말하자 자공이 말하길
    “담장에 비유하자면 자공의 담장은 어깨높이다. 담너머로 집안의 좋은 풍경을 볼 수 있다. 공자의 담장은 대궐과 같아서 그 대문 안으로 들어가보지 않는 이상은 종묘의 아름다움도 백관의 북적임도 볼 수 없다. 그 대문으로 들어선 자가 몇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 자공이 공자에게 배운 것이다. 공자 외에는 자공만이 멋진 비유를 말할 수 있었다. 

    공자는 일의 순서에 맞추어 비유하는데 자공이 이를 터득하여 써먹은 것이다. 자공에게는 그나마 공자의 테크닉이 일부 전수되어 있는데 맹자에게는 전혀 없다. 물론 주자에게 있을 리가 없다. 공자의 가르침은 당대에 끊어졌다.


    제 20편 요왈堯曰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일어설 수 없고, 언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명命은 자연에 근거한 진리의 법칙이고, 예禮는 사회에 받아들여짐이요, 언言은 개인의 능력발휘다. 천하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점차 범위가 좁혀지는 것이 구조론과 통한다. 


    구조론은 에너지의 결을 따라 전체에서 부분으로 좁혀진다. 에너지는 의사결정한다. 의사결정의 절대원리는 결정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정하려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에너지의 잉여가 필요하다. 에너지를 남기려면 범위를 좁혀야 한다.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사건에 임하여 대칭을 만들고 축을 움직여서 그 대칭된 둘 중에서 하나를 취하는 방법으로 점차 범위를 좁혀가며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범위를 좁히면 에너지의 잉여가 있으므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이는 에너지의 결이다. 결따라 간다. 이것이 순리다. 거스려면 역리다. 역리는 부분에서 가능하지만 곧 에너지가 고갈되므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잠시 승리하나 영원히 패배한다. 순리를 따르라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군자는 위에 있으므로 아래를 본다. 소인은 아래에 있으므로 위를 본다. 논어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이고, 도덕경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본 풍경이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전모가 보이지 않는다. 전모가 보이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 알지 못하는 자가 아는 척을 하니 언어가 혼란스럽다. 


    언어가 혼란스러우니 소인배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매력이 된다.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인배들이 도덕경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논어는 군자의 도덕률이요 도덕경은 소인배의 처세술이다. 단 논어는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므로 정상 그 자체에 대해서는 구태여 해명하지 않았다. 


    단지 주역에 살짝 근거를 둘 뿐이다. 공자는 공부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 깨달아서 일이관지한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상부구조를 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공자의 사상에 일부 허점이 있으므로 노자의 일부 기여함이 있다. 거기까지다.

    공자는 군자를 가르치고 노자는 소인을 가르친다. 소인배의 가르침이 와닿는다면 소인배다. 그러므로 공자보다 노자가 인기가 있다. 물론 그래봤자 예수를 당할 수는 없다. 공자와 노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노자는 일단 문장력이 떨어진다. 좋은 대목과 조잡한 표현이 공존한다. 후대의 가필 때문일 수도 았지만 원래 문제가 있다. 논어 안에서도 공자의 말과 제자들의 말은 수준차이가 크다. 노자 스스로도 ‘나도 잘 모르지만 억지로 말해본다.’고 말하고 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추상개념을 표현하는 어휘가 절대로 부족했던 그 시대의 한계였다.


aDSC01523.JPG


    논어나 도덕경의 원문해석에 관심을 두는 분이 많은데 그건 배신입니다. 이곳은 구조론을 논하는 곳이며, 구조론을 쉽게 설명하는 방편으로 공자와 노자를 끌어들이는 것이지, 공자나 노자 따위가 뭐 대단하다고 거기에 매달린다는 말입니까? 주객이 전도된다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일단 공자를 쳐죽이고 오세요.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진작에 나왔는데 아직 안죽였습니까? 배신은 안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오맹달

2016.02.29 (18:51:42)

공자는 이미 깨달았기에 그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노자는 깨달음에 이르지 않아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 왕필의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공자를 방편으로 풀어주시는 구조론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구조론도, 공자도 두루두루 이해가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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