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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801 vote 0 2016.02.05 (10:54:46)

     

    "참으로 인에 뜻을 둔다면 악한 것이 없어진다.“


    어진 것을 단순히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좁게 해석한다면 곤란하다. 공자는 어진 사람만이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워하는 것은 어진 것이 아닐진대 왜 공자는 미워하라고 말했겠는가? 착한 마음만으로는 악을 해결할 수 없다. 선과 악이 싸우면 악이 이기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 맛난 음식이 식탁 위에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면 악당도 싸울 마음을 잃기 마련이다. 결핍이 악을 부르는 것이다. 인류의 생산력이 증대한다면 악은 자연히 소멸한다. 생산력을 늘리려면 과학하여 환경과의 상호작용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참된 인이다. 공자는 직관적으로 그런 판단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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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와 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나 도道로써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않는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나 도道로써 얻은 것이면 피하지 않는다. 군자가 인은 버린다면 어떻게 명성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먹는 동안에도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 황급한 때에도 지키고, 위급한 때에도 지켜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작은 인이 아니라 신과의 일대일, 곧 큰 인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의사결정에 인이 쓰인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 첫 번째 의사결정인 질의 결합이 인이다.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마음의 결합이 군자의 명성을 이룬다. 밥먹을 때는 숟가락과 결합해야 하고, 황급하게 나설 때도 신발과 결합해야 하고, 위급할 때라도 칼과 결합해야 한다. 인을 무언가와 결합하는 것으로 본다면 인이 쓰이지 않을 때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의 결합력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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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진 것을 좋아하는 이를 보지 못했고, 모진 것을 미워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행이겠으나, 모진 것을 싫어해도, 어진 것이 행해져 모진 것이 내 몸에 붙지 못하게는 한다. 하루를 어진 것에 쓰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그것에 힘이 모자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나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단지 선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 악을 미워해야 하며 현장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없다. 타인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자는 단지 마음이 착한 사람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다. 공자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는 능력있는 기술자가 필요했다. 그 기술을 갖춘 사람은 없지만 그것을 갖춘 팀은 있다. 안회가 그 마음씨로 어진 사람이 되고, 자공이 그 지혜로 모진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자로가 그 용맹으로 모진 사람을 낱낱이 처단하면 된다. 공자는 안회와 자공과 자로가 합쳐진 완벽한 인격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 사람은 현실공간에 있을 수 없지만 어딘가에 있다. 역사 속에 그것이 있고, 세월 속에 그것이 있고, 시간 속에 그것이 있고, 일의 흐름 속에 그것이 있다. 위대한 문명의 진보에 있다. 공자가 큰 일을 일으키매 일 안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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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허물은 그 사람이 소속된 당파에 따라 정해지니 일의 경과를 보면 그가 인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어진 사람인지 모진 사람인지는 그 사람이 소속된 곳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결정된다. 진보는 어질고 보수는 모질다. 진보와 보수의 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는 자연에서 이득을 취하고 보수는 남의 것을 빼앗는다. 진보는 잘못을 저질러도 역사의 확률 속에서 용해된다. 다양한 진보실험 끝에 인류의 나아갈 큰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의 실패는 그 노선이 잘못된 노선이라는 좋은 정보를 획득한 점에서 성공이다. 보수의 성공은 남의 것을 빼앗는데 성공한 것이므로 성공해도 실패다. 일하는 방식을 보면 진보인지 보수인지 알 수 있다. 실패해도 인류 전체의 성공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일하면 진보이고 당장의 이득을 취하려 하는 자는 보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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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도는 일의 도다. 일이 되어가는 방식이다. 일은 불과 같아서 한 번 불을 붙여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타는 법이다. 그 불이 잘 타는가 못 타는가는 그 들판의 풀이 마른 풀이냐 젖은 풀이냐가 결정한다. 이 세상의 일은 인류가 좋은 인류냐 나쁜 인류냐가 결정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다만 섶에 불을 붙여놓고 떠날 뿐 구태여 불길을 지켜보며 애태우지 않는다. 타는 불길에 부채질을 하지 않고 물을 끼얹지도 않는다. 다만 그 불이 완전한 불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불이 옮겨붙은줄 알았더니 연기만 조금 나다가 꺼져버리기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성냥불로 촛불을 켜듯이 완전하게 붙어주어야 한다. 공자의 말은 깨달은 이의 언어다. 보통은 아침에 들은 도를 점심에 펼치고, 저녁에 수확하려 든다. 어떻게든 보상받으려 한다. 도는 불과 같으니 어떤 존재하여 있는 것을 내게로 가져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일을 새로 벌이는 것이다. 군자는 천하에 요원의 들불을 일으키고 떠난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간다. 그 불이 최후에 어떤 결과를 빚을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침에 문명의 불씨를 일으켜놓은 자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 도는 천하의 것이며 천하의 존재와 그 완전성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 번 신을 만나면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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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도 남루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더불어 의논할 사람이 못된다.“


    도는 일이다. 선비는 일 자체의 되어가는 결을 따른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지며 그 사이에 고저장단의 온갖 소용돌이와 거친 물결의 칼라를 만들어낸다. 일은 넓어지고 좁혀지며 빨라지고 느려진다. 일은 또 높아지고 낮아지며 가벼워지고 무거워진다. 일로 불행해지고 일로 비참해지며 일로 행복해지고 일로 존엄해진다. 그 모든 것은 일의 결과이며 진짜는 일 그 자체의 되어가는 모양새다. 일 자체의 가쁜 호흡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쓴다면 미처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짜라면 일의 활력에 주의한다.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이 그 활력의 양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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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는 천하의 일에 있어서 반드시 옳다거나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의를 따른다.“


    군자는 일을 따른다. 일은 복제, 조합, 연출된다. 일의 복제단계는 진리의 지배를 받아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는 절대성을 따르지만, 조합과 연출의 단계에 이르면 상대성을 따른다. 조합은 대칭시키며 대칭은 파트너가 있고 파트너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절대로 안 된다고 하거나 절대로 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연출의 단계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연출은 현장의 날씨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므로 절대로 이래야 한다거나 절대로 저래야 한다는 것이 없다. 조명을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엑스트라를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수도 있다. 연출은 순전히 감독의 재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일이라고 하면 보통 일의 초기 세팅단계를 지나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된 단계를 말하기 쉬우므로 공자는 이 장면에서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된 단계를 말한 것이다. 집을 지어도 초기 단계는 엄격하게 설계도를 따라야 하지만 골조를 올리고 난 다음에는 이미 안전상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부분적인 설계변경을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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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는 덕德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土을 생각한다. 군자는 법刑을 생각하고 소인은 혜택惠을 생각한다.“


    군자는 이념을 보고 투표하지만, 소인은 지역을 보고 투표한다. 군자는 사회의 질서를 기대하지만 소인은 개인의 혜택을 기대한다. 군자는 ‘일’로 판단하고 소인은 ‘존재’로 판단한다. 군자는 인상주의 그림으로 보고, 소인은 아카데미파 그림으로 본다. 군자는 낭만주의로 바라보고 소인은 고전주의로 바라본다. 군자는 마음의 연결루트를 찾고 소인은 물질의 존재지점을 찾는다. 2500년 전의 공자가 오늘날의 지역주의를 예견했음은 놀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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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인仁이냐 이利냐다. 군자와 소인의 가는 길이 나눠진다. 인은 어진 것이다. ‘어질다’는 ‘모질다’의 반대다. 모진 것은 뾰족하게 모가 난 것이다. 이利는 치齒와 같으니 뾰족한 동물의 이빨이다. 원시인들은 뾰족한 동물의 송곳니를 도구로 써서 이득을 취했으니 돌멩이라도 날카로운 ‘모’가 있는 것이 ‘쓸모’있다. 그러므로 모진 사람이 그 뾰족함으로 이득을 취한다. 이득은 이빨을 얻음이니 동물의 이빨이 원시인의 재산이다. 어질다는 것은 모서리가 닳은 조약돌과 같아서 그 뾰족한 이가 없는 것이다. 뾰족한 이는 결국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 어질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능력이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합쳐서 큰 힘을 이룬다. 그것이 사랑이다. 군자는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자연에서 가치를 취하고 소인은 뾰족한 발톱을 내밀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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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도는 일이관지다.”


    증자가 일이관지를 충忠과 서恕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잘못이다. 충忠과 서恕라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둘이면 일이관지가 될 수 없다. 일이관지는 오직 서恕 하나이며, 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다. 서恕는 용서가 아니다. 군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단 지나간 일에 말단을 징벌하지 않고 다가오는 일에 근원으로 대비할 뿐이다. 서恕는 대칭원리에 따른 균형감각 곧 밸런스 개념이다. 공자는 깨달은 사람이다. 깨달음은 중용의 깨달음이다. 중용은 밸런스다. 중中은 가운데가 아니라 중복되어 겹친 것이며 중中은 중仲이며, 중衆, 중重과도 통한다. 중은 저울의 축과 같으니 중은 두 번째로 오는 것, 중복되는 것, 겹치는 것이다. 바퀴축과 같다. 바퀴살과 바퀴살이 겹친다. 마디와 같다. 자리와 자리가 겹친다. 겹치는 부분이 대칭의 축이다. 대칭과 축의 작동원리를 깨달으면 중용을 깨달을 것이며 중용을 깨달으면 서恕를 깨닫는다. 서恕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을 해결하는 것이다.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은 소인배의 심리불안에 따른 종교행동을 막는 것이다. 일의 ‘복제, 조합, 연출’된다. 복제는 철학가의 역할, 조합은 정치가의 소임, 연출은 예술가의 몫이다. 대중은 예술가의 세련된 교양과 문화와 예술을 배워 각자 자기 스타일의 개인주의를 완성하면 된다. 공자의 시대에 그것은 예법이었다. 만약 소인배가 철학가와 정치가를 겸하려고 하면 재앙이 닥친다. 철학가를 겸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의 필요성을 제기해야 한다. 집단을 공포에 빠뜨리는 마녀사냥을 저지른다. 정치가를 겸하려는 사람들을 제압하는 위세행동을 해야한다. 대중의 종교행동은 약자의 비굴함과 강자의 교만함으로 나타난다. 역시 위태롭다.
    이 모든 것을 ‘일의 흐름’ 하나로 풀어낼 수 있다. 그 중핵은 의사결정이고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는 밸런스다. 그것이 서恕다. 서는 용서가 아니라 너와 나의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상대가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맞는 합리적 행동이면 받아들인다. 장성한 자식이 독립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다. 군자는 자신의 이익에 맞는 합리적 배신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배신자 조조가 사마의에게 당하듯이 함부로 배신했다가 자신도 배신당하는 비합리적 행동은 단호하게 응징한다. 배신이 배신을 복제하여 사회에 더 많은 재앙을 낳기 때문이다. 공자는 용서하지 않고 준엄하게 꾸짖어 소인배를 타격했다.
    용서는 사건 전체를 봐야 하므로 곧 나서지 말고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다. 사건은 부분이 아닌 전체에서 일어난다.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사건에 개입하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징벌하더라도 드러난 표피보다 감추어진 배후를 털어야 한다. 성급한 ‘자로’에게는 부형이 있으므로 곧바로 나서지 말라고 했고, 신중한 염유에게는 불의를 보면 곧 나서라고 했다. 용서는 없다. 그러나 말단은 건드리지 않는다.
    용서는 봉건사회에 쓰이던 무식한 단어다. 어린이들을 계도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봉건노예제 사회에 노예들이 주인의 물건을 훔치므로 용서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노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야 되는데 노예가 재산이라 징벌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노예제 자체가 범죄다. 주인이 노예를 용서한다는 말은 현대사회에 쓰여질 수 없는 표현이다. 용서라는 단어를 쓸 일이 없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잘못 가르친 부모를 징벌해야 한다. 장발장이 빵을 훔쳤다면 박근혜를 심판해야한다. 굶주린 사촌을 먹여살리기 위해 빵을 구한 장발장은 상을 줘야 한다. 교회의 은촛대를 가져간게 잘못인가? 어차피 교회가 신도들 사기쳐서 훔친거다. 필요한 사람이 쓰는게 맞다. 용서라는 단어는 애초에 어불성설이며 초딩들을 꾸짖는데 쓰이는 말이다. 군자가 입에 올릴 단어가 아니다. 예기에는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이니 이웃나라까지 쳐들어가서 죽이라고 되어 있다. 공자는 예기를 실천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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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일로 봐야 한다. 군자는 일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하던 일을 끝내는 사람이다. 일을 시작하려면 동료를 모아 팀을 꾸려야 한다. 이에 필요한 가치는 의義다. 의는 팀원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것이다. 가족은 친하면 의다. 친구는 믿으면 의다. 사회는 공정하면 의다. 의에 기대어 일을 새로 벌일 수 있다. 소인은 일을 마치려 하므로 소득을 분배하려고 한다. 이에 필요한 가치는 이利다. 무엇이 다른가? 권리가 다르다. 의義에 서면 권리를 얻고 존엄에 이르며 이利에 서면 권리를 잃고 복종하는 대신 행복을 얻는다. 비굴하면 돼지처럼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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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의 말은 더디고 행동은 기민해야 한다."


    말만 앞세우고 행하지 않는 안철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가며 서로 연결된다. 봄여름가을겨울과 같다. 봄이면 여름을 내다봐야 하고, 여름이면 가을을 내다봐야 하고, 가을이면 겨울을 내다봐야 한다. 항상 앞질러가서 다음 단계를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단계를 시작해야 1단계가 완성된다. 1단계를 끝낸 다음에 2단계를 하겠다고 말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일은 문재인이 인재영입하듯이 불시에 후다닥 해치워야 한다. 말이 앞서면 행하려 해도 늦었다. 정보가 새나가서 사방에서 태클 들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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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함께하는 이웃이 있다."


    덕德은 다음 단계로 일을 연결시킨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진다. 맨 먼저 온 사람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길을 닦는다. 두 번째 온 사람이 길 옆에 집을 짓는다. 세 번째 온 사람이 그 집에 가게를 연다. 두 번째 온 사람은 첫 번째 온 사람 덕德에 쉽게 집을 지는다. 길이 없으면 건축허가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도로가 나거나 지하철이 들어서면 주변 땅값이 오르는 것과 같다. 가만이 앉아서 덕德을 본다. 그래서 덕德이다. 세 번째 온 사람 역시 두 번째 사람이 집을 잘 지어놓는 덕분에 쉽게 가게를 열 수 있다. 뒷사람이 앞사람 덕을 보므로 앞사람에게 권리가 있다. 군자는 앞사람의 권리를 취하고 소인은 뒷사람의 이득을 취한다. 앞사람이 권리를 쥐고 있으면 그 덕을 보려고 뒷사람이 모여들어 이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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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은 인류가 큰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인은 앞서가며 길을 개척하는 이의 덕목이고 의는 중간에서 교통정리하는 이의 덕목이고 예는 따라가는 사람의 덕목입니다. 따라가다보면 밀집해서 서로 충돌하므로 적당히 간격을 벌려야 하고 그렇게 얻어진 자기 구역 안에서 별도로 자기 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개인주의이며 미학적 스타일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오맹달

2016.02.05 (14:25:33)

구조론 논어 책이 한 권 집필되네요. 

오늘도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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