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남학생의 성적이 우월했다. 부모들이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네가 우리 집안의 대들보야!’ 하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딸에게는 ‘뭐하고 있어? 설거지 끝내지 않고.’ 하고 다그친다. 지금은 반대로 여학생의 성적이 게임과 야동에 빠져 있는 남학생의 성적을 압도하게 되었다. 교복을 폐지해서 여학생이 화장과 패션에 신경쓰게 해야 성별간에 균형이 잡힐 판이다. 인간은 의사결정에 약하다. 조그마한 핑계라도 있으면 빠져나간다. 집안일 핑계로 공부 안 한다. 안 해도 되는데 왜 하느냐 말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면 절대로 안 하는게 인간이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야 행동에 옮긴다. 반대로 작은 것을 이끌어 큰 것을 통제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자부심이다. 인간을 움직이고자 한다면 건드려야 할 심리적 급소다. 세계의 많은 식민지들 중에서 독립하고 제대로 된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자부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존엄이 답이다. 존엄은 관계의 밀도다. 환경과의 관계가 느슨인가 긴밀한가이다. 여기서 거의 결판이 난다.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직장도 없다면 관계는 느슨해진다. 그럴 때 인간은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인간은 감시자가 없으면 일을 안 한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허무해서다. 왜 하지? 먹고 살려고? 덜 먹으면 되잖아? 더운 나라는 집이 없어도 노숙하면 된다. 감시하지 않아도 열심히 일을 한다고?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감시를 받고 있다. 그게 뭐냐다. 바로 존엄이다. 주변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때 하나가 움직이면 전체가 반응한다. 살짝 건드려도 큰 소리가 난다. 그래서 일한다. 그 긴밀한 상태를 끊어내는 무모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관계망과 단절되었을 때 100미터 앞에 있는 1억원을 버리고 눈 앞의 1만원을 선택하는 오류를 범하는게 인간이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게 인간이다. 백인들은 기본적으로 자부심이 있다. 피부색 덕이다. 한국인은 식민지에 전쟁에 분단으로 상처입었다. 자부심이 망가졌다. 결과는 환빠대란이다. 우리 역사를 최악으로 만들고 있다. 박근혜의 국정교과서 배후에 환빠의 열등감이 자리함은 물론이다. 극복해야 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교정이 필요하다. 인류의 진정한 승부는 집단의 의사결정 역량에 의해 결정된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개인의 의사결정역량이 중요하며, 유교에서 강조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역량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사랑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타인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침투할 수 있는가다. 실패한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게 된다. 훈련된 사람만이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개인의 자질은 아이큐 검사와 스포츠 경기로 대략 판단이 된다. 스포츠와 예능에서 발휘되는 흑인의 재능은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개인은 팀을 이길 수 없다. 팀은 사랑이다. 사랑을 끌어내는 것은 자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불교의 깨달음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획득된다. 자유를 끌어내는 것은 존엄이다. 유교 특유의 결속력에서 존엄은 획득된다. 유교, 불교, 기독교를 두루 섭렵한 백범 김구가 아는 사람이다. 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집단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도출할 수 있는가? 일본은 아직도 식당에서 버젓이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안 먹히는 예다. 한국처럼 단숨에 식당의 나무젓가락을 없애버린다든가 분리수거를 생활화 한다든가 하는건 일본에서 상상할 수 없다. 대부분의 후진국들이 헤매는 이유는 기본이 안 되어서다. 앞으로 가라고 하면 뒤로 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실패한 국가다. 옳고 그르고 이전에 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기업을 해보고자 한다면 최소 5명은 모여야 한다. 일단 그 단계까지 못 간다. 사장이 직원에게 1천만원을 맡기면 시킨대로 은행에 가서 입금하는게 아니라 그 길로 깨끗하게 사라진다. 토요일에 주급을 주면 월요일에 출근하는 사람이 없다. 교육으로 해결되는게 아니다. 물론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존엄이 깨져 있다. 환경과 개인의 긴밀도가 깨져 있으면, 깨진 그릇에 물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그거 원래 안 된다. 한국의 유교를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교리 따위는 시대의 반영에 불과하다. 유교의 폐해는 유교라서가 아니라 동양사가 기본적으로 서양사에 크게 뒤쳐져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의 폐해다. 유교 덕분에 동양사가 과대평가된 것이다. 인도-아프리카-아랍-지중해-게르만이 합쳐진 서양사의 1/5인데 무려 50 대 50으로 착각한다. 그에 비하면 단번에 동양이 진보한 것이다. 중요한건 관계의 밀도다. 부부관계는 긴밀한가? 형제관계, 동료관계, 사제관계는 긴밀한가? 모르는 사람 열 명이 모여 팀을 만들 수 있는가? 패스플레이가 되는가? 낯선 사람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가? 이런 거다. 조선의 유교는 이쪽으로 한 번 끝까지 밀어본 것이며 나름 성공모델을 만들어본 것이며, 한때 수십만이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국가의 성공은 인적자원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느냐다.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노예든 귀족이든 모두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유교가 봉건사회라는 어쩔수 없는 한계 안에서 나름 갈데까지 가 본 것이다. 평민의 소과 합격률이 60퍼센트나 될 정도로 국민의 자원을 최대한 끌어낸 대단한 이벤트였다. 그때 만들어진 의사결정능력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은 송시열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우리도 공자와 같은 성인을 가져보고 싶다는 열망이 작용한 것이며, 타고난 배우 송시열은 성인을 연기한 것 뿐이다. 그 결과로 한국은 중국과 달리 변발이나 전족이 없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날 한류의 원천이 되었다. 자부심이 필요해서 우리도 성인을 한 번 배출해보려 한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배우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세계가 우리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의사결정능력 뿐이다. 의사결정능력은 개개인의 자질, 집단의 결속력, 팀플레이 능력, 사람을 사귀는 능력, 의사결정권자 수다. 개인의 자질은 나쁘지 않다. 집단의 결속력은 리더에게 힘을 몰아주는가다. 여기까지는 제법 된다. 팀플레이 능력은 개방적인 운영을 하느냐다. 여기서부터 잘 안 된다. 부패, 비리는 배타적인 운영이다. 민주주의 안착이 결정한다. 사람을 사귀는 능력은 문화, 예술에서 답을 찾는다. 한류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의사결정권자 수는 역시 민주주의로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은 결국 민주주의로 통한다. 그리스가 민주주의 원조라 하나 작금의 그리스 현실로 보면 동떨어져 있다. 동유럽은 정교 때문에 안 되고, 아랍은 무슬림 때문에 안 되고, 인도는 힌두교 때문에 안 된다. 이들은 모두 관습을 기억하는 할배에게 장악되어 있다. 미국은 고향을 버린 자의 콤플렉스에 기인하는 보수 기독교의 득세가 망치고 있다. 유럽은 무슬림 이민자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능력, 불교의 독립적인 의사결정능력, 유교의 집단적 결속력을 두루 학습한 한국인에게 강점이 있다. 일본이 노벨상을 다수 수상하는 것도 선종불교 특유의 의사결정능력 덕분이다. 오타쿠처럼 혼자서 한 구멍을 파는 재주가 있다. 한국은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패거리에 의존한다. 미국이 잘 나가는 것은 패권에 기초한 자부심 덕분이다. 환경은 변화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자는 망하고 룰을 바꾸는 자는 흥한다. 적응할 것인가 룰을 바꿀 것인가?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문제로 대들다가 도요타 리콜사태로 한 방 맞은 일본은 적응하는 쪽으로 국가의 방향을 정했다. 한국인은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도 기술 안 배우고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겠다며 일본인을 벙찌게 만들었다. 적응하는 대신 룰의 변화로 간 것이다. 그 고집이 오늘의 한국을 있게 했다. 적응하면 죽는다. 개겨야 산다. 룰을 바꿔라.
막연하게 민족타령 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건 의사결정 능력입니다. 이건 학교에서도 못 배우는 것입니다. 중국이 낙후한 것은 여진족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존엄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거 후유증이 100년은 갑니다. 돈으로도 안 되고, 제도로도 안 되고, 교육으로도 안 되는 것이 존엄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인자를 긴밀한 관계망의 장 안으로 콕콕 집어넣어야 하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