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세상과 나의 기본적인 관계설정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가 적이냐 동지냐, 적응할 것인가 통제할 것인가, 생존전략이냐 세력전략이냐, 경쟁관계냐 협력관계냐, 소승이냐 대승이냐,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 고립이냐 소통이냐,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세상과 나의 관계는 달라진다. 피아간에 관계가 맺어지는 한 지점을 스위치로 삼아 제어할 수 있다. 존재는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대칭을 이루고 에너지를 교환하며, 그 교환의 현장에서 에너지가 교차하는 극점이 존재한다. 그림의 소실점이 있다. 그 지점이 항해하는 배의 키가 되고, 운행하는 차의 핸들이 된다. 세상과 나는 적이 아닌 동지여야 한다. 내가 세상에 적응할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상을 통제해야 한다. 생존전략이 아닌 세력전략이어야 한다. 경쟁이 아닌 협력관계, 소승이 아닌 대승,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어야 한다. 고립이 아닌 소통이어야 하고, 보수가 아닌 진보여야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적이고, 적응이고, 생존이고, 경쟁이고, 소승이고, 단기전이고, 고립이고, 보수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틀렸다. 그것은 반철학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철학과 다양한 반철학이 있다. 세상에는 하나의 챔피언과 다양한 도전자가 있다. 슬픔은 기쁨이 아니고, 불행은 행복이 아니다. 반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역시 구조론에 따라 대칭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상은 하나 뿐이고, 정상이 아닌 것은 모두 가짜다. 철학은 오직 하나 뿐이다. 다양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모두 철학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다양성은 일반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이후에 얻어진다. 면 위에는 다양한 선이 있으나 선 위에는 하나의 면도 없다. 철학은 선에서 면으로 도약한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다양성은 먼저 철학을 획득하고 난 다음에 주장해야 한다. 먼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춰야 다양한 음악이 나온다. 철학은 왜 생겼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은 원래 집단의 중심, 의사결정의 중심, 상호작용의 중심, 팽팽한 긴장의 중심을 바라보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 낸다. 전쟁도 불사한다. 개미가 여왕개미에 충성하는 이유는 개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철학하는 이유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사결정의 중심, 집단의 중심이 있다. 옛날에는 신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대체했지만, 요즘은 실존이라는 개념으로 바꾸는 형편이다. 어떻든 본질은 인간이 본래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철학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대칭적 에너지 교환이며, 인간의 에너지는 동기부여이고, 동기부여는 세상과 맞섬에서 얻어지며, 인간이 세상과 맞서 대칭을 이루는 지점은 하나의 점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입으로도 먹고 항문으로도 먹는게 아니고 언제라도 하나의 입으로만 먹는다. 그 하나의 지점은 아기에게는 엄마이고, 소년에게는 또래들의 골목대장일 수 있고, 일베충에게는 박그네일 것이고, 각자가 세상을 인식해 가는 정도에 따라 다르다. 다양한 바라보는 지점들이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철학이 있는게 아니고 그들은 본질에서 모두 같은 지점을 보고 있다. 모두 주변에서 중앙을 보고 있다. 의사결정 중심을 보고 있다. 집단의 스트레스 중심을 보고 있다. 월드컵이면 결승전을 보고 있고, 올림픽이면 금메달을 보고 있고, 피겨면 김연아를 보고 있다. 다양한 장치들은 그 하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들에 불과하다. 목적지는 언제나 하나다. 일천명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어도 실제로는 같은 방향을 본다. 왜냐하면 지금은 퇴근시간이고 그 일천명은 모두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70억이 있고 70억이 다른 철학을 가졌어도 실제로는 하나다. 그것은 70억 인류의 진일보로 이루어진 의사결정의 센터다. 세상을 가장 많이 인식한 사람은 어디를 바라볼까? 바로 거기에 시야를 맞추어야 인류의 진보가 순조롭게 일어난다. 라디오 사이클을 맞추듯이 시선을 맞추어 전체를 동조화 시켜야 한다. 푸틴과 같은 훼방꾼이 나타나 잡음을 넣으면 그 동조화가 깨져서 작품은 엉망이 되고 만다. 아닌 것들이 제각기 ‘딴데 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라니깐!’ 해서 세상이 막장으로 치달은 거다. 연봉협상 때는 구단주를 보고, 시합 때는 감독을 보고, 출루해서는 코치를 보고, 주루할 때는 선행주자를 봐야 한다. 그것은 다양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다. 팽팽하게 긴장이 걸린 지점이 있다. 그것은 중력과 같다. 구조론의 질은 다중의 무질서한 척력을 하나의 센터에 쏠리는 인력으로 전환한다. 우주 공간에는 초끈의 요동에 의한 에너지 밀도가 걸려 있다. 끈이라는 개념은 수학적 장치고 본질은 에너지의 요동이다. 에너지가 요동치면 우주 공간의 두 점은 서로 가까워진다. 별들의 중력이 균형을 이룬 우주의 한 장소에서 1미터 떨어진 두 지점은 20시간 후에 합쳐진다고 한다. 두 물체를 1미터 떼어놓으면 20시간 후에 둘이 붙어버린다는 말이다. 만유인력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공간의 척력이 두 점 사이에서 동조화 되기 때문이다. 두 점 사이에서의 에너지 요동이 바깥보다 더 쉬운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데서 에너지 효율이 얻어진다. 그러므로 두 점은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인력이다. 이는 공간의 요동 곧 척력에서 나왔다. 영화에서 두 친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다수의 폭력배들과 맞서 싸우는 것과 같다. 두 주인공은 처음 떨어져 있지만 폭력배들이 에워싸면 점차 거리가 가까워져서 마침내 등이 붙어버린다. 인력이 작용한 것이다. 실제로는 척력이다. 등을 맞대면 의사결정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효율성이 집단 전체를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에너지의 결이다. 철학은 물리법칙에 근거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철학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다. 왜냐하면 그 핸들은 팽팽한 긴장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옳다고 해서 일제히 그리로 달려가면 오히려 강한 저기압이 형성되어 긴장이 해소되고 극점이 사라져 버린다. 왕이 정치를 잘 하면 왕이 필요없게 된다. 그래서 나라에 왕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 노무현이 정치를 잘 하면 노무현이 필요없게 된다. 그러므로 부시와 레이건처럼 나라에 큰 재앙을 불러들여 고도의 긴장을 유발시킨 악당이 도리어 훌륭한 정치가로 널리 칭송되는 일은 흔하다. 그러므로 아와 피아의 대결구도, 세상과 나의 관계맺기, 적과 동지, 적응과 통제, 생존과 세력, 경쟁과 협력, 소승과 대승, 단기전과 장기전, 고립과 소통, 보수와 진보를 판별하게 하는 태풍의 눈은 인위로라도 창안되어야 한다. 안 되면 스포츠게임이나 축제라도 열어서 연출해야 한다. 이상주의, 자유의지, 거대담론, 세력화, 전복의 개념은 언제라도 유효하며 어떻게든 생산해야 한다. 과학은 있는 것을 규명하지만 철학은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낸다. 개미에게는 여왕개미가 필요하고, 아기에게는 엄마가 필요하고, 부족민에게는 종교가 필요하고, 현대인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 ◎ 광신자 – 종교 및 정치판의 좌우 극단주의 ◎ 궤변가 – 자본에 봉사하는 실용주의, 차별주의. ◎ 회의가 – 탈근대 운운하는 강신주류 떨거지들 광신자를 극복하고, 궤변가와 싸우며, 회의주의를 이겨내는게 철학이다. 우리는 종교적 광신자 뿐 아니라 좌와 우의 정치적 광신자와도 싸워야 한다. 우리는 실용주의, 자본주의, 생존경쟁으로 위장된 궤변가와 싸워야 하며, 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로 포장된 회의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