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란 무엇일까? 구조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부터 가시적인 형태를 유도하는 절차다. 세상은 보이는 형태와 보이지 않는 여러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가 있는 것은 상호작용할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손으로 만질수 있거나, 귀로 들을 수 있거나, 혀로 맛볼 수 있거나, 코로 냄새밭을 수 있다. 어떻든 작용해야 한다. 빛과, 소리와, 피부와, 혀로 대상에 작용하여 그 반작용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그 대상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상호작용하는 것은 형태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은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냄새맡을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을 파악하려면 멈춰세워야 하는데 멈춰세우면 움직임이 사라진다. 움직이는 것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모든 변화하는 것은 상호작용할 수 없으므로 옳게 파악할 수 없다. 형태가 있고 그러므로 상호작용이 가능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멈춰선 것이며, 만약 인간이 멈춰선 것만 인식한다면 세상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세상의 나머지 절반은 구조 속에 있다. 형태가 있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이다. 그러나 존재의 많은 부분은 형태를 갖춘 물질이 아니다. 모든 것은 에너지로부터 비롯된다. 에너지에서 물질을 유도하는 절차가 구조다. 에너지는 일의성과 공간성과 시간성을 거쳐 최종적으로 물질로 구현된다. 이렇듯 절차를 밟아 형태가 구현된 것은 입자의 모습을 가진다. 에너지가 입자화 하는 과정은 양자론의 불확정성과 같은 모호성을 가진다. 구조론은 그 모호한 상태, 움직이는 상태, 변화중인 상태를 규명한다. 존재가 입자로 혹은 물질로 형태를 드러내는 것은 상호작용에 따른 의사결정에 의하여 일어난다. 입자는 최종적인 의사결정의 단위다. 처음 에너지로부터 하나의 독립적인 상호작용의 의사결정단위가 성립하는 과정에, 세부적으로 다섯 중간 의사결정단위가 있다. 곧 에너지, 일의성, 공간성, 시간성, 물질이다. 구조는 이렇듯 존재가 상호작용의 장 안에서 일정한 형태를 획득하는 절차를 규명한다. 입자는 공 모양으로 상상된다. 왜 공모양의 입자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우리 주변에서 입자로 볼 수 있는 것은 과일이나 과일의 씨앗이다. 대개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혹은 강변의 조약돌도 있다. 대개 둥근 꼴이다. 입자가 둥근 꼴을 가지는 이유는 공간의 대칭성 때문이다. 여기에 시간성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존재는 공모양이 아니라 파이프 모양이다. 내부에 판정을 내리는 저울이 있다. 존재가 파이프 모양으로 되는 이유는 에너지의 입출력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파이프 내부의 저울은 상하와 좌우의 대칭을 이룬다. ‘〓’ 꼴의 상하는 공간의 대칭을 반영하고, ‘━ ━’ 꼴의 좌우는 시간의 대칭을 반영한다. 둘을 합치면 ‘┳’ 꼴이 된다. 수평과 수직의 대칭이 맞물리는 지점은 일의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존재가 구슬 모양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반영해야 하므로 피리 모양이다. 피리 안에는 리드가 있다. 파이프 안에 저울이 있다. 사람은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파이프다. 벌레도 마찬가지다. 나무도 뿌리에서 잎까지 수관이 파이프 꼴을 이룬다. 강이나 산도 파이프 모양이다. 자기력선도 파이프 모양이다. 용오름 현상이나 태풍도 마찬가지다. 소총도 내부에 저울을 갖춘 하나의 파이프다. 자동차도 주유구에서 머플러까지 파이프다. 집도 파이프다. 굴뚝만 파이프인게 아니다. 도로든 집이든 입구와 출구가 있는 파이프다. 어떤 존재이든 에너지의 입출력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파이프의 집합이다. 생각해보면 은하계의 모양도 하나의 파이프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왜 파이프인가? 운동하기 때문이다. 자라기 때문이다. 발전하고 진보하고 호흡하기 때문이다. 둥근 조약돌은 멈춰있다. 과일이나 씨앗도 멈춰있다. 멈춰있는 것은 존재의 본 모습이 아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논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서 돌고 있는 팽이를 붙잡아세워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다.
◎ 세상은 에너지로 입력되고 물질로 출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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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용어는 제가 알아들을 수 없구요.
구조론의 차원개념은 접근방법이 다릅니다.
수학의 차원은 도무지 뭘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조론의 차원은 A와 B 사이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루트의 수를 말합니다.
A와 B가 떨어지면 정보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둘이 붙어있다면 정보를 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붙은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도 아닌 묘한 상태가 다섯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차원은 마이너스 방향이므로 0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2>1로 떨어지면 그 사이가 0이 되는 거죠.
즉 둘을 떼어놓는 방법으로 그 과정에 정보를 전한다는 거죠.
이때 상호작용하는 양측에서
한쪽의 차원하락은 다른 쪽의 상승이 됩니다.
어느 한 쪽이 0이 되면 끝나는 거죠.
예컨대 부족주의>가족주의>개인주의 다음은 0입니다.
이때 판단주체가 세계>국가>부족>가족>개인으로 작아지면서
동시에 대응되는 판단대상은 개인>가족>부족>국가>세계로 커집니다.
그러므로 차원은 처음부터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계 다음은 우주나 우주의 우주로 커질 수 없는게
대칭되는 판단주체가 개인 다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조론은 5차원>4차원>3차원>2차원>1차원이 있는데
수학의 점, 선, 면, 입체와 대응시키기 위해 편의로 4,3,2,1,0차원이라고 하는 거 뿐
5차원>4차원>3차원>2차원>1차원이 맞죠.
5차원은 엄마가 자궁 속의 아기에게 정보를 전하는 것입니다.
4차원은 아기를 출산한 상태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기는 밥을 먹지 못하므로 모체에 에너지를 의존합니다.
3차원은 엉켜붙은 씨름선수처럼 공간의 대칭성 곧 힘의 전달로 정보를 전하는 것이고
2차원은 시간의 대칭성으로 정보를 전하는 것이고
1차원은 완전히 이탈하여 떨어져 나가면서 정보를 전하는 것입니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 다음은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구조를 복제합니다.
질은 100퍼센트 복제이며
량으로 갈수록 적게 복제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