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끽다거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인용된 탈무드 이야기를 인용할 수 있다. 두 굴뚝청소부가 굴뚝을 청소하러 들어갔다. 청소를 마치고 나왔는데 한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지 않아 얼굴이 희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어 시커맸다. 어느 굴뚝청소부가 먼저 세수를 하러 샘으로 달려갔겠는가? 당연히 얼굴이 시커먼 굴뚝청소부일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굴뚝청소부는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는 관측의 상대성이다. 모든 드라마와 소설과 영화의 반전은 이 하나의 구조를 복제한다. 얼굴이 흰 청소부는 얼굴이 검은 청소부를 보고 자신의 얼굴이 시커멓다고 판단하여 샘가로 달려간다.
얼굴이 검은 청소부는 반대로 자신의 얼굴이 희다고 믿고 세수를 서두르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도 이와 같다. 부자가 더 인색하다. 돈이 많은 부자가 더 돈의 많고 적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틀렸다. 이는 하부구조의 모습일 뿐이다. 그 굴뚝 안에서 누구도 흰 얼굴로 나올 수는 없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가난뱅이는 몸이 먼저 망가지고 부자는 마음이 먼저 망가진다. 망가진다는 점은 같다. 누구도 그 지옥에서 멀쩡하게 살아나올 수는 없다. 상부구조인 자본주의 그 자체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반전이다.
조사의 선문답은 두 번의 반전구조로 되어 있다. 조주의 ‘끽다거’와 같다. ‘끽다거’를 한 번 하면 예사다. 두 번 하면 역설이다. 세 번 하면 이중의 반전이다. 그 안에 상부구조가 있다. 관계망의 작동구조를 노출하고 있다. 김기덕의 모든 영화 역시 두 번의 반전구조로 되어 있다.
선이 악을 물리치고 인간을 구원한다면 예사다. 어머니의 모성으로 용서하여 구원한다면 역설이다. 이는 한 번의 반전이다. 그러나 김기덕은 이런 식의 사탕발림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한 번의 전복은 가짜다. 승자와 패자의 관계를 반전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반전해야 진짜다.
하나의 반전에서는 소실점을 발견할 수 없다. 관측의 상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역설의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반전으로 조직의 약한 고리를 찾아낼 수 있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급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스타일은 찾아질 수 있다.
이중의 반전을 통하여 이 사회가 팽팽하게 긴장된 관계의 그물 속에서 작동함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관계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불행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신의 잘못이며 오직 신과의 관계를 바로잡음으로서만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보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진술은 예사다.
하나의 반전은 역설이다.
두 번의 반전에서 결이 드러난다.
결이 드러나야 소실점이 찾아진다.
내부의 숨은 조형적 질서가 드러난다.
컵의 안쪽과 컵의 손잡이가 구분되는 것이다.
컵의 손잡이가 적들의 타격대상이 되는 약한 고리다.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형태로 스타일은 만들어진다.
스타일이 조직을 견고하게 할 때 관계가 드러난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관계를 바꿀 수 있다.
뜰앞의 잣나무는 두 번 반전의 구조다.
그림1
컵이 깨져도 꼭 주둥이가 깨지거나 손잡이가 깨진다. 외부와 교통하는 부분이 적에 의한 집중적인 타격대상이 되는 조직의 약한 고리다. 우하귀에 톡 튀어나온 플로리다 쪽에 흑인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히스패닉이 많아서 역시 컵의 손잡이 역할인데 이번 승부는 플로리다가 결정한다. 이건 히스패닉들이 투표 안한 2004년이라서 그렇고.
화두
화두를 깬다는 건 대략 바보 같은 생각이다. 화두는 문답의 구조를 이룬다. 문과 답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실패다. 마땅히 응수가 아니라 배달이어야 한다. 마주보고 대칭을 이루면 축에 잡혀 있는 즉 이미 진 것이다. 전체가 한 줄에 꿰어져 하나의 방향을 보아야 한다. 그럴 때 바깥으로 난 손잡이가 얻어진다. 그 손잡이로 제어가 된다. 레고블럭의 밖으로 난 요철(凹凸)과 같다.
흑과 백, 선과 악, 음과 양, 강과 약이 서로 마주보고 투쟁하는 한 결론은 나지 않는다.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그 교착을 타개해야 한다. 화두는 시간의 인과를 공간의 동시성으로 바꾼다. 그것이 정신 차리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내부에 숨은 조형적 질서를 끌어내기다. ‘A가 이렇게 하면 B가 이렇게 한다.’는 상호작용의 구조를 들추어내는 것이다.
‘끽다거(喫茶去)’라고 하면 손님과 주인이 다탁을 앞에 놓고 마주한 가운데 차가 연이어 배달되는 공간의 구조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구조 안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소실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차를 바라볼 때 손님도 차를 바라본다. 차 한 잔에 의해 서로는 통한다. 그것이 찾아야 할 방향성이다. 그 방향을 쭉 이어가면 전체를 한 줄에 꿰는 소실점이 찾아진다. 거기서 조주의 끽다거 스타일은 완성된다. 마침내 찾아진 조형적 질서다.
‘뜰 앞의 잣나무’라면 나와 손님의 눈길이 동시에 잣나무로 향하는 동선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달을 바라볼 때 그대도 달을 바라본다. 내가 스마트폰을 들면 그대도 스마트폰을 든다. 우리는 그러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병 안의 새’라고 하면 우리네 인생이 80여년이라는 시간의 병에 갇혀 있고, 우리네 우주가 중력이라는 이름의 병에 갇혀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병 안에 잡혀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서 축과 대칭의 구조를 발견해야 한다. 역설과 역설의 역설로 작동하는 결이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결 따라 가면 보인다.
일찍이 선사들이 일천칠백 공안을 만들었다 하나 다 옛날이야기다. 필자가 거기에 일백육십공안쯤 보태도 무방하겠다. 정신차렷! 그대와 내가 마주보고 있다면 실패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땅히 신과 인간의 관계도 그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