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의 '식스센스'로 유명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똑똑똑'은 스토리가 황당하지만 '나이트 샤말란 영화가 원래 저렇지.' 하고 납득하고 보면 이렇게 무리수를 써놓고 결말을 어떻게 짓나 싶어서 끝까지 보게 된다. 이 영화는 '세상 끝의 오두막'이라는 원작이 있다. 스토리의 부실함에 불구하고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은 문학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 영화라는 말이다.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있다. 감독 특유의 종교적 접근이다. 내가 죽으면 인류가 살고 내가 살면 인류가 죽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인간은 내가 죽어서 인류가 사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만들어진 대로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가고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길의 의미는 연속성이다. 길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행위는 연결을 따라간다. 과연 연결되어 있는가? 인간은 무의식으로 집단과 연결되어 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라는 압박은 설득력이 없다. '위하여' 들어가면 가짜다. 내가 선택을 한 번 잘못하면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멸종하는 인류라면 그런 인류는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수준이라면 멸종하는게 맞다. 나 때문에 인류가 멸종한다는 사실을 알면 스트레스 받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은 무의식의 힘이다. 동물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가 되면 죽는다. 고양이과 동물을 제외하고 무리를 떠나 혼자 살아가는 동물은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행위다. 인류가 멸종하면 당장 뭘 해야 하지? 행위가 단절된다. 그럴 때 인간은 죽는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고통보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고통이 크다. 행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행위에 가두면 열심히 한다. 인지부조화를 비롯한 인간의 여러 가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은 행위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기동이다. 임무를 줘서 행위의 연속성에 가둬놓으면 인간은 매우 부지런해진다. 그것을 이용하는 기술이 정치인들의 프레임 걸기다.
인간이 타인을 미워하는 이유는 행위의 근거를 조달하려는 것이다. 타인을 자극하여 뭔가 단서를 얻으려고 한다. 한국인을 좀 때려보면 뭔가 행위의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중국인은 좀 갈궈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다. 사는 이유를 잃어버린 자들이 남을 괴롭혀서 자신이 사는 이유를 발굴하려고 하는 것이다. 80억이 살기에 지구는 비좁다. 나는 인간을 구하지 않는다. 문명을 구할 뿐이다. 신은 인간을 구하지 않는다. 신은 신 자신을 구할 뿐이다. 진지하게 신을 믿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종교의 신은 논외다. 모든 종교의 신은 우상이다. 그런 신은 없다. 존재할 가치가 없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행위의 중심이다. 인간은 행위에 갇혀 있다. 신을 실천하는 사람이 진실로 믿는 사람이다.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많으나 그들은 실천하지 않는다. 단지 말할 뿐이다. 말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거다. 사람 속에 숨으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의 신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어쨌다고?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물의 본능을 들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인데 어쩌라고? 그것은 행위와 관계가 없다. 신이 있으므로 이렇게 해야한다거나 저렇게 해야한다거나 하는게 없다. 신이 있다는 것은 이 여행의 출발점이 있다는 것이다. 계속 가게 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것은 신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족장이 부족의 구성원에게 하는 말이다. 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선악은 감정표현일 뿐이다.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이다. 고양이는 박스가 편안하고, 쥐는 쥐구멍이 편안하고, 양은 양떼가 편안하다. 인간은 교회에 가서 무리에 끼어 있으면 편안하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편안하다. 동물의 본능이다. 그것은 지금 불안하다는 자기소개에 불과하다. 행위에 진실이 있다.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 생물은 진화해 왔으므로 진화를 계속한다. 문명은 진보해 왔으므로 진보를 계속한다. 그것은 생산력과 동원력의 증대다, 상호작용의 총량증대다. 엔트로피를 따라가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어지는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어지는가? 우주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것인가? 우연히 신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인이라도 한 장 해달라고 말할 것인가?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신은 매우 쪽팔리지 않겠는가? 신의 고민을 해결할 대답이 당신에게 준비되기 전에는 신을 면회하지 말아야 한다. 실없는 부탁을 하면 신은 쪽팔려서 당신을 죽인다. 세상이 신의 질문이라면 삶은 인간의 응답이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없다. 쉬운 응답과 어려운 응답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응답을 떠넘기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입을 뗐으면 말을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