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을 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한다. 전제의 전제가 필요하다. 전제의 전제의 전제의.. 끝까지 추궁해 들어가야 한다. 끝단에서 단서를 얻는다.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이성, 헤겔의 절대정신, 마르크스의 혁명은 모든 주장의 단서가 되는 출발점을 상상한 것이다. 그것이 복제의 원본이 된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복제한다. 나머지는 묻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상상이다. 석가의 부처나 예수의 천국은 그냥 상상이다. 도깨비, 허깨비, 머깨비와 같다. 이데아도, 이성도, 절대정신도, 혁명도 그냥 지어낸 말이다.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뭔가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체재가 없기 때문에, 시장에 여전히 수요가 있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그만치 허술한 것이다. 집은 있는데 기초가 없다. 그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다. 생각은 하는데 출발점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궁금했던 것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거였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검색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 시는 그냥 시고 음악은 그냥 음악이다. 시가 뭔지, 음악이 뭔지, 미술이 뭔지 모르면서 그리고 읊고 노래한다. 짧게 씨부리면 시고, 길게 씨부리면 소설이고, 시끄럽게 두들겨대면 음악이고? 그건 아니지. 객체인 어떤 대상에서 답을 찾으면 안 되고 주체가 되는 인간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자연과 인간의 대칭이 있다. 소리가 있으면 귀가 있고 칼라가 있으면 눈이 있듯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룬다. 인간 내부에 찾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 철학이 뭐지 하고 묻는 사람은 없다. 옛날에는 더러 있었다. 생각이 뭐지 하고 정면으로 따져들어 묻는 사람은 옛날에도 없었다. 생각이 뭔지 모르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시는 운율이 있고 라임이 있다. 패턴이 있다. 거기에 뇌가 반응하여 쾌감을 느낀다. 기계적인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있다. 소리에 귀가 반응하고 그림에 눈이 반응하듯이. 형식적인 라임을 주는 것을 한시의 압운과 평측이라면 의미의 라임을 주는 것이 진정한 시다. 두 가지 의미가 패턴을 이루고 충돌할 때 뇌는 전율한다. 지하철 시는 제목 맞추기 퀴즈를 낸다. 넓은 의미의 시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꼼수다. 넌센스 퀴즈는 시가 아니다. 그림도, 음악도, 영화도, 건축도, 디자인도, 요리도, 유머도 마찬가지다. 다 형식이 있다. 어떤 둘 이상의 패턴이 충돌하여 얻어내는 제 3의 요소가 있다. 그 방법으로 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 패턴이 있어야 한다. 패턴은 같은 것의 반복이다. 그럴 때 뇌는 긴장한다. 충돌은 다름이다.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을 때 호르몬이 나온다. 무서운 것이 다시 보니 무섭지 않을 때 웃음이 나오고, 헤어져서 슬프던 것이 다시 만나서 기쁠 때 감동이 나온다. 그것은 기계적이다. 영화감독은 신파술을 구사하여 기계적으로 관객의 눈물을 강요한다. 5분 간격의 웃음과 30분 간격의 눈물로 숫자를 찍는 것이다. 아주 도표를 짜는 호르몬 착즙 기술자도 있다. 숨바꼭질과 같다. 숨는 것은 다름이고 발견은 같음이다. 다름 속에 같음이 있고, 긴장 속에 균형이 있을 때 아이는 즐거워한다. 문학은, 예술은, 조형은, 건축은, 영화는, 요리는, 모든 창의는 다름과 같음의 질서찾기다.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 사건의 인지에는 호르몬의 반응이 있다.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은 메커니즘이 있다. 근본이 있다. 출발점이 있다. 생각은 도구를 쓴다. 철학은 사유의 손잡이를 잡는다. 그리고 생각을 통제한다. 상대성을 제압하는 절대성에 이르러야 한다.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그냥 자극하고 반응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다. 생각은 속을 찔러 관통하는 것이다. think의 어원이다. 모든 것의 원형은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다. 원자가 아니고, 이데아가 아니고, 이성이 아니고, 절대정신이 아니고 혁명이 아닌 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