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구조 어떤 사람이 아무 근거없이 우리말 ‘매우’는 ‘고추가 맵다’는 뜻의 ‘맵다’에서 나왔고, ‘되다(진밥이 아닌 된밥의 되.)’는 되놈(오랑캐)에서 나왔다고 어디다가 썼더라. ‘매우’가 ‘맵다’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되다’가 ‘되놈’과 연결될 가능성 역시 전혀 없다. 그 사람은 ‘된바람’이 북풍이므로 ‘되’는 북쪽이고, 그래서 북쪽놈은 ‘되놈’이라고 말하던데, 그렇다면 된밥, 된장, 된똥, 된통은 뭐란 말인가? 된통 걸렸다면 오랑캐에게 걸렸다는 말인가? 아니면 북쪽에 걸렸다는 말인가? ‘매우’는 마구, 막, 맨, 몹시, 매(사투리, ‘미’라고도)와 가깝고 매다, 모이다, 뭉치다, 뫼, 메주들과 사촌이고, 맞다, 마땅, 밀다, 맺다와 연결되며 넓은 범위에서 물렁, 무른, 물다, 메우다, 마치다, 마마 등의 그룹에 속한다. 굉장히 많은 단어들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잘 찾아보면 수백, 수천단어도 넘게 나올 것이다. M으로 시작되는 이 모든 단어들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물리게 할 때의 느낌과 연결된다. 실제로 입술을 물어보면 M소리가 난다. 결론적으로 ‘매우’는 입술을 지그시 ‘무는’ 데서의 강함을 나타낸다. 사투리로 ‘매 해라’(제대로 해라)고 할때 ‘매’의 발음은 힘을 잔뜩 주어 입술을 강하게 무는 것이다. ‘되다’는 농도가 ‘짙다’의 의미인데 짙다, 질다는 모두 구개음화에 따라 딭다, 딜다에서 왔다. 되다와 지다는 의미가 반대인데 어원이 같다. 이런 현상은 광범위하게 관찰된다. 벌다/버리다, 붙다/빼다. 더하다/덜하다는 어원이 같다. ‘되다’는 ‘짙다’ 곧 ‘딭다’에서 나온 말이고 딭다는 닿다(닿을 때 나는 소리에서, 의성어)와 따르다(물을 따를 때 나는 소리에서, 의성어)를 조상어로 한다. 따르다는 닳다>닳이다(졸이다)>달구다(가열하다, 달이다)>되다로 연결됩니다. 물을 달여서 졸이면 밥이 되다. 된밥이 되는 것이다. 해가 ‘달다’, 볕이 달다는 표현을 노인들이 많이 쓴다. 정오쯤 되어 날씨가 따뜻해졌다는 뜻이다. 달다는 달아오르다 곧 가열되다는 의미다. 물이 가열되면 닳아(졸아) 없어진다. 물이 졸아들 때의 졸다 역시 돓다에서 온 말이며 ‘오’ 발음이 들어간 것은 작은 것(좁다, 솔다, 홑, 홀로 등)을 나타낸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양이 적어지기 때문에 닳다>달다>돌다>졸다로 변한 것이다. 되다는 짙다에서 나온 말이므로 진흙(딘흙)과 연결된다. 여기서 진흙의 진은 질다(딜다)도 되지만 되다는 의미도 된다. 둘 다 통하는 것이다. ㄷ이 ㅈ으로 되는 것은 직접 발음해 보면 안다. 입천장에 세게 닿으면 되고, 살짝 닿으면 질다. 단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므로 이 단어의 아비는 이 단어다 하고 특정할 수 없다. 단지 몇몇 단어와 친연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위 열거한 어휘들도 단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친연성을 나타낼 뿐 반드시 이 단어의 아비가 이 단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어휘들 사이에 중요한 것은 광범위한 친연성이 있고 패턴분석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문명어라면 다르다. 예컨대 게이를 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게이들이 스스로 게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게이는 원래 깔깔>까분다>기껍다>즐겁다는 뜻인데 게이에 대한 혐오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즐겁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원시어는 이런 식의 인위적인 설정이 들어가지 않는다. 감은 떫은 맛을 낸다. 떫은 음식은 타닌 성분이 작용하여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떫다는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달라붙’을 한 글자로 압축하면 ‘떫’이 된다. 여기서 붙는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덥다, 춥다, 그립다, 굽다, 무겁다, 가볍다, 합치다, 겹치다, 싱겁다, 짭다(짜다), 씹다(쓰다), 새그랍다(시다), 간지럽다, 밉다, 지겹다, 괴롭다, 더럽다, 예쁘다의 연속되는 ㅂ 받침들은 모두 몸에 달라붙는 것을 나타낸다. 입술을 붙이면 B가 발음되기 때문이다. 영어도 B나 V, W가 들어간 것은 붙는다는 뜻이 많다. have나 with가 대표적이다. have는 몸에 달라붙는다는 의미다. 우리말 ‘가지다’의 ‘갖다’는 꼬챙이로 꿰다에서 나온 말이다. 꼬챙이로 곶감이나 꼬치 따위를을 곶는다는 뜻에서 곶다>갖다가 된 것이다. have와 느낌이 다르다. 본래의 느낌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영어 역시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패턴분석을 해보면 근원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을 배우는 한 살 꼬마에게 덥다, 춥다, 그립다, 굽다, 무겁다, 가볍다, 합치다, 겹치다, 싱겁다, 간지럽다, 밉다, 지겹다, 괴롭다, 더럽다, 예쁘다에 연속되는 ㅂ들은 모두 몸에 달라붙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선생은 없다. 그러나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이를 안다. 이성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확장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말은 본능으로 쉽게 익히고, 영어는 이성으로 달려들어서 못 배우는 것이다. 어원을 그냥 지어낸 특정 단어나 특정 사건과 연관시키는 것을 민간어원설이라고 하는데 거의 대부분 엉터리다. 95퍼센트 거짓으로 보면 대략 맞다. 어쩌다 하나쯤 들어맞는게 있을수도 있겠으나. 언어를 이해하려면 광범위한 패턴분석을 해야 한다. 거기서 법칙과 경로를 찾아내야 한다. 두음법칙이나 구개음화 같은 현상들을 적용해봐야 한다. ### 언어학이야말로 인문학의 근본이라 하겠다. 그런데 다들 언어를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르면서 아무 이야기나 함부로 지어낸다. 의심하지도 않는다. 불행이다. 근본이 틀어졌으니 바로잡기가 어렵다. 탄식할만 하다. 언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철학사상의 토대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모르면서 소통을 논하고, 지성을 논하고, 깨달음을 논하기는 불능이다. 먼저 언어를 떼고 와야 이야기가 된다. 모든 철학적 사유는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의심이 숨은 전제에 대한 의심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이러한 이치를 일곱살에 깨달았다. 모든 한국인이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도 숨은 전제를 의심하지 않더라는 거다. 예컨데 이런 거다. 두 사람이 서로 ‘내가 옳다’고 우기는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옳다’라는 말에는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로 ‘공동선’이라는 사회적 규범에의 합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옳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공동선이 규범으로 확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팩트를 두고 왈가왈부할 뿐 이러한 본질은 아예 논쟁대상에서 제외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과 소통에 대해 대화하는 격이다. 대화가 통하나? 어불성설에 언어도단이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말할 때는 ‘포지션이 어긋났다’는 뜻인데 이명박은 그것을 ‘홍보가 부족했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어긋남은 문장 속의 숨은 전제들 때문이다. 소통의 문제는 ‘의사결정’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인데 이명박은 권한은 당연히 자기에게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숨은 전제다. 숨은 전제는 대개 포지션으로 성립하므로 인간은 이를 생략한다. 일일이 설명하려 하면 말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숨은 전제들에 통달한 달인도 있다. 이 만화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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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구조>, <영어의 구조> 라는 책을 쓸 계획은 없으신지요? 국어교사나 영어교사들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