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 소집, 사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사회의 존재는 불분명하다. 부족민은 넓은 면적에 흩어져 살다가 행사가 있을 때 모인다. 거기에 사회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사회는 모임이고 모임은 결과다. 왜 모였는지 원인측을 봐야 하는 것이다. 사회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필요성에 의하여 동원된다. 사회 이전에 집단적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집단적 의사결정이 가능한가? 동물은 불가능하다.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능한가? 언어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권력이다.
사회학은 누군가에 의해 작위적으로 제안된 이념이나 막연한 도덕의 강조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본능과 집단적 무의식과 물리적 환경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이념은 희망이고 도덕은 경험칙이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에 불과하다. 말로 해결될 정도라면 이미 걸림돌이 빠지고 문제가 해결 근처에 와 있는 것이다. 대부분 더 근본적이고 물리적인 이유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방해자가 있다. 근본을 질문해야 한다. 사회는 과연 존재하는가?
막연히 사회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소설 쓰는 것이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이 그러하다. 사회는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계약되는 것도 아니고, 집단적 의사결정의 필요성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며 동원 방법은 권력이다. 그러려면 먼저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 사회의 자원들이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권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만드는 절차가 의리다.
사회 - 권력수렴의 결과로 이루어진 집단
동원 - 집단적 의사결정에 따른 권력의 수렴
권력 - 집단적 의사결정에서 행사하는 각자의 지분
의리 - 집단적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하는 집단의 공유자산
가족은 선천적으로 동원된다. 그런데 부족민은 12살이 되면 아이를 버리는게 보통이다. 일본인과 유태인은 13살이 되면 아이를 내보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고, 게르만족도 15살이 되면 자녀를 독립시킨다. 신라의 화랑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부족민이 뚜렷한 형태를 갖추지 못해도 국가는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전쟁에 맞서는 동원구조가 존재하면 국가다. 전쟁에 동원되면 국가, 광장에 동원되면 사회, 노동에 동원되면 회사, 생식에 동원되면 가족, 취미로 동원되면 동아리다.
동원은 집단적 의사결정을 촉발하는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고 소집은 동원의 반복에 따른 학습에 의해 인위적으로 동원된다. 동원을 반복하다 보면 패턴을 학습하여 인위적으로 동원하는게 소집이다. 오일장은 오일마다 소집된다. 새벽장은 새벽에 반짝 하고 파장한다. 시장이 상설화 되듯이 동원이 상설화 된 것이 사회다. 원래는 전쟁을 할 때 사람을 동원하는데 전쟁이 반복되면 상비군이 배치된다. 유목민은 여름에 목축에 종사하다가 겨울만 되면 전쟁에 동원된다. 징기스칸 시절에는 일 년 내내 전쟁을 하게 되는게 상비군이 된 것이다.
의리
의리는 권력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자산의 공유다. 사회의 본질은 집단적 의사결정이다. 집단적 의사결정의 근거는 동원이고, 동원의 근거는 권력이며, 권력의 근거는 의리다. 유무형의 사회적 자산을 공유하면 나눠가질 수 없으므로 문제가 발생하면 권력의 형태로 집단에 의사결정을 위임해야 한다. 배반은 타인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강탈하고 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게 칼을 빌려준 사람을 그 칼로 찌르는 것이 배반이다. 차별은 타인과 자산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담할 것인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앞장설 것인가? 외국인이라면 가담할 수 없다.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이웃집에서 일어난 부부싸움에 참견할 수 없다. 가족 간의 의리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어야 집단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인간은 호르몬과 무의식을 공유하고, 언어와 관습을 공유하고, 영역과 세력과 서열을 공유한다. 자산을 공유해야 발언권이 있고 지분이 있다.
로크, 홉스, 룻소 등의 사회계약설은 개소리고 인간은 계약한 적이 없다. 굳이 말하면 의리를 암묵적인 계약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다. 계약은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이지만 의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운명적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빠져버리는 것이고 휩쓸리는 것이다. 의리가 있는 집단이 의사결정을 잘해서 살아남았다. 미친 사람이 지하철에 불을 지르면 누가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양반이라는 이유로 혹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방관하면 자신도 죽는다. 그 불을 끌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집단이 살아남았다. 공유하는 것은 나눌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해야 한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의리가 부족했다. 그들은 집단의 위기에 맞서 권력을 조직하지 못했다.
집단이 외부의 힘에 맞서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가 권력이다. 약자를 차별하고 다양성을 부정하면 권력을 위임하지 않으므로 집단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래야 인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불을 끈다는 말이다. 그것은 상당 부분 억지다. 서로 공유하는 토대가 없는데 의사결정을 위임하라고 외친다면 공허하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 힘을 합치자고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다. 서로 공유하는 자산이 있어야 한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똑똑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완력이 필요할 때는 건장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매력이 필요할 때는 센스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그것이 의리다. 그래야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의사결정에 무리가 호응한다.
부부의 의리, 부모와 자식의 의리, 동료와의 의리, 국가의 의리가 있다. 호르몬과 무의식으로 엮어진 부모와 자식의 친함은 선천적 의리다. 같은 목표를 두고 팀을 이루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동료를 묶어주는 후천적 의리다. 선천적인 의리는 타고나는 것이고 후천적인 의리는 연습해야 한다. 동료와는 패스를 연습해서 손발을 맞춰놔야 한다. 단독 드리블의 개인기는 독점되고 패스플레이는 공유된다. 한솥밥을 먹고 한침대에서 자야 의리가 작동한다. 말로 해서는 안 되고 호르몬이 바뀌고 무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서 의사결정이 빠른 것은 타고난 선천적 의리다. 미국인이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필요한 때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은 학습된 후천적인 의리다.
의리는 말로 선언될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빠뜨려져야 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이 일어나면 누구라도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내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타인도 나를 위해 희생한다. 나의 희생에 따른 보상을 다른 사람이 받아도 상관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이 희생한 결과가 돌고 돌다가 확률에 의해 내게 할당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리로 살고 차별로 죽는다.
기후위기가 인류 전체를 '의리'로 빠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