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사건을 해명한다. 세상을 사건으로 본다는 것은 사물로 보는 관점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물로 보는 관점은 원자론과 그에 따른 뉴턴의 기계론, 결정론적 관점이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부정한 것도 같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이 내포하는 비결정론, 비실재성, 비국소성을 아인슈타인이 거부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지금까지의 사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양자역학의 분명한 입장은 없다. 철학적인 물음에는 ‘닥치고 계산이나 해.’ 이 말로 응수한다. 해석은 필요없다. 포기한다. 구조론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물음이 왜 중요한가? 인간 뇌구조의 한계 때문이다. 왜 양자역학을 해석하려고 하는가? 양자역학이 규명한 여러 현상이 인간들의 경험적 직관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경험적 직관을 가지고 있는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왜 문제가 되는가? 왜 얄궂은 것을 그냥 얄궂은 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려고 하는가? 왜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으려고 용을 쓰는가? 인간은 모형으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형보다 큰 것이 관측되면 난감해지는 것이다. 모형이 문제다. 모형에 욱여넣는다. 아인슈타인은 모형보다 큰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단지 크다는 이유만으로. 정작 시간과 공간의 모형을 때려부순 사람은 아인슈타인 자신인데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전통적인 시공간의 모형을 때려부수는 것을 지켜본 보어가 신이 났다. 아인슈타인 형님도 마구 때려부수는데 나도 하나 때려부숴야지. 아인슈타인이 걱정한다. 이것들이 어디까지 때려부수려나? 다 부수면 곤란해. 기초는 살려야지. 아니다. 다 부수는게 맞다. 필자는 이 문제를 열일곱 때 해결했다. 자연의 사실은 죄 없고 인간의 뇌구조가 잘못되었다. 사물의 모형을 버리고 사건의 모형으로 보라. 사물로 보면 세상은 작은 것의 집합이다. 왜? 관측자인 인간과 대칭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많으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대칭시킬 수 없다. 반대로 가야 한다. 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자연 사이에 성립하는 대칭을 끊어버리고 객체 안에서 대칭을 발굴하기다. 대칭이 있다는 것은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정보도 없다는 말이다. 있는 것은? 대칭 그 자체다. 대칭이 형태를 바꾸어 물질도 되고, 공간도 되고, 시간도 되고, 정보도 된다. 대칭은 둘이다. 어떤 하나는 대칭이 아니므로 존재로 성립할 수 없다. 가장 작은 것은 다른 것에 빌붙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독립적 존재자가 아니다. 이거다 하고 가리키면 이미 왜곡되어 있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 반대로 달라붙는 것이 최소의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성립할 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계산하고 남는 우수리 같은 것이다. 어딘가에 포함되어 있을 뿐 딱 분리해낼 수 없다. 우리는 잘못된 모형으로 사유하고 있다. 올바른 모형으로 갈아타야 한다. 가장 작은 입자가 있으면 안 된다. 가장 작은게 없으므로 세상은 확률로 해석된다. 나누어서 똑 떨어지면 안 된다. 반드시 우수리가 남아야 한다. 그래야 대칭의 축이 되는 코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작은 것의 집합이 아니라 큰 것의 복제다. 그것은 무한히 쪼개질 뿐 더해질 수 없다. 작은 원자가 어떻게 집합되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틀렸다. 실타래가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결정된다. 실타래는 그냥 있는 것이다. 죄다 연결되어 있으며 분리할 수 없다. 실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세상은 당구공 하나하나의 집합이 아니라 헝클어진 실타래다. 죄다 연결되어 있다. 당구공을 모아서는 많은 정보를 생산할 수 없다. 실 한 가닥을 꼬아서 무한히 많은 정보를 생산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모형으로 사유한다. 그것이 경험적 직관이다. 모형보다 큰 것을 사유하려면 모형을 바꾸어야 한다. 사물의 모형을 버리고 사건의 모형을 받아들여라. 원자론적 사유를 버리고 구조론적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세상은 대칭이다. 안다는 것은 대칭시키는 것이다. 관측자인 나와 대칭시키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나는 1이므로 상대방도 1이라야 대칭된다. 그것이 원자론의 관점이다. 틀렸다. 나는 고립된 1이 아니다. 나는 친구와 동료와 가족과 천하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연결된 실이다. 그러므로 세상도 실이라야 한다. 실은 실마리와 실꼬리가 있다. 그러므로 세상도 실마리와 실꼬리가 있다. 연결하는 바늘귀가 있다. 주체인 내 안에도 대칭이 있고 객체인 존재 안에도 대칭이 있다. 세상은 원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대칭된 실타래의 연결이다. |
A = ~A
이런 관계도 대칭이라고 볼 수 있나요?
A 스스로 대칭을 이루면 A 스스로 존재할 수 있지않을 까요?
A = 2∆t, A
∆t 마다 자신을 부정하면 2∆t 후에 자기 자신으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대칭을 이루려면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이면 하나가 아닙니다.
' 움직이면 하나가 아니다'
스스로 대칭을 이룬다는 것은 움직여야 성립하는 것!
감사합니다.
파동은 내부에 대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일단 파동이 맞습니다.
구조라는 것은 대칭 2가 외력의 작용에 대해서는 1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입자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자체적으로 파동이고 외력에 대해서는 입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상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기독교 광신도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기만하려고 그런 어설픈 짓을 한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다들 지옥갈까봐 몸을 사렸을 때 아인슈타인 이 젊은 친구가 과감하게 질러버렸지요.
질러놓고 수습이 안 될거 같으니까 다시 몸을 사리다가 후배들에게 한 방 맞고.
너는 질러도 되고 우리는 지르면 안 되냐? 질러버려.
관측할 수 있습니다.
현재 그 정도 기술이 안 되는 거지요.
미분식에 들어있는 델타(삼각형)x 라는 게 있는데, 보통은 h라고도 표기합니다. 미분을 유도할 때 이 차이를 0으로 만들자(lim del x -> 0)는 게 바로 미분의 기본 컨셉인 "차이가 0이지만 0은 아니야"라는 것입니다. "0인 것처럼 보이지? 근데 0은 아니지롱. 근데 또 필요하면 0이야~~." "필요에 따라 차이(2를 의미)이자 1이야." 아, 골 때리네.
#
고등학교 수학에서 문제를 풀고 있으면 왠지 꼼수로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든데, 솔직히 '분모에 0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이때까지 깨뜨리면 안 된다고 알고 있었던 절대적인 명제를 '0은 아니지만 0에 한없이 다가간다'는 이도 저도 아닌 궤변으로 때워버렸다고 느낄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접근 없이 고등학교 미적분을 현실에 응용했다가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는 현재의 고등학생들뿐만 아니라 미적분의 개념이 제시될 당시, 그러니까 함수와 극한의 개념이 모호해 무한소라는 개념으로 때워버렸을 당시에 많은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 당시 학자들은 혁명적인 개념이었던 미적분을 엄청나게 사용했고, 그러다가 미적분을 적용해서는 안 될 식에서조차 적용해버려 결국 이상한 값이 나와버리는, 한마디로 미적분 만능주의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를 대체하기 위해 극한이 나왔지만 역시 빈틈이 많았던 건 매한가지였고 직관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오일러 역시 활발히 극한을 사용했지만 그도 당시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여 무한소 개념에 대해 이견을 표시하지 않은 채 극한만 그대로 사용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극대-극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Adequality"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ad-"+"equality", 즉 거의 같다는 뜻으로, 극점에서 독립변수가 아주 조금 변해도, 함수값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나무위키)
#
자, 이제 제가 "극한"을 구조론에 근거하여 정의하겠습니다. 극한의 의미는 "차이 = 2, 공통 = 1의 동시성"입니다. 이게 바로 둘이 하나에 맞물린 상황이에요. 이 그림이 머리에 잘 안 떠오르면 트리나 갈림길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참고로 극한을 정의하는 오귀스탱 루이 코시(1789-1857)의 "입실론-델타 논법"의 의미는 아주 작은(입실론)-차이(델타)입니다. 링크1, 링크2)
이제 하나도 안 헷갈립니다. 어떻습니까? 인류의 2,000년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제야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납니다. 이 모든 것은 이걸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혼선입니다. 비슷한 논의는 "점 두 개를 합치면 선인가?" 혹은 "점은 크기가 있는가?"가 있습니다.
#
그리고 제가 양자역학은 잘 모르기 때문에 대충 말하자면,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도 이러한 언어불성립에 의한 골때림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학과 과학에 관점을 도입해야 하는데 "무관점" 혹은 "무맥락"으로 대상을 객관화 하려다 보니깐 말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죠. 위에서 내려다보면 둘인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하나더라. 근데 그게 뭐냐? 관점이 없으니 답이 나올리가 있나. 위에서 보면 파동이고 아래에서 보면 입자야. 둘이니깐 파동이라고 하고, 하나니깐 입자라고 하는 거겠지? 어디서 보느냐 혹은 어느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정의가 달라지는 거라니깐.
관측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해석이 달라지는 게 당연한 거.
"코펜하겐 해석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등 당대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함께 만든 것으로서 양자역학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통해석이다.[5] 코펜하겐 해석의 관점에서는, '관측'이 중요시 여겨진다. 즉, 관측하기 전에는 여러가지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한다. 코펜하겐 해석은 이를 확률을 의미하는 파동함수(슈뢰딩거 방정식)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슈뢰딩거 방정식의 파동 함수의 제곱이 확률밀도에 비례한다고 본다.) 하지만 관측하는 그 순간 상태는 더 이상 확률이 아닌 특정한 한가지로 정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의 상태는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와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주장한다.[6]
예를 들자면,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해석할 때에는 있는 실험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관측하기 전 까지는 파동이었다가 관측하는 순간 입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스크린에 도달하여 관측되기 전 까지는 파동이므로 전자(혹은 빛)는 동시에 두 슬릿을 통과할 수 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슬릿을 각각 A슬릿, B슬릿으로 두었을 때 처음에 전자(혹은 빛)를 보내면 전자(혹은 빛)가 '슬릿 A를 통과 할 가능성'과 ' 슬릿 B를 통과 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A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자(혹은 빛)'와 'B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자(혹은 빛)'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전자(혹은 빛)의 파동성을 의미한다. 이후 스크린에 도달하여 관측이 되면 그제서야 입자가 된다는 것이다."(한국어 위키 중)
불확정성 원리도 비슷한 맥락
양자역학의 물리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아래는 기본적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를 서술한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고, 두 측정값의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이다. 고전역학의 예측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적인 값을 가질 수 없으며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플랑크상수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이는 입자계로부터 동일한 측정의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통계에 대한 진술이지, 단순히 입자계를 한번 측정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양자현상은 특정한 시도에 의해 그때그때 얻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여러 번의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기댓값과 같은 통계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러한 양자현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리적인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관계에만 성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관측에 적용될 수 있다. 양자현상의 관측량들은 연산자에 의해 얻어지는데, 각 연산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두 연산자를 '교환(맞바꿈) 관계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 위치와 운동량은 교환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은 불확정적인 것이다. 반면 3차원 공간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경우엔, 다른 두 방향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교환 가능한 관계이므로 그것들에 대해서는 불확정적이지 않게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교좌표계에서의 관측을 생각해보자. x축 상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x축상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만, 이 관측은 y축과 z축 상의 위치와 운동량 관측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든 관측에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의 결과가 실험 오차에 의한 것이었다면 x축상의 위치와 y축상의 운동량의 측정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부분이 바로 기술적 한계와 불확정성 원리가 구별되는 부분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는 관측 행위의 순서가 관측하고자 하는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현상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교환관계에 있지 않은 두 연산자에 의한 관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즉 한번의 관측을 수행한 후 다른 관측을 수행할 때 두 관측 순서를 바꾸면 각각은 다른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 이것은 처음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변화하게 되어 다음 관측에서는 처음과 같지 않은 상태에 대해 측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초기 상태가 관측에 의해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파동 함수 붕괴 (wave function collapse)라고 말한다. 양자 현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표현되므로, 그 파동 함수가 변화했다는 것은 수학적 계산에 의해 전과 같은 관측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교환법칙: a * b = b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