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일원론자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감을 받는 것이다. 영감은 에너지의 통제권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바닥의 권력질서를 알아내야 한다. 유기견이 입양되었다면 서열정리가 중요하다. 누가 알파독인지 눈치채야 한다. 군대라면 말년병장보다 실세상병이 중요하다. 간부는 사병의 주적이고 신임하사는 물밥이다. 이런 것을 빨리 알아채야 한다. 모르고 간부들에게 귀염받으려 하다가 몰매 맞는 수가 있다. 이런 것은 무의식에 남아 평생을 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한번 결정되면 죽을 때까지 간다. 소년기에 혼자가 되면 잘못된 권력질서를 따르게 된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모든 것을 일대일 맞대응으로 여긴다. 무언가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자신의 약점을 들키면 안 되고 상대에게 강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이 공격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권력 메커니즘의 이해가 중요하다. 정치권력만 권력인 것은 아니다. 일의 통제권이 권력이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사건의 앞단계가 뒷단계를 제한한다. 그러므로 사건을 설계한 주인에게 권력이 있다.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다. 황무지에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 선점권이 있다. 군대의 고참에게 권리가 있다. 고참이 인수인계에 협조하지 않으면 골탕을 먹는다. 물론 매뉴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매뉴얼이 없는게 한국사회의 병폐다. 매뉴얼로 커버할 수 없는 많은 빈 공간이 있다. 밑바닥의 생리로 작동하는 권력질서를 인정해야 한다. 메이저리거는 어떤 상황에서든 대응할 수 있다. 타자는 결대로 치면 된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보고 치는 것이다. 투구폼만 봐도 궤적을 안다. 이종범 아들 이정후는 스윙이 아름답다. 유전자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이정후는 어떤 공의 궤적이든 대응할 수 있는 매끄러운 스윙폼을 갖고 있다. 공의 궤적에 방망이 궤적으로 맞선다. 투구폼의 궤적과 공의 궤적과 스윙의 궤적이 3일치를 이루는 지점에서 최고의 타격이 일어난다. 관객은 거기서 영감을 받는다. 사건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미지로 느낀다. 그것이 뇌에 각인되었다가 다른 분야에 응용되는 것이 관객의 소득이다. 그것이 스포츠의 존재 이유다. 투수는 타자의 호흡을 빼앗는다.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의 무호흡이 타자의 밸런스를 결정한다. 호흡을 교란하여 타격 밸런스를 흔들면 된다. 포수가 알려주는 정보를 받아들여 카운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방망이에 맞아도 땅볼을 유도하여 수비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주도권을 쥐고 에너지를 통제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궤적은 에너지의 통제과정이다. 타자는 공간의 일치를 노리고 투수는 시간의 불일치를 노린다. 그러나 에너지가 없는 후보선수는 벤치를 달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관객에게 영감을 줄 수 없다. 최고의 경지에서만 영감이 있다. 마이너리그에서는 좋은 영감을 받을 수 없다. 얻는게 없다. 가끔은 눈물 젖은 빵 스토리가 나온다. 그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약한 선수를 보고 관객이 갑질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거지에게 적선하는 심리와 같다. 불쌍한 거지를 비웃으며 멀쩡한 자신의 처지에 안도하는 것이다. 불쌍한 선수의 고군분투를 보고 쾌감을 느낀다. 그런 식이라면 영감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잘못된 영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오히려 해롭다. 주역의 점괘가 맞을 리 없지만 주역은 인기가 있다. 주역은 권력적이기 때문이다. 주역의 핵심 원리는 밸런스다. 음과 양의 이원론적 대결을 밸런스가 일원으로 제압한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다. 똑같이 주역을 읽었어도 이원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망하고 일원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흥한다. 공자의 가르침이라도 마찬가지다. 퇴계는 이원론으로 받아들여 남녀를 분별하고 신분을 차별한다. 율곡은 일원론으로 받아들여 민족의 통합에 나선다. 같은 기독교를 믿어도 이원론자는 천사와 사탄을 차별한다. 신과 사탄이 대립해 있다면 일신교가 아니다. 천사나 마귀나 귀신이나 요정이 활동하고 있다면 이미 다신교다. 천사와 사탄은 인도의 신족설화에서 왔다. 데바족과 아수라족, 두 신족의 대결이 천사족과 사탄족의 대립으로 변형되었다. 그 중간에서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이 영향을 미쳤다. 왜 이원론이 문제인가? 이원론은 선악대결에 따른 균형력에 의존한다. 균형을 찾는 복원력을 강자로 놓고 자신을 약자로 놓는다. 균형력 때문에 완전하다고 믿는다. 아빠가 때려도 엄마가 위로해주니 괜찮아 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균형력을 지배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주인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대신 우리 노예는 주인을 속여먹잖아. 주인 몰래 삥땅을 치잖아. 그러니까 셈셈이지. 이러고 기뻐하며 안심하는 것이다. 뭐? 중국과 북한과 소련이 편먹었다고? 우리 뒤에 일본과 미국이 있잖아. 삼 대 삼이네. 안심되잖아. 이러한 균형에 만족하고 안심하며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만주족이 쳐들어온다고? 우리 화려한 중국문화에 녹아버릴 거잖아. 안심해도 되잖아. 뭐라고? 영국이 쳐들어온다고? 누가 쳐들어와도 인도에 오면 다들 인도인이 되잖아. 인도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고. 실제로 많은 인도의 토후왕들은 영국의 철수를 걱정했다. 영국이 빠지면 파키스탄과 인도가 싸울 텐데. 그 와중에 중국이 어부지리를 노리고 악사이친으로 들어올 텐데. 이러한 균형의 원리는 위험하다. 그 역을 생각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둘로 갈라쳐서 잡아먹는 기술을 사용해 왔다. 뭐라? 오이라트가 몽골과 싸운다고? 우리 청나라가 중재해 줄게. 이러고 신강을 먹었다. 뭐라고? 준가르가 티벳을 침공한다고? 우리 청나라가 중재해줄게. 이러고 티베트를 먹었다. 아주 재미를 냈다. 뭐라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싸운다고? 우리 중국이 중재해줄게. 이렇게 된 것이 중인 국경분쟁이다. 뭐라고? 방글라데시와 미얀마가 싸운다고? 또 중국이 나서야지. 양쪽을 갈라친 다음 둘 다 잡아먹는다. 둘을 대칭시켜 놓고 교착상태에 안주하려는 진중권들의 이원론적 사고는 그 둘을 동시에 잡아먹는 일원론 사고에 깨진다. 진시황이 연횡책으로 합종책을 깨뜨리듯 한다. 바보들 교착시켜 놓고 잡아먹기 너무 쉽잖아. 전라도와 경상도로 갈라쳐서 지역감정 조장해놓고 우리 군부가 해 먹어야지. 지역분쟁을 해결해 준다며 끼어들어 둘 다 잡아먹는 것은 중국사 5천 년간 반복된 패턴이다. 노조가 말썽을 부린다고? 하나 더 만들면 되잖아. 어용노조를 심어서 둘이 서로 싸우게 만들라고. 쉽잖아. 이런 것만 오천 년간 연구한 중국인을 당해내겠냐구. 이원론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선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똑같이 주역을 읽어도 정반대로 해석한다. 강희제는 신하들이 주인을 속인다는 사실을 안다. 신하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데 주역을 써먹는다. 반대로 신하들은 주인을 속이는 기술로 주역을 이용한다. 같은 것이 일원론으로 해석되면 돈을 버는 기술이 되고 이원론으로 해석되면 소인배가 속임수를 쓰는 기술로 되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유는 칼뱅의 구원예정설처럼 세상을 일원론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일원론이다. 돈은 언제라도 교착을 타개한다. 주인이 노예를 잡으러 와도 속량금을 내면 해결된다. 왜 일원론이 옳은지는 기업을 경영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문제는 한국의 좌파들이 이원론에 매몰된 사정이다. 자본은 우파, 지식은 좌파 하는 식으로 정리해 놓았다. 일원으로 보면 자본도 생산력이고 지식도 생산력이다. 고도성장기에는 산업 생산력이 각광을 받았지만 인터넷이 뜨면 지식 생산력이 각광받는다. 왜? 부장님이 컴맹이기 때문이다. 부장님이 신입사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배워야 한다. 그런 변화를 싫어하다가 일본은 뒤처졌다. 지식과 자본의 이원적 대결구도를 깨부수고 생산력 일원론으로 돌아와야 한다. 북중러 대 한미일의 이원론적 대결구도를 깨고 대한민국 중심의 일원으로 갈아타야 한다. 남의 싸움에 종군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왜 미국과 소련이 싸우는데 한국과 북한이 돌격대를 맡아 용맹을 떨치려 하느냐고? 그래봤자 총알받이밖에 더하냐고? 그게 육이오다. 신생국이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다들 흥분해 있었다. 에너지가 펄펄 끓었다. 인정해야 한다. 이차대전에서 활약을 못 한 터키와 에티오피아가 삼차대전 소식 듣고 흥분해서 한반도에 정예를 끌고 왔듯이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일원으로 해석해야 한다. 왜 일원성을 보지 못하는가? 에너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둘의 대결이 있다면 하나의 에너지가 있다. 독일과 브라질이 싸운다면 사실은 피파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돈줄을 봐야 한다. 무형의 에너지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상대가 이렇게 하면 나는 저렇게 맞선다는게 이원론이면 상대가 어떻게 하든 내 계획대로 가는게 일원론이다. 자본은 일원론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세상의 모든 균형을 파괴했다. 계급 간 균형이 깨져서 신분질서가 파괴된 것이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부엌에서 남자들을 흉보고 균형이 맞잖아. 공평하잖아. 이게 이원론이다. 돈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균형을 만들려고 한다. 간부는 사병의 주적이다 하고 대립구도를 만들어낸다. 한국의 개신교가 개독판이 된 이유는 세상을 이원론으로 해석하는 목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도를 착취하려면 이원론이 맞다. 예수는 세상을 일원론으로 해석하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다. 그 기술을 배워서 써먹는 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뭔가 영감을 받는게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질서에 대한 이해이다. 세상이 전진할 때는 일원론이 각광을 받고 멈출 때는 이원론이 인기를 얻는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세상이 멈춰 있었기에 이원론이 득세했다. 강남의 부자들이 교회에 몰려가는 이유는 칼뱅의 구원예정설이 일원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에 민감하고 일원론이 권력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밑바닥 에너지를 보면 세상은 일원이다. |
"상대가 이렇게 하면 나는 저렇게 맞선다는게 이원론이라면 상대가 어떻게 하든 내 계획대로 간다는게 일원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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