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시대가 봉건사회로 되는 이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답은 통제가능성이다. 통제할 수 없다. 청나라 때 지방의 세금은 북경에 도달하기까지 50퍼센트가 중간에서 사라진다. 운반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굳이 운반할 필요가 있을까? 수표와 어음으로 결제하면 된다. 그러려면 은행이 있어야 한다. 청나라 중기에 발달한 표호가 은행업을 했는데 산시성의 산시표호가 유명했다. 서태후 시절에는 표호가 국가의 세금징수를 대행하여 거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중드 '교가대원'에 나온다. 중앙이 지방을 지배하려면 은행이 있어야 한다. 은행업의 발달이 봉건사회를 붕괴시켰다. 루이 16세가 무너진 것도 징세업자들 때문이다. 왕실이 징세권을 경매로 팔아먹었는데 징세권을 사들인 업자들이 농민들에게 무리한 갈취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존 로가 왕립은행을 만들어 폰지사기를 쳤던 미시시피 거품이 유명하다. 존 로는 몰락했지만 존 로의 전성시대에 파리는 꽤 발전했다. 이후 세상은 점차 사기꾼의 계획대로 작동했다. 존 로는 폭주하다가 망했지만 은행은 운영만 잘하면 된다. 자본주의는 은행과 보험으로 개인의 신용을 평가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왜 자본주의는 건재할까? 자본주의는 욕망의 봉건주의다. 봉건시대가 귀족과 부르주아와 평민과 노예로 이루어진 신분의 봉건주의라면 현대는 욕망에 따라 계급이 갈리고 있다. 봉건사회의 신분을 규정하는 것은 가문의 세력이다. 여러 가문을 규합하면 귀족이고, 하나의 가문을 이루면 평민이고, 가문이 없으면 노예다. 인간이 패거리를 이루고 세력화된 것이 봉건사회인 것이다. 봉건시대에 신용은 개인이 아닌 가문에 있었다. 가문은 곧 세력화다. 어떻게든 세력을 이루면 신용이 생긴다. 명문대를 진학하려는 것도 강남에 입성하려는 것도 세력의 획득을 노린 것이다. 흔히 평등을 말하지만 결과측의 평등이 아니라 원인측의 평등이라야 진짜다. 자본은 생물과 같기 때문이다. 생물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욕망이라는 고삐와 재갈로 통제할 수 있다. 모두 똑같이 분배받는다면 공평하지 않다. 최홍만도 한 그릇을 먹고 옥동자도 한 그릇을 먹는다면 공정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자기가 가진 세력 크기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더 많은 세력,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가진다. 기회의 평등을 말하지만 세력을 가진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기회의 평등은 그냥 거짓말이다. 세력을 이룬 백인과 세력이 없는 흑인이 공정한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시시한 농담에 불과하다. 여성이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사권자가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의 능력을 평가한다는건 원초적으로 무리다. 여성이 세력화되지 않는 한 평등은 요원하다. 이런 점은 지역 간 형평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사권자가 어느 지역이냐다. 개인의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세력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근면을 낳는다. 세력을 잃으면 가난해진다. 노숙자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세력을 잃어서 노숙자가 된 것이다. 세력이 없는 개인에게는 국가의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국가는 공유세력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세력이 없는 사람에게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통제가능성이 답이다. 봉건이 봉건인 이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봉건사회는 개인이 아닌 세력으로 경쟁되고 세력으로 평가된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봉건주의다. 정당성을 떠나 현실적으로 개인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옛날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많이 가졌는데 지금은 목청이 큰 사람이 많이 가진다. 욕망이 큰 사람이 목청이 크기 때문이다. 세력에서 신용이 나온다. 근대는 개인의 신용을 평가하는 은행업에 의해 뒷받침된다. 개인의 욕망을 만드는 것은 세력이다. 더 큰 세력에 속한 사람이 더 많은 욕망을 가지고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는다. 모든 것은 에너지 하나로 환원시켜 설명된다. 에너지는 계의 복원력이다. 욕망은 환경과 나란하려는 복원력이다. 세력에 속한 사람은 주변과 나란하려고 하기 때문에 강한 복원력을 가진다. 그것이 욕망으로 나타난다. 게으르다는 말은 욕망이 없다는 말이며 욕망이 없는 사람은 환경이 나쁘거나 혹은 세력이 없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 분배의 평등이 아닌 세력의 평등이 진짜다. 기회의 평등은 절대평가와 같아서 뒤로 과외를 받는 강남 출신이 이긴다. 분배의 평등은 원인측이 아닌 결과측의 평가이므로 통제권이 없다. 즉 인간들이 말을 안 듣는다. 세력의 평등이 진짜다. 인간은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에너지는 주변과 나란해지려는 것이다. 그것이 욕망으로 나타난다. 욕망을 부정하는 봉건적 수법으로 인간을 통제할 수 없다. 욕망을 찬양하는 복음주의 개신교계의 논리도 속임수다. 욕망은 허상이고 세력이 진짜다. 세력이 약한 사람에게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신용을 평가하여 인간을 컨트롤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욕망에 따라 차별하는 봉건주의다. 욕망의 배후에 세력이 있다. 세력의 평등에 따른 모순의 완화가 유일한 방법이다. |
21세기판 새로운 "자본론"
복원 이전에 깨짐이 있다
깨짐이 복원되는 과정만이 진보이고
깨짐이 힘과 에너지를 낳는다
단, 복원의 끝은 우주의 종언이다
"기회의 평등, 분배의 평등이 아닌 세력의 평등이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