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의 이해 엔트로피를 아는 사람은 없다. 알면 써먹어야 하는데 써먹지 못한다. 엔트로피는 어디에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라고 설명되지만 여전히 열역학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는게 그렇다. 관찰된 결과를 중심으로 귀납적으로 아는 것은 아는게 아니다. 원인이 되는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을 중심으로 연역적으로 알아야 아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 증가다. 무질서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실패다. 구조론은 통제가능성에 주목한다. 통제할 수 있고 써먹을 수 있다. 무질서를 조정할 수 있다. 자동차와 마차를 구분하는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그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앎이라야 진짜다. 무질서도를 증가시키고 감소시키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엔트로피를 확률로 접근한다면 편법이다. 틀린 말은 아니나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본 것이다. 거기에 사건 개념이 없고 닫힌계 개념이 없다. 사건의 이해가 중요하다. 사건은 자체적으로 닫힌계를 구성한다. 왜 하필 열이겠는가? 다른 것은 대개 외부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열을 건드리려면 불을 붙여야 하는데 그러다가 들키는 것이다. 사건event은 주사위를 1회 던지는 것이다. 공중에 던져 외부의 개입을 차단한다. 초능력자가 염력을 써서 공중에 뜬 주사위의 눈을 조정하면 event가 깨진다. 열역학은 계가 닫혀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열은 공중에 뜬 주사위처럼 외부를 닫아걸기가 쉽다. 반면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닫혀있지 않다. 공중에 떠 있지 않다. 그런데 잘 찾아보면 곳곳에서 닫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떠나버린 버스와 같다. 버스 문이 쾅 닫혀버린다. 틀어진 커플과 같다. 여친의 마음이 꽉 닫혀버린다. 반대로 열린 문도 있다. 특권과 반칙이 그렇다. 아버지 빽으로 입사하는 직원도 있다. 김성태 딸만 아는 뒷문이 열려 있었다. 그 경우 엔트로피가 증가해야 하는데 감소한다. 열역학적 설명은 괜히 어렵게 말한다. 동영상을 봐도 그런가 보다 할 뿐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계의 닫힘과 열림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고 닫는가? 사건이 열고 닫는다. 열역학이 계가 지정된 사건 안에서 작동하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사건은 시간이 개입되므로 다르다. 정작 시간은 논외로 하고 공간의 확률을 논한다. 공중에 던져진 주사위는 외부에 대해 닫힌다. 떠나버린 버스는 닫힌다.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치자. 출발 총성이 울리면 닫힌다. 밖에서 도와줄 수 없다. 뒷바람이 밀어주기 없다. 뒷바람이 밀어주면 100미터 신기록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말이다. 외부의 도움은 차단했다 치고 내부에서의 도움은 없을까? 내부를 쥐어짜면?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하는데 결승선 코앞에서 거북이가 자기 배를 째고 내장을 집어 던졌다면? 사람은 가슴이 기준이므로 반칙하기 어렵지만 경주마는 코가 기준이다. 코끼리처럼 코를 길게 빼는 능력이 있다면? 거북이는 결승선 앞에서 목을 길게 빼는 방법으로 토끼를 코 차이로 이길 수 있다. 이게 또 묘미가 있는 작전이 된다. 내부의 도움을 받으면 반칙이 아니다. 훈련된 운동선수들은 내부구조의 도움을 받아 이득을 본다. 류현진은 발달된 코어근육의 도움을 받아 공을 구석구석 찔러넣는다. 그것이 구조다. 그러나 엔트로피를 어길 수는 없다. 그래도 닫힌계 안에서 제한된 에너지를 가지고 내부구조의 도움을 받아서 퍼포먼스를 극대화할 수는 있다. 열역학이 사용하는 확률 개념은 엔트로피의 일부를 본 것이다. 자연의 확률은 대개 0 아니면 무한대다. 중간이 없다. 확률로 설명할 수 없다. 두 상자 사이에 통로를 연결하고 개구리나 올챙이든 넣어두면 어떻게 될까? 겨울잠을 자는 뱀이라면 한 곳에만 빼꼭하게 모여 있다. 뱀은 100대 0으로 한쪽 상자에 모두 몰려 있는 것이다. 먹이활동을 하는 바퀴벌레라면 50 대 50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사위를 던져 확률적으로 가는게 아니고 균형을 맞춘다. 확률에 지배되는게 아니라 균형에 지배된다. 만유는 균일해지려 한다. 공기 입자가 연결된 두 플라스크 중 한쪽에만 모여 있을 확률은 10의 몇십 승이 아니고 0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균일해진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50 대 50이다. 왜? 공기 입자들이 서로 충돌해서 밀어내기 때문이다. 이때 에너지는 큰 쪽에서 작은 쪽으로 이동한다. 바위와 돌과 자갈이 무질서하게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바위는 돌을 밀어내고 돌은 자갈을 밀어내고 자갈은 모래를 밀어낸다. 그 반대의 경우는 없다. 모래가 돌을 밀어내는 일은 절대 없다. 왜? 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100이라면 99까지의 힘은 소거되기 때문이다. 대칭원리 때문이다. 100의 질량을 가진 물체는 역시 100의 질량을 가진 물체만 밀어낼 수 있다. 물론 80의 힘을 가진 돌도 20이 힘을 가진 다른 돌과 합세하면 밀어낼 수 있다. 그러나 모래는 아무리 많아도 아니다. 확률은 공평하다. 대칭적이다. A에서 B로도 가고 B에서 A로도 간다. 구조는 공평하지 않다. A에서 B로는 가는데 B에서 A로 못 간다. 대칭이 안 되면 소거하기 때문이다. 돌만 돌을 밀어낼 수 있다. 에너지는 일방향으로만 작동하므로 확률은 10의 몇십 승이 되는게 아니고 0이 된다. 공기분자 중에 큰 것도 있고 작은 분자도 있다. 큰 것은 작은 것을 밀어내지만 작은 것은 큰 것을 밀어내지 못한다. 확률 좋아하네. 확률은 씨가 안 먹힌다. 시간이 흐르면 돌은 돌끼리 모여 몽돌해변이 되고 자갈은 자갈끼리 모여 자갈밭을 이룬다. 균일해진다.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대칭적으로 일어난다. 도처에서 자투리를 지워버리므로 우주는 결정론이 아니다. 재판은 공평해야 하는데 자연의 재판장은 51 대 49로 몰아주기를 한다. 선이 악보다 크면 무조건 무죄로 판결하고 악이 선보다 크면 무조건 유죄가 된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세상이 결정론으로 간다면 0.000001 같은 것이 있어서 곤란해진다. 해결되지 않는 자투리가 많다. 편을 가르는데 이편도 되고 저편도 되는 깍두기가 있다. 피곤해지는 거다. 다행히 우주는 결정론도 확률론도 아닌 방향성으로 되어 있고 방향은 확산 아니면 수렴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방향성이 어중간한 자투리들을 청소해 버린다. 피곤한 소수점 이하는 그냥 지우개로 밀어버린다. 사건은 단위가 있고 그 단위들 사이의 애매한 부분은 그냥 지워서 말소시켜 버린다. 우주의 원리다. 여기서 같은 것끼리 모이는 계의 균일성이 엎어진 물을 주워담는 내부의 첫 번째 그릇이 된다. 무엇인가? 현실에는 엔트로피를 깨는듯이 착각되는 반엔트로피가 무수히 있다. 사건 안에서 자체적으로 엎어진 물을 주워담는 반엔트로피 구조가 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는 틀렸는가? 아니다. 주워담는 그릇을 조달하는 비용이 추가된다. 미세하게 엔트로피는 유지된다. 그런데 말이다. 외부에서 약간의 힘을 보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엎어진 물을 충분히 주워담을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엔트로피는 일방향으로 가지만 대칭과 호응은 쌍방향이다. 물론 사건 전체적으로는 일방향이 맞다. 그러나 적절한 피드백을 주어 쌍방향에 가깝게 될 때 최대효율을 달성한다. 이때 깨진 것을 주워담을 수 있는 바가지의 형태는 단위당 한 가지뿐이므로 세상은 그리로 간다. 에너지의 결이다. 에너지는 결 따라간다. 질이 깨지면 입자로 담고, 입자가 깨지면 힘으로 담고, 힘이 깨지면 운동으로 담고, 운동이 깨지면 량으로 담는다. 이때 계를 유지하는 비용은 최소다. 깨진 유리창을 원상복구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엔트로피다. 그러나 유리창 밑에 용광로가 설치되어 있다면? 깨진 유리는 용광로를 통과하며 다시 녹아서 유리창으로 거듭난다. 원상복구가 된다. 아니다. 용광로 가동비용이 청구된다. 유리창 귀퉁이를 조금 잘라간다. 그런데 거의 원래에 가깝게 회복이 된다. 유리가 와장창 깨져버려야 되는데 상당부분 복구가 되는 것이다. 김연아가 크게 원을 그렸다가 자세를 모으면 회전속도가 빨라진다. 이때 에너지 손실은 최소가 된다. 한 번의 점프로 최대한의 에너지를 끌어낸 다음 그 에너지를 가장 적은 손실을 보면서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이 결이다. 결 따라가는 방법으로 성공한다. 이때 김연아는 추가로 에너지 조달이 없다. 엎어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게 엔트로피지만 밑에 대야를 받치면 거의 주워담을 수 있다는게 구조론이다. 물론 퍼펙트는 아니다. 약간 새어 나간다. 그 와중에 일부 증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외부 에너지의 도움으로 계를 유지할 수 있다. 생명체가 그렇다. 밥을 먹는 것은 외부 에너지의 도움이다. 활동을 하는데 깨지지 않고 유지된다. 그러나 조금 손실이 일어나므로 백 살까지 못 살고 죽는다. 문제는 엎어진 물을 받쳐주는 대야가 내부에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건은 주사위를 던지고 주사위는 공중에 뜨므로 외부에서 도울 수 없다. 몰래 도우면 반칙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에너지를 최대한 회수하는 내부의 대야가 된다. 돌은 돌끼리 모여 균일해지므로 일단 질로 받는다. 물은 점성에 의해 모여서 물방울을 만든다. 저절로 모여 회수된다. 물방울을 떨어뜨렸는데 흩어지지 않고 우묵배미에 모여서 이슬방울을 이루었다. 그것이 구조다. 질이 깨지면 입자로 받고 입자가 깨지면 힘으로 받고 힘이 깨지면 운동으로 받고 운동이 깨지면 량으로 받는다. 완전하지 않으므로 엔트로피의 법칙은 유지된다. 구조를 잃어먹은 것이다. 약간의 손실은 일어난다.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여서 퍼포먼스를 최대화하고 가장 적게 엔트로피를 상승시킨다. 자체적인 해결은 대칭적으로 일어난다. 대칭은 축이 있으므로 확산방향으로 진행된다. 자연의 일은 수렴과 확산밖에 없다. 방향은 둘뿐이다. 엔트로피 증가는 사건이 확산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를 되돌린다는 것은 수렴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방향을 틀려면 축이 밖에 있어야 한다. 계가 지정되어야 한다. 내부에서는 구조를 다운시키는 방법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질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힘으로, 힘에서 운동으로, 운동에서 량으로 한 층을 내려가기다. 이 방법으로 외부도움 없이 내부에서 방향을 틀 수 있다. 날아가는 총알은 외부 도움 없이 방향을 틀 수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내부를 조정하면 조금 틀 수 있다. 투수가 폼을 손보면 제구력이 향상된다. 구조의 축소로 일부 방향전환은 가능하다. 김연아가 몸을 움츠리는 것과 같다. 공간의 거리를 좁혀 시간의 속도를 올린다. 자기 군대의 일부를 외부에 빼놨다가 결정적인 승부처에 투입하는 예비병력의 운용으로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효과를 얻는다. 주사위를 던진다면 주사위 눈 하나를 따로 빼돌리기는 불가능이다. 그런데 윷놀이는 교묘한 손놀림으로 윷가락 하나를 빼고 3개만 던질 수 있다. 두 개만 공중에 던지고 두 개는 밑에 깔아놓는 기술도 있다. 물론 반칙이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만나거나 흩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다. 흩어지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몽룡과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이 되지 않는다. 만나려면 계가 필요하다. 가두어져야 한다. 봄이라는 날씨에, 청춘이라는 타이밍에, 단오날의 이벤트에 갇힌다. 반드시 갇힌다. 둘이 하나의 공간인 토대를 공유하는 형태로 사건은 수렴되어 일어난다. 이때 갇힌다. 외부와는 차단된다. 누구를 만난다면 다른 누구를 만날 수 없다. 사건 안에서 내부적으로 흩어지고 다시 가둬진다. 잡히는 것이다. 춘향과 몽룡은 재회의 약속에 붙잡혔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다섯 번 잡히고 결국 주인공들은 죽어서 흩어진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를 깨닫는다는 것은? 만약 잡혔다면 보이지 않아도 계가 있다. 기압에 잡히고, 수압에 잡히고, 자기장에 잡힌다. 중력장에 잡히고, 분위기에 잡히고, 무의식에 잡히고, 사랑에 잡히고, 의리에 잡히고, 믿음에 잡힌다. 길들여진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잡힌 채로 살아간다. 그것은 언제나 바깥에서 은밀히 잠입해 온다. 내부적으로는 무조건 흩어진다. 사건 안에서 대칭적으로 흩어진다. 1은 2가 된다. 에너지는 언제나 1이다. 사물은 언제나 2다. 호응으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잡힌다. 약간 손해를 보고 잡힌다. 외부에서 들어온 에너지로 5회에 걸쳐 주워담는 그릇을 만든다. 적절한 주워담기는 최소 손실로 최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
연역을 하려면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99.999퍼센트 연역을 못한다고 보면 됩니다.
연역은 아니고 연역적인 접근이나
연역적 관점은 가능하겠지요.
모든 까마귀는 검은 까마귀다.
논리 이야기에 많이 나오는 이런 명제는 명제가 아니고 개소리입니다.
연역이라는 것은
까마귀가 까마귀라면 까마귀가 아닌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
이런 형태입니다.
연역은 있는 것을 그냥 복제합니다.
숫자가 없으면 수학을 못하고
구조론을 모르면 연역을 못합니다.
언어가 없어서 연역을 못하는 것입니다.
연역을 하려면 먼저 연역어를 획득해야 합니다.
숫자를 몰라도 주먹구구는 되고
구조론을 몰라도 조금 건드릴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극소수의 사람이 아는 연역이라면 다루기 어렵고 설명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위에 댓글에서 제가 연역이라고 했던 것은 연역적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초파리가 좋아하는 잘익은 바나나가 있는데 옆에 더 잘익은 바나나가 있으면 초파리는 후자쪽으로 갑니다.
다큐프라임 기생 2부에 보면 얼룩말이 얼룩한 이유는 체체파리에 대해 시각적으로 대항하여 물리지 않기 위함이다고 나옵니다.
거기서 본 얼룩말 사이에는 소들이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대항이 되는 얼룩말과 소가 있으면 체체파리는 소를 택합니다.
얼룩말이 순수하게 체체파리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옆에 소가 있으므로 체체파리는 편한 것을 택하기에 얼룩말이 타겟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서 가설이 맞는지 검증은 해보지 않았지만 이런식으로 세우는 가설들이 대게는 맞습니다.
다큐프라임 기생에서 진화란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고 퇴화가 기본모드인데 환경이나 천적에 대항하기 위한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진화를 해서 대사량을 늘린다 이런 힌트가 있습니다.
이런 힌트가 있으면 여러 곳에 적용을 해봅니다.
동물이 무균상태에서 자라면 면역력이 어떤지?
가축이 야생에서 생존하기 적합한지?
진격의 거인 1화를 봐도 벽이 세워지고 평화가 이어진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거인에 대한 대항력을 줄이고 잘먹고 잘 사는쪽으로 세금을 사용 합니다.
그러다가 벽인 깨지니깐 필사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전력을 갖추려 합니다.
그래서 가설이 맞는 거 같다는 확신이 들면 복제해서 여러 주장을 합니다.
휴대폰을 사용해서 디지털 치매가 걸리는 것은 뇌의 대사를 기기에 전가하는 것이다 같은 거나
의도하지 않는 경우 양손잡이는 극히 드물다거나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발달시키려면 오른손을 못사용하게 묶어두면 된다거나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눈에 들어갈 자원을 아껴 다른 기관에 사용된다 거나
고슴도치가 가시를 만들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자했으므로 거기서 속도나 공격성을 올리도록 대사가 더 이상 늘어날필요가 없다거나
이런 연역적 관점은 생각해볼만한데 심리적인 장벽이 있어 대부분 개발이 안된다는 의견입니다.
상상력을 가지면 집단의 관점과 안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장벽이 아니라 언어적 장벽이라는 거지요.
동사가 아닌 명사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밸런스의 원리나 보상원리 혹은 최적화 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풍선효과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전에 사건을 담아내는 계를 지정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대머리는 눈썹이 진한 경우가 많은데 머리로 갈 자원이 눈썹으로 간 거지요.
사람은 몸에 털이 없기 때문에 대신 머리카락이 긴 데 이런게 보상원리입니다.
장님인데 절대음감이 있다면 뇌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보상원리입니다.
그런 단어나 개념을 명확히 알고 이곳저곳에 적용한다면 연역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어수선하다면 직관력이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연역을 하는데는 심리적인 장벽이 있지 않습니까?
연역이나 선험이나 같은 용어 같은데 선험을 잘하려면 경험에서 패턴을 포착하고 임의로 가설을 세워보고 그게 맞는지 틀린지 확인을 해보고 피드백을 해서 다음에는 더 잘맞추면 됩니다.
100개 중에 60개를 맞췄으면 실력이 있는 겁니다.
문제는 가설을 세울때 틀려도 좋으니깐 쫄지 말고 적극적으로 세워봐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뇌피셜은 나쁘고 팩트는 옳다는 느낌이 강해서 가설을 세우는 훈련을 안하려는 사람이 많은 거 같습니다.
교수가 뻔히 틀린말을 했고 그걸 틀렸다는 걸 인지하는데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사람 눈치 안보고 뻔뻔한 사람이 연역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