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똑바로 하자 언어는 조건문과 반복문,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 기표와 기의로 조직되어야 한다. 보통은 편의로 여러 단계를 생략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고 생략되어 있다. 감추어져 있다. 들추어내면 진실이 밝혀진다. 언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달은 사건 속에서 일어난다. 사건을 드러내야 한다. 먼저 사건이 존재하고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며 나는 기나 승에 서서 전이나 결로 전달한다. 그러한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지 않으면 뜬금없는, 엉뚱한, 생뚱맞은 베이비 토크가 된다. 사건에 올라타는 절차를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도에 관심있으세요는 곤란하다. 이미 사건에 태워져 있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거나,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하거나, 또래가 친구에게 말을 하는 것은 이미 사건에 올라타 있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프로토콜이 약속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구조론연구소에서 발언하려면 이러한 전제를 확인해야 한다. 진지하게 구조론을 학습할 자세가 아니면 안 된다. 사랑한다고 한다. 그 전에 사랑이 있었다. 믿는다고 한다. 그 전에 믿음이 있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과 상관없이 내 안에 들어차 있고 믿음은 믿는 대상과 상관없이 내 안에 충만해 있다. 사랑하는 것은 동사고 충만해 있는 것은 명사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은 다른 것이다. 그 전에 사건은 일어나 있었다. 드러내야 한다. 인간은 사건 속의 존재다. 나는 무엇을 믿는다거나 나는 무엇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일어나 있는 사건을 각자 해석한 것이다.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이 사건은 벌어져 있고 기어코 일은 터져버렸다. 저 자식이 밉상이다. 꼴도 보기 싫다. 내쫓아버려야겠다. 그럴 때 누가 나타나서 저 자식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럴 때 자기도 모르게 달려들어 구하게 된다. 없던 에너지가 갑자기 생겨난다. 그때 깨닫게 된다. 그 자식이 내 자식이다. 무엇이 태도를 돌변시켰을까?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잠들어 있던 본능을 일깨운 힘의 정체는? 사랑이 있었던 거다. 왜 그랬을까? 밉상이잖아. 말 안 듣잖아. 보트 하나에 두 사람이 타고 있다. 밉상이다. 떠밀어 버린다. 한 사람이 물에 빠진다. 보트가 뒤집힌다. 나도 죽는다. 그렇게 우리는 엮여 있다. 토대의 공유다. 우리는 에너지가 흐르는 구조 안에서 엮여 있다. 사랑은 그 에너지의 활동이다. 전류가 흐르듯이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으며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에너지를 잃게 된다. 막연히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동사로 말하면 안 되고 명사로 말해야 한다. 사랑하기 전에 내 안에 사랑이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밉상이라는 말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 사랑이 동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동사에 앞서 명사가 있었고 그 전에 토대의 공유가 있었다. 운명적으로 엮여 있었다. 하나가 빠지면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 구조 속에 있었다. 장이 존재하고 장 안에서 서로는 균일하다. 하나가 죽으면 다른 쪽도 죽는 것이 균일이다. 대칭으로 엮여서 존재한다. 막연히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은 변한다. 순식간에 변한다. 어제의 사랑이 내일은 웬수다. 사랑하려다가 다치게 된다. 상처입히게 된다. 말로 상처입고 기억으로 상처입는다. 그래서 틀어지고 만다. 동사로 표현되는 사랑은 감정의 사랑이고 유통기한은 길어야 며칠이다. 명사로 표현되는 사랑은 이성의 사랑이다. 그것은 상대적인 자신의 신분과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유통기한은 짧으면 3개월이고 길어야 3년이다. 전제로 표현되는 사랑은 운명의 사랑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다. 관계로 엮이면 평생을 가는 것이다. 사랑은 사건이고 사건은 토대의 공유로 일어나는 것이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지정하는 것이다. 침대를 공유할 수 있지만 호텔 객실을 나가면서 깨진다. 건물을 공유할 수 있지만 이혼서류에 도장 찍으면서 깨진다.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에너지의 근원을 공유하고 있다. 사건의 연속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손해 볼 것을 각오하고 과감하게 의사결정한다면 그 안에 사랑이 있다. 사건 속에서 에너지 전달경로의 엮임이 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리고, 무언가 주고받는 것이 있고, 전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매력이고 카리스마고 인간의 사회성이다. 믿기 전에 믿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반사회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집에 쓸데없이 물건을 주워온다거나 범죄자가 된다거나 집창촌에 모여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회를 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자기네들끼리 편안해하는 산적 무리 있다. 문제는 종교단체가 그러한 반사회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라즈니쉬 소굴이 그렇다.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종교집단이 교회에 모여 배타적인 소집단을 만들고 반사회성을 드러낸다면? 도박중독자들이 카지노에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사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베충들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이고 나는 내 자식만 챙기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보수꼴통 말이다. 그 안에 믿음은 없다. 토대의 공유가 없다. 믿음을 부정하면서 믿음을 팔아먹는 자들이 있다. 개독이라고 불리는 예수의 배반자들이 있다. 그들은 목자인 나를 믿고 사회를 믿지 마라고 말한다. 예수만 믿고 대한민국을 믿지마라고 선동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믿음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반사회성이 사이비의 본질이다. 소집단 패거리로 결속하려는 것이 사이비다. 겉으로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인맥놀음에 빠진 패거리 진보 한경오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말하는 진보는 엘리트 몇 명이 살롱에 모여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하며 비리로 화목하다가 신경숙 표절사건이라도 나면 서로 옹호해주고 변명해주는 그런 백낙청 소아병 진보다. 그들은 준엄하지 않다. 춘추필법을 내던진 지 오래다. 언어는 갖추어져야 한다. 동사로 말하기 전에 명사를 찾아야 하고 명사를 말하기 전에 전제를 찾아야 한다. 엮임을 찾아야 한다. 토대의 공유를 찾아야 한다. 사건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걸 자격이 있다. 발언권을 획득하지 않고 그냥 말하면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 어법이다. 먼저 네게 할 말이 있다고 선언한 다음에 밥은 먹고 다니냐고 말을 붙여가는 것이다. 담론을 구성하는 조건문과 반복문이다. 먼저 발언권을 획득하고 다음에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색해진다. 보통은 친한 척 웃음을 띠고 말한다. 보디사인으로 조건문을 대신하는 것이다. 온라인은 표정전달 방법이 없는게 문제다. 그래서 공연히 시비를 건다. 시비를 거는 형태로만 말할 수 있다면 실패다. 상대방이 뭘 모르고 있어서 알려준다는 식이다. 누가 알려 달랬나고? 담론은 조건문과 반복문으로 2개의 사건을 연결하여 세 번째 사건을 도출하는 것이다. 조건문은 커다란 사건을 제시하는 것이며 반복문은 자신이 그 사건 안에서 자리잡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사건 안으로 초대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은 생략한다. 그렇게 차리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번거로우니까 서론 빼고 격식 빼고 본론으로 바로 가자. 그러나 그 언어의 차림을 규명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전제를 생략하고 말을 개떡같이 하는 사람은 근원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랑하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었다. 사탕을 나눠주기 전에 사탕이 호주머니에 있었다. 그 이전에 토대의 공유가 있었다. 서로는 사건 속에 들어와 있었다. 무슨 사건이지? 역사의 진보 사건이다. 그러므로 보수는 발언권이 없다. 닥쳐야 한다. 보수는 사회를 남남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남남인데 왜 말을 걸어? 택시업계 망했다. |
"그 이전에 토대의 공유가 있었다. 서로는 사건 속에 들어와 있었다. ~ 역사의 진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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