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가, 자연이, 언어가, 인간의 뇌구조가 모두 깨달음의 복제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은 플랫폼에 에너지가 입력되면 동일한 패턴을 대량으로 복제한다. 하나의 자궁에서 무수히 쏟아진다. 복제본은 원본에 에너지를 의존한다. 원본이 복제본을 주변에 거느리고 세력을 이루면 방향성이 성립하여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우주의 팽창이고 생물의 진화이고 문명의 발달이고 자본의 번영이고 삶의 풍성함들이다. 사물이냐 사건이냐다. 사물의 세계와 사건의 세계는 방향이 다르다. 사물의 세계는 다르다에 주목하고 사건의 세계는 같다에 주목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궁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자궁은 같다. 플랫폼이 같다. 결과가 다르면 원인이 같고, 끝단이 다르면 시작이 같고, 꼬리가 다르면 머리가 같고, 부분이 다르면 전체가 같고, 출력이 다르면 입력이 같다. 사물의 결과가 다르면 이름을 붙여 구분한다. 사건의 플랫폼이 같으면 이름이 없다. 존재의 자궁은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경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가리켜 지목될 수 없으므로 깨달음이다. 에너지나 플랫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깨달아야 한다. 형식과 내용의 이중구조다. 랑그 속에 빠롤이 있다. 전제 속에 진술이 있다. 맥락 속에 의미가 있다. 관점 속에 팩트가 있다. 연결 속에 사물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반드시 있다. 에너지의 유도 속에 일의 처리가 있다. 사슬로 연결되어 존재를 이룬다. 당신이 어떤 말을 했다면 그 말은 틀린 말이다. 당신이 입을 떼기도 전에 허튼소리다. 언어의 그릇에 담아낼 수 없다. 그러므로 진술을 말하는 자는 전제를 속이려는 자다. 의미를 말하는 자는 맥락을 속이려는 자다. 팩트를 말하는 자는 관점을 속이려는 자다. 내용을 말하는 자는 형식을 속이려는 자다. 이 사슬구조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원초적으로 없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어떤 말을 하든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틀어져 있다. 프로토콜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주파수가 다를 때 유일한 해결책은 배제하는 것이다. 진보가 보수를 설득하려 하면 실패한다. 진보는 세력을 이룬 다음 보수를 배제하는 방법으로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애초에 말은 소용없고 물리적 실천으로만 해결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깨닫는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나'의 개입이 그 연결을 끊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우주의 문제이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깨달았다'는 식으로 진술될 수가 없다. 깨달음은 우주의 작동원리로 그저 있는 것이다. 당신은 깨달음의 배에 승선을 하든지 말든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진보팀에 들지 보수로 남을지 선택할 뿐이다. 대승의 배에 승선할지 소승으로 남을지 선택할 뿐이다. 깨달음은 무리가 세력을 이루고 함께 가는 것이며 인간은 가담하거나 남거나 뿐이다. 천하가 함께 나아가는 길에 당신은 선택할 수 없다. 자기소개 금지다. 개인이 마음의 평정을 찾고 삿된 것에 홀리지 않으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정도의 문제라면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구할 일이다. 깨달음은 당신과 상관없는 존재 자체의 전략이다. 동물은 생태계의 전략을 따르고 개인은 집단의 전략을 따르고 병사는 지휘관의 전술을 따라야 한다. 대승의 배에 올라타야 한다. '나'를 배제하고 함께 어우러져 큰 길을 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원래 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일이다. 당신의 결정이 집단의 무의식에 의해 조종됨을 깨달을 일이다. 당신의 결정이 미리 주어진 큰 그림 안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일이다. 자궁의 존재를 깨달을 일이다. |
"깨달음은 무리가 세력을 이루고 함께 가는 것이며 인간은 가담하거나 남거나 뿐이다."